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객관적 이행곤란사유
(1) 의의
이행곤란사유 중 상대방의 의사나 태도와 같은 주관적인 영역 이 아니라 객관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사정으로 말미암은 이행곤란사유를
‘객관적 이행곤란사유’로 칭할 수 있을 것이다.
(2) 변제자력의 결여
구 독일민법 제321조가 규정하는 ‘상대방의 재산상태의 현저 한 악화’, CISG 제71조 제1항 ㈎호가 정하는 ‘상대방의 이행능력의 중 대한 결함’은 모두 상대방의 변제자력이 결여됨으로써 반대급부의 이행 에 위험이 발생하는 경우로서 우리 민법의 불안의 항변권에 있어서도 이
행곤란사유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우에 이행곤란사유에 해당 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는 앞서 본 각 입법례의 판례 및 학설에서 언급된 구체적인 사례를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의 변제자력의 결여는 쌍무계약의 반대급부가 금전채무 인 경우, 예를 들어 매매계약에서의 매수인 또는 도급계약에서의 도급인 의 대금지급의무 등에서 특히 중요한 이행곤란사유가 된다. 그러나 금전 채무가 아닌 채무 또한 그 이행에 일정한 자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보통 이므로(예를 들어 어떠한 물건을 제작하여 공급하기 위해서는 그 재료를 구매하고 직원을 고용하며 생산, 수송, 판매하는 데에 비용이 투입된다) 변제자력의 결여는 이러한 계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행곤란사유에 해당한다.
(3) 그밖에 채무이행을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사정
변제자력의 결여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채무이행을 현저히 곤 란하게 하는 객관적인 제반 사정 또한 객관적 이행곤란사유의 유형에 포 섭될 수 있다. 이러한 이행곤란사유는 반대채무가 금전채무 외의 것인 경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장기간 방치되거나 악화되는 경우 이행불 능의 채무불이행에 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체적으로는 계약목적물 에 부착된 제한물권을 비롯하여 완전한 권리이전을 제약하는 요소, 행정 적인 제약, 생산수단의 멸실 등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우리 민법은 손해배상에 관하여 원칙적으로 금전배상의 원칙 을 취하고 있다(민법 제394조). 따라서 금전채무 외의 채무라고 하더라도 채무불이행의 단계에 이르면 금전채무, 즉 손해배상채무의 이행에 관한 문제 또한 발생한다. 이는 이행불능과 같이 본래의 채무는 이행이 불가 능해지고 전보배상책임으로 전환되는 경우 특히 그러하다. 그렇다면 비
록 상대방이 부담하는 반대급부 자체에 관해서는 그 이행이 현저히 곤란 할 객관적인 사정이 존재하더라도 상대방에게 변제자력이 충분하다면 반 대급부가 채무불이행에 이르더라도 그로 인한 손해배상채무는 충분히 이 행이 가능하므로 불안의 항변권이 부인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115)
이에 관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판례는 대법원 1997. 7.
25. 선고 97다5541 판결이다. 위 판결은 원고와 피고가 중고자동차 매매 시장 용지인 토지의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는데 매매계약 당시의 도시계획 상 매매목적토지에 중고자동차 매매시장을 설치할 수 없었던 사안에 관 한 것으로, 매도인인 피고는 법률에 의하여 성립된 公社로서 변제자력의 면에 있어서는 실질적으로 위험 또는 불안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해당 하였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피고의 변제자력에 관하여는 별도로 언급함 이 없이 피고의 원고에 대한 채무이행이 곤란할 현저한 사유가 있다고 보아 매수인으로서 선이행의무자였던 원고의 불안의 항변권을 인정하였 다. 이는 곧 금전채무 외의 채무가 채무불이행에 이르러 금전채무인 손 해배상채무로 전환될 수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반대급부 그 자체의 실현이 곤란할 사유에 해당하는지에 따라 이행곤란사유의 유무가 판단된 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판례의 입장은 불안의 항변권의 이론적 근거가 ‘급부 의 대가관계’라는 점에서 정당화된다. 선이행의무와 대가관계에 있는 것은 상대방이 약정한 반대급부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반대급부가 향 후 채무불이행에 이르는 경우 금전채무인 손해배상채무로 전환될 수 있 는지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선이행의무자로서는 상대방의 반대급부의 이행이 곤란할 현저한 사정이 있으면 자신의 의무이행을 거절할 수 있다
115) 이 문제는 불안의 항변권의 소멸사유로서의 상대방의 담보제공과 관련하여
‘금전채무 외의 채무에 대하여 제공하여야 할 담보의 정도’의 측면에서도 다루어질 수 있다.
고 보아야 한다. 또한 불안의 항변권은 상대방의 반대급부가 이행불능 또는 이행거절에 이르기 이전 단계에서 작동하며 그 효력 또한 선이행의 무자에게 일시적인 이행거절권능을 부여함으로써 당사자 사이에 손해배 상책임이 문제되기 전에 계약의 유지와 순조로운 이행을 촉구하는 기능 을 발휘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결론적으로 상대방이 충분한 변제자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 라도 약정된 반대급부의 이행이 현저히 곤란할 사정이 존재한다면 선이 행의무자에게 불안의 항변권이 발생한다.
나) 주관적 이행곤란사유
CISG 제72조 제1항은 “계약의 이행기일 전에 당사자 일방이 본질적 계약위반을 할 것이 명백한 경우에는, 상대방은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라고 정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조 제3항에서 “제2항의 요건 (계약해제 이전의 상대방에 대한 통지의무)은 상대방이 그 의무를 이행 하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한 경우에는 적용되지 아니한다.”라고 정함으로 써 계약위반에 의한 해제사유로서 이행거절을 명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의 학설116)과 판례117) 또한 독자적인 채무불이행의 유형으로서 ‘이행거 절’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상대방이 반대급부의 이행을 명시적으로 거절하거나 그러한 거절을 한 것과 동일시할 수 있는 정도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더라 도 계약의 이행 또는 이행준비의 과정에서 보인 행태가 향후의 이행거절 을 예견하기에 충분하다면 선이행의무자에게 불안의 항변권을 부여하여 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행곤란사유를 앞서 본 ‘객관적 이행곤란사유’
116) 양창수, “독자적인 채무불이행유형으로서의 이행거절”, 민법연구 제4권, 박영사, 1997
117) 대법원 2011. 2. 10. 선고 2010다77385 판결 등
에 대비하여 ‘주관적 이행곤란사유’로 칭하기로 한다. CISG 제71조 제 1항 ㈏호가 정하는 ‘계약의 이행 준비 또는 이행에 관한 상대방의 행 위’는 같은 항 ㈎호가 정하는 객관적 이행곤란사유와 대비되는 주관적 이행곤란사유를 별도로 규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판례 또한 앞서 본 대법원 2012. 3. 29. 선고 2011다 93025 판결에서 도급인이 정당한 이유 없이 기성공사금을 지급하지 아니 하고 이로 인하여 수급인이 공사를 계속해서 진행하더라도 그 공사내용 에 따르는 공사금의 상당 부분을 약정대로 지급받을 것을 합리적으로 기 대할 수 없게 된 경우 선이행의무자인 수급인에게 불안의 항변권을 인정 함으로써, 주관적 이행곤란사유에 해당하는 상대방의 전기 반대급부에 대한 이유 없는 채무불이행이 불안의 항변권을 발생시킬 수 있음을 인정 하였다.
다만 주관적 이행곤란사유는 이행곤란사유가 객관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행위 또는 태도와 같은 주관적인 영역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고, 상대방의 어떠한 행위 또는 태도가 이행곤 란사유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선이행의무자의 주관적인 내심 또는 감정에 의하여 판단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 다. 비록 주관적 이행곤란사유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선이행의무자로 하 여금 향후 상대방의 이행이 곤란할 현저한 사유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계 약 체결 및 그 이후의 제반 사정을 종합하여 합리적인 당사자의 입장에 서 객관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라. 이행곤란사유의 정도에 대한 검토
이행곤란사유의 정도는 그 성질상 구체적 사실관계에 비추어 개별적 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이론을 정립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본항에서는 앞서 본 독일민법과 CISG에서의 논의, 그리고 우리나라의 학설 및 판례를 종합하여 이행곤란사유의 정도를 판 단함에 있어 고려하여야 할 대체적인 기준을 정리하고자 한다.
우선 이행이 곤란할 것으로 예상되거나 이미 불이행된 상대방의 반 대급부가 전체 반대급부 중에서 차지하는 양적인 비중이 고려되어야 한 다. 매매계약에서 전체 매매목적물의 가액에 비하여 매우 경미한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 또는 금액에 관해서만 이행이 곤란할 사유가 존재한다거 나, 전기 반대급부 중 이행되지 않은 부분이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경우에 는 불안의 항변권을 인정하기 어렵다.
양적 비중뿐만 아니라 질적인 중요성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계약해제의 요건으로서 ‘주된 채무’와 ‘부수적 채무’를 구 별하는 학설118) 및 판례119)가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 판례는 채무자 가 ‘당해 채무가 계약의 목적 달성에 있어 필요불가결하고 이를 이행하 지 아니하면 계약의 목적이 달성되지 아니하여 채권자가 그 계약을 체결 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의 주된 채무’를 불이행한 경우 에만 채권자의 계약해제를 인정하는데, 이에 비추어 보면 불안의 항변권 에 있어서도 이행이 곤란할 당해 반대급부가 계약의 목적 달성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 반대급부가 불이행될 경우 선이행의무자가 계약을 체결 하였을 것인지 여부 등의 요소를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앞서 본 ‘상대 방이 반대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계약의 목적이 해를 입는 정도’를 고려하여야 한다는 학설 또한 이러한 입장과 상통한다.
그러나 CISG는 제71조 제1항에서 이행정지권의 요건을 ‘의무의 실 질적인 부분의 불이행’으로 정한 반면 제72조 제1항에서는 계약해제의 요건을 ‘본질적 계약위반’으로 정하여 명시적으로 그 정도에 차이를
118) 곽윤직, 94-95면; 민법주해[XIII], 255-259면(김용덕 집필부분)
119) 대법원 2001. 11. 13. 선고 2001다20394, 20400 판결, 대법원 2005. 11. 25.
선고 2005다53705, 53712 판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