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직후 김일성이 당․정․군을 장악하였으나, 초기 권력구조는 다 분히 집단지도체제적 성격이 강했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만주 항일 빨치산세력 외에도 국내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가했던 국내파세력, 중 국 연안에서 민족해방운동에 참가했던 연안파, 그리고 소련에서 들어온 조선인 2․3세 그룹(소련파)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 이다.65
64해방직후부터 북한은 간부 인사원칙을 규정한 결정서를 채택한 바 있다. 1946년
10월 21일 북조선노동당 중앙상무위원회는 「간부 배치 및 이동에 관하여」라는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이 결정은 북로당의 성장과 간부 충원에서 전환점을 만드 는 중요한 것이었다. 중앙당 간부부에서 취급하고 중앙상무위원회의 비준을 요하 는 간부들은 당과 사회단체에서는 중앙당부 각 부장․부부장․과장․지도원, 도 당부 위원장․부위원장․부장․부부장, 시(구역)․군당부 위원장․부위원장이 었고, 사회단체에서는 중앙조직 위원장․부위원장․부장․부부장 등이었다. 조 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간부 배치 및 이동에 관하여: 북로당 중앙상무위원회 제9 차 회의 결정서 (1946.10.21),” 결정집(1946.9.~1948.3.) , pp. 38-39.
따라서 정권 초기 북한의 주도세력은 항일빨치산, 국내 공산주의운동 세력, 연안파 등이 중심을 이루고 여기에 소련파, 홍명희, 백남운 등 일 부 남쪽 출신 인사들이 결합되는 형태로 형성됐다.
1950년대 들어 김일성은 ‘당의 통일과 단결’을 내세워 이들 세력을 하
나씩 포섭하거나 제거해 나가면서 북한 엘리트층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 져온다.
1952년 12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5차 전원회의는 그 신호탄이었다.
이 회의에서 박헌영․이승엽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 남조선노동당 출신 지도부가 종파주의․지방주의적 경향으로 비판을 받았고, 김열 등 소련 파도 관료주의적 경향으로 비판을 받았다. 결국 다음해 3월 박헌영, 이 승엽 등은 ‘반혁명음모와 미제의 간첩활동혐의’로 체포되었으며, 1954년 에는 김열 등 일부 소련파간부들이 숙청됐다.
6․25전쟁이 끝난 후 김일성은 ‘형태는 조선사람인데 머리는 소련이 나 중국에 가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주체를 강조하고 나섰다. 그러 나 이것은 당 내부의 반발을 없앤 후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56년 8월 말 노동당중앙위 전원회의는 1956년 6~7월에 있었던 김
일성의 소련, 동구권 방문결과를 보고받고 인민보건사업 개선 강화에 관 한 문제를 토의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8월 전원회의에서 연안파인 최창
익(당중앙위원 겸 당중앙위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내각 부수상)과 윤공
흠(당중앙위원, 상업상), 소련파인 박창옥(당중앙위원, 부수상) 등이 연 합하여 김일성의 정치노선과 경제정책을 비난하면서 김일성의 리더십 에 도전하였다. 이른바 ‘8월종파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당내의 절대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주모자였던 최창익 등 일부는 체
65김남식, “해방 전후 북한현대사의 재인식,”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5 (서울: 한길
사, 1989), pp. 28-30.
포되어 처벌을 받았고, 서휘, 윤공흠 등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 보면 경제정책을 가지고 논쟁이 벌어졌지만, 본 질적인 면은 ①유일지도체제냐 집단지도체제냐 하는 국가 영도체제 문제 와 ②당의 뿌리문제, 즉 혁명전통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66 이 사건을 계기로 김일성은 당 정비작업에 들어갔다. 1956년 말부터
‘중앙당 집중지도사업’이 그것이다. 이 사업은 지방당 조직에 대한 사상
강화의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당조직을 강화하려는 ‘아래로부터의 반종 파투쟁’이 병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빨치산 투쟁이 당의 뿌리이자 혁명전통으로 확인되었고 유일지도체계를 강화 해 나갈 것이 결정되었다.
또한 국내파, 소련파, 연안파들에 대한 개별적인 숙청이 진행되었는 데, 이들은 ‘8월종파사건’과는 직접 관련은 없고 김일성 중심의 유일지 도 체계 확립에 위배되어 물러난 것이었다.
1958년 3월 제1차 노동당 대표자회의에서 김일성은 ‘종파주의’의 완
전종식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김일성은 유일지도체계의 기반을 확고하 게 마련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김창만 등 일부 연안파와 일부 남 로당 출신들이 여전히 노동당 중앙위원급에 남아 있었다.
1950년대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유일지도체계가 뿌리를 내리는 시 기라면 1960년대는 유일사상 체제와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제가 완성되 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8월종파사건’을 거치면서 김일성은 당적 사상 체계, 즉 노동당의 사상체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정리해 나갔 다. 1950년대 중반부터 제기된 주체교양과 함께 당적 지도체계에 대한 문제제기가 된 것이다. 이것은 노동당의 당적 체계는 곧 김일성의 사상 이고, 노동당의 유일한 혁명전통은 항일빨치산 투쟁이라는 것으로 귀결
66자세한 내용은 정창현, 인물로 본 북한현대사 (서울: 선인, 2002) 참조.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 중심의 유일사상체계와 영도체계에 반대하거나 적극적이지 않았던 ‘조선민족해방동맹계’의 박금철․이효순 등이 제거 되었다.
김일성은 1967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하여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당내에 다른 어떤 사상도 인정하지 않고 ‘김일성의 혁명사상’만을 유일사상으로 강조한 것이다. 이 시기는 국내적으로 보면 김일성에 반대할 수 있는 세 력이 사실상 모두 제거된 상황이었으며, 국제적으로 보면 소련과 중국에 대해 자주노선을 표방한 시점이었다.
제5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직접 작성한 보고문건을 통해 당의 유일
사상의 진수를 이루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주체사상이고 당의 유 일사상체계는 주체의 사상체계임을 선언하였다. 또한 김일성은 보고를 통해 “당을 강화하는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당에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며 그에 기초하여 당대열의 통일과 단결을 계속 확고히 보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때에 이르면 이미 북한사회는 김일성을 중심으 로 한 유일적 영도체계가 확고히 수립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1967년 당의 유일사상체계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것과 동시에 수령 의 유일영도체계 형성이 시작됐다. 북한에서 본격적으로 김일성을 수령 으로 지칭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이다. 이것은 당 총비서인 김일성을 중 심으로 당․정․군의 유일적 영도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한 것을 의미했 다. 이때 이미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원칙’이 1967년 말에 작성되어
1968년 초부터 당간부생활의 기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수령의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당․정․군의 역할을 수령에 게 집중하고 유일적 영도를 보장․집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근거를 내
세워 이것을 제도화하는 방안으로 나온 것이 1972년의 국가주석제이다.
이 시점이 되면 북한권력층은 김일성을 비롯해 김일, 임춘추, 최용건, 서철, 오백룡, 오진우, 전창철, 김동규 등 항일빨치산 출신의 ‘영도간부 층’이 당․정․군을 완전 장악하고 김정일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빨치산
2세’그룹이 ‘지도간부층’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한다.67
특히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선정된 후 후계체제가 형성되 면서부터는 혁명 1세대와 혁명 2세대가 중첩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 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혁명 2세대들이 실무책임자로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은 ‘항일빨치산 혈통의 재생산’이라고도 볼 수 있다.68항 일빨치산 시절의 김일성․김책이 김정일 후계체제가 형성되면서 김정
일․김국태(김책의 장남)로 재생산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후계체제의 안정화는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을 겪 으면서 북한사회에 새로운 권력엘리트층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으로 작 용한다.
67북한 권력엘리트의 통합과정에 대해서는 전현준 외, 북한의 권력엘리트 연구 (서 울: 민족통일연구원, 1992), 제2장 참조.
68‘항일빨치산 혈통의 재생산’ 과정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광운, 북한정치사연구
1 (서울: 선인, 2004) 참조.
<그림 Ⅲ-1> 북한 권력엘리트의 역사적 변천
국내 공산주의계 박헌영․이승엽
범빨치산계 김일성
연안계 김두봉․무정
소련계 허가이․박창옥
연안계 김두봉․최창익
소련계 박창옥
실무관료 정준택․이종옥
신진세대 김정일
신진세대 만경대혁명학원 실무 범빨치산계 관료 김일성, 최용건, 김일
김일성직계․실무관료
김정일 후계체제
빨치산계열 갑산계열 김일성 박금철
실무관료 김일성계열 제2,3로군계 이종옥 김일성, 오진우 김광협
1949년 6월 남․북로당합당
1953년 8월 제6차 전원회의
1956년 8월
‘8월 종파사건’
1967년 4월 박금철사건
1969년 1월 김창봉사건
1974년 2월 5기 8차 전원회의
갈등관계 연합관계 탈락
탈락
탈락
탈락
출처: 정영철, “김정일 체제 형성의 사회정치적 기원: 1967~1982”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1), p. 65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