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글쓰기는 자기표현이라는 점에서 글쓰기 주체 내면의 해묵은 감정 을 해방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는 격정을 정화하는 윤리적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몸 안의 불순물을 배설한다는 의학적 술어로도 기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catharsis)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읽 기에서의 공감과 쓰기에서의 표현을 장려하는 문학치료의 기본 전제로 기능한다.
실제로 본고의 본조사 대상이었던 222명 중 158명(약 71%)이 시 쓰기 활동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가 자 아성찰적 사유로 이어지느냐는 별개의 문제인 것으로 나타났다. 어떤 학 습자들은 시 쓰기 이후 이어지는 자작시 해설 및 성찰의 내면화 활동을 중단하거나 무성의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글쓰 기를 통한 카타르시스 효과가 자아성찰적 사유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특 별한 교육적 처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자화상 시 쓰기에서 감정의 언어화는 ‘나’를 대체하는 이미지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고백의 부담을 덜고 솔직한 자기표현을 이끌어내 나, 사유를 동반한 감정의 표현이 이루어지도록 돕기도 한다. 즉 자화상 시 쓰기를 통한 감정의 언어화는 성찰적 사유로 이어지기에 유리한 지점 을 확보하므로 유의미한 교육적 처치가 될 수 있다.
(1) 표현의 반복을 통한 감정의 해방
이 절에서는 ‘나’를 대체하는 이미지를 만들고 그 형상의 입을 빌어 자
번호 [구-30720]
시
<꽉 막힌 병> 나는 꽉 막힌 병 / 터질 것 같은 꽉 막힌 병 // 미워 서 그런 게 아니야 //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 짜증나서 그런 게 아 니야 // 병이 깨져 버려야 / 그 말들이 나올 텐데 // 미안해 / 미안 해 / 정말로 미안해 // 말하지 못하는 꽉 막힌 병 / 터질 것 같은 꽉 막힌 병
자아 성찰 적 사유
순간적인 감정을 참지 못해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 는 것을 생각해 반성하며 시를 썼다. 구체적인 감정을 넣지 않고 쓰 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감정이 막 나와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말을 하고 나니 이렇게 후련한데 왜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이번 일로 나의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 달았고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면 조금이라도 표현할 수 있는 계기로 삼고 싶다.
자기 인식
활동 전 활동 후
실수를 많이 하는 사람 실수를 하지만 그 실수로써 반성 하여 성장할 줄 아는 사람이다 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한 학습자의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학 습자는 자신의 감정을 시적 화자의 입을 빌어 직접적으로 표출하기 보 다, 상상의 작용으로 만들어낸 형상의 입을 빌어 표현함으로써 진정한 공감에 기반한 감정의 사유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감정의 표현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아성찰적 사유를 시작할 수 있 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30220]은 자아이미지 작성 단계에서 “실수하고 싶지 않은데 계속 실수하는 나”라는 불일치의 자각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자기서사 작성 단계에서 욱하는 성질 때문에 친구와 다투었던 일, 동생과 TV를 보다가 싸웠던 일, 키우던 강아지에게 화풀이를 했던 일 등을 상세히 서술하였 고, 이를 통해 야기된 감정은 “답답하다. 미안하다.”였다. 이를 통해 이 학습자가 말하는 ‘실수’란 ‘다른 사람과 갈등이 생겼을 때 미안하다는 말 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어 학습자는 자신을 형상화하는 이미지로 ‘깊은 늪’과 ‘막힌 병’을 떠 올리는데, 이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 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학습자는 그 중 후자를 택하여 자화상 시를 썼는데, 1연에서 자신을 꽉 막힌 병이라는 은유함으로써 형상화한 이미 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2연과 4연에서는 화자의 생각과 감정이 직접적․반복적으로 표출된다.
학습자는 이러한 직접적 반복이 감정의 북받침을 이기지 못하고 표현된 결과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구체적인 감정을 넣지 않고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감정이 막 나와서”, “말을 하고 나니 후련하다”라는 활동의 감상에 잘 나타난다. 즉 이 학습자는 억눌린 감정을 표출함으로써 감정 의 해방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학습자의 자작시 해설을 보면 이 시가 단순한 감정 표출의 결과 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학습자의 해설에 따르면 2연과 4연 의 1, 2, 3 행은 각각 친구, 동생, 강아지라는 대상에게 따로 건네는 말이 라고 한다. 또 4연의 마지막 행에 “정말로”를 붙여 “미안해”를 더욱 강조 한 이유는 화풀이 대상이었던 강아지에게 가장 미안했기 때문이라고 한 다. 즉 이 시는 학습자의 억누른 감정이 폭발하여 있는 그대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감정의 사유를 거쳐 나름대로 정교하게 조직하려 노력한 의식의 산출물인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사유는 학습자가 자기형상과의 동일성과 비동일성을 동 시에 인식했기에 가능한 일이 되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다음은 이 학 습자의 자작시 해설에서 주목할 점은 마지막 연에 대한 고민인데, 이 서 술에서 자기형상에 대한 학습자의 인식이 잘 드러난다.
처음에는 “깨진 병은 흙으로 돌아간다 / 조각난 유리 조각은 웃고 있다”라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안 깨진 것 같다. 미안하다는 말을 안했기 때문 이다. 그래서 웃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다시 꽉 막힌 병이라고 썼다.
[구-30720-1차-3]
즉 학습자는 자신을 대체하는 이미지, 즉 ‘꽉 막힌 병’이라는 형상이 스
스로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결코 동일하지는 않은 존재임을 확 실히 인식하고 있다. 이는 자화상 시 쓰기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공감이 결코 자타의 동일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셸러(M. Scheler)는 공감을 자타의 동일시라 보는 것이 공감에 대한 착 각이자 공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 하였다.6) 그는 공감의 기본 적인 구성요소로 이해, 뒤따라 느낌, 뒤따라 삶을 제시하였는데, 이 중 첫 번째 단계인 이해는 타자를 타자로서 의식할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 는 우는 아이를 보고 동정심을 느끼지만, 이는 아이의 슬픔과 별개로서 존재하는 ‘나’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즉 진정한 공감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존재로서의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 고 타자의 객관적 실재성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판단을 통해 뒤따 라 느낌과 뒤따라 삶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하여 학습자는 진정한 공감에 기반을 둔 자아성찰을 시작할 수 있 게 된다. 학습자의 감상에는 카타르시스(“말을 하고 나니 이렇게 후련한 데”) 이후에 이어지는 변화의 의지(“왜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고, 이번 일로 나의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고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면 조금이라도 표현할 수 있는 계기로 삼고 싶 다.”)가 잘 드러나 있다. 이는 해묵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카 타르시스를 느꼈지만, 결코 그 행위가 자신의 실생활에서 이루어지지 않 았음을 인식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는 성찰이다.
학습자는 자기형상의 입을 빌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감정의 해방을 통 해 자신을 반성적 성찰의 길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이는 진실한 자기표현이자 진정한 공감이라는 점에서 자아성찰을 위한 유의미 한 처치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아래 학습자가 작성한 활동의 감 상문에서 잘 드러난다.
사색(?)에 빠졌다고나 할까요? 내 마음을 쳐다보고 계속 계속 표현해보니까 어 디가 아픈지도 알겠고 점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깊어져서 ‘나’를 깊이 6) 박주영(2017), 「공감의 윤리적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연구 : 셸러(M. Scheler)의
공감 윤리학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있게 들여다본 것 같아요. 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마음 속 감정이 있는 것 같 아서 가끔 마음 속 실타래를 풀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가장 큰 변화로는 사건(여기에 있는 사건은 보통 부정적이에요)이 일어났을 때 조금 더 나를 아니 까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됐어요. 예전에는 우유부단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 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구-30230-3차-4]
글쓰기를 통한 문학치료에는 크게 공감과 통찰, 두 가지 과정이 존재한 다. 공감의 과정이 내담자의 슬픔이나 고통, 위축된 자존감을 바라보고 쓰다듬어 주면서 카타르시스적 분출을 장려하는 과정이라면 통찰의 과정 은 자신의 갈등과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는 성숙한 과정이다. 즉 글쓰기 주체는 공감적 대상을 활용하여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끼 고, 이는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통찰할 수 있도록 만 드는 힘이 된다.
(2) ‘나’를 대체하는 이미지를 위로하기
이 절에서는 자화상 시 쓰기를 위해 ‘나’를 대신 나타낼 수 있는 이미지 를 떠올린 다음, 시적 화자의 입을 빌어 그 형상을 위로함으로써 타자로 부터 위로 받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얻은 학습자의 경우를 소개한다. 이 는 자화상 시 쓰기의 주체인 ‘나’가 표현하려는 대상인 ‘나’와 동일하면서 도 동일하지 않은,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통일로서 존재한다는 특수성에 서 비롯되는 것이다.7) 자화상 시 쓰기를 통해 주체는 위로하기와 위로받 기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주체의 내면적 갈등을 해결하 고 긍정적인 자아성찰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돕는다.
‘나’를 대체하는 이미지를 위로하기는 상상력을 활용한 직접적 말하기의 체험이라는 점에서 게슈탈트 심리 치료의 빈 의자(empty chair) 기법과 유사하다. 빈 의자 기법은 누군가가 내 앞에 앉아있다고 가정하고 드러 내기 힘들었던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미해결된 욕구를
7) 오성호(2006), 『서정시의 이론』, 실천문학사, p.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