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설명하였듯이 자신이 속한 학파의 기준만이 옳다고 내세우는 지 식은 도의 특정 부분만을 담지하고 있으므로 진정한 앎이라고 보기 어렵 다. 스스로 체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객관적 기준을 제시하려고 한 범인 들에게 마음을 비우는 수양이 우선임을 장자는 알려준다. 그 수양의 과 정은 허심(虛心)을 통해 외물을 잊는 경지에서 나아가 무아의 지경에 도 달하는 좌망(坐忘)과 심재(心齋)의 수양 과정임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해소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왜 참 된 지가 진인 이전 인간 외부에 존재하면 안 되고 진인의 경지에서 진지 가 구현된다고 장자는 주장하는가. 장자에 의하면 인간만이 인간이 도로 부터 받은 고유한 본성조차 잊을 수 있는 정신적 경지에 진입할 수 있 다. 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의 본성은 도와 질적으로 같으나, 개물 의 입장에서는 고유한 형태와 습성 및 욕구를 지니며 인간 또한 마찬가 지이므로 유한(有限)하다고 볼 수 있다. 장자가 보았을 때 인간의 고유한 특징은 체득의 주체임을 자각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동물은 이미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까지 없애는 것은 불가하다.
하지만 자각적 깨달음을 얻은 인간은 인간 고유의 욕구와 본능까지도 잊 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이유는 마음으로부
터 비롯된다. 마음은 편견적 인지의 기관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있기 때 문에 비움으로써 도를 채울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하다. 즉 수양이 없 다면 성심(成心)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으나, 자신의 성견성심을 타파하고 무궁한 도와 일치시키게 할 수 있는 내적 수양 또한 결국 마음의 문제에 서 비롯된다.
‘심재(心齋)’를 다시 떠올려보자. 장자는 심재를 이야기할 때 먼저 감각 기관으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야 하며,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마 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내성의 자 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본인의 마음을 출발 요건으로 삼되, 궁극적 으로는 마음의 작용까지 비우고 털어내야 결국 도와 완전히 합일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 사물이든 인간의 욕구이든 간에 모든 질곡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적 경지를 뜻한다. 이러한 진인 은 유한한 인간의 위치에서 무궁한 세계로 확장될 수 있는 정신적 경지 에 오르게 되어 도와 완전한 합일에 도달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의 마음 이 덕(德)과 도(道)와 모두 대통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인만이 특 정 사물이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든 간에 이것을 사심 없이 바라볼 수 있다. 이로 인해 만물을 대하는 진인의 시각은 심미적이며 관조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인(眞人) 이후의 진지(眞知)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 까? 진지란 인식적 차원의 수준을 넘어선다는 것은 이미 지적되었다. 장 자에게 있어 본인의 사유와 인식이 객관적으로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논 리적인 사유 속에서 논증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즉 장자는 순수한 이 성적 인식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은 분석적 사고를 끊임 없이 발휘해야 하며, 개념을 정의해야 하고, 대상 사물을 범주화시켜 계 속해서 구분하고 나누어야 한다. 예를 들어 참된 지가 인간의 심성 바깥 에 절대지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서양적 세계관에서 보면 진지는 인 간과 구분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양적 세계관에 비해 서양은 현상의 배 후를 좌우하는 현실 너머의 세계를 실재(實在)로 존재한다고 믿는 생각 이 농후하다. 따라서 서양철학에서는 개인 및 인간의 실존과 유리된 사
유가 가능하며, ‘객관적 우주의 궁극 실재’를 제대로 인식하는 과정에 대 한 탐구는 윤리학과 반드시 함께 논의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서양인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동양철학은 인식론과 논리학이 불충분할 수 있으나, 동양적 사유가 이와 같이 전개된 까닭은 세세히 따져 논한다면 삶에 있 어서 가장 중요한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점을 늘 경계한 까닭이었다.
동양적 사유에서의 지식은 인간, 인간의 삶, 인간이 몸담고 있는 현실 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장자뿐만 아니라 중국철학에서 지식을 논 하는 데 있어 공통적인 시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거나 절대적으로 실체 하는 외재 대상을 설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양에서의 ‘앎’이란 스스 로를 완성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연결되는 앎이며, 앎은 단순히 지 식[knowledge]으로 번역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앎이다.
그러므로 동양철학에 있어서 ‘앎’이란 인간과 분리되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고 ‘앎’에 대한 인식이 삶과 떨어져 성립될 수도 없다. 동양학은 지식을 추구하고 그것을 획득하는 데에서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 연의 이치로부터 삶의 진리를 체득하여 그 진리를 온전히 현실에서 실현 시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장자에게 있어 보다 중요한 것 또한 현실 및 인간과 관련이 있 는 삶이자, 최상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앎이다. 따라서 주변의 상황, 환 경, 자연, 현실의 모습, 인간과 동떨어져 있는 앎을 지각할 수 있는 문제 는 전국시대의 모순을 해결해줄 수 있지 않기 때문에 사변적 인지의 문 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장자의 입장에서 진정한 앎을 논의하기 위해 보다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궁극적으로 난세를 극복하기 위한 출발점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하느냐이다. 결국 장자는 본인의 내성적 수양 에서 비롯된 자유로운 정신 경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해답을 제시하 였다. 이와 같이 도를 터득한 진인은 결국 타인에게까지 긍정적인 힘[德]
발휘하여 일반적 편견에 사로잡힌 대중을 감화시킬 수 있고, 그들 또한 내성적 성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변화시킴으로써 최종적으로 난세가 평 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290)
따라서 진지는 일반적으로 일컫는 지식과는 다르게 해석해야 할 것이
다.291) 진지란 지식적 해석을 초월하여 도의 심오한 합일을 통해 얻은 인생의 경지에서 말하는 지혜[wisdom]인 것이다.292) 아래 인용문처럼 복 희씨는 아는 것이 없는 듯 하였음에도 그의 앎은 참으로 진실하다. 전자 의 앎은 인식을 통해 얻게 된 제한적인 앎이며, 후자의 앎은 지극한 정 신적 경지에 도달한 이후의 앎이다. 곧 후자의 앎은 자연에 따른 앎이며 하늘이 하는 바를 알고 사람이 하는 바를 아는 앎이다. 인간의 힘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억지로 말하려고 하거나 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
복희씨는 잠을 잘 때 편안하고 깨어나면 아는 것이 없는 듯 했다. 자신을 말이라고 하든 소라고 하든 개의치 않으므로 그의 앎은 신뢰할 수 있고 그 의 덕은 매우 참되다.293)
하늘이 하는 바를 알고 사람이 하는 바를 알면 지극하다. 하늘이 하는 바를 아는 사람은 자연에 따라 살아가고 사람이 하는 바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앎이 아는 것으로써 알 수 없는 것을 길러 천수를 누리고 중도에 요절하지 않으니, 이것이 앎의 성대함이다.294)
290) 김충열은 서양의 지식과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동양의 ‘앎’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앎이란 앎이라는 행위, 그 행위를 통해 얻게 된 앎, 그리고 그 앎을 실천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앎, 또한 실천을 통해 다시 얻은 앎, 즉 덕성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이다.” 김충열, 『김충열 교수의 중국철학사Ⅰ』, 서울: 예문서원, 1994, 50쪽.
291) 영부·영대로부터 직접 발출되는 지(智)는, 곧 도덕의 광휘이고, 인생의 정 신 생활의 현현이어서 매우 보배로울 수 있다. 이러한 지는 보통의 분석적 지의 지가 아니라 후에 선종에서 말한 “진리의 빛이 사방을 비춘다”는 비춤 과 같다. 方東美, 앞의 책, 360쪽.
292) 徐復觀, 앞의 책, 108쪽.
293) 泰氏,其臥徐徐,其覺于于,一以己為馬,一以己為牛,其知情信,其德甚 真.「응제왕」
294) 知天之所為,知人之所為者,至矣. 知天之所為者,天而生也. 知人之所為 者,以其知之所知,以養其知之所不知,終其天年而不中道夭者,是知之盛也.
「대종사」
진인(眞人)이 제각각의 만물의 가치를 우열로 두지 않고 관조할 때, 그 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만물을 평등하게 비추는 태양의 빛과 유사하 다는 점에서 진지(眞知)와 같다. 「대종사」의 조철과 견독을 다시 상기 하며 새벽에 해돋이를 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295)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듯하더니 해가 어느 순간 갑자기 툭 하고 솟아올라 특정한 부분만이 아 니라 모든 만물을 환하게 비춘다. 따라서 장자는 진지의 특성을 아래와 같이 밝음[明], 빛[光], 태양[日]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상대가 틀렸다 옳다 하고 그가 옳다 하는 것을 틀렸다고 하니 밝음[明]만 못하다.296)
옳음도 역시 하나의 무궁이라면 그름도 역시 하나의 무궁이니 밝음[明]만 못하다.297)
부어도 가득차지 않고 퍼내어도 마르지 않으며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지 못하니 이를 일러 드러나는 빛[光]이라고 한다.298)
295) 김충열은 조철과 견독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장자는 대종사편에서
‘독’을 아침 햇빛에 비유해서 아침 해가 비친 뒤에 독이 나타난다고 하였는 데, 이는 아침 해가 어둠을 가르고 떠오르면서 적막과 무명에 감추어졌던 삼 라만상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독’을 바로 지혜의 광망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 김충열, 앞의 책, 298쪽. 또한 이강수의 조철 과 견독에 대한 해석을 싣는다. “조철을 필자는 ‘어느날 아침 툭 터지는 것’
으로 해석하였고, 견독은 ‘절대의 도를 본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이 때 절 대는 대비를 이루어 서로 의존하고 있는 관계에서 초탈하는 것을 뜻한다. 어 느 날 아침 동쪽에 태양이 떠오르면서 세계가 환히 열리게 되어 밝은 태양 아래서 만물을 보듯이, 어느 날 갑자기 정신세계가 툭 터져, 대비를 이루며 서로 의존하고 있는 관계를 벗어난 독자적 실체와 간격 없이 만나는 것을 견독이라고 한다. 오도한 선승이나 경험할 수 있는 이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아의 본성인 덕과 천지 만물의 근원인 도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만물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인간이 천지만물을 존재하고 움직이게 하는 도와 통하게 된다.” 이강수, 앞의 책, 159쪽.
296) 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則莫若以明.「제물론」
297) 是亦一無窮,非亦一無窮也. 故曰莫若以明.「제물론」
298) 注焉而不滿,酌焉而不竭,而不知其所由來,此之謂葆光.「제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