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은유와 진리의 글쓰기
3.2. 비자발적 기억과 은유
마르셀이 글쓰기의 결심에 이르기 전까지 마르셀의 자아들은 분열되고 분산되어 있다. 이러한 자아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다고 여겨지는 유일한 대상은 바로 육체이 다.252) 그리고 시간 속에 흩어진 마르셀의 분열을 대표하면서, 또한 향후 다가오게 될 분열된 자아의 통합을 견인하게 되는 것은, 육체의 감각과 연결된 비자발적 기억이다.
『잃어버린 시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괄목할만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비자발적 기억은, 욕망이 지배하는 현실의 삶의 배면에서, 독서의 경험에서부터 이어지는 낮의 몽상과 예술의 주체에게 ‘정수(essence)’의 초월적인 인상을 제공한다. 그리고 진정한
‘다시살기(revivrscence)’로서의 비자발적 기억은 삶의 ‘역사 다시쓰기(réécrire l’histoire)’로서의 글쓰기를 예비하며, 이 글쓰기는 분열된 자아의 통합을 가져온다.
때문에 비자발적 기억의 성격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연구에 필수적이다.
1912년에 가스통 갈리마르에게 보낸 프루스트의 편지 속에서는 소설 전체의 제목 으로 “마음의 간헐성(les intermittences du coeur)”이 언급된다.253) 그러나 1913년 에 이 제목은 다른 책의 제목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묘사하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의 한 장의 제목으로만 남겨진다.254) ‘마음의 간헐성’
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마음이 시간에 따라 단선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로 인해 비자발적으로 튀어나오기도 하고, 또한 이 러한 비자발적 기억을 통해 우리의 과거가 현재에 생생하게 현현하기도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마음이 늘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망각에 의해 군데군데 단절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52) 마르셀은 과거의 기억이 영구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되고 있는 듯 생각되는 이유가 단지 육 체의 존재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Sodome et Gomorrhe, Ⅲ, pp. 153-154. 이때, 마르셀 에게 육체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나의 동일한 실체라고 믿을 수 있는 유일 한 근거이다.
253) “Par exemple titre général « Les Intermittences du Coeur »...” Marcel Proust, op. cit., Plon, 2004, p. 584.
254) Jean-Yves Tadié, op. cit., p. 702.
이 분야의 인식이란 간헐적이며, 감정의 현재적 효과가 소멸하면 그 인식도 함께 소멸한다.
la connaissance en ces matières étant intermittente et ne survivant pas à la présence effective du sentiment.255)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에 나타난 사랑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모든 감정은 일시적이며 시간 속에서 사라진다는 마르셀의 믿음을 나타내며, 자아의 통시적 분열에 연결된다. 하지만 마음의 간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좀 더 복잡한 구조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간헐성은 단순히 인지나 감정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상태에 있는, 혹은 상태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아 자체의 변동과 교체에 관련된다.
『잃어버린 시간』에 나오는 비자발적 기억의 대표적인 예로서는 '편상화의 에피소드', ‘마들렌 과자의 에피소드', '포석의 에피소드'가 있다. ‘마음의 간헐성’의 장에는 할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비자발적 기억인 ‘편상화의 에피소드’가 들어있다. 이 에피소드는 서술상 마들렌 과자의 일화 이후에 나타나지만, 마르셀의 삶에서는 최초의 비자발적 기억의 장면이다. 『게르망트 쪽』의 2부 초반에 있었던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마르셀의 지나친 초연함은, 이때서야 비로소 이해된다. 어느 날 몸을 구부려 편상화의 첫 단추에 손을 댄 마르셀은 갑자기 슬픔에 흐느껴 운다. 그때 무언가 신성한 것이 출현한다. 기억 속에서, 그때 그대로의, 몸을 숙여 자신을 근심스레 바라보던 “진짜” 할머니의 얼굴이 나타난다. “완전한 추억”이 “산 실재”를 되살아오게 하는 것이다.256)
우리의 내적인 기능의 소산 전부, 곧 과거의 기쁨과 슬픔 전부가 영구히 우리 것 으로 소유되고 있듯이 생각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육체의 존재 탓이다. 육 체는 우리 영성의 그릇인 듯싶으니까. (...) 그런데 아까 돌연 내게 복귀한 자아 는, 할머니가 발베크에 이르자 웃옷과 신의 단추를 벗겨 주었던 그 오랜 저녁 이 래 존재치 않았던 것이라서, 할머니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던 그 순간에 내가 들러붙은 것은, 그 자아가 모르는 오늘 낮 동안의 하루라는 것의 뒤에가 아니라 - 시간에는 몇몇 다른 계열이 평행해 있기라도 하듯 - 시간의 연속을 중단하지 255)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Ⅰ, p. 601.
256) Sodome et Gomorrhe , Ⅲ, p. 153.
않은 채 극히 자연스럽게, 지난날의 발베크 도착 첫 저녁 후에 곧바로 이어져 있 었다.
C’est sans doute l’existence de notre corps, semblable pour nous à un vase où notre spiritualité serait enclose, qui nous induit à supposer que tous nos biens intérieurs, nos joies passées, toutes nos douleurs sont perpétuellement en notre possession. (...) Or, comme celui que je venais subitement de redevenir n’avait pas existé depuis ce soir lointain où ma grand’mère m’avait déshabillé à mon arrivée à Balbec, ce fut tout naturellement, non pas après la journée actuelle, que ce moi ignorait, mais – comme s’il y avait dans le temps des séries différentes et parallèles – sans solution de continuité, tout de suite après le premier soir d’autrefois que j’adhérai à la minute où ma grand’mère s’était penchée vers moi.257)
시간이 공간과 같이 균일하게 분할되는 것으로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무의식 의 순서에 따라 배치되어 있음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가 있을까? 또한 이 “복귀한 자아”는 현재의 자아와 그때의 자아가 다른 자아임을 의미함으로써, 우리가 앞서 감 정의 영역에서 고찰한 바 있는 자아의 통시적 분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포석의 에피 소드’에서 연이어 불러 일으켜진 추억들은 서로의 사이에 “시간 이상의 거리감을, 동 일한 질료가 아닌 다른 우주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가지고 있다.258) 이 분열된 자아들 사이의 간극은 단순한 망각의 벽 이상으로 공고하다. 그러나 비자발적 기억은 과거가 망각에 의해 사라져 버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려주며, 그 자아들 이 하나씩의 지층을 이루며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순간을 예비한 다.
주로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과 함께 서술되는 감정적 자아의 죽음은, 대개 의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처럼 이 감정적 자아가 비자 발적 기억에 관련되어 있는 경우에는, 이 또한 통시적 자아의 분열에 관련되어 있으 면서도 의식적 자아분열의 서술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비자발적 기억은 근본 적으로 무의식적이고 잠재적인 것이다. 또한 비자발적 기억이 상기시키는 것은 기억 의 “크리스털 구체”259)의 세계와 그 세계를 산 자아 자체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따
257) Sodome et Gomorrhe , Ⅲ, pp. 153-154.
258) Le côté de Guermantes, Ⅱ, p. 692.
라서 완전한 추억”260)이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회상되는 과거와는 다른데, 박제된 대 상으로서의 기억이 재현의 대상인데 반해, 비자발적 기억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지 도 몰랐던 내용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마르셀은 편상화의 끈을 만지고 슬픔에 휩싸 이고 나서야 할머니의 죽음을 그다지도 슬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그 가 마들렌 과자를 먹기 전까지 콩브레에 대해 생각나는 것이라곤 잠자리의 드라마를 위시해 초반에 서술된 내용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무의식은 기억하고 기록하며, 잃어 버린 줄도 몰랐던 과거는 우연한 계기의 감각 속에서 살아 되돌아온다.
또한 비자발적 기억이 경유하는 감각은 정신 뿐 아니라 육체에 속한 것으로, 정신 속에서 펼쳐지지만 육체에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간 속에서의 자아의 분열 속에서 ‘나’들을 절대적으로 묶어 놓고 있는 것은 바로 나의 육체이다. 마르셀은 처음 육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나’라는 것을 묶어 놓고는 있으나 대수롭지는 않 은 것처럼 이야기한다.261) 오히려 그에게 있어 기억들을 생생하게 불러오는 것은 특 권화된 대상들, 풍경들, 이름들, 혹은 장소들이다262). 그러나 이런 기호들이, 들뢰즈의 분류에 따르면 ‘감각적 기호’들이, 새겨져 있는 곳은 바로 그의 육체이다. 신체에는 기억과 감정들이 쌓여 있고, 거기에 연결된 기호가 작동했을 때, 저장된 기억은 송두 리째 ‘한 존재처럼’ 올라오는데, 이것은 바로 비자발적 기억의 고유한 특성이다. 비자 발적 기억의 과거 환기는 몸을 구부리거나(편상화의 에피소드), 몸을 비틀거리는 것처 럼(포석의 에피소드), 무의식적인 육체적 행위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유사하 게 베르그손에게 있어 육체는 특권적인 이미지이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과 물질계를 연결시켜준다.263)
259) Du côté de chez Swann, Ⅰ, p. 87.
260) Sodome et Gomorrhe , Ⅲ, p 153.
261) “C’est sans doute l’existence de notre corps, semblable pour nous à un vase où notre spiritualité serait enclose, qui nous induit à supposer que tous nos biens intérieurs, nos joies passées, toutes nos douleurs sont perpétuellement en notre possession.” Sodome et Gomorrhe, Ⅲ, pp. 153-154.
262)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이다. “Mais elle devint pour moi dans la suite une cause de joies en restant dans ma mémoire comme une amorce où toutes les routes semblables sur lesquelles je passerais plus tard au cours d’une promenade ou d’un voyage s’embrancheraient aussitôt sans solution de continuité et pourraient, grâce à elle, communiquer immédiatement avec mon cœur.”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Ⅱ, p. 80.
263) 『잃어버린 시간』의 맨 앞에 배치되어 있는 비몽사몽의 상태에서의 잠자리의 대목은, 앙리 베르그손이 서술한 특권적 이미지로서의 신체가 갖는 효과와 멋진 문학적 대응을 이룬다.
“Voici un système d’images que j’appelle ma perception de l’univers, et qui se bouleverse de fond en comble pour des variations légères d’une certaine image
‘포석의 에피소드’가 불러오는 진리의 감각은 마르셀이 글쓰기를 결심하게 되는 결 정적 계기이다. 바로 직전까지 문학에 환멸을 느끼며 글쓰기를 영영 포기하려던 그에 게 돌연 계시의 순간이 온다. 포석에 발부리를 부딪치고, 비틀거리며 다른 발을 딛었 을 때 엄습한 환희로 인해, 그 순간, 그에게서 미래에 대한 온갖 불안은 사라진다.
사실 그때 내 속에서 즐거운 인상을 음미하고 있는 인간은, 그 인상 속에 있는 옛 어느 날과 현재와의 공통점, 다시 말해 그 인상 속에 있는 초시간적인 영역에 서 그 인상을 맛보고 있는 것이고, 이런 인간이 나타나는 것은, 그 인간이 현재 와 과거 사이의 저 일종의 동일성에 의하여, 사물의 정수를 먹고 살면서, 그 정 수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환경, 즉 시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경우뿐이다.
au vrai, l’être qui alors goûtait en moi cette impression la goûtait en ce qu’elle avait de commun dans un jour ancien et maintenant, dans ce qu’elle avait d’extra-temporel, un être qui n’apparaissait que quand, par une de ces identités entre le présent et le passé, il pouvait se trouver dans le seul milieu où il pût vivre, jouir de l’essence des choses, c’est-à-dire en dehors du temps.264)(강조는 필자)
한 “인간”이 갑자기 등장한다. “그 인간은 사물의 정수만을 양식 삼아 먹고, 그 정 수 안에서만 삶의 실제, 삶의 환희를 발견한다.”265) 시간 속에 돌이킬 수 없이 분열 되어 있던 자아는 여기서 돌연 동일성을 회복한다. 이 자아는 ‘마들렌 과자의 에피소 드’에서 나타나는 자아가 그러하듯이, 그를 괴롭혀왔던, 그리고 그를 유폐와 단절로 향하게 만들었던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식으로 존재하며, 그들처럼 늙어가고 그들처럼 죽어갈 것”266)이라는 불안감에서 벗어나 있는 초월적 자아이다. 이 시간을 넘어서 있 는 존재는, 발베크의 호텔방에서 그토록 두려워했던 자아의 소멸을 극복하고 있다. 늘 자신을 따라다니던 실재(Réel)의 공포에서 벗어나, 죽음과 미래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 는 이 초월적 자아의 감각 속에서 마르셀은 지극한 행복감을 느낀다. 그리고 애써 생 각한 끝에, 포석의 비자발적 기억이 불러일으킨 것이 베네치아의 심상임을 알아낸다.
privilégiée, mon corps. Cette image occupe le centre ; sur elle se règlent toutes les autres ; à chacun de ses mouvements tout change, comme si l’on avait tourné un kaléidoscope.” Henri Bergson, op. cit., 1999(1939), p. 20
264) Le temps retrouvé, Ⅳ, p. 450.
265) Le temps retrouvé, Ⅳ, p. 451.
266) Du côté de chez Swann, Ⅰ, p. 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