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은유와 진리의 글쓰기
3.3. 글쓰기와 자아의 통합
비자발적 기억의 은유에 의해 등장한 초시간성의 감각과 환희에 찬 자아는 명백히 어린 시절의 전능감을 가진 상상계적 자아에 닿아있지만, 이미 외부의 위협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통합되고 확신에 찬 자아이다. 그리고 은유의 의미작용으로 구성된 이 상상적 진리의 자아는 주체를 글쓰기의 길로 이끈다. 그는 그 진리를 작품 속에 고정시키기로 결심한다.
요컨대 어느 경우에나, 그것이 마르탱빌 종탑에서의 전망이 준 것과 같은 인상이 건, 또는 두 걸음걸이의 불균형이나 마들렌의 맛 같은 무의식적 기억이건, 어쨌 든 그러한 경우에는, 사색해보려고 애쓰면서, 감각을 그것과 같은 법칙 같은 사 상을 가진 형상으로 번역하도록, 즉 자기 속에서 솟는 감각을, 어둑한 곳으로부 터 나오게 하여, 그것을 어떤 정신적 등가물로 전환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나에게 유일한 것으로 여겨지는 그 방법은,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n somme, dans ce cas comme dans l’autre, qu’il s’agisse d’impressions comme celles que m’avait données la vue des clochers de Martinville, ou de réminiscences comme celle de l’inégalité des deux marches ou le goût de la madeleine, il fallait tâcher d’interpréter les sensations comme les signes d’autant de lois et d’idées, en essayant de penser, c’est-à-dire de faire sortir de la pénombre ce que j’avais senti, de le convertir en un équivalent spirituel. Or, ce moyen qui me paraissait le seul, qu’était-ce autre chose que faire une œuvre d’ar- t?286)
마르셀이 비자발적 기억이 주는 진리의 감각에 힘입어 글쓰기를 결심하고 자신의 예술론을 확고히 하게 되는 과정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가 글쓰기를 포기했던 것은 아버지와 노르푸아 씨의 말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 으로는 자신의 세계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필히 타자에 부딪쳐 붕괴하고 말리라는 불안 때문에, 그는 글쓰기를 포기한다. 그럼에도 그는 내면세계의 진리를 놓 지 않는데, 마르셀의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의 분리는 여기서 주어지며, 마르셀의 자아 의 분열에 대한 인식들도 여기에서 주어진다. 외부세계에 완전히 굴복해 흡수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분열된 자아들이 외부에 산산이 흩어진 것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외부세계와의 간격과 가면에 의한 자아의 보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문학을 통해 그에게 주어진 진리의 감각을 현현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마르셀이 망설임 없이 글쓰기를 선택하게 하며, 이제 이 문학을 그의 대타자로 만든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예술론, 자신의 창조 작업이 자신의 대타자가 된다는 것은 그가 주체적인 한 존재로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286) Le temps retrouvé, Ⅳ, p. 457.
마르셀이 게르망트 저택에 들어서기 이전에, 공쿠르의 존재를 환기하는 것은 우연 이 아니다. 말하자면 여기에서 공쿠르는 문학이라는 상징계에서 그가 주체로 서기 위 해 극복해야 하는 문학적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3.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되찾 은 시간』의 초반에 프루스트가 삽입한 공쿠르의 패스티시와 이에 대한 마르셀의 사유 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극복의 또 다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가적 능력의 좌절을 느끼며, 그 좌절보다도 그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문학이라는 것 자 체에 대한 환멸이다. 그러나 좌절과 환멸을 느끼면서도, 이 때 마르셀은 이미 공쿠르 라는 아버지에 반하는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다. 그리고 게르망트 가에서 포석의 에 피소드를 겪고 자신의 문학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때, 동시대의 사실주의 문학을 향한 그의 비판은 공쿠르에 대해 조심스럽게 서술되었던 어조보다 훨씬 강력해진다.
그리고 공쿠르가 언급했다는 게르망트 가의 도서실에서(물론 공쿠르의 언급 또한 그 의 작품처럼 픽션이지만), 마르셀은 그의 문학적 몽상의 최초의 단초가 되었던 『프랑 수아 르 상피』를 다시 발견한다. 아버지 공쿠르의 장소에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세계 를 상징하는 상드의 소설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표제가 불러일으킨 추 억에 감동하면서, 마르셀은 그 표제가 그에게 주었던 신비와 같은 주관적인 진리를 보편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그는 단지 자 신의 허약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의심했던 이 ‘마력을 지닌 문학’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신비와 몽상의 문학, 감수성의 문학을 긍정하게 된다.
알베르틴과의 갇힌 생활에서 실제 아버지의 위치에 자신을 두고, 아버지를 모방하 려 했던 욕망의 주체의 아버지 되기의 시도가 결국 실패했다면, 창조적 주체의 문학 적 시도는 이처럼 성공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과한다. 그리고 욕망의 주체 가 행했던 반복의 과정은, 이제 예술의 주체에 의해 작품으로 재창조됨으로써 그 가 치를 되찾게 된다. 밤과 낮의 분열되어 있던 자아가 동일한 상상계적 자아의 양면인 것처럼, 아버지가 되려는 욕망의 주체와 문학적인 주체로 서고자하는 예술의 주체 또 한, 일견 분열되어 보이지만 마르셀의 동일한 심리적 구조에 속해 있다. 나뉘어져 있 다고만 생각했던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이 실은 연결되어 있었던 것처럼, 만날 수 없이 분열되어 있다고 느껴졌던 두 세계와, 두 자아, 두 욕망의 주체는 실은 연결 되어 있는 것이다.
글쓰기에 대한 마르셀의 결심은, 필연적으로 그의 주체의 변화를 낳는다. 우선 죽 음에 대한 그의 태도가 달라지게 되는데, 지금까지 죽음은 늘 그를 따라다니는 실재 적 불안이었다. 그러나 마르셀은 어머니와의 분리, 충분한 습관이 없는 상태에서의 공
포, 혹은 감정의 상실에 의해 자신이 가뭇없어지는 분열된 자아의 죽음에 대한 두려 움을 말할 뿐, 자기 소멸이라는 실재적 불안에 대해 말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지점 에 와서, 마르셀은 처음으로 그것을 인정한다.
...내가 아무 것에도 몰두하지 않은 채 그저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에도 죽 음의 관념은 자아의 관념과 마찬가지로 줄곧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si je ne m’occupais de rien et restais dans un repos complet l’idée de la mort me tenait compagnie aussi incessante que l’idée du moi.287)
이제까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습관의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288) 타자와 습관 은 언제나 외부현실에 의해 영향을 받기에 그것으로 그의 유약한 자아를 보호하는 것 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상상계적 자아가 긍정되고, 이상적 자아가 힘을 얻고, 그것이 세계와 연결된 글쓰기라는 하나의 과업을 품게 됨으로 해서, 그는 진정 으로 상징계에 진입하며, 그것을 긍정한다. 이는 또한, 그가 결심한 글쓰기가 혼자만 의 몽상적 글쓰기가 아닌, 타자들에게 주어지기 위한 보편적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이 를 통해 획득한 진정한 자아감에 힘입어, 이제 마르셀은 더 이상 죽음으로부터 숨지 않아도 되며, 처음으로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견딜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의미에서, 글쓰기는 그에게 진정한 죽음의 상념을 불러온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죽음이 나에게 아무래도 좋게 된 바로 그때에, 다른 형태로 나는 다시금 죽음을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사실 나 자신 때문이 아니라 나의 책 때문으로, 그 책을 꽃피우려면 이토록 숱한 위험에 위협당하고 있는 그 생명이, 적어도 앞으로 얼마동안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la mort. Or c’était maintenant qu’elle m’était devenue depuis peu indifférente, que je recommençais de nouveau à la craindre, sous une autre forme il est vrai, non pas pour moi, mais pour mon livre, à l’éclosion duquel était au moins pendant quelque temps indispensable cette vie que tant de dangers menaçaient289)
287) Le temps retrouvé, Ⅳ, pp. 619-620.
288) “l’habitude n’est qu’un masque jeté sur le vigage de la mort : elle n’est pas le visage de notre immortalité.” 이 습관은 그러나 죽음의 얼굴에 씌운 가면에 불과하다. 습 관이 우리 불멸성의 얼굴은 아니다.” Gaëtan Picon, op. cit., p. 169.
289) Le temps retrouvé, Ⅳ, p. 615.
이제 다가온 글쓰기의 작업에 충분한 시간이 있을까, 그 전에 자신이 죽지 않을까 라는 고민으로서의 죽음은, 이미 작가의 삶으로서 상징화된 삶이 생각할 수 있는 죽 음이며, 자기소멸의 심연 같은, 저항불가능하고 숨을 수밖에 없는 그런 실재성을 띤 죽음이 아니다. 새로운 죽음의 관념이 다가옴은 그가 드디어 실재의 공포를 진정으로 가릴 수 있게 되어, 인간으로서의 죽음의 조건을 짊어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 여준다. 그래서 그는 재빨리 글쓰기에 맞춰 자신의 삶을 재구성한다. 지나온 삶은 글 쓰기의 재료들이며 타자들 또한 이것을 위해 있었던 것이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은 글쓰기를 중단시킬 가능성의 관념일 뿐이다. 마르셀은 글쓰기로써 비로소 죽 음을 두려워할 만한 삶의 욕망을 가지게 된다.
또한 글쓰기의 결심은 타자와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상상적인 자아를 방어하기 위 해 외부에 대한 철저한 단절을 고수하며 타자를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자신의 주체를 찾기 위해 참조해야 할 대상으로 대했던 마르셀 은, 이제 타자들을 자신의 작품의 소재로서, 또한 독자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나에게 진리를 밝혀 주었건만, 지금은 고인이 된 그러한 사람들은 모두가,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해서 평생을 살다가, 나를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Tous ces êtres qui m’avaient révélé des vérités et qui n’étaient plus, m’apparaissaient comme ayant vécu une vie qui n’avait profité qu’à moi, et comme s’ils étaient morts pour moi.290)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극단적인 유아론적(solipsiste) 전망을 본다. 타자들은 진 리를 잡아두기 위한 예술의 재료가 됨으로써 모두 마르셀 자신을 위한 존재가 되어버 린다. 또한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에게 예술이 기본적으로 “뜻대로 되는 세계”라는 상상계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291) 비록 결여를 감싸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초월적인 진리의 세계라는 점에서 상상적이다. 이러한 유아론은 마르셀의 고 립된 세계의 흔적이다. 그러나 이제 마르셀은 곧 이러한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몸서 리를 칠”292) 정도로는 자기 자신에서 빠져나와 있다. 최소한 자신이 타자를 자신의
290) Le temps retrouvé, Ⅳ, p. 481.
291) 주 285) 참조.
292) Le temps retrouvé, Ⅳ, p. 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