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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정전협정 배경과 내용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UN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북진을 하였지만 1950년 10월 16 일 중국인민지원군의 대규모 참전으로 전세는 또다시 역전되었다. 이후 미국 상원의 원 에드윈 존슨(Edwing Johnson)은 1951년 5월, 38선을 경계로 하는 정전을 모색 하자 스탈린도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정전협상이 진행되게 되었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정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한반도의 분단 고착화의 시작이었 다.56) 3년간의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살펴보면 6‧25전쟁에 한국군 약59만 명, 미군 약 30만 명, 기타 15개국 유엔군 등 총93만명이 참전하였다. 이에 반해 공산 측에서는 북한군 약26만명, 중국 인민지원군 약78만명, 소련군 약2만 6천명 등57) 총106만 6천명이 참전하였다. 결과적으로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당사국은 물론 이고 참전국들도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한국과 유엔군 전사자, 비전투 사망자, 부 상자, 행방불명자, 포로 등은 약 47만 명 이상이었다. 공산측의 경우도 약 119만 -158만 명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였다.58)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 고지쟁탈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1951년 7월 10일부 터 약 2년 간 진행된 휴전을 위한 군사회담은 양측 모두 전쟁에서 확실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휴전회담이 이처럼 길게 진행된 이유는 군사분계선 획정문제와 포로교환 방식 등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었기 때문 이었다.

56) 6‧25전쟁에 대해서는 예프게니 바자노프/나딸리아 바자노바, 『소련의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 김광린 역(서울: 열림, 1998); 김학준, 『한국전쟁:원인.과정.휴전.영향』(서울: 박영사, 1989) 등 참조.

57) 당시 소련 공군대장이었던 게오르기 로보프의 증언에 의하면 스탈린은 1950년 11월8일부터 약 7만명의 공군을 중국군과 중국기로 위장하여 참전시켰다. 『동아일보』, 1992년 7월 6일자.

58) 6‧25전쟁의 피해상황에 대해서는 “한국전쟁”, http://ko.wikipedia.org, pp.91-124.

유엔군 측의 입장에서 볼 때는 최초 설정한 전쟁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 것이며, 북한 측에서 볼 때는 전쟁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이 정전협정에 서명한 배경은 당시 상황에서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물자와 식량문제로 위험한 상황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과 소련도 전쟁이 다 시 확산될 경우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양측 모두 전쟁이 지 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이로 인해 제한전쟁 양상을 보였다.

양측의 정전협정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정 전협정 체결을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쪽으 로 분위기가 굳어져 가자 협정체결 막바지에 불만을 표출하는 차원의 정치적 결단 으로 약 2만5000여 명에 이르는 방공포로를 석방하자 이에 놀란 미국은 정전협정을 체결을 동의하는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는, 즉 전쟁을 일단 중지시키는 의미인 정전협정이라는 불안전성을 동맹으로 보완해주는 방식으로 결정된 것이다.

현재까지 남북관계를 군사적인 측면에서 국제법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6・25 전쟁 정전협정이다. 정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10시 판문점에서 클라크(Mark Clark)유엔군 총사령관,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 팽덕회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간에 서명되었다. 해리슨(William Harrison) 미군 육군 중장은 유엔군대표단 수석 대표로, 그리고 남일 북한군 대장은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대표 로 각각 배석자로서 추가 서명하였다. 정전협정의 원명은 ‘제련합군 총사령관을 일 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 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59)이다.

정전협정은 서언, 5조 63항, 부록 11조 26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언은 “쌍방에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60)충돌을 정지시키기 위하여 서 로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할 목적으로” 협정을 체결한다고 밝히고 있다.

‘제1조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는 군사분계선(MDL)의 확정과 이 선으로부터 각 기 2km씩 후퇴한 비무장지대(DMZ)설정 (1항), 한강 하구수역의 민용선박 항행 개 59) 정전협정 원문은 허문영 외, 『한반도 평화체제: 자료와 해제』(서울: 통일연구원, 2007),

pp.91-124.참조.

60) 정전협정에서는 ‘한국’은 남북한을 모두 포함하는 Korea를 의미한다.

방(5항), 비무장지대 안팎에서 적대행위 금지6항) 등을 규정하고 있다.

‘제2조 정화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에서는 정전협정 조인 12시간 후부터 적대행 위의 완전 정지(12항), 정전협정 효력 발생 이후 72시간 내 비무장지대로부터 모든 군사력과 장비철거, 서해 5도(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에 대한 유엔군 총사 령관의 군사통제(13항), 10명61)의 고급장교로 이루어지는 군사정전위원회의 구성 (19-23항), 군사정전위원회의 직책과 권한(24-30항), 4명62)의 고급장교로 구성되는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설치(36-40항),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임무(41항) 등이 규정되어 있다.

‘제3조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에서는 정전협정 효력 발생이후 60일 이내 전쟁포 로의 직접 송환 인도 및 직접 송환하지 않은 전쟁포로의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이관 처리(51항), 전쟁포로 송환의 정전협정 효력 발생 이후 60일내 완료(54항), 판문점을 통한 쌍방 전쟁포로의 인도 인수(55항), 6명63)의 영관급 장교로 구성되는 전쟁포로 송환위원회의 설립(56항), 전쟁포로 송환과정의 협조를 위한 유엔군 16개국 적십자 사 대표 및 북한 적십자사 대표와 중국 적십자사 대표로 구성되는 공동적십자팀 설 치(57항) 등이 규정되어 있다.

‘제4조 쌍방 관계정부들에의 건의’는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하 여 쌍방 군사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 한 후 3개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상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의 소집하고 한 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거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 문제들을 협의 할 것을 이에 건의 한다.”(60항)고 밝히고 있다.

‘제5조 부칙’은 발효규정으로 정전협정이 1953년 7월 27일 22시부터 효력을 발 생함을 밝히고 있다.

나. 비무장지대 설치 및 관리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로 한반도에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248km에 이르

61) 5명은 유엔군 총사령관이 임명하고, 5명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이 공동 임명한다.

62) 2명은 유엔군 총사령관이 지명한 중립국 스웨덴과 스위스가 임명하고, 2명은 조선인민군 최 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이 공동으로 지명한 중립국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가 임 명한다.

63) 3명은 유엔군 총사령관이 임명하고, 3명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이 공동임명한다.

는 비무장지대(DMZ : De militarized Zone)가 설치되었다. 비무장지대는 4km의 폭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중앙에는 군사분계선(MDL : Military Demarcation Line)이 설정되어 있다.64)

비무장지대의 설치목적은 양측 간에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고, 상호 감시를 통해 기습공격을 방지할 수 있는 거리공간(4km)을 유지하는 데 있다. 따라서 비무장지대 공간 안에는 무기가 배치되지 않아야 하며, 상호감시 및 검증체제가 유지되어야 한 다. 이러한 사항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정전협정에는 군사정전위원회65) 및 중립국 감독위원회66)를 구성하여 운용토록 하였다.67)

그러나 현재의 비무장지대 관리 및 운용은 최초의 설치목적과는 달리 다수의 중 화기가 설치된 가운데 한반도의 냉전구도의 상징으로 간주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비 무장지대 안에는 다량의 대인지뢰 및 대전차지뢰가 매설되어 있다.68) 뿐만 아니라 비무장지대의 감시초소인 GP에는 중화기가 설치되어 있고, 수색정찰 및 매목을 강 화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정전협정 위반 사항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다. 북한의 정전체제 와해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정전협정을 위해서 필요한 조직은 군사정전위와 중립국 감독위이다. 이 두 조직은 모두 북한의 와해 시도로 이미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 고 있다.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하는 정전협정 위반사항은 군사정전위에서 처리해야 하나 1991년 이후 지금까지 군사정전위는 개최되지 못한 채 명목만 유지하고 있다.

정전협정에 반대했던 초기에는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 대표로 한국군을 참석시키지 않았으나 전후처리 문제로 미국과 유엔군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장성을 군사정 전위 유엔군 대표로 참석시켰다. 북한은 1991년 2월 13일 제459차 군사정전위에서

64) 비무장지대는 폭 4km로서 남북한이 각각 2km씩 관리하고 있다.

65) 군사정전위원회는 쌍방이 각 5명씩 운용하되 3명은 장군급, 2명은 대령급으로 운용토록 하였 다.

66) 중립국 감독위원회는 4개국의 고급장교로 구성되었으며, 유엔군 측에서 지명한 스위스와 스웨 덴 장교와 공산군 측에서 지명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장교로 구성되었다. 중립국 감독위 원회는 주요 5개 출입항에 감시조를 운용토록 하였으며, 그 결과를 군사정전위원회에 보고토 록 하였다.

67) 김재철, “DMZ탄생과정의 재조명과 평화적 활용방안”, 『동북아연구』, 제26권 제2호(조선대학 교 동북아연구소, 2011), p.36.

68) 1999년 9월 국방부가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의하면 한국군이 관리하는 비무장지뢰는 약 105만 여발, 북한군이 관리하는 비무장지대에는 약 750여 발이 매설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 고 있다. 장용운, 『접경지역 평화지대론』(서울 : 연경문화사, 2005), pp.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