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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 남북 간 평화에 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유럽 에서 전개되었던 데땅뜨 무드에 편승하여 이루어진 7.4남북공동성명을 들 수 있다.

둘째는 6‧25전쟁 이후 북한의 위장평화 공세이다. 북한은 6‧25전쟁 이후 남한이 전 후복구 사업에 전념하고 있을 당시부터 군비축소 제안 등 적극적 위장 평화공세를 펼쳐 왔다.

가. 7

4남북공동성명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은 남한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북한의 노동당 조직지

72) 제성호, “한반도 안보환경 하에서 정전협정의 역할과 미래관리체제”, 『국방정책연구』, 제29권 제2호(서울: 한국국방연구원, 2013), pp.41-45.

도부장 김영주의 비밀접촉의 결과로 남・북 간 합의가 공개되었다. 자주, 평화, 민 족대단결이라는 3원칙에 합의하였고 이후 남북대화의 틀로서 남북조절위원회를 개 최하게 되었다. 하지만 7·4남북공동성명은 자발적인 의지와 협의의 결과물이라기보 다는 국제정세에 끼워 맞추기 위해 마지못해서 내놓은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 국 7·4남북공동성명은 남북 간의 실질적인 진전이라기보다는 남북 당사자 모두 독 재정권의 강화를 위한 정치 목적을 위해서 이를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73) 물론 여 기에는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가 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기정사실이다. 1972 년 5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 사이에 긴장완화를 위한 데땅뜨 정책이 조인되었다. 거기다가 미국과 중국이 극적인 화해를 함으로써 동북아 가 대립구도에서 화해구도로 변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긴장 완화를 희망했고 남북대화의 필요성을 요구하게 되었다.74) 이러한 미국과 소련의 데땅뜨가 7·4남북공동성명이 가능케 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이후 남북관계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추진을 할 수 없는 한계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국제정세에 어쩔 수 없이 반응하는 수동적인 자세는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진전될 수 없는 결과를 예상할 수밖에는 없었다.75)

7·4남북공동성명은 결국 남북한 간의 독재정권의 강화수단으로 전락했다. 당시 박 정희 정부는 직전 총선과 대선에 야당의 상당한 약진에 정치적으로 부담감을 느끼 고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런 부담감을 해소함과 동시에 자신의 독재 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7·4남북공동성명 이후 통일환경 변화라는 명 분을 내세우며 유신헌법을 강행, 통과시켰다. 북한 김일성도 1960년대 모험주의적 군사노선이 한계에 다다르자 대남평화노선을 계속 유지하면서 결국 7·4남북공동성 명에 합의했다. 그리고 7·4남북공동성명 이후 사회주의 헌법을 통과시켜 수령 독재 체제를 더욱 강화시켰다. 물론 7·4남북공동성명은 6‧25전쟁 이후 남북 분단 이후 최 초의 고위급회담으로서 남북이 합의했다는 것과 남북 모두에게 통일의 가능성을 열

73) 김근식, “남북 합의의 안정성 평가와 새로운 남북합의의 필요조건”, 『동아시아평화경제연구 1』, (2014. 12), pp.10-12.

74) 1972년 2월 닉슨의 중국 방문 당시 공동성명에는 ‘유엔을 통한 한반도문제 해결’이 아니라

‘남북대화에 의한 한반도문제 해결’을 주장했다. 통일노력60년 발간위원회 편, 『하늘길 땅길 바닷길 열어 통일로』,(서울: 도서출판 다해:통일부, 2005). pp.88-89.

75) 7・4남북공동성명은 미중 데땅트라는 우호적인 외북환경 조성에도 불구하고 상호존재 불인 정, 짧은 기간의 최고위급 접촉 등으로 인해 한반도 갈등 관리로의 성공적 전환에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정진, “냉전시대 한반도 갈등 관린의 첫실험, 7.14남북 공동성명”, 『북한 연구학 회복』, 16권 1호 (2012).

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7·4남북공동성명은 주체적인 합의라기보다는 미·소 데땅뜨라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일시적인 합의였고 또한 남과 북이 독 재강화를 위한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한 한 계를 지닐 수밖엔 없었다. 결국 1973년 8월 남북조절위원회는 세 번의 본회의를 거 친 후 결렬되고 말았다. 남과 북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자 통일원칙의 차별 을 구실로 대화 결렬의 핑계를 삼았다.

7·4남북공동성명의 내부 동력이 부족할 수밖엔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최고위 급 정상 간의 합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실 합의, 서명한 주체가 상부의 뜻을 받 들어 남측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북측의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가 서명한 것이었다. 이는 합의의 주체와 합의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합의 내용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의 3대 원칙에 합의한다는 것이었고 긴장 완화와 신뢰조성 추진을 명시하고 이후 남북대화를 위해서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 운영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제정세 변화의 외적 요인과 남북 당자간의 국내 독 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7·4남북공동성명이 이용됨으로써 실질적인 성과 를 기대할 수 없었다.

나. 북한의 위장평화 공세와 군비축소 제안

북한은 지금까지 중대한 도발을 시도할 경우 그 이전에 평화적 제안을 펼치는 소 위 ‘위장평화공세’를 전략적으로 활용해 왔다. 이는 화전양면전술을 활용하여 도발 의 기습효과를 노리면서 남남갈등을 유발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북한이 위장평화공세를 통한 화전양면전술을 시도한 사례는 계속 반복되어 왔다.

그 예로 북한은 남북 단일 국회구성계획을 발표한 직 후 6‧25남침을 감행했고, 남북 연방제 통일을 제의한 직 후 1968년 1월21일 청와대 기습목적으로 무장공비를 침 투시키고, 동년 11월 2일에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었다. 북한은 1972 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시기에 즈음하여 남침용 땅굴을 굴착하기 시작하였고, 1974년 8월에 조국통일 5대강령을 제시한 직후 8.15광복절 기념행사에 박정희 대 통령 저격을 시도하였으며 그 결과 육영수 영부인이 서거하였다. 또한 1976년에는 남북한 군대를 30만으로 감축하자는 군축을 제안한 직후 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 건이 있었으며, 1983년에는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미 3자회담을 제의한 후 동년 10 월에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를, 1987년에는 민족단합 5개항을 발표한 후 동년 11월

29일에 KAL858기 폭탄테러를 감행했다. 남북고위급회담이 진행 중인 기간인 1999 년 6월 15일에는 제1차 연평해전, 월드컵 축하 메시지를 전달한 직후에 제2차 연평 해전이 발발했다.76)

특히 북한의 위장평화공세의 일환으로 군비축소 제안을 강화했다. 남북한 간의 군 비통제 논의는 정전협정 이후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 어간에 열린 제네바 정치회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북한은 남한 내 미군 철수 및 남북한 공히 병 력을 10만 명을 유지하고, 무기도 동수보유 원칙에 의한 군축을 하자고 제안하였 다.77) 이러한 북한의 공세적 제안에 대해 한국은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그 이유는 6‧25전쟁 직후 군사력의 상대적 열세로 한국의 입장은 오히려 군사력 증강이 절실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북한은 줄곧 ‘주한・미군 철수’와 ‘10만 명으로 병력감축’ 등 의 기존 제안을 반복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에 대해 한국은 한・미동맹을 와해 시키기 위한 위장평화공세로 인식하게 되었다.

1973년 3월 15일 7‧4남북공동성명의 창구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남북조절위원 회’ 본회의에서 북한은 기존제안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소위 ‘군사력 대치상태 해소 5개항’을 제의하였으나 한국은 진정한 신뢰구축의 중요성을 재강조하면서 군축 및 평화협정 체결은 시기상조임을 주장하였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은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를 통해서 성공적으로 추진 하고 있는 유럽의 신뢰구축 사례를 한반도에 적용하기 위해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 한 제안했다. 결국 북한이 주장한 군비통제 추진원칙은 ‘선 군축’이며, 한국이 추진 하고자 하는 군비통제 원칙은 ‘선 신뢰구축’으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어 한반도 군 비통제는 답보상태에 머물고 말았다. 군비통제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필수 적 조건이라는 점에서 보다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다. 냉전기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성격

남북한이 첨예하게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냉전기에 7‧4남북공동성명을

76) 김동현 기자, “북, 또 화전양면 전술? 잠수함 기동으로 알아본 사례들”, 『브릿지경제』, 2015. 8.

23일자, http://www.viva100.com/main/view.php?key=20150823010004649(검색일:2017.

5.10)

77) 신영석, 『역대정권의 통일정책 변천사: 한반도 통일논의 60년』(서울 : 평화문제연구소, 2008), pp.71-73.

통해서 이산가족 상봉과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게 된 사실은 당시의 국내정치 상황 속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7‧4남북공동성명은 별 다른 성 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냉전기인 70년도 초에 7‧4남북공동성명에 북한이 임하게 된 배경은 두 가지가 상 반되어 존재할 수 있다. 첫째는 세계적 데땅트 무드에 편승하여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당시 유럽은 소련의 주장으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추진되기 시작 한 시점이었다.

독재정권도 국제사회의 안보질서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반 면에 북한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화에 임하게 된 요인을 화전양면전술로 보는 경 향이 많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은 7‧4남북공동성명에 임하는 시기에 남침 용 땅굴을 파기 시작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저격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 로 미루어 볼 때, 북한이 대화에 임하는 것은 진정성이 결여된 측면이 강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냉전기에 김일성 집권기에 감행한 테러 및 군사적 도발행위는 김정은 정권에 이 르기까지 반복되고 있다. 북한의 도발이 반복되어 온 배경에는 본질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받고 있다. 물론 그동안 북한의 도발은 각 사건별로 발생요인이 존재하지만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게 반복되는 공통분모가 존 재한다는 것이다. 그 공통분모에 해당되는 요인은 ‘한반도 공산화’라는 북한의 최종 목적이라고 보는 주장이 있다.

아울러 북한의 ‘한반도 공산화’라는 최종목적은 정권안보와 무관하지 않다. 즉, 백 두혈통만이 ‘한반도 공산화’라는 최종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을 북한인민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한반도 공산화’라는 최종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대남 군사적 도발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대남도발은 북한 정권의 정통성에 기반하고 있으며, 정권안보와 직결된다는 점이다.78)

결국, 북한정권은 ‘한반도 공산화’라는 최종목적을 수정하기란 어렵다. 그 이유는 이를 수정할 경우 백두혈통에 의한 세습정권의 정통성을 상실할 우려가 크기 때문 이다. 또한 북한지역에서 세습정권의 당위성이 존재하는 한 이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한계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78) 김재철, “김정은 정권의 도발요인 분석과 재도발 억제전략: 핵·미사일 도발과 국지 무력도발 을 중심으로”, 『한국동북아논총』, 21집 제2호(한국동북아학회, 2016), pp.116-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