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난 속에서 먹고 살기위한 암시장으로 출발했던 종합시장 및 상거래 공간들은 북한 사회 내부의 변화를 추동하는 중요한 플랫폼 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거래와 경쟁, 물질 중심의 가치와 미래 전망 등이 싹트고, 외부 세계로부터 수입된 ‘문화’가 폭발하는 곳이다. 현
재 국가 주요기관을 중심으로 한 배급체제와 나란히 북한 경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시장경제의 주역은 여성들이다. 경제난 이후 30여 년 동안 자신의 몸으로 수행한 노동을 통해 가족과 사회를 먹여살려 온 여성들은 시장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고, 일상 관계의 변화를 주 도하고 있다.
가.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과 시장 활동 (1) 경제공동체가 된 가족과 여성의 역할
경제난과 시장화 이후 가족은 생존의 단위이자 경제공동체가 되 었다. 개인의 생명을 보장하던 국가 배급체제가 유명무실해지면서 개인은 개별가족을 중심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경 험한 것이다. 죽음 앞에서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결국 혈육인 가족들 밖에 없다는 체험은 당과 국가에 대한 암묵적인 불신과 회의 의 정서를 형성했다. 결혼 중매시장에서 ‘당일군’의 지위가 떨어진 것이 대표적인 현상이다.
2000년대 들어 장마당 활동은 다양한 형태로 조직화되었고, 여성 들은 제도화된 시장을 매개로 합법, 비법의 경계를 오가며 각 분야 별 물품을 도소매하거나 중개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2002년의 경 제관리개선조치, 2003년의 종합시장제조치를 통해 시장이 합법화 되면서 북한 사회에는 사실상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와 시장경제가 공존하는 이중경제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기업의 독립채산제 등 자율권이 확대되면서 생산영역에서 혁명정신 대신 개인주의적, 물질주의적 가치가 확산되었다. 또 종합시장과 국영상점을 통한 소 비재 시장이 발달하고, 국가가 관리하는 물품을 제외한 생필품과 공 산품 및 외국 수입품 거래가 가능해진 것이다.123) 누구나 임대료와
국가납부금을 내면 개인 또는 단체로 시장의 매대를 빌려서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와 당의 핵심적인 조직에 배치된 경우를 제 외한 일반 노동자들 중 정상적으로 출근해서 일하는 비중이 크게 떨 어진 반면, 장사 등을 통해 생계유지 활동을 하는 주민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 시장이 합법화된 후 비공식적 노동이 크게 증가하였는데,
“시장을 통한 장사와 방문장사 및 밀수, 생산 물품이나 음식 및 서비
스를 판매하는 자영업, 농업, 건설업, 서비스업 등의 일용직 등이 있다. 사회적으로 묵인되는 주변적 노동으로 시장 규찰대, 소토지 생산자, 소작인, 계절노동, 식모 혹은 가정부, 페인트공, 대리동원 노동, 개인교사, 품삯노동, 건설업 일용노동, 외화벌이 고용원, 8‧
3작업반원, 가내작업반원 등 다양한 직업ˮ이 등장했다. 또 교사나 의사 등은 사교육과 사설의료행위를 통해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거 래하고 있다.124) 이런 변화 속에서 북한의 개별 가족 내에서는 남편 과 아내, 부모와 자식들이 상호 역할 분담을 하면서 가족 생계노동 을 수행하기 위한 전략적 실천들을 하고 있다.
이번 사례연구에서도 상층계급의 대학생과 전업주부(사례 1, 사 례 14, 17) 및 군인가족(사례 21), 일부 공식직장의 노동자(사례 19) 를 제외한 거의 모든 여성들이 다양한 형태의 장사를 했다. 대학을 졸업한 여성들은 교사, 의사 등의 직업 활동을 하면서 개별 과외활 동이나 치료 활동을 하는 반면, 중학교를 졸업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공식직장에 적(籍)을 걸어두는 등의 방식으로125) 어머니 혹은 언니, 친구들과 연계하여 상업 활동을 하
123) 이승윤‧황은주‧김유휘, “북한 공식-비공식 노동시장의 형성과 여성,ˮ pp.
304~305.
124) 위의 글, p. 306.
125) 적(籍)을 둔 기업에서 실제 일하지 않으며 돈을 내고, 시장 활동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버는 노동자를 8·3노동자라고 부른다.
였다.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장사를 해서 가족생활에 보태고, 자신 의 결혼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혼 여성들의 경우 남편의 ‘부양가족
’으로 등록하고 각종 장사를 통해 가족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개별 가족이 여성의 재생산 및 생산노동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배급제도라고 하는 경제적 토대에 의해 직접 결합되었던 수령-당-인민의 관계가 시장 활동을 통해 침윤된 반면, 개별 가족단위의 의무와 책임이 강화된 변화를 보 여준다.(2) 다양한 형태와 수준의 시장 활동
사례연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시장 활동은 지방 소도시의 장마 당에서 평양 부자동네를 장악한 국제적 거래까지 다양한 형태와 수 준으로 구조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평양의 경우 개성공단을 통해 유 입된 ‘한국 물건’이 가장 비싸게 거래되고 있고, 일본 및 중국 제품, 국제사회의 지원 물품 등을 트럭이나 컨테이너로 거래하는 큰손과 이를 받아서 판매하는 소매상들이 있다. 평양과 대도시에서는 유아 들의 분유에서 독일제 의약품까지 생활에 필요한 모든 소비제품이 거래되고 있다. 중국 등의 대방과 거래하는 큰 손들은 남자인 경우 가 많지만, 큰 자본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여성들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평양 상층계급이었던 사례 14의 시누이는 직접 버스 두 대를 사서 교통사업을 하였다. 이처럼 남편이 확실한 권력을 가진 상층계 급인 경우 여성이 큰 식당, 상점 등의 지배인을 하는 방식으로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은 이전 시기부터 가능했다. 흥미로운 점은 큰돈을 가진 상층계급 여성들이 최근 확장된 시장 경제 내에 참여하고 있다 는 점이다.
북중 접경지역에서는 옷을 비롯한 소비재와 약초, 광물 등이 국경
밀수를 통해 거래된다. 돈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소규모의 음식장사 나 재배한 농산물 거래에서 약간의 돈을 모으거나 빌려서 약초, 광 물 중간유통을 하는 등 자본의 규모에 따라 중층적인 상거래가 이루 어지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사례 7, 사례 8, 사례 10 이외에도 사례 6은 2000년대 초반부터 2018년 한국으로 올 때까지 10여년간 장사를 하며 생활했다. 사례 6은 1980년대 초에 양강도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출생했다. 어머니는 평양외국어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대 학의 ‘영어교원
’으로 30년 일하고 퇴직했다. 의사인 아버지는 진료
소 등에서 근무하다가 집에서 개인진료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례 6이 소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 가족들이 배를 곯는 일이 허다했다. 대학 교원이자 의사인 부모들은 당에 충실한 ‘지식인’으로 장사 기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비법을 할
줄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에 중학 교를 졸업한 사례 6은 ‘고일 돈’이 없어 대학에 가지 못하고 기능공
학교에서 2년 동안 일하며 재봉기술을 배웠다. 그는 졸업 후 천을 사서 아동용 옷을 만들어 장마당에 팔기 시작한 이후 2018년 한국으 로 올 때까지 화장품 장사, 중고 옷장사, 음식장사, 약장사 등을 하 며 가족 생계를 도왔다. 2000년대 중반에 아버지의 친구 아들과 중 매로 결혼한 사례 6은 장사를 계속했다. 당원인 남편이 군생활 중 사고를 당한 후유증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사회보장’ 처리가 되었지 만 실제 지원받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약장사를 하면 굶어죽지않는다
’는 아버지 권유로 결혼한 이듬해부터 약장사를 시작했다.
약이라는 거 할 때는 여러 가지 대중약, 중국약으로부터 해서 이 게 점점 한 300가지 수로 약이 많습니다, 수가. 액체로부터 시작해 서 다 있으니까. 25% 포도당, 그 다음에 종합아미노산, 몰리아민 이런 액체로… 비타민제 해서 액체도 있고. 집에서 이렇게 환자들
치료하면서 주사하매 점적[링거액]도 달고 그 다음에 부항도 붙여 주고 뜸도 떠주고 이렇게 치료를 했습니다, 내가. 약도 팔면서 그 걸 해야 되니까. 자격증이 없는데 그거 왜 했는가? 내가 임상의전 내과의사 편을 자체 공부를 했단 말입니다. 공부를 하고, 아버지가 의사다나니까나 아버지가 다 배워줬단 말입니다. 침혈로부터 시작 해서. 그래서리 그렇게 하고. 그렇게 해서 약장사를 하기 시작해 서, 그거 연한 있습니다, 내가. 거의 한 10년 했습니다, 내가 장사 를. (사례 6 구술녹취록, 2019/1)
고지식하게 배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대학교원을 하는 어머니 와 의사생활을 하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어머니의 명의로 시장의 매 대를 사서 화장품 판매를 하는 등 각종 장사를 하던 구술자는 결혼하 여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장마당에 나가서 약장사를 하였 다.126) 위의 구술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국가의 의료시설이 제대 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의사들이 집에서 치료행위를 하는 것뿐만 아 니라, 시장에서 누구든 의약품을 판매할 수 있다. 개인이 약을 팔면 서 의사면허 없이 치료 활동까지 하고 있다. 북한 사회의 부족한 의 료체계를 여성들의 비공식적 노동이 대체하거나 보충하고 있는 양 상이다. 흥미로운 점은 ‘고지식한’ 사례 6의 부모들도 결국 먹고 살 기가 힘들게 되자 사례 6에게 침술을 비롯한 의료 기술을 ‘개별적으
로
’ 가르쳐서 약장사를 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으며, 대학 영어
교원이었던 어머니는 집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시집간 사례 6의 아이를 돌보았다는 점이다. 이처럼 온 가족이 자신이 가진
126) 2007년 경부터 시장을 통제하기 위한 당국의 단속이 본격화되었다. 단속 통제는 장 사 연령 제한, 장사 품목 및 판매액 제한, 장사 장소 제한 등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 다. 특히 2007년 경에는 통제가 강화되어, 상행위 연령이 45세 이상으로 제한되었 다. 이후 상행위 제한 연령은 30세 이하, 40세 이하, 45세 이하, 49세 미만 등 시기 별, 지역별로 다소 상이하게 나타났다. 양문수, “2000년대 북한의 반(反)시장화 정 책: 실태와 평가,ˮ 현대북한연구, 제15권 1호 (2012), pp. 9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