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주의는 국제정치학의 지배적 패러다임이다. 냉전이 종식된 이 후에도 그 위세는 지속되고 있다.79) 물론 현실주의 패러다임 내에도 여러 가지 분파가 있지만,80) 일반적으로 카(E. H. Carr)와 모겐소 (Hans J. Morgenthau)로 대표되는 전통적(또는 고전적) 현실주의와 왈츠이후의 신현실주의(또는 구조적 현실주의)로 크게 구분된다. 전 통적 현실주의와 신현실주의는 이론구성이나 방법론 측면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가장 뚜렷한 차이는 분석수준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인간의 권력추구라는 본성에서 출발하여 국가수준에 분석의 초점 을 맞추는 전통적 현실주의와 달리 신현실주의는 과학적인 체계이론 (systemic theory)을 표방하고 국제체계의 구조 속에서 국가행위를 설명하고 있다. <표 III-1>에서 보듯이 양자간에 몇가지 분명한 차이 점이 드러난다.81)
79) 이는 1990년대 중반 주요 국제관계 학술논문집과 「국제학 협회(ISA)」
발표 논문들의 80%가 신현실주의 계열에 속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 다. Ole Waever, "Figures of international thought: introducing persons instead of paradigms," The Future of International Relations: Masters in the Making, eds. by Iver B. Neumann and Ole Waever (London: Routledge, 1997), p.26.
80) 예를 들면, 린-존스(S. M. Lynn-Jones)와 밀러(S. E. Miller)는 고전적 현실주의(H. J. Morgenthau), 구조적 현실주의(Kenneth N. Waltz), 신 고전적 현실주의(Randall Schweller), 패권경쟁 및 힘의 전이에 관한 현 실주의 이론들(R. Gilpin, A.F.K. Organski)로 구분한다. Sean M.
Lynn-Jones & Steven E. Miller, "Preface," The Perils of Anarchy, pp.xi-xiii; 듄(T. Dunne)은 현실주의를 ‘구조적 현실주의 I’(H. J.
Morgenthau), ‘구조적 현실주의 II’ (Kenneth N. Waltz), ‘역사적·실천적 현실주의’(E. H. Carr), ‘자유주의적 현실주의’(H. Bull)로 분류한다.
Timothy Dunne, "Realism," The Globalization of World Politics: An 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Relations, eds. by John Baylis & S.
Smith (Oxford: Oxford Univ. Press, 1997), p.113 참조.
<표 III-1> 전통적 현실주의와 신현실주의의 비교
전통적 현실주의 신현실주의
방법론
․객관적 법칙을 반영한 합 리적 이론 정립 지향/귀납 적 이론
․역사, 사회학, 정치철학 의 존적/ 설명중심
․간결성과 엄격성을 지닌 합리적, 연역적 이론 정립 시도/ 설명과 예측
․신고전학파의 미시경제적 개념 원용
이론적
성격 ․외교정책이론 지향적 ․국제정치이론 지향적/체 계이론
분석수준 ․다수준: 인간 및 국가수준 중심
․단수준: 국제체계의 구조 중심
권력개념
․규범적 권력개념: 인간과 국가의 원초적 목표로서 권 력
․정치의 기본단위로서 권력
․다른 목표를 달성하기 위 한 수단으로서의 권력
국가이익 ․권력의 극대화 ․안보확립
국가행위의 동인
․권력과 국가이익
․공세적 국가행위(권력의지 관철)
․무정부상태와 능력의 배분
․방어적 국가행위(타국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 )
가. 핵심가정
이와 같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세계관 및 기본가정은 기 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모겐소가 제시한 현실주의의 여섯가지
81) K.N. Waltz, Theories of International Politics, p.126; J. Mearsheimer,
"The False Promise of International Institutions," p.10; R. Gilpin, "No One Loves a Political Realist," Security Studies, Vol. 5 (1996), pp.3-26; Randall L. Schweller & David Priess, "A Tale of Two Realisms: Expanding the Institutions Debate," Mershon International Studies Review, Vol. 41 (1997), pp.7-8 참조.
원칙들은 전통적 현실주의의 세계관 내지 가정을 분명히 보여준다.82) 이 원칙들은 크게 세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인간본성에 관한 비관적 견해이다. 즉 인간은 본성적으로 권력을 갈망(lust for power) 하며, 이는 갈등을 야기하는 원천으로서 불변의 객관적 법칙이라는 점이다. 둘째, 권력으로 정의된 국가이익이 국제정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셋째, 정치적 행위의 도덕적 특수성에 대한 강조이다. 모겐소 는 베버(Max Weber)의 정치윤리를 빌려왔다. 즉 정치적 행위는 보 편적 도덕원리 ― ‘심정윤리(Gesinnungsethik)’ ― 의 적용을 받지 않 고 정치적 결과를 기준으로 삼는 ‘책임윤리(Verantwortungsethik)’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신현실주의는 국제체계에 분석수준을 맞추고 가치를 배 제한 과학적 이론을 내세우는 탓에 ‘인간본성’과 ‘정치적 도덕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현실주의의 기본구상이 숨겨져 있는 「인간, 국가, 그리고 전쟁」(1959)이란 저서에서 왈츠는 이미 비관적 인간본성에 대한 현실주의적 시각을 수용하고 있다. 특 히 그는 인간본성이 불변적이라면, 인간행위는 사회적·정치적 제도에 의해서만 변화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으며,83) 이는 신현실주의의 탄생에 중요한 지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또한 무정부적 국제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자구(self-help)와 자국중심주의를 강조하는 신현실주의 의 논리 속에도 현실주의적 정치윤리가 내재되어 있다.
실제로 신현실주의는 그 출발부터 새로운 철학적 질문이나 지적 전통을 창조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왈츠의 이론적 출발점은 “국제관 계의 역사에서 행위자의 의도와 결과가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 이유”
82) H. J. Morgenthau, Politics Among Nations, 3rd Edition (1973), pp.3-15 참조.
83) K. N. Waltz, Man, the State, and War, pp.40-41 참조.
와 “역사적으로 행위자들이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결과가 지속적으로 재현되는 이유”를 규명하려는 데 있었다.84) 이에 대한 대 답을 찾기 위해 그는 국제체계에 초점을 맞춰 정치적 현실주의를 엄 격하고 연역적인 체계이론으로 정립하려 했다.85) 따라서 신현실주의 는 기본적으로 전통적 현실주의의 세계관 및 핵심가정을 현시적 또 는 묵시적으로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아가 신현실 주의 이론은 엄격성과 간결성에 입각한 과학화를 강조하며, 연역적 방법론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 현실주의에 비해 보다 명확 한 기본가정들을 제시하고 있다.
어떠한 형태를 막론하고 현실주의 패러다임이 공유하고 있는 핵심 가정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크게 네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86)
가정 1: 국가는 국제정치 행위의 핵심 단위이다.
84) K. N. Waltz, Theory of International Politics, p.65.
85) 왈츠는 신현실주의 이론의 목적을 다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① 과거 의 현실주의자들보다 더욱 엄격한 국제정치이론을 개발하는 것, ② 단 위수준과 구조적 요소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으며, 그들간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 ③ 국제정치학연구에서 지배적 이었던 (국가) ‘안에서 밖으로(inside-out)’ 사고방식의 부적합성을 드러 내는 것, ④ 체계의 변화에 따라 국가행위가 어떻게 달리 나타나며, 기 대했던 결과가 변화하는지 보여주는 것, 그리고 ⑤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들과 주로 경제적 군사적 문제에 그 이론의 실제적용 사례들 을 제시하는 것이다. K. N. Waltz, "Reflections on Theory of International Politics," Neorealism and Its Critics, p.323.
86) Robert O. Keohane, "Realism, Neorealism and the Study of World Politics," Neorealism and its Critics, ed. by R.O.Keohane. p.7; Jeffrey W. Legro & Andrew Moravcsik, "Is Anybody Still a Realist?"
pp.12-13; John J. Mearsheimer, "The False Promise of Internaitonal Institutions," p.10; R. L. Schweller, "A Tale of Two Realisms," p.6;
Benjamin Frankel, "Restating the Realist Case: An Introduction,"
Security Studies, Vol.5, No.3 (1996), pp.xiv-xviii 등 참조.
현실주의자들에 따르면, ‘정치적 동물’인 인간은 그들이 충성을 바 치는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으로서만 존재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사회 적·정치적 문제의 기본적 단위는 집단이다.87)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 서 보면, 근대 세계의 기본집단은 영토적 경계를 가지는 민족국가이 다. 비록 다국적 기업, 국제비정부기구 등 초민족적 행위자들이 생성 되고 있지만, 국가를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에 국가는 국제정치의 가 장 핵심적인 행위자이다.
가정 2: 국제체계는 조직원리로서 무정부상태이다.88)
국가체계와 달리 주권국가로 구성된 국제체계는 위계적 권력이 존 재하지 않는 무정부성을 띠고 있다. 따라서 국제체계의 본성은 기본 적으로 갈등적이다. 그러나 현실주의자들은 무정부성을 ‘만인의 만인 에 대한 투쟁’ 상태로 보지는 않는다. 전쟁은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 기 때문이다. 무정부상태에서의 문제는 오히려 결과의 예측불가능성 이다. 국가들간에는 수많은 협정, 조약, 관습, 규범 등이 존재하며, 이 는 상호 협력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각 국가들의 이익 을 반영한 것일 뿐, 불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 제도나 관습들은 타국의 능력에 대 한 지식을 증대시키거나 협상과 상호 작용을 용이하게 하는 것 이상 은 아니다. 즉 제도나 관습은 제아무리 확대·발전하더라도 국제관계 의 무정부상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어떠한 국가도 세 계공동체를 위해 자국의 이익을 희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처럼 서로를 신뢰할 수 없는 무정부상태에서 국제체계의 구성단위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돌보는 자구의 원칙에 따라 행위한다.
87) Robert Gilpin, "No One Loves a Political Realist," p.7.
88) K. N. Waltz, Theory of International Politics, p.88f.
가정 3: 국가는 권력을 추구하며, 그 자체로 목표이거나 아니면 다 른 목표의 수단이다.
권력은 현실주의 이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특히 무정부상태 의 국제체계에서 권력은 생존을 위한 자구능력이라는 맥락에서 가장 기본적 개념이다. 현실주의자들은 국가의 권력 추구를 자국의 독립과 안전유지, 그리고 번영 등과 같은 국가이익을 위해 타국이 취한 정책 에 영향을 미치거나 타국의 행동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려 는 것이라고 말한다.89) 따라서 현실주의자들의 권력에 대한 관점은 국가의 자율성 확대와 타국에 대한 영향력 확보라는 두가지 차원으 로 대별될 수 있다. 권력에 대한 현실주의적 시각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상대성에 있다. 즉 어떠한 국가권력 측정에서도 타국과의 비 교를 통한 능력의 상대적 크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권력개념에 대한 통일된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전통적 현실주의의 경우, 권력은 그 자체로서 목표인 반면, 신현실주의자들은 권력을 수단으로 파악한다. 또한 신현실주의 내에 서도 국가의 권력추구에 대한 가정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소 위 ‘공세적 신현실주의자’들은, 마치 시장에서 기업들이 이익을 극대 화하길 원하는 것처럼 무정부적 경쟁 상황 속에서 국가들은 가능한 많은 권력을 추구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방어적 신현실 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들의 일차적 관심은 보편적으로 자 신들의 권력지위를 유지하는 데 있으며, 단지 몇몇의 국가들만이 예 외적으로 더 많은 권력을 가지길 원한다. 이들은 권력유지를 넘어 권 력증진을 추구하는 국가행위가 국제체제의 속성 탓이 아닌 국가차원 의 하부체계적 변수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90)
89) 모겐소의 국가권력에 대한 설명은 H. J. Morgenthau, Politics Among Nations, Part III, pp.103-6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