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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요 청자 명문의 종류와 성격

경기도 광주 관음리 20호, 우산리 4

14호, 송정동 5

6호 요지에서는 다른 관요에서 확인되지 않은 명문청자가 출토되었다.207)(도 4, 도 26) 명문이 표기된 관요 청자는 발과 접시와 같은 일상기명이 대부분이며 문 양이 시문된 예가 거의 없다. 해당 청자는 기형과 굽이 단정하며 굽 접 지면에 시유된 유약을 닦아내어 번조한 공통점이 있다. 청자의 단면을 실견했을 때 태토가 밝은 편이었고, 유색은 번조 분위기와 시유의 두께 에 따라 다양하며 빙렬이 있는 예도 있었다.208) 한편, 관요에서 명문청자 의 출토 사례는 극히 적은 반면 대다수의 관요에서는 백자에 명문을 표 기하였고, 명문의 종류 역시 다양하였다. 관요 백자의 명문은 ‘天, 地, 玄, 黃’와 같은 자호명, ‘左, 右, 別’명, ‘干支+左(右/別)+숫자’명이 대표적이다.

이외에 견본을 뜻하는 ‘見樣’명, 왕실 특정 대상을 지칭하는 ‘世, 內, 司’

명이 표기되기도 하였다.<표 36>

207) 경기도박물관 편, 경기도 광주 관요종합분석 보고서, p. 280 ; 경기도자박물관 편,

(제10회 경기도자학술세미나 발표논문집) 최근 발굴조사된 가마터 조사성과, pp. 4 6~47 ; 국립중앙박물관 편, 경기도 광주 중앙관요(요지지표조사보고서-도판편), p.

21, p. 26, p. 59 ; 조선관요박물관 편, 광주 송정동 56호 백자가마터, 조선관요박 물관, 2008, p. 211 ; 해강도자미술관 편, 광주 조선백자요지 수집 백자파편 분석 보 고서, 해강도자미술관, 2003, p. 108. 이외에 광주 관음리 일대에서 ‘六’명 청자편이 수습된 바 있다.(경기도자박물관 편, 김영훈 선생 기증도편 자료집, 경기도자박물관, 2016, p. 190) 다만 정확한 가마의 위치와 폐기물 여부를 단정하기 어려워 본 논문에 서 다루지 않았다.

208) 경기도자박물관에 소장된 광주 우산리 4호 요지의 명문청자는 전반적으로 기벽이 두껍고, 태토에 잡물이 포함되어 있으며 자화의 정도가 완전하지 않아 단면의 태토 발색이 서로 다르거나 기공 또한 확인되었다.

자 기 명

시 가 문

기 마

백자 청자

天/地

/玄/黃 左/右/別 世

干支 +左(右/別)

+數

타 數 王/仁

中/殿

左(右)+

15C 후반

우산리4 內,司 二, 三, 五 王, 仁, 殿

우산리14 ○ ○ 一, 二 殿

관음리20

오전리3 ○ 귀여리11 ○ 16C

전반

도마리1 ○

무갑리2 ○ ○

열미리5 ○ 16C

중반

우산리9 ○ 見樣

번천리8/9 ○

16C 후반

곤지암리1 ○

관음리4/11 ○

관음리10 ○ ○

대쌍령리1/2 ○

무갑리10 ○

정지리3 ○

16C 관음리9 ○

17C 전반

탄벌리1/8 ○

학동리9 ○

학동리10 ○ ○

왕산리2 ○

상림리1/10 ○ ○

상림리11 ○

17C 중반

선동리1/2 ○ ○

송정동5/6 ○ 左+숫자

<표 36> 시기별 관요의 명문 표기대상과 내용

1) 명문의 종류와 내용

관요에서 확인된 청자의 명문은 ‘王, 仁, 殿’의 非숫자명과 ‘一, 二, 三, 五’의 숫자명 그리고 ‘(간지+)左+숫자’명으로 구분된다.209) 이들 명문은

음각선으로 표기되었고, 개체별로 시유와 명문 표기의 순서에 차이를 보 이기도 한다. 명문의 필체는 태세(太細)가 분명한 당시의 서법(書法)과 달리 얇고 빠른 필선이 특징이며, 이른 시기 상감청자의 정갈한 해서체 명문과도 차이를 보인다.210)(도 52) 더욱이 관요 청자의 명문은 모두 굽 내면에 표기되어 동체 내저면

내외측면에 다양한 방식으로 표기된 분청 사기의 명문과 확연히 구분된다.211) 여기서 명문의 표기지점은 제작과 사용, 유통 중에서 중점을 두는 대상, 표기시점과 표기처의 위계에 따라 달라졌을 것이다.

관요가 설치 운영되기 이전, 분청사기는 전국 각지에서 제작되어 한양 으로 수급되던 공물 자기였다.212) 자연히 한양에 수합된 분청사기는 공 물 충당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기종과 수량에 대한 확인 절차가 진행되었

209) 우산리 4호 요지에서 수습된 ‘王’명은 초벌편에 해당하여 백자, 청자 여부가 불분명 하다. 그러나 공조, 어영청, 청진동, 시전행랑 유적에서 청자의 명문으로 ‘王’명이 확인 되었는데 반해 백자의 ‘王’명은 묵서로 표기된 예가 대다수였다. 또한 우산리 4호 요 지에서 확인된 백자의 명문은 청자의 명문과 표기 위치(‘內, 司’명) 또는 음각선의 깊 이(‘貴, 专, 見樣’명)에 차이를 보였다.(해강도자미술관 편, 광주 우산리 백자요지 (Ⅱ)-17호 백자요지 시굴조사보고서, p. 89) 무엇보다도 우산리 4호 요지에서 ‘王’명 과 함께 초벌편의 명문으로 수습된 ‘仁, 殿’명은 청자편의 명문으로도 확인되었다. 따 라서 우산리 4호 요지 초벌편의 ‘王’명을 청자의 명문으로 파악하였다.

210) 한강문화재연구원 편, 서울 군기시터 유적(본문), p. 211.

211)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시대 관청에서 사용할 자기는 수량 확보와 질적 수준 유지 등을 목적으로 1417년, 1421년 이후 명문이 표기되었고, 출토자료와 전세품을 통해 관 청의 명문이 표기된 자기를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내자시(內資寺)를 지칭하는 명문은 대전 구완동공주 학봉리고창 용산리 요지, 내섬시(內贍寺)를 지칭하는 명 문은 공주 학봉리고창 용계리와 용산리완주 화심리곡성 구성리광주 충효동 요지, 예빈시(禮賓寺)를 지칭하는 명문은 공주 학봉리고창 용산리 요지에서 확인되 었다. 명문은 굽 내면에 음각되거나 동체 외면에 묵서된 경우도 있지만 내저면 중앙 이나 측면 혹은 동체 외면에 상감기법으로 표기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국립중앙박 물관 편, 계룡산 분청사기, 국립중앙박물관, 2007, p. 55, p. 57, p. 63, p. 66, p. 79 ; 박경자, 15세기 공물의 운송방법과 분청사기 명문의 지역별 특징 , pp. 220~221 ; 박경자 외, 조선 전기 공납용 백자제작에 따른 분청사기 양식변화 , p. 294 ; 호남문 화재연구원 편, 고창 용계리 요지, p. 255 ; 同著, 고창 용산리 요지, p. 294, p.

300, p. 305)

212) 2015년 4월부터 진행된 태안 마도4호선 정밀발굴조사에서 ‘羅州廣興倉’명이 표기된 목간, ‘내섬’명 인화분청사기 등이 선박편과 함께 인양출수되었다. 이들은 나주 영산창 (榮山倉)에서 거둬들인 세곡이나 공물을 광흥창으로 옮기는 도중에 침몰한 조운선과 공물로 추정되었다. 인양된 내섬명 인화분청사기는 명문이 없는 분청사기들과 함께 10점 혹은 20점 단위로 성근 망태기에 담겨 있는 상태로 확인되었고, 내섬명 인화분 청사기는 이것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문화재청 외, 태안 마도4호선 수중발굴조 사 보고서, 문화재청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6, p. 365)

을 것이다. 더욱이 조선 왕실은 이른 시기부터 분청사기의 수급관리를 위해 최종 사용처, 제작처와 제작자를 명문으로 표기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분청사기에는 최종 수급처와 관리처에서 확인하기에 적합하도록 구 체적인 관사명, 장인명, 지역명이 표기되었다.

반면, 관요는 한양에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여 제작과 운송, 수급에 이 르는 일련의 과정을 관리 감독하기에 용이하였다. 또한 자기의 제작과 검수가 관요라는 일정 공간 내에서 이뤄져 한양으로 수급되었다. 이에 따라 최종 사용처 혹은 제작처의 명칭을 굳이 상세하게 기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관요 청자의 명문뿐만 아니라 관요 백자의 자호 명, 좌우명은 모두 단일글자의 명문에 해당하였다. 관요 청자와 관요 백 자는 모두 굽 내면에 명문이 표기되는 방식으로 일원화되었는데 이는 제 작 당시부터 일률적인 규제가 적용되었음을 뜻한다. 즉, 굽 내면에 단일 명문을 표기하는 것은 관요에서 이뤄진 명문 표기방식의 특징이었다.

명문청자는 관요 외에 소비유적에서도 다수 출토되어 관요 청자의 명 문에 대한 다각도의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213)<표 37> 당시 관요 명문

213) 겨레문화재연구원 편, 이천 수하리도암리 유적, 겨레문화재연구원, 2012, pp.

118~119 ; 경기문화재연구원 편,檜巖寺Ⅱ-78단지 발굴조사보고서(유물 도면 진), 경기문화재연구원, 2003, pp. 156~157, pp. 487~488 ; 同著,檜巖寺Ⅳ-1~4단 지 발굴조사보고서(유물 도면사진), 경기문화재연구원, 2013, p. 48 ; 고려문화재연 구원 편,서울 관철동 유적, 고려문화재연구원, 2008, p. 62 ; 국립문화재연구소 편,

경복궁 동편 서편 궁장지역 발굴조사,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pp. 230~231 ; 同 著, 경복궁 소주방지 발굴조사 보고서, p. 234 ; 同著, 경복궁 용성문 서수문장청지 역 발굴조사,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pp. 176~179 ; 同著, 경복궁 함화당, 집경당 행각지 발굴조사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p. 124 ; 상명대학교박물관 편, 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 태고종 전통문화전승관 신축부지 문화유적 발굴조사, 상명대 학교박물관, 2007, p. 93 ; 서울역사박물관 편, 서울의 도요지와 도자기, 서울역사박 물관, 2006, p. 154 ; 중원문화재연구원 편, 동대문 운동장 유적(Ⅱ) 유물도판, p. 18, p. 35, pp. 56~57, p. 131, pp. 184~185, p. 206 ; 한강문화재연구원 편, 서울 군기시 터 유적, p. 101, p. 127, p. 160, p. 243, p. 261, p. 294, p. 372 ; 同著, 서울 수서동 유적, pp 103~104 ; 한림대학교박물관 편, 강화 조선 궁전지(외규장각지), 한림대 학교박물관강화군, 2003, pp. 145~147 ; 한백문화재연구원 편, 양양읍성-추정 북문 지 주변 발굴조사 보고서, 한백문화재연구원, 2013, p. 37 ; 同著, 여주 연라리 유적

, 한백문화재연구원, 2011, p. 154 ; 한울문화재연구원 편, 서울 세종로구역 2지구 유적, p. 391, p. 408, pp. 422~423, p. 450. p. 472, p. 518, p. 543, p. 583, pp. 601~

602, p. 624 ; 同著, 서울 종로 공평 124지구 유적 약식보고서 , 한울문화재연구 원, 2015, p. 139 ; 同著, 서울 종로 관철동 175번지 유적 발굴조사, 한울문화재연구 원, 2015, p. 235 ; 同著, 서울 종로 돈의동 170번지 유적, 한울문화재연구원, 2014,

청자가 사용된 곳은 왕실, 관청 및 관아, 사찰, 민가, 상업지구, 성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그러나 시기적 편차가 크고 특수한 성격을 지닌 강화행궁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관청과 관아는 한양 내에 위치하였다. 사 찰은 한양과 인접한 대형사찰에 해당하였고, 민가 역시 한양이나 한양과 근거리에 입지한 지역에 위치하였다. 무엇보다도 공물 조달과 수급, 사적 인 매입과 유통 등에 관여한 시전에서 상대적으로 다양한 명문청자가 확 인되어 당시 관요 청자의 판로 중 시전이 주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명문청자는 관요에서 제작되어 왕실과 관청, 한양과 근거리 에 위치한 대형사찰에서 사용되거나 시전을 중심으로 유통되었다.

‘大, 中, 世, 処, 四, 六, 十’명은 소비유적에서 청자의 명문으로 확인되 었던 반면, 관요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명문은 백자와 동 일한 위치와 방식으로 표기되거나(大, 中, 世, 処), 백자와 표기방식은 다 르지만 표기된 위치가 동일하고(世, 処), 관요 청자의 숫자명문과 동일한 성격을 가진 점(四, 六, 十)에서 모두 관요 청자의 명문인 것으로 추정된 다.214) 이외에도 시유되지 않은 굽 내면에 묵서로 표기된 ‘졔, 仲今(仲 令), 田’명, 점각된 ‘太□生, 天, 윤개’명은 모두 유통과정이나 사용처에서 추가로 표기된 명문에 해당하였다. 이들 역시 소비유적의 성격으로 보아 관요 청자에 표기된 명문으로 판단하였다.215)

p. 112 ; 同著, 서울 중구 장교4지구 유적, 한울문화재연구원, 2015, p. 441 ; 同著, 종로 어영청지 유적, 한울문화재연구원, 2011, pp. 246~248 ; 同著, 종로 청진1지구 유적Ⅱ(유물), 한울문화재연구원, 2011, p. 167, p. 203, pp. 236~237, p. 360 ; 同著, 종로 청진2-3지구 유적Ⅱ(유물), p. 64, p. 71, p. 87, p. 156, p. 161, p. 197, p. 354, p.

479 ; 同著, 종로 청진5지구 유적Ⅱ(유물), 한울문화재연구원, 2012, p. 532 ; 同著, 종로 청진8지구 유적Ⅱ(유물), p. 153 ; 同著,종로 청진12~16지구 유적Ⅲ(유물Ⅰ), 한울문화재연구원, 2013, p. 241, p. 440, p. 456, p. 495, p. 544, p. 548, p. 555, p. 620, p. 669 ; 同著,종로 청진12~16지구 유적Ⅳ(유물Ⅱ), 한울문화재연구원, 2013, p. 25, p. 61, p. 101.

214) 경기도자박물관 편, (제10회 경기도자학술세미나 발표논문집) 최근 발굴조사된 가 마터 조사성과, p. 47 ; 국립문화재연구소 편, 경복궁 소주방지 발굴조사 보고서, p. 236 ; 同著, 경복궁 흥복전지 보고서, p. 159 ; 중원문화재연구원 편, 동대문 운 동장 유적(Ⅱ) 유물도판, p. 72, pp. 199~200, p. 210, p. 216, pp. 222~223, p. 231, p.

237, p. 244, p. 255 ; 한강문화재연구원 편, 서울 군기시터 유적, p. 135 ; 한울문화 재연구원 편, 강진 전라병영성 성내부 유적Ⅰ, p. 141 ; 同著, 서울 세종로구역 2지 구 유적, p. 404, p. 482, p. 484.

215) 국립문화재연구소 편, 경복궁 소주방지 발굴조사 보고서, p. 234 ; 중원문화재연구 원 편, 동대문 운동장 유적(Ⅱ) 유물도판, p. 19 ; 한울문화재연구원 편, 종로 청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