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과 관련하여 수많은 정책연구결과가 나왔 으며, 지금도 연구들은 계속되고 있다. 정책연구는 현실세계에서 발 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정리하여 대안을 제시 하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지식에서 출발하는가에 따라 정책대 안이 달라질 수 있음은 자명하다. 물론 지식은 단지 문제해결을 위한 도구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규정하는 것도 지식에 달려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포괄하여 체계화된 지식을 흔히 이론이 라고 부른다. 이론은 반드시 현실세계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아니며, 복잡한 현실을 보다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 렌즈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점을 인식한다면,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구체 적인 정책대안 연구를 보다 심층적이고 의미있게 수행하기 위해 어 떤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관한 이론적 논의가 반드시 필요 하다.
이 맥락에서 본 연구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 중점을 두었다. 첫째, 한반도 평화체제의 문제에 앞서 평화개념을 정립하고, 평화에 관한 이론연구의 흐름을 요약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평화는 현존하는 어 떤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라기보다 미래지향적 목표로서 끊임없이 추 구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구체성을 갖기 힘들며, 그 결과 평화에 대한 인식 및 구체적인 정책대안은 바라보는 이의 가치에 따라 매우 다르 게 나타난다. 예컨대 현실주의자는 갈퉁이 말하는 소극적 평화에 대 체로 만족하며, 자유주의자는 적극적 평화를 향한 인류정신의 발전 가능성에 상대적으로 더욱 주목한다. 또한 평화개념은 국제정치적 현
실에 따라 변화해왔다. 2차세계대전 이후 미·소대립이 첨예화되고 핵 무기로 인해 인류절멸의 가능성이 대두되었던 시기에는 이론적 관심 이 소극적 평화의 달성에 급급했으나, 1970년대 긴장완화를 거쳐 탈 냉전시대에 이르면서 적극적 평화를 향한 희망이 상대적으로 점증했 다. 이는 안보연구의 초점이 국가안보, 국제안보, 세계안보로 변화해 왔다는 사실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주의적 안보연구에 대한 비판적 입 장에서 탄생한 현대적 평화연구도 점차 이론과 사회운동의 양 측면 에서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는 데서 입증된다.
둘째, 한반도 평화구축에 관한 정책연구에 활용되고 있거나, 활용 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이론들을 국제정치학의 관점에서 비교·검 토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평화는 국제정치학의 중심주제이기 때문이 다. 본 연구에서는 지난 10년이래 서로 경쟁하고 있는 현실주의, 자 유주의, 구성주의의 세가지 이론적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각 이론들이 표방하는 핵심가정과 평화의 조건을 요약적으로 정리했다. 문제는 사 회과학 이론이 가지는 한계 탓에 이들 중 그 어느 것도 모든 사회현 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일반이론으로 간주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 러므로 각 이론들은 특정 문제영역에서 강점과 약점을 가진다.
현실주의와 자유주의는 세계적 냉전시기 문제해결이론으로서 국제 정치이론의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1970년대 등장한 신현실주의와 신 자유주의는 실증주의와 신고전학파의 미시경제학적 목적합리성을 기 반으로 무정부상태의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전략적 행위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국제정치현상에 대해 서로 치열한 논쟁을 전개하는 가운데 국제정치학계를 석권했다. 그러나 이들 이론에 전제된 가정 및 방법 론, 예컨대 국가중심주의, 효용주의, 실증주의, 그리고 구조개념 등은 일반사회과학의 관점에서 많은 비판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1960년대 부터 이미 사회학에서 시작된 3가지의 이론적 ‘탈(post)’ 운동
(post-structuralism, post-positivism, post-modernism)의 여파가 1980년대 뒤늦게 국제정치학에 밀려들면서 기존 이론들에 대한 비판 이 고조되는 가운데 구성주의가 서서히 태동되었다.
구성주의는 무엇보다 국제정치이론들의 존재론 및 인식론적 문제 를 제기함으로써 국제정치학이 사회과학으로서 면모를 재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구성주의는 기존의 주류 이론들이 방 법론적 개체주의와 실증주의에 집착하여 사회과학의 전체주의(또는 구조주의)와 관념주의적 전통을 배제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마치 19 세기 말 베버가 역사주의와 실증주의의 논쟁에 대해 양자를 모두 비 판하며 대안을 제시했듯이,314) 양자간의 이론적 절충점을 찾으려는 시도의 산물이다. 즉 역사라는 큰 흐름을 무시한 채, 현재라는 시간 적 단면에만 초점을 맞추어 눈에 보이는 요소들간의 인과적 관계를 효용주의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기존 국제정치이론들의 한계를 극복 하기 위해 구성주의는 역사주의의 해석과 이해를 도입·접목시키려는 원대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처럼 구성주의는 비판이론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따라서 기존 국제정치이론들에 비해 문제해결이론으로서 아직 풍부한 연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구성주의가 문제해 결이론의 성격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구성주의는 신현실주 의와 신자유주의가 의존하는 합리적 선택이론의 가정들이 ‘특정 조건 을 전제’(ceteris paribus)로 하기 때문에 현실세계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서 행위의 상호주관성에 주목한다.
즉 현실세계에서 행위자들의 행위는 상호주관적 상호작용을 통해 구 314) 막스 베버, “사회과학적 그리고 사회정책적 인식의 객관성,” 「막스 베 버의 사회과학 방법론 ①」, 전성우 역 (서울: 사회비평사, 1997), pp.29-124 참조.
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성주의는 정체성, 문화, 규범 등의 개념 을 바탕으로 국제관계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 맥락에서 구성주의자들은 합리적 선택이론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 해 언어행위이론, 나아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행위이론을 도입한 다. 행위를 ‘담론적 실천(discursive practice)’이라고 표현하는 구성주 의는 합리적 선택이론의 핵심인 전략적 행위에는 의사소통적 행위가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셋째, 이상과 같은 국제정치이론들의 비교·검토를 기반으로 한반도 평화체제에 관한 이론적 논점을 제기하는 것이다. 기존의 연구들이 대체로 경험적·귀납적 내지는 규범적인 접근방법을 채택하고 있으며, 이론적 접근은 단지 간헐적으로 시도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론적 논의의 활성화를 통해 정책연구의 상상력을 제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먼저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개념 규정을 시도했다. 개념규정은 개념적 틀 또는 이론적 논의를 위한 기 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국제레짐의 한 형태로 규정했다. 그 근거로서 ① 한반도 평화는 지역적 범위를 가진 하나의 국제적 이슈로 간주될 수 있고, ② 한반도 평화문제 해결을 위해 어떠한 형태의 제도가 마련되고, 이를 위한 명시적 내지 묵시적 원칙, 규범, 규칙, 그리고 결정절차들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 며, ③ ‘7·4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공동합의서’ 등은 비 록 실천력을 갖지 못하지만, 원칙과 규범에 대한 남북한의 공동인식 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에는 이미 ‘선언적 레짐’이 존재한다는 세가지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개념규정이 현재 진행중인 경험적 사실들을 이론적으로 재 구성하는 작업이라면, 한반도 평화문제에 대한 존재론 및 인식론적 논의와 문제해결이론적 논의는 앞에서 제시한 세가지 이론적 패러다
임을 토대로 연역적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존재론 및 인식론적 논의 는 웬트의 ‘주체와 구조 관계에 따른 국제정치이론들의 분류’를 활용 하여 한반도 평화체제가 어떠한 질서 및 작동원리에 따라 형성·발전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즉 한반도 평화체제의 질서모델 을 모색하는 이론적 작업이다. 이를 위해 현실주의, 자유주의, 구성주 의의 이론적 틀을 모두 적용시켜 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구성주 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정에 요구되는 다양한 분석수준을 연계 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이 론으로서 주목받을 가치가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문제해결이론적 논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협력행위의 가능성과 그 방법에 관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는 게임이 론에 근거한 합리적 선택(전략적) 행위, 규범적 행위, 그리고 담론적 행위에 관한 이론을 바탕으로 각각의 한반도 평화문제의 해결 방법 을 살펴보았다. 한반도 평화문제는 여태껏 주로 합리적 선택이론의 가정에 집착하여 전략적으로만 인식된 경향이 매우 강하며, 그 결과 오히려 전략적 딜레마의 상황에 처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방법의 적극적 모색이 요구 되며, 규범적 및 담론적 행위이론은 전략적 행위를 보완해주는 접근 방법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같이 국내 및 국제적 차원을 모두 아우르 는 문제에 대한 이론적 접근에 있어서 구성주의의 존재론, 인식론, 방법론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따라서 본 연구는 구성주의에 더 욱 큰 비중을 두고 각 이론들을 비교·검토했으며, 이를 한반도 현실 에 적용시켜보았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누차 강조했듯이 어떠한 이 론도 일반이론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현실주의의 신중함과 자유주의 의 발전주의 내지 진화론적 이념은 결코 경시될 수 없다. 또한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