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요 청자는 고려청자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백자 및 분청사기와 시대성을 공유하였고, 한편으로 용천요 청자의 영향도 받았다. 뿐만 아니 라 사옹원이 정한 제작법식에 따르면서 소비자의 취향과 용례에 적합하 도록 제작되었다. 실제로 관요 청자는 위계차가 크고 다채로운 성격의 소비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이에 따라 소비처별로 사용한 관요 청자의 기 종, 기형, 문양 등에 대한 비교와 차등 여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관요 청자의 제작과 수급, 소비와 관련한 측면, 그리고 관요 청자 의 유통 역시 단편적이나마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소비유적의 범위와 성격
일찍이 조선 왕실은 경기도 광주목 일대에서 백자, 청화백자와 함께 청자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1461년
경국대전
형전에는 청자를 동궁이 사용할 기명으로 명시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세조는 왕과 동궁이 서로 다른 자기를 사용할 것을 재차 지적하였다. 그러나 청자 사용에 대한 제 한은 한동안 실행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관요는 청자를 백자와 함께 지속적으로 제작하였고, 왕과 동궁 그리고 왕실의 공간을 뜻하는 명문을 표기하였다. 즉, 동궁 기명으로써의 사용 여부를 떠나 관요 청자 는 왕실에서 사용될 것을 염두하여 제작되었다.현재까지 관요 청자는 46개에 달하는 소비유적에서 출토되었다.329) 왕
329) 본 논문에서 제시한 소비유적은 2016년 8월까지 보고된 발굴자료를 대상으로 하였 다. 다만 단일유적에서 출토된 청자 중에서 지표 수습되거나 매립층에서 출토된 경우 연구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관요 청자가 출토된 소비유적 자료(발굴기관, 보고서명(발 간년도))는 겨레문화재연구원, 서울 통의동 유적(2015), 이천 수하리・도암리 유적
(2012), 종로 세종로동 76-14번지・당주동 108번지 유적(2015) ; 경기문화재연구원,
남한산성 한흥사지유적(2014), 하남 법화사지(2013), 檜巖寺Ⅱ-7・8단지 발굴조 사보고서(2003), 檜巖寺Ⅲ-5・6단지 발굴조사보고서(2009), 檜巖寺Ⅳ-1~4단지 발
실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리라는 짐작과 달리 해당 소비유적들은 왕실 외 에도 관청, 사찰을 비롯해 시전과 민가, 교육기관에 이르기까지 그 성격 이 다양하였다. 그중에서도 한양에 위치한 관청과 민가유적에서 관요 청 자가 출토되는 비중이 압도적인 양상을 보였다. 여기에 왕실유적에서 관 요 청자가 출토된 비율은 전체 소비유적에서 출토된 수량의 12.5%에 불 과한 반면, 한양 내 관청과 시전의 경우 출토비율이 67%에 달하였다.
즉, 관요 청자는 왕실이 아닌 관청과 시전을 중심으로 유통과 사용이 이 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330)<표 57>
굴조사보고서(2013) ; 고려문화재연구원, 서울 관철동 유적(2008), 서울 신문로 유 적(2010), 서울 장교동 유적(2013), 서울 정동 유적(2012), 서울 중학동 유적 (2009) ; 국립문화재연구소, 경복궁 광화문지역 및 어도지역 발굴조사(2011), 경복 궁 동편 서편 궁장지역 발굴조사(2011), 경복궁 소주방지 발굴조사 보고서(2008),
경복궁 용성문 서수문장청지역 발굴조사(2011), 경복궁 침전지역발굴조사보고서 (1995), 경복궁 함화당, 집경당 행각지 발굴조사보고서(2008), 경복궁 흥복전지 보 고서(2008), 숭례문 발굴조사 보고서(2011) ; 국립중앙박물관, 경복궁 훈국군영 직 소지(1996) ; 단국대학교박물관, 정비・복원을 위한 경희궁지 제2차 발굴조사보고서
(1987) ; 명지대학교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서울 청진6지구 유적Ⅱ(2007) ; 불교 문화재연구소, 서울 종로구 관수동 유적(2015) ; 상명대학교박물관,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 태고종 전통문화전승관 신축부지 문화유적 발굴조사(2007) ; 서울역사박물 관, 서울의 도요지와 도자기(2006), 서울 탑골공원 원각사지 시굴조사 보고서 (2002), 종묘광장 발굴조사 보고서(2012), 진관사 발굴조사 보고서(2012) ; 중앙문 화재연구원, 청계천 유적(2004) ; 중원문화재연구원, 동대문운동장 유적 보고서Ⅱ (2011) ; 한강문화재연구원, 서울 군기시터 유적(2011), 서울 도렴동 유적(2013), 서울 서린동 유적(2012), 서울 수서동 유적(2015), 서울 종친부터 유적(2013) ; 한림대학교박물관, 강화 조선 궁전지(외규장각지)(2003) ; 한백문화재연구원, 서울 종묘광장 어도복원구간 내 유적(2015), 양양읍성-추정 북문지 주변 발굴조사 보고 서(2013), 여주 연라리 유적(2011) ;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술동 증축사업부지내 유적(2013), 서울 종로 공평 1・2・4지구 유적 약식보고서 (2015),
서울 종로 관철동 175번지 유적 발굴조사(2015), 서울 종로 돈의동 170번지 유적, (2014), 서울 종로 마로니에공원 내 유적(2014), 서울 종로 세종로구역 2지구 유적 발굴보고서(2013), 서울 종로 옥인동 5번지 유적(2016), 서울 종로 중학구역 도시 환경정비사업 내 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2009), 서울 중구 장교4지구 유적(2015),
서울 청진8지구 지하보행로부지 유적(2016), 종로 송월동 서울성곽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2010), 종로 어영청지 유적(2011), 종로2가 40번지 시전행랑 유적(2010),
종로 중학구역 유적(2011), 종로 청진1지구 유적(2011), 종로 청진2~3지구 유적
(2013), 종로 청진5지구 유적(2012), 종로 청진8지구 유적(2013), 종로 청진12~
16지구 유적(2013), PAGODA타워 종로유적(2012)에서 참조하였다.
330) 이외에도 춘궁동 유적에서 상감청자향로편 1점이 출토된 바 있다. 그러나 해당 유 적의 성격이 명확하지 않아 본 논문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경기도박물관 편, 춘궁동 유적, 경기도박물관, 2003, p. 326, p. 344.
한양 지방
왕실 관청 사찰 시전 기타 민가 왕실 사찰 민가 기타 合
유적(개) 3
11
1 1 516
1 6 1 1 46수량(점) 44 165 6 104 6 44 6 22 3 1 401 비율(%) 11
41.1
1.525.9
1.5 11 1.5 5.5 0.7 0.2 99.9<표 57> 소비유적의 종류 및 관요 청자의 출토양상(수량, 비율)
관요 청자가 출토된 소비유적은 대부분 한양과 그 인접지역에 위치하 고 있었다.<표 58~62> 그 중에서도 왕실유적은 주궁(主宮)인 경복궁, 창덕궁을 비롯해 경희궁과 강화행궁이 이례적으로 포함되었다. 상술했던 것처럼 강화행궁은 내란에 대비한 이궁(離宮)으로서 경복궁과 창덕궁에 버금가는 위계를 가진 공간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경복궁은 다른 왕 실유적에 비해 발굴조사가 진척되었고, 그 결과 많은 수량의 관요 청자 가 출토되었다. 특히, 경복궁 내에서도 왕실 음식을 담당한 소주방, 왕의 출입구였던 용성문, 중앙군영인 훈국군영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수량의 관요 청자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출토양상은 왕실에서 관요 청자의 사용 빈도차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해준다.
관요 청자가 출토된 관청유적은 모두 한양에 위치하였다. 해당 관청은 최고 정치기구인 의정부와 공조 및 형조(정2품), 사간원
・
군기시(정3품), 어영청, 혜민서 등의 실무기관에서부터 종친부, 종묘와 같은 특수기관에 이르기까지 위계의 폭이 넓고 성격 또한 다양하였다. 현재까지의 출토자 료에 따르면 관청에서도 관요 청자의 사용비중에 차이를 보였다. 당시 관청은 구성인원의 규모와 성격, 업무가 제각각이었다. 이에 따라 관요에 서 관청으로 청자가 전해지는 방식은 왕실의 하사, 시장을 통한 구입, 사 번, 선물 등 관청별로 다소간의 차이를 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추후 발 굴 자료의 축적을 통해 이에 대한 논의를 명확하게 진척시킬 수 있을 것 으로 기대한다.한편, 조선 왕실은 불교를 배척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러나 한양 근 교의 사찰을 중심으로 관요 청자가 사용된 것이 확인되어 억불정책의 한 계를 보여준다. 특히, 왕실과 밀접한 회암사, 원각사, 진관사, 봉헌사를
비롯해 전란 당시 물자를 조달하거나 역을 부담하였던 한흥사, 법화사에 서 관요 청자가 사용되었다.331) 사찰유적에서 관요 청자가 출토된 양상 또한 사찰의 위계에 따라 차등을 보여준다. 즉, 사찰에서 치뤄진 행사의 종류와 규모, 참여 인원의 규모 등에 따라 사용될 기물의 종류와 품질에 차이를 보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관요 청자는 왕실, 관청, 사찰 외에도 상업, 교육과 같이 특화된 영역 의 공간이나 도로, 교각과 성곽 같은 특정 기능과 용도를 가진 특수 공 간, 그리고 민가에서도 사용된 것이 확인되었다. 그중에서도 육의전을 포 함한 시전은 서울 종로 청진동 일대에 위치하여 왕실과 관청 물품 조달 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실제로 시전 유적은 관요 청자의 출토빈 도가 높았고, 기종과 기형, 문양면에서도 가장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이 밖에도 관요 청자가 출토된 민가유적은 대부분 한양의 청계천 북편에 위 치하였고, 특히 궁궐과 관청, 시전에 인접한 특징을 보였다. 또한 장방형 의 기단석을 사용하거나 정면한 적심을 조성하는 등 공력이 소요된 건물 구조물에 해당하였다. 더욱이 관요 청자 외에도 다수의 인화분청사기,
‘上’명 백자, 청화백자를 비롯해 명대 경덕진 민요에서 제작된 청화백자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즉, 관요 청자를 사용한 민가는 다양한 자기를 사 용할 수준의 재력을 갖추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관요 청자가 사용된 소비처는 한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위 계가 높은 왕실과 관청, 왕실과 밀접한 사찰, 물류의 중심인 시전, 일정 수준의 재력을 가진 민가에 해당하였다. 현재까지의 출토양상을 보면 소 비처간에도 구성인원, 규모, 위계에 있어 다소간의 차이를 보였고 소비처 별로 사용된 관요 청자의 수량과 종류면에서도 상응하는 양상을 보였다.
추후 진행될 발굴조사를 통해 관요 청자가 사용된 소비유적의 자료가 축 적될 것으로 여겨지며, 여기에 관요 청자를 비롯해 백자, 청화백자, 외국 자기의 사용범위와 성격에 대한 비교연구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331) 仁祖實錄 卷33, 仁祖14年(1636) 12月 24日, “時, 城中被圍日久, 供御諸物俱乏. 漢興 寺僧希安, 進白紙四十卷 山蔬 蘿葍菜各一石(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