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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요 청자의 종류별 전개양상

조선시대 관요의 운영시기는 관요 백자의 명문, 기형, 문양 등과의 비 교를 토대로 밝혀져 왔다.191) 이에 따라 청자를 제작한 관요의 주된 운 영 시기 또한 일정한 시기로 범위를 좁히는 것이 가능하다. 경기도 광주 우산리 4호 요지는 백자의 명문(‘內, 司’)으로 인해 관요 설치 이전에 운 영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192) 실제로 우산리 4호 요지에서 수습된 청자 는 14321460년 사이에 운영된 광주 건업리 2호와 우산리 2호 요지의 청자와 세부 기형 및 굽의 형태면에서 유사하였다.193) 다만 우산리 4호 요지에서 확인된 청자의 명문은 건업리 2호와 우산리 2호 요지에서 확인 되지 않는 반면 고령 사부리 요지 분청사기의 명문과 동일한 내용이었 다.194)

해당 명문의 일부는 우산리 4호 요지와 인접한 우산리 14호 요지의 청 자와 초벌편, 우산리 17호 요지의 백자에서도 확인되어 광주 우산리와 고령 일대 가마에서 제작된 자기가 서로 연관될 것으로 여겨진다.195)

191) 관요의 운영시기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로 강경숙, 韓國陶磁史 ; 김경중, 16세기 중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양상 연구-가마터 출토 명문백자를 중심으로 ; 同著, 17세기 명문백자를 통해 본 관요의 운영시기-생산소비유적 출토품을 중심으 로 , 한국고고학보77, 한국고고학회, 2010 ; 김귀한, 15~16세기 관요 백자 제작 양 상의 변화와 그 배경-광주 대쌍령리 2호 요지를 중심으로 ; 同著, 15~17세기 관요 백자 명문의 변화와 그 배경 ; 김봉준, 銘文資料를 통해 본 廣州 牛山里 窯址群의 性格 ; 김영미, 조선시대 관요 청자 연구 ; 김영원, 조선시대 관요체제의 변천-도 기소자기소에서 분원관안으로 ; 同著, 조선시대 도자기 ; 박정민, 조선 전기 명 문백자 연구 ; 윤용이, 朝鮮時代 分院의 成立과 變遷에 관한 硏究(一) ; 同著, 1 516세기 조선백자의 양상 , 일도자문화의 교류양상, 경인문화사, 2005 ; 전승 창, 15~16세기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 관요연구 ; 정양모 외, 韓國白磁陶窯址, 韓 國精神文化硏究院, 1986 참조.

192) 김봉준, 銘文資料를 통해 본 廣州 牛山里 窯址群의 性格 , pp. 130~133 ; 김영미, 朝鮮時代 官窯 靑磁 硏究 , p. 107.

193) 해강도자미술관 편, 광주 건업리 조선백자 요지-건업리 2호 가마유적 발굴조사보 고서, pp. 50~51, p. 80.

194) 대동문화재연구원 편, 고령 사부리요지, p. 65, p. 67, p. 77, p. 81, p. 85, p. 99, p.

103, p. 107, p. 109.

195) 김경중 외, 조선 전기 관요 최근 조사 성과-우산리 9호14호 일원을 중심으로 , 제10회 경기도자학술세미나 발표논문집 최근 발굴조사된 가마터 조사성과, 경기도자 박물관, 2015, pp. 46~47 ; 해강도자미술관 편, 광주 우산리 백자요지(Ⅱ)-17호 백자 요지 시굴조사보고서, 해강도자미술관, 1999, p. 53.

엇보다도 명문의 내용을 고려하면 명문이 표기된 시점은

경국대전

형 전이 처음 간행된 1461년, 왕과 동궁의 기명 중복 사용에 대해 지적한 1462년과 1463년보다 후행할 가능성이 크다.196) 따라서 광주 우산리 4호 요지의 상한을 1460년대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197)

광주 우산리 14호 요지는 2기의 가마가 연접한 구조를 이루는데 이는 16세기 전후에 운영된 도마리 7호 요지의 성격과 일치한다.198) 자연히 우산리 14호 요지의 운영시기는 우산리 4호 요지와 도마리 7호 요지 운 영시기의 중간선상에 해당하는 15세기 후반일 가능성이 크다.199) 관음리 20호 요지는 우산리 14호 요지에서 출토된 청자화형잔과 동일한 예가 수 습되었고, 오전리 3호 요지의 경우 우산리 14호 요지에서 출토된 청자접 시와 기형상 동일한 면을 보이고 있어 모두 15세기 후반에 운영되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광주 귀여리 11호와 도마리 1호 요지는 편년유물의 명문을 통해 각각 1493년, 1505년 전후에 운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우산리 9호 요지, 번천리 8

9호 요지는 출토된 음각묘지석의 명문을 토대로 각각 1540년 대, 1560년대에 운영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200) 관음리 9호 요지의 경우

196)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 장에서 관요 청자의 명문 자료와 문헌 자료를 토대로 진행 할 예정이다.

197) 世祖實錄 卷29, 世祖8年(1462) 11月 30日, “(전략)名分不可不嚴, 昨日司饔院進膳, 雜用世子器皿, 甚不可, 若是則父子同器, 君臣同器, 奴主同器矣, 名分何居? 與野人奚擇 焉? 世子尙且視膳, 事孰大於御膳乎? 其司饔別坐罪尤重焉, 當丁寧告戒之.” ; 世祖實錄 卷30, 世祖9年(1463) 2月 22日, “前日進膳時畇以司饔提調, 不分器皿, 父子安有同器之 理?(후략)”

198) 김경중 외, 조선 전기 관요 최근 조사 성과-우산리 9호14호 일원을 중심으로 , pp. 41~42 ; 한국문화유산연구원 편, 광주 도마리 7호무갑리 14호 요지, 한국문 화유산연구원, 2013, pp. 40~43, p. 195.

199) 우산리 14호 요지는 우산리 4호 요지보다 다양한 명문이 확인된 점에서 후행하지만 귀여리 일대보다 이른 시기에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경중 외, 조선 전기 관요 최근 조사 성과-우산리 9호14호 일원을 중심으로 , p. 47)

200) 우산리 9호 요지는 백자음각묘지석의 ‘壬寅’명을 근거로 1482년과 1542년으로 운영 시기에 대한 해석이 양분되고 있다. 그러나 해당 묘지석의 명문은 두차례에 걸쳐 표 기되어 제작시기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우산리 9호 요지의 청자를 실견한 결과 1505년 전후에 제작된 도마리 1호 요지의 청자에 비해 태토가 정선되고, 시유상태가 좋으며 전반적으로 기벽이 얇은 점에서 1550년대에 운영된 번천리 9호 요지의 청자 와 친연성을 보였다. 이에 우산리 9호 요지의 주된 편년을 1482년이 아닌 1542년으로 파악하였다.

백자의 기형과 굽 형태, 청화백자의 문양, ‘天’명 등으로 보아 16세기로 편년된다. 그 외에도 기존 선행의 연구에서 광주 무갑리 2호, 번천리 3 호, 열미리 5호, 학동리 4

5

6호 요지의 경우 16세기 전반으로 편년되 었으며 광주 곤지암리 1

4호 요지를 비롯해 관음리 2

4

10

11

22 호, 대쌍령리 1

2호, 무갑리 8

10

18호, 정지리 3호 요지는 16세기 후 반에 운영된 것으로 의견이 합치되고 있다.

17세기에 제작된 관요 자기의 경우 대부분 굽 내면에 간지(干支)명이 표기되어 구체적인 운영시기를 알 수 있다. 실제로 광주 탄벌리 1호 요 지는 16061612년, 탄벌리 8호와 학동리 10호 요지에서 1608년, 학동리 9호 요지에서 16131615년의 편년이 가능한 명문이 각각 확인되어 운영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용인 왕산리 2호 요지는 16261627년, 광 주 상림리 1

10

11호 요지는 16291640년, 선동리 1

2호 요지는 16401649년, 송정동 5

6호 요지는 16491653년으로 편년시기를 파악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광주 신대리 13호 요지의 경우 명문의 판독은 어렵지만 수 습된 청자기대가 광주 도마리 1호, 번천리 9호, 학동리 4호 요지에서 출 토된 예와 기형상 유사하였다. 또한 신대리 13호 요지처럼 청자를 포함 하여 백자, 철화백자가 제작된 관요로는 광주 곤지암리 1호, 번천리 8호, 선동리 2호, 송정동 5

6호, 용인 왕산리 2호 요지를 들 수 있다. 다만, 신대리 13호 요지에서 출토된 철화백자의 문양은 17세기 전반의 예와 뚜 렷한 차이를 보였다.201) 따라서 신대리 13호 요지의 운영시기를 송정동 5, 6호 요지보다 늦은 16601670년대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상으로 청자를 제작한 관요의 운영시기를 명문, 기형, 문양을 토대로 파악하였다. 그 결과 관요 청자는 가장 이른 예가 광주 우산리 4호 가마, 가장 늦은 예가 광주 신대리 13호 가마에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관요 청자는 관요가 운영되기 이전부터 그 조형이 제작되어 관요가 운영된 이후에도 제작을 이어가 1670년대까지 제작되었다.202)<표 23>

201) 변은숙, 17세기 철화백자 연구-경기도 광주 관요를 중심으로 , 이화여자대학교 석 사학위논문, 2000, p. 33.

202) 관요 청자의 제작 시기는 15세기 후반, 16세기 전반, 16세기 중반, 16세기 후반, 17

15C후반 16C전반

우산리 4 1460년대 도마리1 1505전후

우산리14, 관음리20, 오전리3 15C후반 무갑리2, 번천리3, 열미리5

16C전반 귀여리11 1493전후 학동리 456

16C중반 16C후반

우산리9 1540년대 곤지암리1 1570년대

번천리89 1550년대 곤지암리4, 정지리3

16C후반 관음리24101122

대쌍령리12 무갑리81018

17C전반 17C중반

탄벌리1 1606~1612 선동리12 1640~1649 탄벌리8, 학동리10 1608 송정동56 1649~1653 학동리9 1613~1615 신대리13 1660~1670 왕산리2 1626~1627

상림리1 1631~1636 상림리10 1629 / 1639

상림리11 1635

<표 23> 운영시기별로 청자를 제작한 관요의 예

한편, 경기도 광주 일대는 남한강, 북한강을 끼고 한양으로 이어지는 물류의 이동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 관요 또한 하천 주변에서 벗어나 지 않은 지역에 입지하고 있었다. 청자를 제작한 관요는 이른 시기에 광 주 퇴촌면, 남한산성면, 남종면 일대에 위치하였고, 이후에는 초월읍, 곤 지암읍에서 운영되었다. 즉, 시기가 내려올수록 청자를 제작한 관요는 광 주 일대의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는 변화를 보였다.<표 24> 선행 연구에 서도 관요는 1516세기에 광주 퇴촌면, 중부면, 초월읍, 1718세기 전 반에 도척면에 위치하는 비율이 높았던 것으로 파악되었다.203) 청자를

세기 전반, 17세기 중반으로 편의상 구분하였다. 이러한 시기 구분은 후술할 관요 청 자의 성격과도 부합하는 것으로 파악되어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방향 15C후반 16C전반 16C중반 16C후반 17C전반 17C중반

남종면 귀여리

퇴촌면 우산리

관음리 도마리 우산리 관음리 정지리

남한산성면 오전리 번천리 번천리

송정동 송정동

탄벌동 탄벌동

초월읍 무갑리

학동리

대쌍령리

무갑리 학동리 선동리

곤지암읍 열미리 곤지암리 신대리

도척면 상림리

용인 왕산리

제작한 관요 또한 전반적인 관요의 이동 경로와 부합하여 시목(柴木), 가 마시설의 사용 가능여부에 따라 남측으로 이동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표 24> 시기별로 청자를 제작한 관요의 지역적 분포

한편, 관요 청자의 종류는 앞서 생산유적과 소비유적 출토품, 전세품을 토대로 총 14종의 기종, 43개의 기형, 26개의 소재, 55개의 문양으로 정 리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관요 청자는 생산유적에서 출토된 경우 제 작시기를 가늠할 수 있으며 그 외에는 동일 기종이 다른 종류의 자기로 출토되거나 유적의 편년이 명확한 경우에 한해 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1) 기종별 기형의 변화추이

현재까지 출토양상을 기준으로 (발-1-A)는 관요 설치 운영될 당시부 터 제작된 가장 이른 시기의 관요 청자발의 기형이었다. 16세기 중반이

203) 전승창, 15~16세기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 관요연구 , p.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