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불안의 항변권이 부착된 선이행권리를 자동채권으로 하는 상계가 가능하다면 항변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 이행이 강제되는 것과 동일 한 결과를 낳으므로 이는 허용될 수 없다.150) 통상 이를 상계금지효라 한다.
독일의 판례는 독일민법 제320조가 정하는 동시이행의 항변권과 마 찬가지로 불안의 항변권 존재 자체로 선이행의무자가 이행지체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을 면한다고 보면서도,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선이행의무자에게 상대방이 의무이행을 요구하는데도 선이행의무자가 불 안의 항변권을 구체적으로 행사함으로써 반대급부청구권이 위태로움을 이유로 이행을 거절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상대방은 독일민법 제
323조 제1항에 따라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고 한다.154) 이는 불안의 항변
권의 이행지체저지효를 보다 세분화하여 손해배상책임에 관해서는 당연 효과설을 취하면서도, 상대방으로서는 선이행권리자가 불안의 항변권을 이유로 이행을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반대급 부 또는 담보의 제공을 통하여 불안의 항변권을 소멸시킬 기회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채무불이행을 원인으로 한 계약해제에 관해서 는 일부 행사효과설과 유사한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이 쟁점은 결국 불안의 항변권, 나아가 항변권이라는 개념 자체를 현실적인 거절행위를 전제로 하는 적극적인 작위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하 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일반적으로 항변권이 청구권의 행사에 관하여 그 작용을 막아 그치게 하는 권리를 뜻하는 이상 항변권의 개념을 어떻 게 구성할 것인지는 청구권의 개념구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행기의 정함이 없는 채무는 그 실현을 위해 채권자의 적극적인 이행청 구가 필요하나(민법 제387조 제2항) 확정기한부 채무는 그 이행기가 도 래하는 것만으로 이행지체책임이 발생하고(민법 제387조 제1항) 불확정 기한부 채무 또한 채무자가 그 이행기의 도래를 안 날을 경과함으로써 이행지체책임이 발생하는 등(민법 제387조 제2항), 채권 내지 청구권이
13754, 13761 판결 등
154) BGH 11. 12. 2009, NJW 2010, 1272. 또한 이 경우 선이행의무자는 신의칙(독 일민법 제242조)에 따른 모순행위금지의 원칙에 의하여 사후적으로 불안의 항변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일정한 효력을 발휘하여 채무자에게 이행지체책임이 발생하는 데에 반드 시 채권자의 이행청구라는 적극적인 작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므로, 청구 권의 반대개념으로서의 항변권 또한 반드시 채무자의 현실적인 거절을 전제로 하는 권리로 볼 것은 아니며 채무이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지위 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155) 따라서 일단 불안의 항변권이 발생하면 선이행의무자는 상대방에게 이를 구체적으로 행사하는 등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더라도 이행지체책임을 면하게 된다고 보아야 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은 독일의 판례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으나, ① 위 독일판례에 의하더라도 그 결론의 이론적 근거가 精緻하게 밝혀졌다 고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은 점, ② 「채권법의 현대화에 관한 법 률」로써 불안의 항변권에 관한 조문을 개정하면서 담보요구권과 계약해 제권을 명시한 독일민법과 달리 선이행의무자의 적극적인 담보요구 및 계약해제를 통한 계약관계로부터의 이탈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 민법에서 (이에 관하여는 후술한다) 여전히 반대급부에 이행곤란사유가 존재하고 있는 선이행권리자가―스스로 그 이행곤란사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지의 여부를 불문하고―보다 용이하게 계약관계로부터 이탈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형평에 맞는 것인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점 등을 고려하 면, 이행지체저지효에 관하여 독일의 판례와 같은 해석론을 취하는 것은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나. 이행지체로 인한 손해를 배상한 이후 그 반환청구의 가부
선이행의무자가 불안의 항변권이 발생한 상태에서 선이행의무를 이 행하더라도 그 반환을 청구할 수 없음은 앞서 본 바와 같다. 그러나 선 이행의무 자체가 아니라 연체료, 지체상금 등 이행지체로 인한 손해를
155) 남효순(2001), 112-113면
배상한 경우 그 반환을 청구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판례는 일관되게 불안의 항변권의 존재 자체로 이행지체책임이 발생 하지 않는 이상, 선이행의무자는 이미 지급한 연체료, 지체상금 등 이행 지체로 인한 손해배상금을 부당이득으로서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고 보 고 있다.156) 나아가 그러한 손해배상금의 지급이 민법 제742조가 정하는 비채변제에 해당하여 부당이득반환을 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 에 관하여도, “채무 없는 자가 착오로 인하여 변제한 것이 아니라면 비 채변제는 지급자가 채무 없음을 알면서도 임의로 지급한 경우에만 성립 하고 채무 없음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변제를 강제당한 경우나 변제거 절로 인한 사실상의 손해를 피하기 위하여 부득이 변제하게 된 경우 등 그 변제가 자기의 자유로운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 사정이 있는 때에는 지급자가 그 반환청구권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보 아야 하는데, 판결의 대상이 된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비추어 선이행의무 자가 지급한 연체료는 채무 없음을 모르고 변제하였거나 채무 없음을 알 고서도 변제거절로 인한 사실상의 손해를 피하기 위하여 그 자유로운 의 사에 반하여 부득이 변제한 것이어서 비채변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사례가 있다.157)
이에 대해서는 선이행의무자가 구체적으로 불안의 항변권을 행사하 여야 이행지체저지효가 발생한다는 전제하에, 이미 이행한 선이행의무 자체와 연체료 등 이행지체로 인한 손해배상금 모두 반환을 청구할 수 없고 오히려 불안의 항변권이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면서 도 연체료를 지급하기까지 하였다면 불안의 항변권을 포기한 것으로 보 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158) 그러나 앞서 본 바와 같이 불안의 항변권
156) 대법원 1997. 7. 25. 선고 97다5541 판결, 대법원 2006. 10. 26. 선고 2004다 24106, 24113 판결
157) 대법원 1997. 7. 25. 선고 97다5541 판결 158) 김동훈(1999-1), 347-348면
은 그 존재 자체로 이행지체저지효가 발생한다고 보아야 하므로 선이행 의무자가 지급한 연체료, 지체상금 등의 손해배상금은 법률상 원인, 즉 이행지체의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의무가 없어 부당이득에 해당 하고, 따라서 민법 제742조의 비채변제에 해당하지 않는 한 선이행의무 자는 그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
불안의 항변권이 발생하였음에도 선이행의무자가 자신의 의무를 이 행하고 이행지체로 인한 손해까지 모두 배상하였다면 구체적인 사실관계 에 따라서는 불안의 항변권을 포기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래계의 현실에서 선이행의무자가 불안의 항변권이 발 생하였는지 여부를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나아가 사실상의 불이 익을 피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요구에 따라 지체상금 등 그가 주장하는 손해배상금을 일단 전액 지급하는 사례 또한 적지 않으므로, 특별한 사 정이 없는 한 이러한 경우 선이행의무자가 불안의 항변권을 포기한 것으 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