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 자체가 극히 미세하여 우리에게 의식되지 않는 것들을 뜻한다. 미세지각은 그렇기에 소위 무의식적인 영혼의 활동을 입증하는 개념인 셈이다.72) 들뢰즈는 라 이프니츠가 모나드에 부여하는 이러한 ‘모호한 지각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추론을 전개한다.
하나는 이 ‘애매한[어두운] 지각’을 위해서 “나는 하나의 신체를 가져야만 한 다”(P 113; 국155)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감각의 오류, 꿈의 가설, 악령의 가설 등 적어도 세 단계를 거치며 조금이라도 명석하지 않은 것은 제거해나가는 방식으로 명석판명이라는 진리의 기준을 확립한다. 그는 밀랍의 비유를 들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형상이 녹아내리고, 분간해낼 수 없을 정도에 다다랐을 때조차 그것이 밀랍 이라고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근거는 통각(apperception)에 있다고 말한다. 이때 부정되는 것은 우선 밀랍을 시각적인 표상에 따라 인식하는 감각이다. 감각에 따 르면 그것은 더 이상 밀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신체, 즉 감각을 작동시키 는 신체는 ‘애매한 지각’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게 신체는 이러한 골 칫덩어리로 전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명석한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심급에 놓이는 것이 신체이다.73) 모든 사물을 동등하게 표현할 수 없는 영혼이 어떤 사물을 명석 하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는 ‘신체간의 연관관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저는 제가 말한 것, 즉 “영혼은(나머지 다른 조건들이 같을 경우) 자신의 신체에 속한 것을 더 분명하게 표현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혼은 특정한 방식으로, 특별히 다른 물체와 자신의 신체 간의 연관 관계(relations other bodies)에 따라서 전 우주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모든 사물을 동등하게 표현할 수 없습 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들 간에는 구별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로부터 영혼이 자 기 신체의 일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완전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귀결되지는 않습니다.
외부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동등하게 표현되지 않는 이 부분들 자체에도 연관 관계 의 등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AG, 81; 서신, 203-4쪽, 강조는 인용자)
이로부터 들뢰즈는 라이프니츠가 제시하는 ‘애매한 지각’은 우리가 신체를 갖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 안에 애매한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신체를 가져야만 한다”(P 114; 국156)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내 신체와 관계
72) “라이프니츠는 그의 작은 지각의 이론으로 20세기 초 프로이트에 훨씬 앞선 최초의 무의식의 발견자가 되었다.” 배선복, 『라이프니츠의 삶과 철학세계』, 철학과 현실사, 2007, 144쪽
73) 이것은 들뢰즈의 독특한 해석이다. 본래 신체(corp)는 관념이 만들어내는 현상에 불과 하다고 간주하는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 신체의 중요성은 결코 주장되지 않는다.
반면 들뢰즈는 그의 지각론에서 반대로 신체의 중요성을 도출해내고 있다.
를 맺는 정도에 따라 외부사물이 명석하게 혹은 애매하게 표현될 것인가가 결정된 다는 것은, 그러한 신체라는 기준 없이는 어떠한 명석한 지각 역시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각 모나드가 신체를 갖는 것은, 그것이 명석한 지대를 갖기 때문이다. 여 기에서 이 지대는 신체와의 관계를 구성하며, 자신의 고유한 ‘관계항’을 낳는다. 태어나 서 죽을 때까지 명석한 지대를 답파하거나 탐색하는 과제가 부과된 신체를 우리가 가져 야만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 명석한 지대를 갖기 때문이다.(P 114; 국157)
이처럼 나는 하나의 신체를 가져야만 한다는 요구를 들뢰즈는 ‘정신적인 필요성’
으로 해석함으로써, “데카르트 자연학적 귀납을 라이프니츠는 신체의 정신적 연역 으로”(P 114; 국156)고 역전시킨다고 말한다.
‘애매한 지각들’로부터 도출되는 다른 하나는, 그를 통해 더 이상 명석판명함이 라는 진리의 기준이 동시에 작동할 수 없게 된다는 데에 있다. 앞서 모나드는 우 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영향을 감지하지만, 그 모든 것에 전부 주의를 기 울일 수는 없다는 점을 보았다. 바꿔 말하면 어떤 ‘판명한’ 지각도 불가피하게 이 러한 수많은 ‘모호한’ 지각을 포함할 수 밖에 없다. 파도소리를 들을 때 역시 마찬 가지다. 비록 구별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수백 수천의 개별적인 파도 소리를 듣는 다. 그리고 그 ‘모든 파도의 개별적인 소음들’에 대한 작은 지각들로 이뤄진 총괄 적 결과물로서 바다의 굉장한 소음이 들리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러한 작은 지 각들의 총괄적 결과물을 우리는 ‘파도소리’로 ‘대강(grossièrement)’ 표현하는 것 이다.
‘전체적 지각들이 무한히 많은 작은 지각들로 이뤄진다면 욕구 또는 큰 욕동은 무한히 많은 작은 욕구들로 이뤄진다. 보다시피 욕구는 작은 지각에 대응하는 벡터이다. 그것은 아주 기이한 무의식이 된다. 물방울과 대응하는, 갈증 있는 사람에게는 작은 욕동과 대 응하는 바다의 물방울. 그리고 내가 ‘아 목말라, 목말라!’라고 말할 때, 나는 무엇을 하 는 것인가? 나를 움직이는 수백수천의 작은 지각들의, 그리고 나를 관통하는 수백수천 의 작은 욕구들의 총괄적 결과물을 대강;크게 표현하는 것이다.’74)
그럼에도 라이프니츠는 파도소리를 명석하게 들었다고 말한다. 무수한 수의 모 호한 지각들을 ‘판명하게’ 지각할 수 없는 상태이므로, 그 미세지각들의 총괄적 결 과물을 ‘대강’ 표현하는 것임에도 말이다. 물론 우리는 파도소리와 그것이 포함하
74) Deleuze Cours 1980.4.29.
는 미세지각들간의 관계에 관한한 ‘모호하게’ 지각한다. 반면 파도소리를 다른 소 리들(뱃고동 소리, 갈매기의 울음소리, a의 목소리 등)과는 ‘판명하게’ 구분한다.
그럼에도 총괄적 결과물로서의 파도소리와 그것이 포함하는 무수한 수의 모호한 지각들 간의 관계는 여전히 구분불가능한 지점에 놓인다는 점에서 모호하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어떤 것을 명석하게 지각한다는 것은 언제나 그것이 포함하는 수많 은 미세지각에 대한 모호한 지각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추론이 나온다. 이때에 명석판명함이라는 기준은 더 이상 동시에 작동할 수 없게 된다. 명석한 동시에 모 호한 것, 그것이 우리의 지각을 구성하는 다른 표현이라는 점을 저 파도의 예시가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