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2. 동북아시아 초점국가들(일본, 한국, 중국)의 ‘정체성 정치’의 양상: 역사에 대한 이해의 문제를 중심으로
절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체성의 정치로 주목 받는 이런 문제들 에 대한 자기주장이 각 나라에서 제기되기 이전에 자기 나라나 사회에 대 한 정체성 의식이 이 나라들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는 점이다. 그러나 연구자는 정체성의
‘정치 ’라는 말로써 조금 더 특정적
인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우선 발전하는 자기 국가가 자신의 활동 방식을 결정함에 있어서 어떤 순간이 되면 체제 운영 차원에서 정체성에 대한 규정이 의사결정과정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점이다
.
이것은 국가의 발전이 사회적 이해관계의 분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현대 사회의 특징 때문에 불가피하게 취해 지는 사회통합조처의 한 수순이다. 이런 조처로서 가장 전형적인 것은 국 가 법률 체계의 정비와 확충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 는 것은 국민 교육의 정비이다.
역사 교육은 현대 국민국가에서 사회적으 로 발생하는 이해관계의 분화를 국민적으로 통합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 적 국가장치이므로 국가를 주도하는 세력은 정치권력의 안정화를 위해 그 권력의 성격에 부응하는 정신태도가 국민 대다수에게 내면화되기를 바라게 마련이다.그 다음 연구자가 의도하는 것은 국가적 필요에 따라 국가의 자기정체 성을 규정할 때 다른 국가의 자기정체성을 얼마만큼이나 고려하느냐에 따라 상대 국가 및 자기 국가가 존립하는 지역의 여러 세력들과 정립하는 관계나 그들에 대한 정책 행위의 양식이 달라진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데 있다
.
다시 말해서 한 국가가 공표하는 자기정체성이‘자국중심적․
타국 배제적 성격’의 정체성인가 아니면 ‘자국개방적․
타국연관적 성격’의 정체 성인가에 따라 그 국가의 대내외적 권력 행사와 결부된 국가적 실천의 양 상과 국가적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20세기 후반기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이 ‘정체성의 정치’가 바로 2차
18 동북아 공동의 문화유산에 대한 공동 연구와 관리
대전 이후의 국제적 냉전과 그 냉전 체제 붕괴 이후의 지구화를 배경으로 동북아시아에서 전개된 포스트임페리얼리즘 체제를 성공적으로 주도하거 나 거기에 적응하는 데 성공한 나라들 순서대로, 즉 일본 → 한국 → 중 국의 순서로 실행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각 나라에서 벌어진 정체 성의 정치의 컨텐츠와 파장은 각기 상당한 차이가 난다
.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각 나라에서 실행한 정체성의 정치의 양상을 살펴보기로 하자.가 . 일본 : 신우익의 대국지향적 민족주의와 시민사회의 간헐적 저항
일본에서 역사 문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역사 교육 문제를 발판으로 한 정체성의 정치가 시기별로 제기되는 양상은 주로 일본 제국주의에 의 한 침략전쟁의 피해자였던 이웃 나라들의 강력한 항의로 야기되는
‘주기
적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이후 일본의 국가정치를 주도한 자민당의 ‘55년 체제’가 역사 교과서를 매 개로 일본 국민의 의식으로부터 대동아 전쟁의 정당성을 훼손시키는 그 어떤 패배의식도 추방시키고, 일본의 정치군사 대국으로의 재도약을 위한 정신적 발판을 마련하자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제
1차 역사 교과서 파동은 1955년 총선거에서 승리한 민주당이 미군정
아래서 제정된 평화헌법의 기조에 일정 정도 부정적 인식을 내비치는 가 운데 ‘자주 헌법 제정, 자위군 창설, 국정 교과서 통일
’의 공약을 실현에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민주당은 우려할 만한 교과서 문제(1~3집 )라는 팸플릿에서 이미 검정을 통과한 역사 교과서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
우파 학자들은 이에 부응하여 공공연하게 대동아 전쟁 긍정 론을 제기하였으며, ‘평화교육’에 입각하여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을 대 거 비난하고 나섰다.
자유당과 민주당이 자민당으로 합당한 다음해인1956년 자민당이 장악한 문부성은 교과서 검정심의위원을 100인으로 두
배 증원하여 검정을 강화하고, 1957년에는 전일본교직원조합과 관련된 대Ⅱ. 동북아 공동의 문화유산에 대한 공동 연구와 관리의 필요성 19 학 교수들이 집필한 교과서는 모두 불합격시켰다.3
제
2차 역사교과서 파동은 1980년 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자민당이 문부
성에 압박을 가하여 사회 및 역사 교과서에 일본의 과거를 부정적으로 인 상지울 수 있는 용어들을 전면적으로 개정할 것을 요구하여 시작되었다.
1982년 문부성의 교과서 심의에서 ‘침략’은 ‘무력 진출’로 하거나 아예 그
표현을 삭제하도록 했으며, 3․1 ‘운동’은 ‘폭동’으로 하면서 그 희생자 수 는 명기하지 않았고, 토지의 약탈도 ‘수용’으로 완화시켜 표현하도록 했다.바로 뒤이어 1983년 나카소네 수상은
‘정치군사대국론’을 제기하고 ‘전쟁
총결산’을 주장하고 나서면서“자국의 행위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평가를
용인하는” ‘자학사관’의 총체적 청산을 선도하였다.4제
3차 교과서 파동은 1990년대 중반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후지오카 노
부카스(藤岡信勝), 니시오 간지(西眉幹二) 등 이른바 ‘자유주의사관론자 들
’은 “확실한 국가의식과 긍정적 역사교육을 위해” “명치 시대 이후 일
본은 대륙침략을 시작하여 이웃 국가들을 짓밟아 황폐화시키고, 전쟁으로 국민을 비참하게 만들었다는 식으로 일본 국가를 스스로 악역무도하게 묘사하는 ‘자학사관’(자학사관)” 또는 “공산주의자들이 천황제를 비판하는‘코민테른 사관’”, “일본 점령 미군의 일본 국가의식 탈취를 위한 ‘도쿄재
판사관’” 등을 척결하자고 나섰다.5 그런데 이들의 활동이 크게 격화된 것 은 1991년 남북한의 종군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와 유엔에서 쟁점화 시켜 유엔인권위원회와 쿠마라 스와미 보고, 맥두걸 보고 등을 통 해 인권 침해와 성범죄로 국제적으로 단정된 종국위안부 사실이1996년
새로 개정된 7종의 교과서 안에 포함되면서부터였다. 이것은 일본의 우익 을 대단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자유주의사관론자들이 ‘새로운 교과 서를 만드는 모임’을 결성한 계기가 되었다.
63박찬승, 한국동북아지식연대 편, “동북아 3국의 역사인식 공유를 향하여,” 동북 아공동체를 향하여 (서울: 동아일보사, 2004), pp. 435-436.
4위의 글, pp. 437-438.
5위의 글, p. 439.
6위의 글, pp. 441-442.
20 동북아 공동의 문화유산에 대한 공동 연구와 관리
일본 교과서 파동은 대략
25년 주기로 반복하고,
정치권, 우익 지식인 권,
우익 대중단체 등으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선거를 통해 확보된 자민당 지지를 통해 정치적 추진력을 획득해 왔다. 그러면서 2,000년 가을 새로 운 역사교과서 의 문부성 제출로 우익적 정체성 정치의 공세는 절정에 도달하였다.
이 교과서는 일본 우익의‘정체성 정치’의 총결정판으로서,
종군위안부 사실이나 난징 대학살 같이 자국에 불리한 역사적 사실의 삭제
․축소 ․왜곡,
제국주의 비행의 합리화 내지 정당화, 근거 없는 반미주의와 아시아 주변 국가들에 대한 폄하, 전쟁책임 회피에서 더 나아간 전 쟁찬미론 및 낡은 천황주의의 부활 등 현대적인 양식에 입각해 볼 때 역 사 교과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온갖 오류가 의도적으로 총동원되었다는 인근 국가 정부들의 비판을 받았다.7
그러나 일본 사회가 이런 우익 파시즘으로 완전히 획일화되어 있는 것 은 아니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실제로 자신들 나름의 교 과서를 제작하여 검인정을 통과하고 각급 학교에 채택시키려고 나서자 전일본교직원조합이 앞장서고 대다수 시민단체가 참여하여 그 교과서의 채택을 사실상 원천 봉쇄시켰다. 이런 시민적 실천을 전후하여 재일 조선 인이 다수 포함된 일본 학계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및 전쟁 책임 인정에 기반한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면서8
“일본의 역사 교육
이 국민의 역사‘의 교육이었고,
개인의 교육은 ‘국민’으로서 추상화되었으
며,
전 지구 시민의 교육은‘국제적인 일본인’으로 해소되어 모든 ‘국민의
교육
’이라는 내셔널리즘으로 통합되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러한 틀
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9 이것은 곧 일본 사회 안에
‘정체성의 정치’에 대해 우익 국가주의와 다른 방향을 취하는 시각도 간헐
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일본의 지적인 담론장에서는 일본의7위의 글, pp. 442-443.
8타나카 히로시 외, 이규수 옮김, 기억과 망각. 독일과 일본, 그 두 개의 전후 (서 울: 삼인, 2000) 참조.
9코모리 요우이치ㆍ타카하시 테츠야, 이규수 옮김, 「옮긴이의 말」, 국가주의를 넘 어서 (서울: 삼인, 1999), p. 18.
Ⅱ. 동북아 공동의 문화유산에 대한 공동 연구와 관리의 필요성 21 민족주의 또는 네오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상대적으로 우위 를 띤다.10 그러나 대중 담론과 현실 권력의 현장에서 이들 비판적 지식 인들의 목소리는 소수파로서 고립되어 있다. 신우익적 정체성 정치에 대 항하는 이들의 태세는, 그들 자신이 자처하듯이, 거의 “레지스탕스적인 대 응
”
11으로 규정될 만하다. 따라서 일본 안에서의 정체성 정치는 압도적 정치 세력의 지원을 받아 포스트임페리얼리즘 상황에서 대국을 지향하는 우익적 자기정체성 입장을 일관되게 확대시키는 쪽이 일본 민족을 강조 하면서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가운데 탈정체성의 초국적 보 편주의를 지향하는 시민사회 세력이 그 헤게모니에 급진적 비판을 행하 는 형세로 진행된다.나 . 한국 : 국가절대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서의 정체성 교착
한국에서 정체성 정치가 국가적으로 행해진 것은
5․16쿠데타로 집권
한 박정희 장군이 두 번의 선거에서도 대통령으로 거듭 집권하는 데 성공 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쿠데타로부터6년이 지나는 기간 동안
한국 역사에서 유례없는 속도로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데 성공한 그는1968년 들어 “제2경제”의 개념으로 국민에 대한 정신적 관리의 필요성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면서 국민 교육의 근간을 전면적으로 재정비할 원칙의 수립에 골몰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구상은 1968년1
월 18일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권오병(權五炳)에게 「국민교육헌장」의 제정을 지시하면서 구 체적으로 언명되었다.12 권 장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13“제3공화국이 수
10대표적으로 일본 민족의 단일성을 신화적 실체화의 오류라고 비판한 오구마 에 이지, 조현설 옮김, 일본 단일민족 신화의 기원 (서울: 소명출판사, 2003. 12) 참조. 그리고 일본인의 전후 의식의 비현실성과 무책임성에 대한 비판으로서 같 은 저자의 小熊英二, <民主>と<愛國>. 前後日本ナツヨナリスムと公共性 (東京: 新曜社, 2004. 8., 10쇄/2002. 10., 초판1쇄) 참조.
11이 표현은 도쿄대학 종합문화연구학부 철학과 타카하시 테츠야(高橋哲哉) 교수 가 2004. 11. 8. 도쿄대학교 코마바 캠퍼스의 철학과 사무실에서 연구자와 대담 하는 중에 일본 사회 소수자로서의 자기 입장을 묘사하는 말이었다.
12‘국민교육헌장’의 제정 경위와 그 국민교육상의 의의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홍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