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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힘에의 의지와 부정적인 힘에의 의지

앞선 절에서 ‘나’라는 개체와 그 개체의 단일한 의지를 가정하는 쇼펜하우어와 달리, 니체는 개체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의지를 상정한다는 점을 보았다. 이는 단 연 의식 이하의 것으로, 말이나 사유로서 표상불가능한 영역의 미시적인 힘들을 지시한다. 때문에 ‘힘을 의욕하는 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부당하다. 니체에 따르면 “생물 자체가 힘에의 의지”(VP 468-469; 영369; 국414)이기 때문이다. 오 직 그러한 힘들이 상호간의 어떤 관계를 형성했을 때, 그 힘들의 표현으로서 개체 가 성립하고 운동이나 대상이 출현하는 것이다. 때문에 들뢰즈는 “힘에의 의지는 차이의 요소(élément)이며, 이러한 요소로부터 어떤 하나의 복합체 내에 현존하는 힘들이나 그러한 힘들의 각각의 질이 파생되어 오는 것”(ND 24; 국39-40)이라고 말한다.

이는 힘들간의 관계에 따라 물리적인 운동이 발생한다고 보는 설명과도 유사하 다. 다만 물리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힘들간의 ‘양’적인 차이인데 반해 니체는 힘의 ‘질’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가령 우리는 피스톤 안과 바깥의 온도차 를 통해 운동을 발생시키는 열기관을 떠올릴 수 있다. 온도가 무조건 높다고 운동 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주변과의 온도‘차’로부터 운동이 발생한다. 즉 절 대적인 힘의 크기와는 무관하게 힘 간의 어떤 ‘차이’에 의해서만 운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힘 자체보다는 이웃항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양적인 차이를 발생시 키는가에 주목함이다. 니체에게도 힘 자체보다는 그것들간의 관계가 문제이다. 상 이한 두 힘의 차이를 이용해 힘들의 분포상태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게 고려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 니체는 힘의 양보다는 ‘질’적인 측면에 주목한다. “‘기계론 적 세계관’은 양(量) 이외의 아무것도 바라지 않거니와, 하지만 힘은 질(質) 속에 숨어있다.”(VP 442; 영349; 국393)

는다.”(DR 15; 국40)고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여 주의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힘에의 의지는 또한 항상 운동하며, 경쾌하고 다원론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어떤 힘이 명령하는 것은 힘에의 의지에 의한 것이지만, 어떤 힘이 복종하는 것도 힘에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힘들의 두 유형 혹은 두 개의 질에 대해서, 힘에의 의지의 양면, 두 개의 질(qualis), 즉 궁극적이고 유동적인 성질들이자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힘들의 성질들 보다도 더 심원한 두 개의 성질들이 대응한다. 왜냐하면 힘에의 의지야말로 능동적인 힘들이 긍정하도록, 그들 자신의 고유한 차이를 긍정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그러 나 이와는 반대로 반동적인 힘들의 본성은 우선 자신이 아닌 것에 대립하는 것이며, 다 른 것을 제한하는 것이다. 반동적인 힘들에서는 부정이 최초의 것이며, 그것들은 부정 하는 것에 의해서 외관상의 긍정에 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능동적인 것과 반동적인 것이 힘들의 질인 것처럼, 긍정과 부정은 힘에의 의지의 질이다.(ND 24-25; 국40)

니체에게 힘은, 긍정을 최초로 하는 ‘능동적(active)인 힘’과 부정을 최초 힘으로 하는 ‘반동적(reactive)인 힘’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힘들의 구분에 따라 힘에의 의 지 역시 능동적인 힘을 긍정하도록 하는 ‘긍정적인 힘에의 의지’와 자신이 아닌 것 에 대립하는 것이자 다른 것을 제한하는 반동적인 힘에 의해 발현되는 ‘부정적인 힘에의 의지’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이 반동적인 힘 내지 그에 의한 부정적인 힘에의 의지만을 살피고, 그것으로 유기체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반동적인 힘 만을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힘들의 근본적인 우월성’을 보지 못한다. 들뢰즈는 이 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니체에게서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될 반동성의 개념의 출발점은 바로 기계적이 고 공리적인 타협들, 열등하고 지배받는 힘들의 모든 권력을 표현하는 조정들 (regulations)이다. 그런데 우리는 힘들의 그 반동적인 면에 대한 현대 사유의 지나친 관심을 확인해야 한다. 사람들은 반동적 힘들로부터 유기체를 이해할 때 충분히 이해한 것으로 항상 생각한다. 반동적 힘들의 본성과 그것들의 전율이 우리를 유혹한다. 그래 서 삶의 이론 속에서 메커니즘과 목적은 서로 대립하지만, 그것들은 반동적 힘들 그 자 체에만 해당하는 두 가지 해석이다. 적어도 우리가 힘들로부터 유기체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가 반동적 힘들을 그것들을 지배하며 자신은 반동적이지 않은 힘과 관련시킬 때만 매커니즘이나 목적이 아니라 힘들로서 다시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그 힘들로서 파악할 수 있다. ‘적응이 우선 그 힘들의 영향력에 종속되어 있 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자발적이고 공격적이며 정복하고 빼앗고 변화 시키는 힘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들을 제공하는 힘들의 근본적인 우월성을 보 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유기체의 가장 고귀한 기능들의 될 때 권위를 부인한다.’(NP 46; 국89)

여기서 들뢰즈가 지적하고 있는 ‘반동적인 면에 대한 현대 사유의 지나친 관심’

은 앞서 살폈던 ‘자연의 합법칙성’만을 문제삼는 태도와 유사하다. 이들은 ‘연장’으 로서의 신체가 작동하는 ‘필연적’이고 ‘무예외적’인 법칙에 몰두해 그로써 유기체 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때 이들이 전제하는 삶의 이론 속에서 의 목적이 ‘자기 보존’이라면 그를 위해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생장과 발달’(VP 460; 영362-363; 국407)일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자기 보존’이라는 것 역시 이미 “복잡한 유기물의 관점에서 본, 하나의 해석”(VP 436-437; 영345; 국 388)에 불과하다. 가령 통상적으로 굶주림을 최초의 움직임으로 간주하지만, 이는 일종의 손실의 회복일 뿐이다. 더욱이 원형질의 입장에서 영양분의 섭취는 자기 보존이 아니라 분열로 나아간다. 분열이 “힘이 자신의 것으로 삼은 소유물을 더는 좌우할 수 없을 만큼 강하지 못할 때 나타”(VP 437; 영345; 국389)나는 것인 만 큼, 그 자체는 지배하는 충동과는 정반대를 가리키게 된다.

더욱이 니체의 입장에서 “유(類)가 진보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세계에 관한 가 장 불합리한 주장”(VP 463; 영365; 국410)이다. “가장 풍부하고 복잡한 형태는 오 히려 쉽사리 파멸”하기에 “희귀하게 달성될” 뿐이지만, 끝끝내 변이하지 않는 듯 이 보이는 “가장 저급한 형태”는 독자적인 풍요성을 갖(VP 461; 영363; 국408)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윈적인 관점과는 정반대로, ‘보다 강한 것, 혈통 이 보다 좋은 것’에서 ‘진화’가 아닌 ‘도태’를 보는 것이다.

그는 이로써 생물학이 설정하는 생물의 목적 내지 그 메커니즘으로는 해명될 수 없는 긍정적인 힘에의 의지를 부각시키고자 한다. 이는 단연 생명의 자기보존본능 에 충실한 반동적인 힘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때문에 때로 그것은 생을 위협하기 도 한다. 그렇기에 그는 오히려 “삶의 가치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자들이 최상위를 차지하며 잔존한다는 것을 목격”(VP 462; 영364; 국409)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가 그러한 능동적인 힘 내지 긍정적인 힘에의 의지에 주목하는 것은 생명의 본질 은 ‘고양’에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바로 모든 생명있는 것에서 가장 명료하 게 지적할 수 있는 점은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한 것이 되기 위하여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이다.”(VP 465; 영367; 국412) 바로 이 때문에 그는 때로는 생존의 위협을 감수하고서라도 능동적으로 힘을 행사하려는 긍정적인 힘에 의 의지를 존재의 본질로 삼는다. 바로 여기서 다른 의지들을 자신에게 복속시키 려는 ‘지배하고자 하는 의지’로서의 긍정적인 힘에의 의지가 제시된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의 생물체가 탄생하는지 자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신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힘들의 ‘자의적인’ 산물로서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체는 환원될

수 없는 다수의 힘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다수적 현상이다. 따라서 그것의 다수적 현상 의 통일, ‘지배의 통일’이다. 하나의 신체 속에서 우월하거나 지배하는 힘들은 소위 능 동적(actives)이고, 열등하거나 지배받는 힘들은 소위 반동적(reactives)이다. 분명히 힘 과 힘의 관계를 표현하는 원초적인 질들은 능동적이거나 반동적이다. 왜냐하면,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힘들은 각각이 동시에 그것의 양적 차이 그 자체에 상응하는 질을 가 지고 있지 않다면, 양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그것들의 양에 따라 힘들-능동적 힘들과 반동적 힘들-의 차이를 서열(hiérarchie)라고 부를 것이다.(NP 45; 국87-88)

이러한 힘에의 의지에 있어서의 질적인 구분은, 우리가 어떤 의지를 갖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해명한다. 니체가 제안하는 힘에의 의지란 어떤 개체에 복속되는 단일성이 아니기에, 애초에 의지를 갖는 ‘나’라는 주체는 가정되지 않는 다. 대신 무수히 많은 복수적인 힘에의 의지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의지들이 작동하는 방식과 힘의 분포에 따라서 질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바로 이때 우리가 어떤 의지를 갖는다는 것은 곧, 그 의지를 만들어내는 힘들에 복종한다는 것을 뜻 하게 된다. 그 의지 안에는 또 다른 복수적인 의지들이 있고, 그 의지들 중에 힘들 의 분포에서 ‘통치자’의 자리를 차지한 우월한 의지에 우리는 복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통찰은 우선적으로 “의식이 겸허해야 할 필요성”(VP 453; 영357;

국402)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소위 ‘자아’라고 칭해지는 것 대신 복 수적인 힘에의 의지들 가운데 출현하는 전혀 다른 양상의 ‘통치자’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개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힘에의 의지들의 복합체가 곧 개체이 다. 우리는 이와 실로 구분될 수 없고, 때문에 쉽게 알아차릴 수도 없다. 니체는 그래서 “모든 행위나 의식에 있어서의 가장 일반적이고 낮은 본능은 실제로 우리 가 그 명령에 따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명령 그 자체이기 때문에, 바로 이 이유로 어디까지나 가장 인식하기 어렵고 가장 감추어진 본능이다”(VP 452; 영 356; 국401)라고 말한다. 본성상 능동적 힘들은 의식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힘들은 유기체의 의식이하의 수준에서 벌어지고 있는 끊임없는 저항과 복종 속에 서 확립과정을 통해 우리를 형성한다.

‘필연적으로 무의식적인 힘들의 활동은 신체를 모든 반동적인 것보다 우월한 어떤 것 그리고 특히 의식이라고 불리는 자아의 반동적인 것들보다 우월한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 신체의 능동적인 힘들은 바로 신체를 하나의 자신(soi)으로 만들고, 자신을 우월하고 경이로운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자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보다 강력한 존 재, 알려지지 않은 현자. 그는 너의 신체 속에 살고, 바로 너의 신체이다.’(NP 47; 국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