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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외상의 고착과 구조적 반복

2.3. 모독, 동성애, 사도마조히즘

알베르틴이 마르셀에게 특권적 대상이 된 이면에는 어머니 모독의 쾌락에 대한 충 동이 있다. 선의 화신인 어머니의 의견을 짓밟아버린 그 경험은 그를 끝없는 죄책감 으로 몰아가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거기에서 어떤 쾌락을 느꼈으리라는 것이 본 논문 의 견해이다. 앞에서도 정신분석적 차원에서 논의되었지만, 이는 프루스트의 전기적인 측면과 더불어, 텍스트 안에서도 충분히 유추될 수 있다. 다른 등장인물들의 예를 더 하여 나아가 『잃어버린 시간』에서 나타난 사도마조히즘의 세계까지 위반과 도착에 관 련된 쾌락들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기로 한다.

죄의식을 동반한, 혹은 죄의식을 반드시 전제로 하는 이러한 쾌락은, 뱅퇴유 양의 예에서 강렬하고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선한 육친에 대한 죄를 저지른 점에 대하여 주인공과 뱅퇴유 양은 공통의 죄를 짓고 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죄는 뱅퇴유 양 에 비해서는 훨씬 경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어머니나 할머니에 대한 태 도는 지극한 죄책감으로 드러나고 있는 반면, 오히려 그런 의미에서 극단적인 악인이 라고 할 수 있는 뱅퇴유 양에 대한 평은 묘한 뉘앙스를 띤다.

그녀 같은 사디스트는 악의 예술가이지, 완전무결하게 악한 사람과는 다르다.

(...) 뱅퇴유 양 같은 사디스트들은 아주 감성적이고 천성적으로 고결해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관능적인 쾌락마저도 뭔가 사악한, 악인의 특권처럼 여겨지는 것이 다. (...) 어쩌면 그녀가 다른 사람이 주는 고통에 무관심하고, 이 무관심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간에, 잔혹함이 끔찍하고도 지속적인 형태라는 것을 자신이나 타인에게서 식별할 수만 있었다면, 그녀는 결코 악을 이처럼 드물고 경이롭고 낯 설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며, 악의 나라로 이주하는 것도 이처럼 안온하게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Une sadique comme elle est l’artiste du mal, ce qu’une créature entièrement mauvaise ne pourrait être (...) Les sadiques de l’espèce de Mlle Vinteuil sont des êtres si purement sentimentaux, si naturellement vertueux que même le plaisir sensuel leur paraît quelque chose de

mauvais, le privilège des méchants. (...) Peut-être n’eût-elle pas pensé que le mal fût un état si rare, si extraordinaire, si dépaysant, où il était si reposant d’émigrer, si elle avait su discerner en elle comme en tout le monde, cette indifférence aux souffrances qu’on cause et qui, quelques autres noms qu’on lui donne, est la forme terrible et permanente de la cruauté.197)

뱅퇴유 양에 대한 묘한 변명과 옹호는, 마르셀이 자신의 이기주의를 드러내는 서 술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정의감과는 생판 모르는 사이라, 도덕적 감각이 완전히 결핍되고 말았다”고 말한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마음속으로는 약자나 불행한 인간 에게 편들고 있었다”고 변명하는데, 그 약자라는 것은 창피를 당하기 직전인 샤를뤼 스 씨이다.198) 샤를뤼스 씨는 동성애와 도착적 쾌락이라는 측면에서 뱅퇴유 양과 상 통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그렇다고 해서 마르셀이 그 ‘약자’를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하 는 것은 아니다.

마르셀 자신에 대한 변명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는 뱅퇴유 양에 대한 이 변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살아서 고뇌에 시달리고 죽어서 모독당 한 그녀의 아버지에게 어떤 사죄와 보상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셀의 선악의 개념에는 타자가 들어와 있지 않다. 마르셀이 어머니의 뜻에 반해 알베르틴을 집에 들이는 행동은 사실 뱅퇴유 양이 그녀의 여자 연인을 집에 들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 다. 심지어 그는 그녀의 처소를 아버지의 서재로 정한다. 마르셀 스스로 말하듯 어린 시절의 상황과 알베르틴과의 생활 사이의 동일성은 모독적이다.199) 바타이유는 그의 저서에서, 프루스트가 실제로 뱅퇴유 양과 비슷한 행동을 벌였던 전기적 사실을 제시 한다.200) 그러므로, 뱅퇴유 양에 대한 변명은 프루스트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도 해석 될 수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상징계로 진입한다는 부친살해의 테마201)는 프루스

197) Du côté de chez Swann, Ⅰ, pp. 162-163.

198) La Prisonnière, Ⅲ, p. 795.

199) La Prisonnière, Ⅲ, p. 520.

200) 주 169) 참조.

201) “Ici gît évidemment la portée que garde l'oeuvre de Freud : Totem et tabou, malgré le cercle mythique qui la vicie, en tant qu'elle fait dériver de l'événement mythologique, à savoir du meurtre du père, la dimension subjective qui lui donne son sens, la culpabilité.” Jacques Lacan, “L'agressivité en psychanalyse(1948)”, Écrits, Seuil, 1996, p. 117.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아들들은 공모하여 아버지를

트에게서는 오히려 일종의 모친살해로 나타난다. 이는 무척 은밀하고 간접적인 방식 으로 드러나지만, 그가 할머니의 죽음이 마치 자신의 탓인 것처럼 괴로워할 때, 그 배 면에는 이러한 양상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는 왜인지 모르지만 할머니의 죽음에 대 한 지나친 죄책감을 느낀다. 이는 어머니를 찢고 삼키고 싶어 하는 어린 아이의 공격 성이 어머니와의 분리 단계에 이르러 자신의 환상 속에서의 공격 때문에 어머니가 죽 게 될까봐, 그리하여 홀로 남게 될까봐 두려워하며 갖게 되는 죄책감을 연상시킨 다.202) 주인공은 그녀를 극복하고 그녀로부터 독립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공격성과 죄책감의 단계에 고착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는 대상의 독립성을 애써 외면하고 상대가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느끼는 상상계적 인 식에 머무르려고 애쓴다. 그러나 마르셀이 실제로 그들이 개별적인 존재라는 것을 모 르는 분열증자는 아닌데, 그는 단지 거기에 머무르길 원하며, 그 지점에서 상대를 모 독하는 방식으로 죄책감을 동반하는, 뱅퇴유 양의 쾌락에서 보여지듯 오히려 쾌락을 위해 죄책감을 필요로 하는, 그러한 쾌락을 반복적으로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뱅퇴유 양에 대한 마르셀의 태도는 그 자신의 비도덕성을 짐작케 한다. 그는 비도 덕적이지만, 어떤 죄책감은 매우 강렬하다. 이 죄책감은 특정한 대상인 어머니와 할머 니를 향하고 있다. 그는 마치 선악의 구분이 아직 없는 유아기 이후에 오는, 공격성과 강렬한 죄책감을 동반한 전오이디푸스 기와 같은 심리를 보여준다. 마르셀이 뱅퇴유 양을 언급하면서 그녀의 선함이 그와 같은 악을 불러왔다고 했듯이, 오히려 그의 기 이한 옹호가 그의 죄책감의 강렬함을 반증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마르셀의 타자에 대 한 그의 철저한 분리는 타자의 입장에 동일시하거나 공감하는 것을 막고, 따라서 타 자를 죄책감을 느낄 만한 존재로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 같다. 자아의 방 어를 위해, 또한 몽상의 능동적인 작업들을 위하여 필수적으로 주어져야 할 전제 조 건은 외부와의 유리로, 그가 마음껏 대상을 주무르고 또한 안전하게 관찰할 수 있는 위치다. 따라서 그는 타자를 대상화한다. 심지어 그는 타자에의 장악을 머릿속에서만

죽이며 아버지의 여자들을 나눠 갖고 그 죄책감을 보상하기 위하여 죽은 아버지를 신으로 만 든다고 말한다.

202) “His oral-sadistic phantasies... have a quite definite character and contain ideas that he gets possession of contains of his mother’s breast by sucking and scooping it out. This desire to suck and scoop out, first directed to her breast, soon extends to the inside of her body.” Melanie Klein, op. cit., 1998, p. 128. “The child now fears that its mother will die in consequence of its phantasied attacks upon her and, in addition, is afraid that it will be left all alone in its helpless state.” Jacques Lacan, “L'agressivité en psychanalyse(1948)”, Écrits, Seuil, 1996, p.

179.

이 아닌 실제로도 시도하게 되는데, 이러한 강력한 시도는 알베르틴과의 관계에서 촉 발된다. 그러나 알베르틴을 장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마치 생기를 잃는 것처 럼 보인다. 따라서 그는 타자인 그녀를 사랑하는 동시에 그녀를 완전히 장악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알베르틴의 감금 뿐 아니라, 그녀 사후에 어 린 소녀들을 사서 그녀의 장면들을 재현한다든가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세계를 현실에 실현하려는 시도로 인해 죄악의 성격을 띤다. 이 경우, 정신적인 영역 뿐 아니 라 현실적인 영역에서 안전선이 필요해지는데, 이것이 알베르틴이 ‘감금’된 이유이다.

외부에 대한 이러한 비밀의 담장에 균열이 일어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앞으로 슬픔을 달래기 위해 소녀를 데리고 오는 일도, 그 소녀 앞에 불쑥 형사가 나타나 이쪽이 망신당하고 악인으로 취급받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 왜냐 하면, 만일 경관이 나타나 생면부지의 소녀가 나를 수상쩍은 사나이로 여기기라 도 한다면 나는 차라리 자살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 알베르틴에 게도 역시 미성년자 유괴가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내게는 이 생이 사면초가가 된 듯싶었다.

Dès lors il me serait à jamais impossible de faire venir une petite fille dans mes chagrins pour me consoler, sans risquer d’avoir la honte devant elle qu’un inspecteur surgît et qu’elle me prît pour un malfaiteur. (...) Car si j’avais pensé que même une petite fille inconnue pût avoir par l’arrivée d’un homme de la police une idée honteuse de moi, combien j’aurais mieux aimé me tuer ! (...) il me sembla que le détournement de mineures pouvait s’appliquer aussi à Albertine. Alors la vie me parut barrée de tous les côtés.203)

순결해 보이는 소녀를 곁에 두고 마음을 달래야지, 하면서 돈을 주고 생면부지의 여자아이를 데려와 무릎에 앉혀 놓고 재우는 따위의 일은 명백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비도덕성에 대한 주인공의 무심함은 기괴하 게까지 보인다. 그에게는 그것이 타자나 사회와의 관계가 아닌 자신의 몽상의 실현이 며, 그 타자는 단지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얼마나 외부세계와 유리되어 있 었는지를 증거하며, 외부세계에 대해 인식에서부터 얼마나 무능력한지를 보여준다. 그 는 외부세계와의 경계를 긋고 자신의 몽상적 세계를 방어하는 만큼, 자신이 정해놓은

203) Albertine disparue, Ⅳ, pp. 2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