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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시대 세대교체와 ‘고난의 행군 세대’ 등장

Dalam dokumen 김정일 시대 북한의 정치체제 (Halaman 68-83)

명 2세대이면서 김정일 비서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한성룡․최영 림․최태복 등이 새로 등장하였다. 김정일 비서는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대대적인 세대교체와 인사이동을 자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3년간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 비서는 당, 정, 군 주요 간부들에 대한 인사를 유보하였다. 다만 오진우 인민무 력부장 등 혁명 1세대의 잇따른 사망으로 공석이 된 자리를 보선하는 데 그쳤다.

김일성 주석 사망 후 북한 권력엘리트 내부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97년 10월 김정일 비서가 노동당 총비서에 공식 추대된 시점을 전후

해서였다. 이후 김정일 총비서는 1998년 9월 10기 대의원 선거를 통해 내각과 대중단체의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교체하고, 2003년 8월 제11기 대의원 선거를 통해 당과 군의 일부 인사를 교체하기 시작하였다.

가. 1998년 헌법개정과 세대교체 : 내각과 대중단체 간부의 변화

1997년 각 시․도의 농정 책임자인 농촌경리위원장들이 대거 교체되

면서 세대교체 바람이 북한사회에 불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평안남 도․양강도․황해남도 등 6개 도․직할시 농촌경리위원장이 물러났다. 이들은 60~70대 노년층들이었으며 1950~60년대 ‘천리마세대’를 대표 하는 ‘노력영웅’들이었다. 빈자리에는 실력과 실천력을 겸비한 40~50대 로 채워졌다. 곧이어 지방행정을 책임지는 도․군당 책임비서 및 인민 위원장, 공장․기업소 지배인들이 차례로 교체되었다. 13개 도․직할시 당책임비서 및 인민위원장 가운데 새로운 인물이 80%를 넘어섰다.

1998년 조선노동당의 외곽단체들의 책임자들이 바뀌었다. ‘김일성사

회주의청년동맹’은 1998년 1월 23~28일 제8기 14차 전원회의를 열고 조직문제를 토의한 후 최용해 전임 제1비서를 ‘신병관계’의 이유로 해임 하고 이일환을 선출했다.70이일환 청년동맹 제1비서는 항일빨치산 김 명화의 외손자로 ‘빨치산 3세대’에 해당하는 신세대이다. ‘조선민주녀성

동맹’(여맹)은 1998년 4월에 열린 여맹 제5기 28차 전원회의에서 1971

년 10월 선출된 후 27년간 위원장 자리를 지켜온 김성애(김일성 주석의

부인)를 경질하고 1985년 8월부터 대외문화연락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아오던 천연옥을 임명했다.71

‘조선농업근로자동맹’(농근맹)은 1998년 4월 22일 평양에서 제7기 33

차 전원회의를 소집하고 조직문제를 토의, 최성숙 전임 위원장을 경질하 고 후임에 황해남도 신천군 당책임비서를 지낸 승상섭을 선출했다.72

‘조선직업총동맹’(직총)은 1998년 6월 29일 직총 제7기 제37차 전원회

의를 소집 전임 위원장 주성일을 “건강상의 관계로 해임소환”하고 염순 길을 선출했다. 신임 직총위원장 염순길은 1986년 직총 산하 강원도 직 업동맹 위원장, 1989년 강원도 천내탄광연합기업소 당책임비서를 역임 했다.73

이처럼 당외곽단체 중앙간부들의 연령이 70대에서 50~60대로 낮아 졌다. 새 인물들은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종합대학 출신들의 ‘혁명 2 세대’로 김정일이 70년대 주도한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에서 두각을 보였던 인물들이다.

이러한 간부 교체 바람은 1998년 7월 26일에 실시된 최고인민회의 10

70 북한연감 2000 (서울: 연합뉴스, 1999), p. 404.

71위의 책, p. 401; 2000년 10월 3일에 열린 여맹 제5기 제34차 전원회의에서 천연옥 이 다른 사업에 ‘조동’(전보)된 것과 관련하여 박순희가 새 위원장이 되었다. 선중앙방송 , 2000년 10월 4일.

72 북한연감 2000 , pp. 402-403.

73위의 책, p. 401.

기 대의원선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대의원 687명의 64%에 해당하는

449명이 교체되었다. 9기 대의원선거 때의 교체 폭 31.4%(214명)에 비

하면 2배가 넘는다.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두각을 나타내 발탁된 공장․기업소의 직장장․기사장, 협동농장 관리위원장, 경제기 관 실무간부 등이 대의원에 대거 발탁됐기 때문이었다.

또한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중 군부인물이 107명을 차지했는데, 이는 9기의 62명에 비해 약 2배가 증가된 것이다.74

북한은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 회의를 개최하여 주 석제를 폐지하고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에 재추대함으로써 권력승계를 마무리하였다. 김정일 체제의 공식출범은 ‘혁명 2세대(빨치산 2세대)’의 시대가 본격화되었고, 김정일이 1974년 후계자로 지명된 후 24년 만에 세대교체가 완료된 것을 의미한다. 박성철, 김영주 등 살아있는 혁명 1 세대들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으로 임명돼 사실상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제10기 대의원선거를 통해 나타난 인사의 특징은 크게 3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첫째, 당 정치국원, 내각 부총리급, 군의 대장급 이상의 ‘영도 핵심층’에는 약간의 자리이동 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로 임명된 후 사실상 인사권을 행사해 왔기 때문 에 북한의 최고수뇌부와 당, 군의 핵심간부진에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이 다. 그만큼 북한 핵심간부층은 안정돼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혁명 1세

대’들은 백학림, 이을설 등 몇 명을 제외하고 명예직을 맡아 정치일선에

서 물러났다. 이들은 대부분 70~80대로 북한사회의 노년층을 대표한다.

둘째, ‘지도핵심층’(당과 내각의 부장급)을 비롯해 중간간부층에 대대

74정창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결과와 전망,” 통일경제, 8월호 (서울: 현대경제연구원, 1998) 참조.

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김정일 후계체제 형성의 ‘1등 공신’ 들인 서윤석(전 평남도당 책임비서, 정치국원), 최문선(전 황해북도당 책임비서), 김강환 대장, 김철명(전 로동신문 책임주필) 등이 건강, 정치 적 이유로 물러났다. 대신 전병호, 한성룡, 김국태, 김기남, 김용순, 최태

복, 정하철(후에 승진) 등 당비서와 장성택, 이용철, 염기순, 최춘황, 이

제강 등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등이 여전히 실세자리를 유지했다. 셋째, 내각은 전문지식이 있는 ‘실무형’으로, 당과 군은 만경대혁명학 원 출신의 빨치산 2세들로 인선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실무형 승진사례 로는 부총리가 된 조창덕과 곽범기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료 중에서는 만경대혁명학원 1기 출신인 김국태․전병호 당비서 등이 선두주자다. 군부에서는 김영춘 총참모장을 비롯 총참모부와 인민 무력부의 핵심간부 대부분이 만경대혁명학원 1기~2기생으로 구성돼 있으며, 만경대혁명학원 2~5기 출신들이 총참모부의 국장과 군단장급 을 맡고 있다.

이들이 급부상하고 있는 것은 만경대혁명학원이 빨치산 2세들을 체계 적으로 당과 군의 간부로 길러내는 교육기관이라는 점도 있지만 김정일 위원장과 특별한 인연도 크게 작용했다. 김정일이 어린 시절을 이들과 함께 보내면서 끈끈한 인간관계를 형성했던 것이다. 북한은 이를 ‘혈연 적 관계’로까지 선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김정일 체제의 공식출범은 ‘혁명 2세대(빨치산 2세대)’와 3세대의 시대가 본격화된 것을 의미한다.

특히 1960년대 초반 김정일 위원장과 김일성종합대학에 함께 다닌

‘대학 동창생’들과 60년대 중반에 당 조직지도부에 들어간 당료(黨僚)들

의 급부상이 주목된다. 이들 대부분은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이어서 자연스럽게 북한 정치권의 세대교체를 이끌고 있다.75

1998년 헌법개정을 통해 두드러진 현상은 권력구조의 개편이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주석제와 중앙인민위원회가 폐지되고, 그 기능이 국방위 원장과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에게 상당부분 이양됐다는 점이다.

북한은 주석을 대신해 국방위원장을 사실상 국가 최고직책으로 격상시 켰다.

9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장 추대연설에 나선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국방위원장이 “나라의 정치 군사 경제역량의 총체 를 통솔지휘”하고 “전반적 국력을 강화 발전시키는 사업을 조직영도하 는 국가의 최고직책”이라고 규정하였다.76 그러나 헌법규정상(100조) 국방위원회는 국가주권의 최고군사지도기관이며 전반적 국방관리기관 일 뿐이다. 국방위원장도 일체 무력을 통솔하며 국방사업 전반을 지도한 다고만 규정되어 있다. 10명으로 구성된 국방위원회의 면면도 모두 무 력과 군수분야를 담당하는 간부들로 망라되어 있다.77이를 통해 볼 때 국방위원장이 폐지된 주석직을 대신해 국가최고직책의 위상을 갖는 것 은 헌법규정과 상관없이 현실적 위상에 대한 특별한 의미부여라고 보아 야 할 것이다. 반면에 국방위원회는 전반적 국방관리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국방위원장과는 분리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국방 위원장은 국방을 포함해 전반적인 국가사업을 관장하지만 국방위원회 의 역할은 무력과 군수분야로 한정된다는 의미다.

또 다른 변화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도 최고인민위

75 중앙일보 , 2001년 7월 31일.

76 북한연감 2004 (서울: 연합뉴스, 2003), p. 165.

77국방위원회는 위원장과 제1부위원장, 부위원장, 위원으로 구성된다.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 회의에서 위원장은 김정일, 1부위원장 조명록 차수, 부위원장 김일철(인민무력상), 이용무 차수가 선출됐고, 위원에는 김영춘(총참모 장)차수, 연형묵(자강도당 책임비서), 이을설(호위총국장)원수, 백학림(사회안전 상)차수, 전병호(군수담당)비서, 김철만(제2경제위원회 위원장)차수가 선출됐다.

Dalam dokumen 김정일 시대 북한의 정치체제 (Halaman 68-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