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는 이러한 미분적인 무의식을 무한소 분석과 연결지어, ‘심리-수학적 영 역’이라고 명명한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츠는 무슨 이유로 의식적 지각을 이루는 것 은 무한히 많은 요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만약 미시적인 작은 지각들이 모 여서 총체화된 결과, 의식을 이루는 것이라면, 그것을 종합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는 다시 미시적 지각들 이전에 의식이 선재해야 한다는 순환논증으로 빠져들고 마 는 것이 아닐까? 만약 이들을 종합하는 어떤 ‘주체’ 내지 ‘원리’를 상정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 이러한 종합을 순전한 우연의 결과로 치부해야 할까?
이에 대해 들뢰즈는 라이프니츠가 유의하여 구별하고 있는 ‘총체화 (totalisation)’를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에 주목한다. 라이프니츠가 의식적 지각들 이 작은 지각들‘로 합성된다(composer)’고 할 때와 작은 지각들‘에서 파생된다 (dériver)’고 말할 때,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분명 두 표현은 모두 수학 적인 ‘적분’이라고 표시할 수 있는 통합 내지 전체화에 해당한다. 그러나 ‘합성되
다’는 부분-전체의 관계를 나타내는 반면 ‘파생되다’는 미분관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라이프니츠가 이따금 총체라는 용어를 끌어들여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등질적 인 부분들의 합산 외의 다른 무엇이 중요하다. 부분-전체의 관계는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전체도 부분만큼이나 감지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어 떤 물레방아의 소리에 너무 익숙해서 그 소리를 포착하지 못할 때처럼 말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하나의 웅성거림, 현기증은 의식적 지각들이 되지 않으면서도 전체이다. 사 실 라이프니츠는 전혀 부족함 없이 미세지각 대 의식적 지각으로의 관계가 부분에서 전 체의 관계가 아니라, 평범함에서 특별함 또는 주목할 만함으로의 관계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즉 “특별한 것은 그렇지 않은 부분들로 구성되어야만 한다.”(P 116-117; 국160)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바는, 규칙적인 지각의 더하기로서의 의식화가 출 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오히려 ‘특별함 또는 주목할 만함’으로의 관계에 의해 이뤄지는 의식화이다. 가령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많은 것들을 동시에 취한 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두드러진 생각에만 주의를 기울인다”(AG 89;서신 230)고 말한다. 지각되지 않은 많은 미시적 지각들 중 우리는 가장 두드 러진 것, 즉 들뢰즈의 표현에 따르면 특이점(singular point)에만 주의를 기울인 다. 이로써 무수히 많은 미시적 지각들이 모두 평균적으로 규칙에 따라 집합하여 우리의 의식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들뢰즈는 부분으로서의 무의식들의 합산(addition)이 곧 의식이라는 공식의 부적 당함을 제시하기 위해, 위 인용된 부분에서 ‘어떤 물레방아의 소리에 너무 익숙해 서 그 소리를 포착하지 못할 때’를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만약 ‘무의식:의식=부분:
전체’라는 공식이 성립하려면, 의식은 언제나 ‘전체’를 의식하여야 한다. 의식되지 않는 부분들의 총합이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익숙해져서 의식되지 않는 경우, 그러한 의식은 결코 ‘전체’를 뜻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물레방아의 예시 로서, 들뢰즈는 ‘무의식:의식=부분:전체’라는 공식의 반례를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를 라이프니츠 연구자인 졸리(Nicholas Jolley)도 제시한다. 졸리 에 따르면, 라이프니츠가 제시하는 무의식으로부터의 의식화는 ‘주의집중 (attention)’을 통해 가능하다. 가령 스미스와 존이 전기드릴 공사가 한창인 배경을 뒤로 하고 대화를 하고 있다. 그러나 대화에 집중한 스미스는 드릴 소리를 의식하 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존이 그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로써 스미스는 드릴 소리를 의식하게 된다.79) 이러한 예시는 미세지각으로서의 수많은 드릴 소리들의 ‘부분’들 은, 거시적인 드릴 소리라는 ‘총체’로 곧바로 환원될 수 없음을 입증한다.
79) Nicholas Jolley, Leibniz, Routledge Philosophers, 2005, p.121
물레방아와 전기 드릴의 사례가 보여주듯, 우리의 의식은 ‘전체’를 가리키는 것 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들뢰즈의 라이프니츠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특별한 것 또는 주목할 만한 것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들뢰즈는 의식은 ‘총체화’를 수행 한다기보다 ‘특이화(singularisation)’를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라이프니츠는 “특별한 것은 그렇지 않은 부분들로 구성되어야만 한다”80)고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령 녹색이 있다고 해보자. 녹색은 노란색과 파 란색의 혼합으로 만들어진다. 물론 노란색과 파란색은 그 자체로 지각가능하다. 그 렇지만 그 두 가지 색이 서로 혼합될 때, ‘노랑임’과 ‘파랑임’이라는 지각은 사라져 야한다. 노랑과 파랑에 대한 지각이 미세지각으로 ‘분쇄화’되는 것이다. 분쇄되어 무한히 작아진 노랑과 파랑에 대한 미세지각은 어떤 비율에 따라 다시 혼합되고, ’ 녹색‘이라는 지각으로 의식에 드러난다.81) 즉 노랑과 파랑에 대한 지각이 미세지각 이 되면서 ‘사라지’고, 이것들이 다시 녹색을 규정하는 ‘미분비(微分比, un rapport différentiel)’82) ‘안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는 ‘녹색’이라고 칭할 수 있는 의식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노란색은 다시 가령 흰색과 주황색에 대한 미세
80) NE, 82-83. 이 부분에서 라이프니츠는 본유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 예들로, ‘사각형은 원이 아니다’라는 명제와 ‘단 것은 쓰지 않다’는 명제를 검토한다. 단 맛과 쓴 맛은 감 각적 경험에 기반한 것이므로 본유적인 관념이라고 할 수 없다. 반면, 사각형은 둥글다 는 것은 감각과 무관하게 영혼의 내부에서 도출된다는 점에서 본유관념의 사례에 해당 한다. 들뢰즈가 지적하는 ‘특별한 것은 그렇지 않은 부분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내용 은 이러한 둥근 사각형이라는 명제가 도출되는 과정을 지시한다.
81) 들뢰즈는 낭만주의를 주제로 한 강의(들뢰즈의 강의록 중 관련된 부분만을 선별ㆍ정리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 이와 유사한 사례를 언급한다. 색에 관한 언급은 1983년 4월 19일 강의록을 참조할 수 있다. 빛 자체는 색으로 분할되지 않기 때문에, 색은 ‘오 직 빛과 어둠의 무한한 대립을 틈타서만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들뢰즈가 괴테로부터 빌려온 기본적인 아이디어이다. 이 때 들뢰즈는 색을 ‘사물의 윤곽들’로 정의하고 그 윤 곽을 통해 사물의 구분이 가능해지고, 반대로 그러한 윤곽의 사라짐을 통해 사물의 자 연과의 통합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윤곽의 나타나고 사라짐은 일종 의 ‘자연과 자연 안의 대상들에 흐르는 이기적 욕망’이라는 설명을 제시한다. 빛으로서 의 강도가 있고, 그와 분리할 수 없는 색으로서의 윤곽의 출현을 설명하는 이 대목에서 들뢰즈는 다시 한번 빛과 어둠의 무한한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즉 어떤 항간의 ‘관계’의 관점에서 무한한 발생의 계기를 포착하고 있다.(Deleuze Cours 1983.4.19. 참조) 82) 여기서 ‘미분비(rapport différentiel)’란 개념에서‘ ‘différentiel’, 즉 ‘미분적’의 번역
어이다. 들뢰즈는 이를 ‘분화소’로 번역되는 ‘différencial’과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한 다. 이미 산출된 차이들, 지금 현존하는 개체들간의 분할들로 성립하는 차이들은 ‘분화 소’에 속한다. 세상에 똑같은 두 장의 나뭇잎은 없다는 말은 바로 이 ‘분화소’를 지칭한 다. 때문에 분화소는 개체들 ‘간’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반면 그러한 산출된 차이들 이 전에, 논리적으로 선행하여 그러한 차이 자체를 산출해내는 차이가 있어야만 한다. 이처 럼 ‘스스로 차이짓는 것’을 들뢰즈는 ‘분화소’와 구분해 ‘미분소’라고 칭한다. 이는 다른 개체들과의 구별과는 무관한다. 오직 자신 안에서 차이나는 것들을 생산해내는 역량을 뜻한다. 때문에 분화소가 개체들 ‘간의’ 관계와 결부된다면, 미분소는 개체 ‘내’의 층위 와 상관적이다. 여기서 무의식이 ‘미분적’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스스로 차이짓는 ‘미분 소’와 같은 것으로 잠재적인 층위의 ‘차이화하는 역량’으로 이해될 수 있다.
지각들을 포함하고, 그것들이 미분비 안으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노랑’으로 지각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같은 방법 으로 무수히 많은 갈래를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노랑임’과 ‘파랑임’이라는 규정성이 미세지각이 되는 과정에서 ‘사라진 다’는 점에 유의하자. 만약 각각의 규정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서로간의 혼합을 통해 ‘녹색’이라는 새로운 규정성을 배태할 수 없다. 때문에 의식의 층위에 도달하기 위해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규정성을 획득하는 것이라면, 단연 그러한 의식화 이전에는 미규정성의 상태가 선행되어야 한다. 미세지각은 그 러한 미규정성의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한 미규정성의 상태는 곧 ‘[특별하 지] 않은 부분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구성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미세지각에서 출발한 의식의 문제를 어떻게
‘미분비의 문제’로 전환시키는지를 알게 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모든 의식은 문턱 (Toute coscience est seuil)”(P 117; 국161)이다. 문턱이 최소한의 의식을 나타 낸다면, 언제나 미세지각들은 이 가능한 최소치보다 더 작다. 아직 문턱을 넘지 않 은, 그렇기에 의식화되지 않은 미세지각들은 말 그대로 무한히 작은 것이다. 그리 고 이 무한히 작은 미세지각들이 어떤 특별한 관계를 맺을 때, 이 미분비의 질서 안에서 미세지각은 선별된다. 이렇게 해서 의식의 문턱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의식 으로서의 지각들과 우리는 조우하게 된다.
의식 이하의 차원에 복수적인 미세지각들을 상정하는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들뢰 즈는 다시 ‘평범한 미세지각들’과 ‘두드러진 미세지각들’로 구분하여 그 거시 지각 의 성립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미세지각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 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