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외상의 고착과 구조적 반복
2.1. 대상화와 자리바꿈
산책길에서 질베르트와 만난 마르셀은 이후 그녀와 교제를 해 나가게 되지만, 어
137) Albertine disparue, Ⅳ, p. 87.
느날 그녀가 어떤 남자와 걸어가는 것을 본 후, 어느 순간 그는 그녀를 포기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질베르트와의 교제 후에 마르셀이 외부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변화가 생긴다. 몇 번이나 몽상하던 스완의 집에서 꿈에 그리던 질베르트와 함께 앉아 있을 때, 그는 욕망이 그대로 유지되게 하기 위해 손댈 수 없는 것의 매력을 간직하고자 한다. 마르셀은 현실적으로 상대를 소유하는 것보다 가질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몽상 이 더욱더 자신을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때문에 대상과의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의 욕망을 북돋우고 마음에 드는 대상들을 취하여 즐기려고 마음먹는 다. 이는, 앞에서 상세히 살펴본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에 사이의 방벽과 연관되어 있 다. 마르셀은 자신의 상상적 세계를 외부세계로부터 보호하고 유지하는 가운데, 타자 들을 대상화함으로써 몽상의 재료로 삼는다.
마르셀이 타자들을 대상화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타자를 있는 그대로의 한 인간 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에 맞게 타자를 마치 사물처럼 감각과 인식 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의 대상화에는 타자의 독립적 존재에 대한 인식을 회피하려는 방식들이 뚜렷이 드러나는데, 이때 마르셀의 방식들은 상상계적인 성격을 띤다. 그는, 타자를 독립된 한 존재로 인지하는 대신, 대상에게서 멀리 떨어 져, 아직 분화되지 않은 불균질한 덩어리로서 타자들을 인식하거나, 혹은 반대로 대상 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통합되지 않은 분열된 상태에 있는 것처럼 인식하는데, 이는 마치 대상과 자아를 정신 속에서 아직 완전히 구성하지 못한 아이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연상시킨다.138)
발베크에 와서 마르셀은 알베르틴을 위시한 한 무리의 소녀들을 만나는데, 그는 이 한 떼의 소녀들을 여러 개체로 이루어진 하나의 덩어리로 바라본다.139)
...그리고 흰 달걀모양 얼굴과 검은 눈, 초록 눈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을 때, 나 는 그 모습이 조금 전 내게 매혹을 불러일으켰던 모습과 같은지도 알 수 없었
138) 대상에 대한 분열적이고 미분화된 인지를 ‘상상계적’이라고 할 때, 이는 상상적으로 통합된 거울상에 자신을 소외적으로 동일시하는 상상계적 인식과 일견 모순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거울상에 의한 신체의 “정형외과적” 통합은, 아이가 신체를 파편화된 것으로 경험하 는 단계를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벌어진다. 다시 말해, 아이는 자신의 거울이미지의 완전성에 매혹당하기 시작하는 때에만, 자신의 실재적 신체의 파편화를 인지한다. 자아의 발 생은 이 양자 사이의 심적 변증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로렌초 키에자, 위의 책, pp. 48-49.
마르셀의 인식 방식이 ‘상상계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서술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 다.
139) “...si dissemblables qu’elles parussent, peut-être été presque superposables.”,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Ⅱ, p. 297.
고, 내가 나머지 소녀들로부터 분리해서 인식하는 이런저런 소녀에게 그 모습을 연결할 수도 없었다. 내 시각에서의 이런 경계부재는 – 내가 곧 그 경계를 설정 할 테지만 – 소녀들의 무리 너머로 어떤 조화로운 파동을, 집합적이고 유동적인 액체 같은 아름다움의 부단한 움직임을 퍼뜨렸다.
...et quand... je voyais émerger un ovale blanc, des yeux noirs, des yeux verts, je ne savais pas si c’était les mêmes qui m’avaient déjà apporté du charme tout à l’heure, je ne pouvais pas les rapporter à telle jeune fille que j’eusse séparée des autres et reconnue. Et cette absence, dans ma vision, des démarcations que j’établirais bientôt entre elles, propageait à travers leur groupe un flottement harmonieux, la translation continue d’une beauté fluide, collective et mobile.140)
그리고 이내 그녀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그녀들의 개별화가 이루어지 지만 아직 “그녀들 각각의 이름은 알지 못했으므로”141) 그녀들은 시각적 특성으로써 구분된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하나의 전체이다.
이제 그녀들은 개별화되었지만 그럼에도 자족감과 우애심으로 활기를 띤 시선 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친구인지 행인인지에 따라 때로는 관심어린 눈길, 때로는 건방지고 무관심한 눈길의 불꽃이 켜졌고, 또한 항상 함께 산보를 하면서 ‘별도 의 무리’를 이룰 만큼 그렇게 내밀하게 서로를 안다는 의식은, 그녀들의 몸이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그 독립적이고 분리된 몸들 사이에 따사로운 그림자나 대 기마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동일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설정하여, 군중 속에서 그 육체 행렬이 천천히 펼쳐지는 동안에도 군중과는 다른, 각각의 부분이 서로 결합된 어떤 동질적인 전체를 형성했다.
Individualisées maintenant pourtant, la réplique que se donnaient les uns aux autres leurs regards animés de suffisance et d’esprit de camaraderie et dans lesquels se rallumaient d’instant en instant tantôt l’intérêt, tantôt l’insolente indifférence dont brillait chacune, selon qu’il s’agissait de l’une de ses amies ou des passants, cette conscience aussi de se connaître entre elles assez intimement pour se promener 140)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Ⅱ, p. 148.
141) 이는 이름의 중요성을 이야기해 준다.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Ⅱ, p.
150.
toujours ensemble, en faisant « bande à part », mettaient entre leurs corps indépendants et séparés, tandis qu’ils s’avançaient lentement, une liaison invisible, mais harmonieuse comme une même ombre chaude, une même atmosphère, faisant d’eux un tout aussi homogène en ses parties qu’il était différent de la foule au milieu de laquelle se déroulait lentement leur cortège.142)
소녀들은 마치 인상파 화가에 의해 화폭에 그려진 한 무리의 사람들과 같다. 경계 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전체의 빛이 주는 인상을 투박한 터치나 점묘로 그려내 멀 리서 보지 않으면 그 윤곽이 구분되지 않고 마치 색의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그러한 그림 속의 한 무리 사람들을 보여주듯이, 마르셀은 소녀들을 꽃다발의 꽃들처럼 묘사 한다. 소녀들은 서로 헷갈리며 뒤섞인다. 각기 다른 특성들을 지니고 있지만, 소녀 각 각의 특성도 빛에 따라 풍경이 바뀌듯 시시때때로 바뀌기 때문에 그가 그녀들을 구분 하기란 더욱 힘이 든다. 어쩌면 오히려 구분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 옳은데, 이는 마르셀이 외부세계를 화가의 시선, 예술가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의지적으로 선택하 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타자들은 개체로서의 그 존재 자체의 인간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들이 개별적으로 지각될 때도, 그들은 하나씩의 특성을 지닌 예술의 소재로 다뤄질 뿐이다.
동시에 그 화폭은 그의 내면풍경이다. 그가 그녀들을 개체로 구분해나가는 것은 그녀들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녀들을 알게 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이다. 하지 만 시간과 접근성이 커질수록, 역으로 대상의 구분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 있다. 어떤 대상을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관찰하는 것은, 기존에 기억하고 있던 그 사 람의 특징에 새로운 특징들을 더하면서 때로는 낯섬과 놀라움을 낳으며 대상을 분열 된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에게는 그 상들을 통합할 의지가 없다. 그는 인간의 얼굴 을 신통기에 나오는 신의 얼굴에 비유한다. “상이한 면속에 나란히 놓여 있지만 한 번에는 볼 수 없는 한 덩어리 얼굴들”143)
이는 이름의 몽상적 사유에 이어 이제는 하나의 이름으로 통칭할 수 없는, 매 순 간 다른 계열체로서의 여인들의 생생한 체험이다. 이처럼 대상은 거리를 두어 뭉쳐짐 으로써 뒤섞이기도 하고, 지나치게 가까워 한 개체로서의 통일성을 상실하기도 한다.
142)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Ⅱ, p. 151.
143)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Ⅱ, p. 270.
대상은 시간과 장소의 혼란과도 뒤섞인다. 발베크에서 보았던 그녀를 파리의 자신 의 집에서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는 묘한 기분을 느끼는데, 시간을 넘어서 다른 장소 에 있는 동일한 알베르틴은 마치 자신의 몸에 발베크를 담고 있는 듯이 보이면서도 미묘하게 그때와는 다르다. 이 시간과 장소의 차이에서 오는 듯한 기묘한 느낌은, 그 녀의 빰에 입맞춤하는 대목에서 그녀의 분열로 드러난다.
...그녀의 빰을 향한 내 입술의 짧은 여정에서 내가 본 것은 열 명의 알베르틴이 었다. 이 유일한 소녀는 머리가 여러 개인 여신일 듯했으며, 내가 마지막으로 본 머리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또 다른 머리에 자리를 내주었다.
...dans ce court trajet de mes lèvres vers sa joue, c’est dix Albertines que je vis ; cette seule jeune fille étant comme une déesse à plusieurs têtes, celle que j’avais vue en dernier, si je tentais de m’approcher d’elle, faisait place une autre.144)
그가 알베르틴을 묘사하는 장면들은 마치 의도적으로 그녀를 분열시킨 것처럼 보 인다. 때로는 그녀의 코끝만, “미세화를 보듯” 때로는 두 뺨이, 때로는 안색이 부각되 어, 그녀는 “마치 다양하게 빛나는 영사기 조명에 따라 색깔이나 모양, 성격이 무수히 바뀌는 어느 발레리나의 출현처럼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145) 그리고 이는 마르셀의 자아의 분열과 바로 연결된다. 그는 알베르틴을 생각하는 각각의 자아에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 알베르틴에 대한 각각의 인식은 마르셀을 각각의 자아로 흩어지게 하고, 곧이어 방향은 반대로 뒤바뀌어 그녀는 그의 시선에 의해 따로 분리된 듯한 “무한한 계열체”146)가 된다.
정확히 말하면 그 후 나는 알베르틴을 생각했던 각각의 내 자아에 다른 이름을 붙여야 했다. 아니, 차라리 내 앞에 결코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은 각각의 알베르틴에게 다른 이름을 붙여야 했는데, 마치 연이어 나타나면서도 한 번도 같았던 적이 없는 바다인 듯, 그런 바다 앞에 또 다른 님프인 알베르틴이 뚜렷 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Pour être exact, je devrais donner un nom différent à chacun des moi 144) Le côté de Guermantes, Ⅱ, p. 660.
145)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Ⅱ, p. 298-299.
146) “la série indéfinie d’Albertines imaginées”,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Ⅱ, p.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