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요 청자의 사용규제와 이행
조선 왕실은 경기도 광주목 일대에서 백자, 청화백자, 청자를 제작하도 록 하였다. 이와 함께 세종은 백자, 세조는 백자와 청화백자를 어기로 각 각 사용하였던 반면 동궁은 1455년 이후 처음으로 자기를 사용하였다.95) 1462년과 1463년 어기와 동궁 기명은 서로 구분 없이 사용되었고, 관요 가 운영된 이후에도 얼마간 백자와 청자는 왕실 내에서 차등 없이 사용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96) 반면에 청화백자는 1485년에도 여전히 금은 기와 함께 사용에 제재를 받았다.97) 뿐만 아니라 1505년 전후에 운영된 광주 도마리 1호 가마에서 청화안료에 대한 시험번조가 진행되고 있었 다.98) 즉, 왕실에서 사용할 청자와 백자는 제작과 수급에 큰 문제가 없었 던 반면 청화백자의 제작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었다.
왕실의 자기 사용 양상은 1554년
경국대전주해
가 편찬되고, 이듬해 1555년 해당 규정이 이행되면서 비로소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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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따르면 왕과 동궁, 관청(예빈시)에서 사용할 기명은 각각 백 자기, 청기, 채문기로 구분되었다.[기록 1]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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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편찬되 었던 1554년은 경기도 광주 우산리 9호 가마, 번천리 9호 가마 등의 관95) 世祖實錄 卷1, 世祖1年(1455) 閏6月 19日, “工曹請造中宮酒房金盞, 命以畫磁器代之, 東宮亦用磁器.” 1455년은 어기로 백자가 사용되던 시점이었고, 이로부터 6년이 지난 1461년 經國大典의 항목에 동궁의 청자 사용 규제가 포함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1455년 동궁이 일찍부터 청자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기와 동궁이 사 용할 자기를 법조항으로 구분해야할 만큼 자기 사용에 구분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 다.
96) 世祖實錄 卷29, 世祖8年(1462) 11月 30日, “名分不可不嚴, 昨日司饔院進膳, 雜用世 子器皿, 甚不可, 若是則父子同器, 君臣同器, 奴主同器矣, 名分何居?(후략)” ; 世祖實錄
卷30, 世祖9年(1463) 2月 22日, “前日進膳時畇以司饔提調, 不分器皿, 父子安有同器之 理? 且宦者帶金, 例不供膳於世子, 而畇供膳, 此皆畇之過, 渡江時又於大駕前, 擁侍世子, 畇亦有罪.(후략)”
97) 經國大典 卷5, 刑典 禁制, “大小貟人用紅灰白色表衣白笠紅鞊者酒器外金銀靑畵白磁 器者(후략)”
98) 국립중앙박물관 편, 광주군 도마리 백자요지 발굴조사 보고서-도마리 1호 요지, 국 립중앙박물관, 1995, pp. 96~97.
[기록 1] 經國大典註解 後集 註解 下, 刑典 禁制條
“임금의 반찬 그릇은 백자기를 쓰고 동궁은 청기를 쓰며 예로 예빈(맞이하 는 손님)은 무늬 있는 그릇을 쓴다.”100)
요에서 청자를 비롯해 백자의 제작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기록에 명시된 백자기와 청기는 각각 관요 백자와 관요 청자에 해당할 것이 자 명하다.99)
관요가 설치된 이후 대략 90년간 관요 청자는 왕실 내에서 엄격한 규 제 없이 사용되었다. 그렇게 백자와 함께 왕실 내에서 사용되던 관요 청 자는 1555년 동궁의 소용품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관요 청자의 사용 처 결정과 관련해 당시 음양오행사상의 적용과 그에 따른 상징이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기존의 의견에 별다른 이견은 없다.101) 그러나 현재 학계 에서는 동궁의 소용품으로 관요 청자가 선택된 시점과 그 시대적 배경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관요 청자가 동궁 소용품으로서 갖는 성격 을 밝히기 위해 주목해야할 대목으로써
경국대전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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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편찬 배경, 관련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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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감교청(勘校廳)을 별도로 설치하여 수년간의 교정과정을 거쳐 최종 편찬된 법전이다.102) 조선 왕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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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법제를 기준 으로 삼았고, 이를 고치거나 폐기하는 것을 지양하였다.103) 한편으로는99) 채문기는 ‘문양을 그려 넣은 그릇’을 뜻한다. 현재까지 ‘예빈’명이 표기된 자기는 인 화분청사기가 대부분이고, 실제로 인화분청사기가 기면에 문양을 가득 채워 시문된 점을 염두하면 분청사기를 지칭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1555년은 분청사기가 주로 백 토분장기법을 사용한 귀얄분청사기, 덤벙분청사기로 제작되던 시점으로 인화분청사기 의 제작 시기와 차이가 있다. 이에 예빈시에서 사용한 채문기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논의가 필요한 실정이다.
100) 經國大典註解 後集 註解 下, 刑典 禁制條, 白磁器, “御膳用白磁器, 東宮用靑器, 禮 賓用彩文器.”
101) 관요 청자의 제작배경과 사용처를 음양오행사상을 근거로 논한 대표 연구로 (김영 미, 조선시대 관요 청자연구 ,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를 들 수 있다.
102) 成宗實錄 卷173, 成宗15年(1484) 12月 21日, “《大典》勘校廳啓事竣, 賜堂上洪應等 匹段一匹, 郞廳等鹿皮一張.”
103) 成宗實錄 卷176, 成宗16年(1485) 3月 20日, “(전략)且取才然後東班敍用之法, 已載
《大典》立法而尋改之, 甚未便(후략)” ; 成宗實錄 卷193, 成宗17年(1486) 7月 22日,
“(전략)《大典》乃先王所以爲子孫, 立萬世不易之法, 殿下之所當遵守者也, 而今不遵焉,
법제를 편의에 따라 이행하지 않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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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없는 조항을 임시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14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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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기재된 조항의 오류가 지 적되었고 수정을 요구하는 의견이 개진되었다.104) 15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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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수정으로 인해 폐단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 기존 법제가 훼 손된다고 평가되었다.105) 이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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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조항이 지닌 문제는 해 마다 지적되고, 조항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이어졌다.106) 그럼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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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개정은 여전히 선왕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판단되어 섣불리 추진되지 못하였다.107)1550년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 안위(安瑋, 1491~1563)와 봉상시 정(奉常寺正) 민전(閔荃, 1499~?)은 대전주해관(大典註解官)으로 발탁되 어 정법(定法)을 만들도록 지시받았다.108) 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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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해석이 어렵거나 표현이 불명확한 조항을 선별하여 풀이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판서(判書)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을 비롯해 참판(參判) 심통원(沈通 源, 1499~?), 참의(參議) 이몽필(李夢弼, 1507~1562)이 초고 작성에 참여 하였다. 이후 삼정승(三政丞)이던 심연원(沈連源, 1491~1558)과 상진(尙一不可也. 《大典》之法, 當守之如金石, 行之一時而一時信焉, 行之千萬世而千萬世信焉 (후략)”
104) 成宗實錄 卷254, 成宗22年(1491) 6月 24日, “(전략)興天寺修補, 自祖宗而然, 已載
《大典》.’, 祖宗之法, 改之者亦多, 請停之.(후략)” ; 成宗實錄 卷255, 成宗22年(1491) 7月 11日, “(전략)權璸以學官, 常仕成均館, 然未經二年敍爲司果, 有違《大典》, 請改正.
(후략)” ; 成宗實錄 卷255, 成宗22年(1491) 7月 21日, “(전략)許葟仕未滿而陞司僕正, 李榮無賢能勤勞而陞副正, 有違《大典》之法.(후략)”
105) 中宗實錄 卷8, 中宗4年(1509) 5月 22日, “(전략)《大典》不可毁, 而近來一法立一弊 生, 弊生則又毁之. 何以紛更如此其甚耶? 莫如遵守先王之法而已(후략)”
106) 中宗實錄 卷94, 中宗35年(1540) 12月 25日, “(전략)《大典》法條, 猶有未盡, 故有各 年受敎, 去七月, 申明受敎擧行, 而受寄十兩以上者, 罪同强窩. (후략)” ; 中宗實錄 卷 95, 中宗36年(1541) 6月 22日, “(전략)各司書吏額數, 載在《大典》 近來吏不奉法, 於用 事之地, 托稱預差, 數外入屬, 無有紀極, 而兵曹尤甚.(후략)”
107) 成宗實錄 卷260, 成宗22年(1491) 12月 8日, “(전략)勘校廳非改《大典》, 但褒集可 行受敎而已. 此法先王所定, 已載《大典》, 今不可削.(중략)先王《大典》, 不可輕改.” ; 成宗實錄 卷262, 成宗23年(1492) 2月 11日, “(전략)先王之法, 雖非正道, 不可一朝毁棄 之也. 旣停度僧, 《大典》之法仍舊何傷?(후략)” ; 成宗實錄 卷273, 成宗24年(1493) 1 月 8日, “(전략)法當相避而啓稟敍用, 有違《大典》之法, 請竝改正(후략)” ; 中宗實錄 卷59, 中宗22年(1527) 8月 27日, “(전략)下議其欽恤之意則至矣, 然立法於《大典》之外 則終必有弊, 依法爲之亦當.(후략)”
108) 明宗實錄 卷11, 明宗6年(1551) 3月 16日, “(전략)自今令《大典》註解官, 詳明釋之, 立爲定法, 俾無二見似當(후략)”
[기록 2] 經國大典註解(前集) 序
“(전략) 경국대전이라 이름 지어 오늘날까지 준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말과 의미는 오직 간결하고 심오한 것에만 힘을 써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 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 법문에 능통하지 않으면 그 법을 적용하는데 어둡다 는 사실은 이상한 것이 없도다. 1550년 봄 경국대전에 주석을 해서 시행에 편리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 있어 예조에 담당부서를 두도록 명하였다. (중 략) 이에 의심이 있는 곳이 풀리고 헛갈리던 것이 분명하게 되었으니 아마 도 전일에 이해하기 어려운 미혹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마침내 깨끗하게 써 서 책을 만들어 바치니 경국대전주해라고 이름을 내려주셨다. (후략)”111) 震, 1493~1564), 윤개(尹漑, 1494~1566)의 검수를 거쳐 1554년
경국대 전주해
이 편찬되었고, 1555년부터 이행되었다.109) 결국
경국대전주해
의 편찬목적은 기존의
경국대전
에서 시행되지 않았던 항목을 이행시 키는데 있었다.110)[기록 2]
경국대전주해
가 편찬된 의도를 염두한다면, 조선 왕실은
경국대전
형전을 편찬할 당시부터 청자와 백자 사용에 구별을 두고자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까지
경국대전
의 기록에 이와 관련한 대목은 남 아있지 않다.
경국대전
형전에서 왕실의 자기 사용에 제한을 둔 조항 이 유효했다면 다양한 종류의 자기에 왕실을 뜻하는 동일 명문이 표기되 거나
경국대전주해
의 항목으로도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경국대전
형전이 처음 편찬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462년과 1463년 세조가 동궁과 자신이 동일한 그릇을 사용하고 있는 폐단을 지적하며 사 옹원 관리를 질책하였던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기록 3~4] 1469년 9월에 작성된
경국대전
서문에 따르면
경국대전
을 작성할 당시 여109) 李肯翊(1736~1806)의 練藜室記述 卷11, 明宗朝故事本末 에 경국대전주해 편찬 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한 기술이 있어 이를 참조하였다.
110) 정긍식, 경국대전주해 , 法學제49권 제2호,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2014, p. 286.
111) 經國大典註解(前集) 序, “(전략)名曰經國大典, 至今遵行. 然其遣辭措意, 惟務簡奧, 不顧人所難解. 夫旣不通於其文, 則其瞀於用法, 無足怪矣. 庚戌春, 有言其須加註釋, 乃便 於行者, 命設局於禮曹.(중략)於是, 釋者疑而眩者明, 庶幾袪前日難解之惑矣. 遂繕寫粧䌙 而進, 賜號經國大典註解(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