경제난 시기에 국가 배급이 중단되고 대부분의 공식직장이 제대 로 운영되지 못하면서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공식 직장 밖으로 나와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고난의 행군’ 종료 이후 남 성들은 다시 공식직장의 통제 하에 들어갔지만, 여성들, 특히 기혼 여성들은 대부분 공식직장 대신 시장과 연계된 경제활동을 선택했 다. 그러나 미혼여성들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고급중학교 졸업과 함 께 공식직장에 배치되어 일을 해야 한다. 이하에서는 다양한 공식부 문 내에서 이루어지는 여성 노동의 양상과 공식부문 내의 성별분업 구조, 직장 내 성차별과 성별위계구조에 대해 살펴본다.
가. 성별 노동분업과 성차별 구조 (1) 여성의 직업 선택과 성별 노동분업
Ⅱ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정은 시대 들어 북한에서는 정책적 차원에서 여성들의 직업활동 참여를 강조하고, 전문직 여성들의 모
범사례를 내세우며 여성들을 공식노동의 영역으로 불러들이려 하고 있다. 그러나 사례연구에서 확인된 것은 남성은 공식노동, 여성은 비공식노동이라는 성별노동분업 체계가 존재하고 있으며, 공식노동 내에서도 여성노동은 특정 분야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북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미혼여성들은 뇌물(사례 12, 사례 22), 질병(사례 2), 가짜결혼(사례 9) 등의 방법을 써서 공식직 장에서 일하는 것을 피하고 시장활동에 뛰어든다. 결혼 전에 공식직 장에 다녔던 여성들도 결혼을 하면 대부분 공식직장을 그만두고 비 공식부문에서 장사 등의 생계활동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많았다. 연 구 과정에서 만난 10명의 기혼여성 중 5명은 결혼 전과 후에 모두 공식직장에 다니지 않았으며, 4명은 간호사, 공장노동자, 보위대 등 공식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결혼 후 에도 이전의 직업을 유지한 여성은 전문직 여성 한 명(사례 21)뿐이 었다. 경제난 이후 시장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비공식부문에서 여성 들의 경제활동 참여가 증가되었는데, 이는 공식노동 부문에서 여성 들의 이탈과 ‘남성노동=공식부문 노동, 여성노동=비공식부문 노동’
이라는 성별노동분업 구조를 오히려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공식노동에서 여성들이 이탈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배급 중 단 또는 감소로 인해 공식노동의 유인이 사라진 반면, 시장과 연계 한 비공식부문의 노동은 실질적인 소득을 창출하는 상황 속에서, 자 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한 여성들의 자발적 선택의 결과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난 이후 배급을 통해 생계를 보장해주는 공식직업 이 흔치 않은 가운데서도 지속되는 공식부문 내의 강고한 성별분업 구조에 기인한다. 북한에서는 국가 계획에 따라 노동력이 배치되는 데, 여성은 남성에 비해 임금이 낮은 직종, 그 중에서도 ‘여성의 특
성
’이 요구되는 특정 직업에 편중되어 배치된다.
115)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장려되는 부분은 경공업, 교육, 문화, 편의봉사 부문 등 여성 에게 적합한 직종으로 규정된 영역이다.116) 2008년 인구센서스 자 료를 바탕으로 산출한 북한의 16세 이상 산업별 남녀의 인구비중을 살펴보면, 여성에 비해 남성의 비율이 상당히 큰 산업부문은 채취, 전력, 도시경영, 건설, 운수 및 보관, 체신 및 정보, 과학연구, 공공 봉사 및 국토, 국가관리 부문이며, 여성의 비율이 큰 산업부문은 농 수산 및 임업, 소매 및 소매, 여관 및 급양, 교육, 보건 및 보양, 편의 봉사 부문이다.117)
공식노동부문 내의 산업별 성별분업구조는 고등교육부문의 성별 구조와 맞물린다. 국제기구에 보고한 북한의 통계자료상에 나타난 대학 졸업생의 전공분야별 성별 비중을 보면, 전공별로 큰 젠더격차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육 부문을 전공한 여성은 전체의 31.6%로, 전공 부문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데 비해, 남성은 19.9%로, 27.3%인 제조
‧
건설 부문보다 낮다. 농업부문은 남성의 16.5%, 여 성의 11.7%가 전공하고 있고, 공공의료 부문은 여성의 12.8%, 남성 의 9.2%가 전공하고 있다.118) 산업구조와 고등교육에서 산업부문 별, 전공별 젠더 차이가 크며, 산업부문과 고등교육 전공의 젠더구 조가 대체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북한의 대학별, 학과별 선발 인원 은 해마다 각 산업부문별 인력을 고려하여 국가계획 지표로 결정하 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고등교육 전공 구조의 비율은 국가계획상 산업부문별 고급인력 배치 비율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북한 당국은 「녀성권리보장법」 제28조 “로력배차에서의 차별금지ˮ
115) 대한변호사협의회, 『북한인권백서 (서울: 대한변호사협의회, 2014), p. 185.
116) 박영자, 북한 녀자: 탄생과 굴곡의 70년사 (서울: 앨피, 2017), p. 356.
117) 장지연‧김화순, 통일한국의 노동시장과 여성 고용 및 일․가정 양립연구 (서울: 한 국여성정책연구원, 2015), p. 20.
118) Education Commission DPRK, Education For all national EFA 2015 review:
DPR Korea (S.I.: Education Commission, 2014), p. 68.
조항을 통해 직장에서 성별, 결혼, 임신, 출산 등을 이유로 여성 취 업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고등교육 부문 별 인력양성 계획과 산업부문별 노동자 배치가 맞물리며 공식노동 영역의 산업부문별 노동력의 젠더 차이가 발생하고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식노동 영역의 성별분업구조는 여성들의 직업선호도에 그대로 반영된다. 면담 과정 중 북한에서 여성들이 선호하는 직업을 물었을 때,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거의 똑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의사, 교사, 무역회사 회계원, 간호사가 그것이다. 이 직업 중 의사와 교사 는 해당분야의 대학졸업장이 필요한 전문직이고, 회계원은 대학 또 는 전문학교 관련학과 전공자들에게 유리하기는 하지만, 고등교육 을 받지 않더라도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자리를 얻기도 한다. 간호 사는 1~2년제 간호원학교나 6개월제 기능공양성소를 졸업하면 직 장을 얻을 수 있어 전문성의 정도는 조금 약하다. 이 직업 중 의사, 교사, 무역회사 회계원은 직장에서 지급하는 임금 이외에 직업적 지 위나 전문지식과 기술을 활용하여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고, 의사 와 교사는 전문성을 요하는 만큼 사회적 지위도 높다. 여성들이 이 러한 직업을 선호하는 이유는 이런 직업이 공장노동이나 농사일에 비해 육체적으로 편안하고 “깨끗한 직업
ˮ, “여자다운 일ˮ이라는 인식
때문이다.괜찮은 직업이라면 의사도 괜찮고 선생님도 괜찮고, 그 다음에 사람들 생각에는 간호사도 그래도 깔끔하고 여자다운 흰 옷 입었으 니까 괜찮은 직업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 이런 회계원. 일단은 일하는 그게 깨끗해야, 일하는 시설이라든지 건물이라든지 환경, 환경이 좀 깔끔해야 되고. 그 다음에 좀 로임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런 것도 좀 높아야 되고. 그래도 교원 같은 거 하면 일단 돈이
많이 생길 수 있어요. 학부형들이 자주 막 뭐 시켜달라 어쩌라 하면 진짜 엄청 많이 들고 오거든요. 그러니까 그 직업은 그것대로 괜찮 은 거죠. 그리고 의사들도 또 괜찮죠. 국가에서 딱히 주는 건 없지 만, 이렇게 환자들이 그래도 선생님 수고했다고 사례비도 줄 수 있 고 하다보니까 약간 자기 그런 게 있잖아요. 간호사도 그렇고. 그 다음에 회계원 같은 거는 또 이렇게 자기가 돈을 다루니까 거기서 자기가 좀만 어떻게 머리만 쓰면 자기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거든 요. (사례 9 구술녹취록, 2019 2차 면담/12~13)
직업선택의 폭이 좁다보니 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선택해 야 하는 여성들은 직업진로와 관련해서 ‘뚜렷한 목표’가 없는 경우가 많다. “쥘만한 직업ˮ이 없다보니, 평범한 집안의 젊은 여성들은 “시 집 가는 게 최고 대학 나온 것
ˮ과 같다고 말한다(사례 3, 사례 23).
반면, 간부집 자녀이거나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안의 여성은 “미래를 그릴ˮ 수 있다. 사례 1은 2000년대 중반에 평양의 대학을 졸업했다.
그가 다니는 대학은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더 많았는데, 대학 졸업생 중에는 국가기관 산하의 외화벌이 기관과 큰 호텔과 식당,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학생들도 거의 대부분 졸업 후 군에 입 대해서 군 생활을 하고 입당하여 간부의 자격을 갖추려고 했다. 사 례 1의 여자친구들은 대부분 “이상이 있고 롤모델이 있었다.ˮ 그들은 장래희망으로 옥류관의 지배인, 여성간부를 꿈꾸거나, 중국과 무역 하는 개인기업을 차리고 싶어했다. 사례 1도 같은 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큰 복합위락시설을 운영하는 선배언니를 롤모델 삼아서 졸업 후에 투자를 받아 그런 시설을 지어서 경영하는 꿈을 가졌다.
존경하는 롤모델 같은 언니가 평양에서 유명한 그런 지하에 주 차장, 1층에 식당, 2층에 상점, 3층에 사우나, 4층에 헬스장, 이런 걸로 해서 거의 봉사센터, 서비스센터 같은 걸 만든 거예요. 그게
개인이, 2009년, 10년부터 굉장히 많이 생겼어요. 갑자기 확 많아 졌거든요. 그래서 그걸 내가 굉장히 하고 싶었거든요. 대학교 1학 년 때부터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면 입당하고 와서 저거를 무조건 할 거야 하고. 저도 친척이 돈을 투자해 주겠다고 그랬으니까 딱 그런 사업을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리고 너무 멋있잖아요. 대학 졸업하고 무슨 위에 누구 눈치 안 보고 자기가 사장인 거잖아요.
돈 만지고 사람 관리하고 모든 걸 다 하니까, 그게 나는 멋있었어 요. (사례 1 구술녹취록, 2019 2차 면담/28)
(2) 직장 내 성차별과 유리천장
면접에 참여했던 여성들 중에는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장사를 해서 생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남편의 대학공부 뒷바라지를 하거 나 남편이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뒷받침한 여성 들이 많았다. 결혼하지 않은 20대 여성들 중에도 북한의 남녀관계가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결혼 후에는 남편을 뒷바라지해서 “올 려세우겠다
ˮ고 생각했던 여성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이 자기 스스
로에게 투자하여 교육수준을 높이고 좋은 직장에 가서 출세하는 것 을 택하는 대신 남편을 출세시키는 것을 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여성 이 권력기관의 고위직에서 일하거나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데는 한 계가 있다는 것이다. 앞 장의 사례에 등장하는 여성노동력 위주의 직장에서도 간부나 관리자는 남성이 담당하고 있다. 산업이나 직종 에서 남녀 간의 강력한 성별분업구조가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직장 내에서 여성의 승진과 고위직 진출이 쉽지 않다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고위직군 중 여성의 비중이 높지 않다는 점은 통계 수치를 통해서 도 확인할 수 있다. 2008년 인구센서스 자료를 바탕으로 산출한 북 한의 16세 이상 직업군별 남녀의 인구비중을 살펴보면, 가장 고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