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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의 포스트임페리얼리즘(탈제국주의) 상황과 국민 국가체제의 전개: 동북아 공동체 구상의 지리적 범위와

서 론

1. 동북아의 포스트임페리얼리즘(탈제국주의) 상황과 국민 국가체제의 전개: 동북아 공동체 구상의 지리적 범위와

Ⅱ. 동북아 공동의 문화유산에 대한 공동 연구와 관리의 필요성 11

1. 동북아의 포스트임페리얼리즘(탈제국주의) 상황과 국민

12 동북아 공동의 문화유산에 대한 공동 연구와 관리

동북아시아에서 전개된 포스트임페리얼리즘 체제 안에서 가장 먼저 이런 방식의 국가 체질을 체득하여 국민국가로서의 기반을 공고히 한 첫 번째 국가는 물론 일본이었다. 국가의 전면 파탄으로 끝난 태평양 전쟁에서의 패전 이후 일본은 막 도래한 냉전 상황과 한국 전쟁이 준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1951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통해 피점령 패전 국가

의 지위를 단시간에 벗어나 주권국가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1952년 4월부 터 효력이 발휘된 이 조약으로 1945년

8월부터 시작되었던 이른바 7년간

의 ‘점령기’(占領期)를 끝낸 일본의 국가적 운영구조는 미국 점령 정책의 압박 아래서 제정된 평화헌법이 상징하듯이 일정 정도 민주화되었지만, 과거 제국주의 운영의 핵심 세력이 그대로 국가주도 세력으로 전이되어 이 세력의 후원과 주도로 이른바 ‘55년체제’를 구성하여 국가 안팎에서 준 패권적(準覇權的) 지위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당연히 전후 일본은 동북아시아 지역에 침략 전쟁을 유발하고 식민주의를 부식하였던 과거 제국주의 주도 세력의 권력 행태에 대한 근본적 자기 반성의 기회를 가질 필요도 없이 보다 개선되고 세련된 ‘현대화된 패권 추구 기술’로 동북아시 아의 포스트임페리얼리즘 체제에서 선두 국가의 위상을 확보하였다.

동북아시아 국가 가운데 현대적 국민국가의 제도적 골격을 형식적으로 가장 먼저 갖춘 나라는, 아주 역설적으로 말해,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3년 만인 1948년 8월에 국민국가 체제로 정부 수립을 선포했던 대한민국이었 다

.

그러나 대한민국은 새로이 전개된 냉전 상황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생 존 기회를 확보한 과거 제국주의 부역 세력과 가장 열악한 생존 상황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했던 극좌 패권주의 사이의 극단적 투쟁으로 사 실상 민족과 영토가 분열됨으로써 온전한 형태의 현대 국민국가 구조를 갖추지 못한 채 반공산주의 투쟁의 전선 국가로 편성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국가는 본래의 헌법적 목표였던 자유민주주의와 복지지향적 국 민경제의 순탄한 실현을 유보한 채 분단체제의 틀 안에서 국제적 패권 경 쟁의 선두 국가가 되었다

.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거의 반세기 동안 연이어 지속되었던 가부장적 권위주의 통치와 군부독재체제 아래서

Ⅱ. 동북아 공동의 문화유산에 대한 공동 연구와 관리의 필요성 13 정치와 경제의 모든 방면에서 ‘국가주의’(Etatism)를 체화시켰고, 이것은 일단 5․16 쿠데타 이후 1960년대부터 경제의 비약적 성장으로 국가 차 원에서 그 효력을 입증한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포스 트임페리얼리즘의 동북아 질서 안에서 대한민국이 국민국가로서 추구했 던 국가주의란 ‘국가 안보’와

‘경제 성장’을 국가적 최고 가치로 삼고,

자 유나 민주주의의 발달, 다양한 개성의 공존과 관용 같은 기타의 가치는 아주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대단히 전체주의적 성향의 정신태도를 가리킨다.

중국은 대륙을 제국주의와 유관한 모든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

1949년 10월 사회주의적 형태의 국민국가 체제를 정식으로 수립하였다.

사회주의 중국은 대내적으로 일체의 계급을 타파하고, 대외적으로 일체의 패권 추구를 배격하면서 그 자체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 국제주의적인 풍 모를 갖춘 대단히 혁신적인 국가적 실천을 감행함으로써 포스트임페리얼 리즘의 골격 자체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자체 한 국 가로서 주권 원칙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최소선으로 고수하는 한 중국 역시 ‘국제주의의 국가주의로의 변모라는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대외적으 로는 사회주의권 안에서 벌어져 끝내 해소되지 못한 구(舊)소련과의 이념 분쟁과 대내적으로는 조급한 급진주의에 몰린 문화대혁명의 파탄으로 권 력 유지와 경제 기반 등의 국가 운영이 궁지에 몰리면서 시작된 1978년부 터의 개혁개방 정책은 동북아시아의 포스트임페리얼리즘 체제에 또 하나 의 중요한 세력 변수가 출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

그런데 덩샤오핑에서 장쩌민을 거쳐 후진타오까지

25년 이상 계속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은

중국의 사회성격을 사회주의적인 것에서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완전히 변 모시켰고, 중국 국가 자체의 성격도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국가에서 ‘중화 민족주의’를 정신축으로 하는 한 개 국민국가로 탈바꿈하였다.2

이상과 같이 아주 소략하게 요약한 바에 따르더라도 동북아시아 발전

2나카가네 가츠지, 이일영․양문수 옮김, 중국경제발전론 (서울: 나남출판, 2003.

11) 참조.

14 동북아 공동의 문화유산에 대한 공동 연구와 관리

의 선두에 서서 세계적 비중을 가진 경제와 정치의 수준에 도달한 한국, 중국

,

일본 세 나라의 국가 성격에서

2차 대전 때까지의 국제 질서의 기

축이었던 제국주의가 완전히 탈피되기는커녕 국민국가 차원에서 포스트 임페리얼리즘적 양상으로 변형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포스트임페리얼리즘적 특성으로 분명히 부각되는 것은 이 지역의 각 국 민국가가 바로 그 국민국가 단위에서 정치적으로는 승리주의(勝利主義

triumphalism),

경제적으로는 성장주의(成長主義), 그리고 문화적으로

는 자기문화 우월주의(自己文化優越主義)를 국민적 체질로 만들어갔다 는 것이다

.

이 언명이 의미하는 바는 대단히 위중하다. 왜냐하면 이런 사 태 진단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현재적 상황에서 동북아시아 지역 에서 국가간 지역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예견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북아시아 의 이런 사태를 유럽과 비교하면, 바로 이렇게 국민국가들 차원의 첨예한 대립상과 그 위험성을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 및 그 순간이야말로, 전쟁을 통해 두 번씩이나 국가와 국민들을 파탄에 몰아넣은 유럽 역사의 심각한 과오를 반복할 필요 없이, 동북아시아의 지역 공동체가 절대로 필요하다 는 믿음을 확신시키는 근거이기도 하다.

21

세기에 들어서면서 동북아 지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구상 에서 가장 역동적인 변화를

,

그것도 선도적으로 추진하는 곳이 되었다

.

그 리고 이 지역에서도 경제와 정치 측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발전상을 보인 한국

,

중국

,

일본을 초점국가(焦點國家 focus-states)들로 놓고, 북한, 대 만

,

러시아를 제

1중간원(第一中間圓)으로 하면서,

몽고, 싱가폴, 베트남, 타이

,

말레이시아,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제2중 간원

(第二中間圓)으로 설정하고,

멀게는 방글라데시, 인도, 파키스탄, 네 팔을 외곽원

(外廓圓)으로 두르면,

동북아 발전파장의 근거리권과 원거리 권의 복합적 윤곽이 떠오른다

.

Ⅱ. 동북아 공동의 문화유산에 대한 공동 연구와 관리의 필요성 15

<표 Ⅱ-1>

동북아발전 파장권 또는 동북아 문화공동체의 외연

인도

싱가폴

몽고 베트남

말레이시아

북한

韓國

타이

방글라데시 초점국가

日本

러시아 필리핀

미얀마

中國

한자문화권

네팔

대만 라오스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이 지역의 가장 두드러진 역사적 특색은 일본

,

러시아, 타이를 제외하고 는 모두 미국

,

영국, 프랑스 및 기타 서양 국가들(즉 네덜란드

, 20세기 초

짧은 기간 동안의 독일

,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의 러시아)과 방금 제외시킨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배 아래서 식민지 통치를 직접 경험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에는 이 지역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서양 제국주의의 ‘직접적

통치’는 종식되었다. 하지만

,

앞에서 상론했다시피, 냉전과 그 뒤의 지구화 과정에 의해 ‘제국주의적 지배 질서’는 사실상 각 나라 사이에서 온존되고 확산되면서 지역 차원에서 ‘포스트임페리얼리즘 체제’(post-imperialist

regime)가 성립되었다 .

크게 이 포스트임페리얼리즘 체제 안에서 이 지역 국가들은 한 편으로 는 국민국가 차원의

(on the level of nation-states)

세력 결집과 세력 분 화를 가속적으로 수행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지역 국민국가들

16 동북아 공동의 문화유산에 대한 공동 연구와 관리

사이에(between nation-states) 격심한 세력 경쟁을 추동하는 형국으로

20세기가 종료되었다.

결국

21세기가 막 그 초입을 통과하는 2004년 현

,

동북아 초점국가들은 물론 동북아 발전의 파장이 미치는 동아시아권 전체는 ‘국민국가별로’ 생존과 발전을 위한 긴장된 경쟁과 제휴가 복합적 으로 착종하는 상황에 빠져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연구자가 동북아 발전파장권의 초점국가로 상정한 한․중․일 삼국은 식민통치가 종식된 이후 포스트임페리얼리즘 체제를 선도하거나(일본) 아 니면 거기에 적극 적응함으로써(한국 및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 이 지역 에서 특히 경제

,

그리고 나아가 권력 정치 측면에서 국민국가적 발전도를 현격하게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권의 이 포스트임페리얼리즘 체 제는 그것에 포함된 각 국가들이 국민국가로서의 기본틀을 잡아가는 국 민국가 초기의 성장 국면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강화되었다. 그런데 이 초 점국가들이 경제 및 정치 면에서 국민국가로서 초기 국면 이상의 발전을 요구하는 단계에 들어서면서, 경제 및 정치 측면의 이해관계에서 이들 초 점국가들을 사안별로 어느 정도 결합시켰던

‘쌍무적 협력관계들’만으로

더 이상 조정할 수 없는 국가적 욕구가 제기되었다. 그것은 곧 이들 국가 들이 자기 국가를 무엇으로 이해하여 대외적으로 자기주장을 펼치고, 어 디에다 자기 입지를 요구하느냐 하는 문제, 즉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identity)에 대한 욕구였다.

정체성의 정치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역사

문제이다. 이 문제를 보다 명세적으로 정확하게 적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동북아시아 현대사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동북아시아 민족과 국가들을 상대로 벌인 역사적 비행에 대한 사실 인식과 평가에 있어서 일본 국가와 다른 국가들 사이의 현격한 격차 문제,

한반도에서 남북한 분단과 관련된 국제적 책임 문제,

중국의 다민족 통일국가관에 의거한 동북아시아 과거사의 전면 개 작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