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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修養)의 의미 : 도(道)와 덕(德)의 합일

장자에게 있어 내적 수양이란 곧 도(道)와 합일되는 경지를 위한 노력 이다.214) 도와 합일되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부단한 수양을 통해 계속해 서 깨달음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말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 어려우며, 또 한 도와 완전히 합일되는 경지는 사물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분별을 낳 지도 않는다. 따라서 기존의 논리대로 도를 세세하게 말로 설명하려 하 며 이것과 저것으로 분별하려는 태도는 결국 도와 일치하지 못한 삶이라 고 볼 수 있다.

도와 합일된 상태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체득(體得)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흔히 중인은 ‘도란 무엇인가?’, ‘도는 어떻게 해야 알 수 있

214) 노자의 도(道) 개념이 각 제자학파들이 내세우는 최고 개념보다 한층 상 향시키면서도, 결국 그들이 주장한 최고 개념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 하는 한계를 어떻게 돌파하고 있는지에 대해 김충열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이 제까지 모든 사람들이 매달리고 의지하던 최고 개념을 파괴시키려면 그보다 상위에 위치할 수 있는, 더욱 큰 권위를 담은 개념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노자는 특별히 ‘도’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 모든 개념을 포괄하여 제압하거나 무력화시켜 버린 것이다. …… 그러면 노자의 도야말로 그 어떤 개념보다 절대적이요 주재적인 것이 아닌가? 지고유일한 신도, 만물 생성의 근원인 천지도 모두 도 아래에 위치한다면 그런 도야말로 더욱 권위 있는 신이요 근원이 되지 않겠는가? 신이니 천지니 하는 개념들이 사람들을 관념 적으로 구속하기 때문에 그것을 파괴하기 위한 명분으로 도를 내세웠지만, 그 결과 사람들은 신과 천지 개념에서는 해방되었을지 모르나 이내 더 강력 한 도라는 개념에 속박된 것은 아닌가? 이러한 우려, 즉 도의 횡포를 불식시 키기 위하여 노자는 최고 개념에 위치시켰던 도를 다시 최하위 개념으로 환 원시켰다. 그것이 ‘박(樸)’의 개념이다. 그리하여 도는 포괄자는 될지언정 절 대적인 유일자나 주재자 혹은 초월자는 되지 않는다.” 김충열, 앞의 책, 115 쪽. 『장자』 또한 도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동곽자의 질문에 귀천을 불구하 고 오물더미와 같이 모든 곳에 도가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위의 글을 참고할 만하다. 물론 김충열은 노자의 도와 장자의 도를 동일한 위치에 놓고 논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노자의 ‘도’와

‘자연’은 기계적이고 수리적이고 무목적적인 데 반해, 장자의 ‘도’와 ‘천(자 연)’은 생명이 솟아나는 광장으로 예술적이고 정신적이며 심지어 이성적이기 까지 하다. 그래서 장자의 ‘천’은 순종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감상하 고 그것과 노닐고 그것의 정신과 왕래하며 벗할 수 있는 생명 향유의 대상 이기도 하다”. 같은 책, 250-251쪽.

는가?’의 질문을 쉽게 하기 마련이다. 「지북유」 첫 장에는 이와 유사한 물음을 던지는 의인화된 지(知)가 등장한다.

지(知)는 무위위(無爲謂)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질문을 하고 싶소. 어 떻게 사려해야 도를 알 수 있소? 어떤 장소에서 어떻게 입어야 도에 편안 히 머무를 수 있소? 무엇을 따르고 어떤 방법이라야 도를 얻을 수 있소?”

지는 세 번 질문하였으나 무위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었다.215)

지는 도를 쉽게 얻고자 하여 가장 간편한 방법인 언어로 묻고 언어로 대답해주기를 기대하는 범인과 흡사하다. 그러나 무무위는 대답하지 않 는데, 도의 전부를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도를 말로 설명하여 전달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는 내편의 구절이다.

대도(大道)는 지칭할 수 없으며, 대변(大辯)은 말할 수 없다.216)

도(道)는 …… 억지로 함이 없고[無爲] 형태가 없다[無形]. 따라서 도를 전 할 수는 있으나 받을 수 없고 얻을 수는 있으나 볼 수 없다.217)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도란 특정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 에 설명할 수 없다. 도를 받거나 볼 수 없다고 말한 이유는 귀나 눈과 같은 감각 기관으로 인식하는 것과 다른 방법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도를 전하고 얻을 수 있다는 뜻은 최종적으로는 스스로가 터득할 수 있 도록 노력을 가해야 한다는 의미와 같다.

215) 知謂無為謂曰:「予欲有問乎若. 何思何慮則知道?何處何服則安道?何從何 道則得道?」三問而無為謂不答也. 非不答,不知答也.「지북유」

216) 夫大道不稱,大辯不言. 「제물론」

217) 夫道,……無為無形. 可傳而不可受,可得而不可見.「대종사」

『도덕경』 또한 심오한 것을 다룰수록 함부로 말로 표현하는 것에 대 해 경계해야 함을 보여준다. 통행본 『도덕경』은 1장에서부터 언어가 도의 진면목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는 불완전한 수단임을 먼저 지적한 다.218) 언어의 유한성에 대해 『도덕경』는 이렇게 지적한다. 말로 표현 할 수 있는 도는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다.219) 따라서 도와 관계한 대변 (大辯)일수록 어눌해 보이는데,220) 그 이유는 말이 전부가 아닌 가르침이 기 때문이다.221)

도는 언어라는 수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도를 명사와 같 은 개념어로 한정지을 수 없다. 길은 걸어 다녀서 이루어진 것이고 사물 은 그렇게 일컬어져서 그렇게 불리는 것일 뿐이다.222) 마찬가지로 도 또 한 한시적인 이름이지 도에게 붙어져 있는 불변의 이름이 아니다. 따라 서 장자는 말한다. 이름은 실질의 손님에 불과하다.223) 도를 무엇이라고 이름붙일 수 없다.224) 『도덕경』 또한 말한다.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 상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225) 도는 항상 그러한 이름이 없으며,226) 도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다.227)

깨달음의 극치에 있는 진인(眞人)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언어를 통 해 개념을 구사하는 것은 특정적으로 한정되므로 말을 아껴야 한다. 따 라서 성인은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다.228) 또한 모르는 것에 대해 함부로

218) 김병환, 『김병환 교수의 동양윤리사상 강의』, 100쪽. 여기에서 통행본

『도덕경』이라고 일컫는 까닭은 기존의 왕필본 이외에 『도덕경』의 판본 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73년 중국 장사 마왕퇴의 묘에서 출토된 백서본은 통행본 38장이 가장 앞에 위치하고 있고, 마찬가지 로 한비자가 『도덕경』을 주해한 『한비자』의 「해로」 또한 통행본 38장 의 해설로 시작된다.

219) 道可道,非常道. 『도덕경』1장 220) 大辯若訥. 『도덕경』45장 221) 不言之教. 『도덕경』43장

222) 道行之而成,物謂之而然.「제물론」

223) 名者,實之賓也.「소요유」

224) 彼何人者邪?……無以命之.「대종사」 이 때의 命은 名으로 해석한다.

225) 名可名,非常名.『도덕경』1장 226) 道常無名.『도덕경』32장 227) 繩繩不可名.『도덕경』14장

논하지 않고 아는 것에 대해서도 논쟁하거나 다투지 않는다. 실정을 있 는 그대로 전하지 말로 과장하여 전하지 않으면 온전함에 거의 가깝 다.229)

천지의 밖에 대해서 성인(聖人)은 유보하고 기술하지 않으며, 천지의 안에 대해서 성인은 기술하지만 논의하지 않고, 역사책에서 경세(經世)에 관한 선왕의 뜻에 대해서 성인은 논의하지만 논쟁하지 않는다.230)

모르는 곳에서 멈출 줄 알면 지극하다. 누가 말하지 않는 논변과 말하지 않 는 도를 알겠는가?231)

이와 같이 도를 체득한 사람은 천지의 밖, 삶의 시종과 같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 굳이 말로 설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내적 체험을 통해 자연 스럽게 우러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장자』에 등 장하는 애태타와 왕태라는 인물도 마찬가지이다. 애태타는 용모가 추악 하지만 남녀노소 그를 보면 함께 살고 싶어 하고 왕 또한 그를 재상으로 삼고 싶어 한다.232) 애태타가 주장하는 것을 사람들은 들은 적이 없고 언제나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룬다.233)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주장 을 내세우지 않으며 그의 지식은 사방을 넘지 않지만 남녀가 그 앞에 모 여든다.234) 따라서 애태타는 말이 없는데도 신임을 받는다.235)

한편 왕태는 다리가 잘린 사람이지만 왕태를 따라다니는 제자는 공자

228) 聖人無名.「소요유」

229) 其常情,無傳其溢言,則幾乎全.「인간세」

230) 六合之外,聖人存而不論. 六合之內,聖人論而不議. 春秋經世,先王之志,

聖人議而不辯.「제물론」

231) 故知止其所不知,至矣. 孰知不言之辯,不道之道?「제물론」

232) 衛有惡人焉,曰哀駘它. 丈夫與之處者,思而不能去也.婦人見之,請於父母 曰『與為人妻,寧為夫子妾』者,十數而未止也.……國無宰,寡人傳國焉.「덕 충부」

233) 未嘗有聞其唱者也,常和而已矣.「덕충부」

234) 和而不唱,知不出乎四域,且而雌雄合乎前.「덕충부」

235) 而寡人信之.「덕충부」

의 무리만큼 많고 공자는 그를 성인으로 추앙한다.236) 왕태는 서서 가르 치지 않고 앉아서 의논하지 않는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마음을 비우고 가서 가득 채워 돌아온다.237) 그는 말 없는 가르침을 펴서 겉으로 보이 지 않지만 학생의 마음을 충분히 채워준다.238) 이들의 사례를 통해 진인 은 말의 한계를 알고 무언의 가르침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덕경』 또한 말없는 가르침을 보이는 성인에 대해 말한다. 성인은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보인다.239) 따라서

『도덕경』은 이렇게 제안한다. 말을 아끼는 것이 자연에 부합한다.240) 또한 궁극적으로 도는 하나이나 그것을 도라고 언급하는 순간 도는 언 어로 지칭된 도와 구분되어 둘로 나뉘며, 그 둘에 다시 언어가 개입하면 다시 구분되어 셀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241) 도는 나뉘지 않은 전 체이며 전체는 만물을 포통(包通)하지 구분하지 않는다.242)

도는 경계가 있은 적이 없다.243) 도는 통하여 하나가 된다.244)

236) 魯有兀者王駘,從之遊者,與仲尼相若.……仲尼曰 夫子,聖人也.「덕충 부」

237) 立不教,坐不議,虛而往,實而歸.「덕충부」

238) 固有不言之教,無形而心成者邪?「덕충부」

239) 是以聖人處無為之事,行不言之教『도덕경』2장 240) 希言自然.『도덕경』23장

241) 既已為一矣,且得有言乎?既已謂之一矣,且得無言乎?一與言為二,二與 一為三. 自此以往,巧歷不能得,而況其凡乎!「제물론」

242) 1958년 모종삼, 서복관, 장군매, 당군의가 「중국문화선언(중국문화에 관 해 세계의 인사들에게 알리는 선언)」을 내보일 때 그들은 서양과 상대적으 로 비교될 수 있는 중국 문화 및 사상의 특성으로 ‘일원성(一原性)’ 또는 일

‘본성(一本性)’라는 점을 지적하였는데, 이는 곧 근본이 하나라는 도(道)와 맥 락이 연결되어 있다. 식물과 동물 등 유기체의 생명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뿌 리 또는 원시세포에서 출발하듯이, 곁가지인 주변부보다 근본을 중시해야 한 다는 점은 중국 철학의 특질로 꼽을 수 있다. 이 글의 전문은 牟宗三, 『中 國哲學的特質』, 김병채 외 옮김, 『모종삼 교수의 중국철학 강의』, 서울:

예문서원, 2011, 부록을 확인하면 된다.

243) 夫道未始有封.「제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