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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소련의 사례 : 고르바초프 시기10

(1) 소련군의 부패 및 기강문란 실태

소련군에서 부패는 군 고위층들이 군 조직을 통제하거나 때로는 개 혁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이 된 후 당은 더 이상 혁명을 선두에서 이끄는 전위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 하였다. 당은 혁명투쟁을 실제 수행하기 보다는 일상 속에서 그저 혁 명을 거론하는 정도였다. 이를 혁명투쟁의 ‘관행화’(routinization)11라 고 하는데, 당이 투쟁을 포기하는 대신 누군가 당을 대신하여 투쟁하길 바라는 과정을 의미한다.12

이 결과, 당 지도부는 어리석게도 개인의 이익과 조직의 이익을 분

리하는 ‘관료적 개인화’(bureaucratic personalization)를 저질렀다.

특히 소련군에서의 관료적 개인화 현상은 군 안팎에서 군 고위층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위신을 유지하기 위한 관행으로 정착되었다. 더 심각 한 문제는 군이 부패행위를 나쁜 것으로 보지 않고,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고르바초프 시기에 나타난 소련군의 부패 및 기강문란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그 내용과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10_이 부분은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주로 Brenda J. Vallance, “Corruption and reform in the Soviet Military,”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 7, No. 4 (December 1994)를 주로 참고하였다.

11_Ken Jowitt, “Soviet Neotraditionalism: The Political Corruption of a Leninist Regime,” Soviet Studies, Vol. 35, No. 3 (July 1983), p. 278.

12_막스 베버는 ‘카리스마의 관례화’란 통제를 포기하고 누군가 통제를 수행하길 바라는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착안하여, 투쟁의 관행화로 정의하였다.

(가) 후원(Patronage)과 보호주의(Protectionalism)

후원과 보호주의는 소련군 내에서 일어난 일상적 관행들이었다. 후 원과 보호주의 시스템은 초급 장교나 중급 장교들이 진급을 하거나 징 계 또는 처벌의 대상이 되어 이를 무마시키길 원할 때 평소 알고 지내 온 군 고위층의 도움을 받는 방식이다. 군 고위층은 초급 장교나 중급 장교들의 희망사항과 애로사항을 해결해 주고 경제적 이득을 챙겼다.

그런데 후원과 보호주의 시스템과의 연결고리를 갖지 못했던 일부 장교들은 이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였고, 불만은 주로 불공정한 진급에 모아졌다. 또한 무능한 장교들이 후원과 보호주의 시스템을 이용하여 진급에 성공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따라서 많은 장교들은 일 에 대한 관심보다 지휘관과의 끈끈한 개인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최 선의 수단을 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사례 1 : 로갈스키(Rogalski) 중위는 군 중앙지도집단에서 참모 장직을 맡았던 부친 덕분에 자신의 진급뿐 아니라, 그의 가족 구 성원 대부분이 좋은 직장을 얻었다. 로갈스키 사건에서 나타난 가족 유대감에 기초한 보호 현상은 소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사례2 : 한 기갑사단의 젊은 지휘관은 소속부대의 한 장교가 자 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선 진급대상이 되었다고 불만을 가 졌다. 이 문제는 부대 당위원회 회의에서 논의되었지만 해결되 지 않았다. 자격없는 장교는 결국 진급에 성공하였고, 그 배후에 는 한 장군이 있었다.

후원과 보호주의 시스템은 병사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당연한 처 벌도 보호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사례 3 : 멜렌테프(Melentev) 대위는 음주 및 근무태만과 관련 하여 8차례에 걸쳐 적발되었음에도 자신을 보호하는 후원커넥

션을 이용하여 이를 무마할 수 있었다.

사례 4 : 유보레비치(S. G. Uborevich) 중령은 상습적으로 음주 하고, 심지어 근무시간에도 술을 마시고, 부하들을 때렸다. 그래 도 그는 매번 승진과 더불어 새로운 부서로 전출되었다. 그는 유 명한 소련군 사령관이자 전쟁영웅인 페트로비치 유보레비치의 손자였다.

후원과 보호주의 시스템은 근무배속에서도 작동하였다. 후원자는 수 혜자들에게 좋은 근무여건을 제공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일부 장교들 은 낙후된 지역으로의 배속을 피하였고, 심지어 모스크바 밖으로 한 번 도 전출되지 않았던 장교들도 많았다. 반면, 후원자가 없는 일부 장교 들은 열악한 지역에서 장기 근무를 하기가 일쑤였다.

사례 5 : 쉐쉬코(Sheshko) 대위는 여러 장교들이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에서 10~12년 동안 교체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국, 소련군은 후원자를 가진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으로 분열되 었고, 사적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공적 규정과 지시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게 되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후원과 보호주의 시스템의 폐단에 대한 군 고위층의 인식이었다. 이들은 후원과 보호주의가 오히려 군의 전통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는 시대착오적 논리를 갖고 있었다.

사례 6 : 아라포프(Arapov)13는 지휘관들이 훌륭한 젊은 장교 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소련의 군 사왕조들(military dynasties)14을 최고의 전통을 상징하는 조 국의 꽃이자 자존심으로 표현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군대 내에

13_아라포프(V. F. Arapov)는 3성 장군이며, 소련 국방성 인사참모부의 부부장이었다.

14_여기서 군사왕국이란 군벌을 의미한다.

보호주의가 존재하는 것이 군의 전통이고 이는 군대에게 이익이 라고 강변하였다.

(나) 직권 남용(Blat)과 강제 노동

직권 남용은 소련군에서 유행하였던 부패방식이었다. 직권 남용은 군 지휘관들과 고위지도자들이 극장표나 희소한 소비재로부터 기계나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재화를 획득하는 데 이용되었다. 직권 남용 은 공식적 지위를 이용하여 개인적 이득을 챙기는 특권이었고, 군 내에 서 큰 문제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고르스키(V. Gorskii)사건이 있었다.

사례 1 : 신병배치 업무를 담당하는 고르스키 대령은 대부분의 명령과 지시를 근무여건이 좋지 않은 곳으로 배치된 신병이나 사병들과 거래하는 데 사용하였다. 신병과 사병들의 부모들은 고르스키에게 샴페인, 150루블 이상의 돈, 과자와 책들을 바침 으로써 자식이 좋은 근무지를 배정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고르 스키는 보드카, 코냑, 기타 희소상품이나 좋은 상품들을 외부의 감사관들에게 제공하여 이들을 매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르스키는 경징계 처분을 받았다.

또한 부대를 위한 재화나 서비스를 획득한다는 명목으로 병사들의 노동을 악용하는 관행이 있었다. 물론 이것이 지휘관에게 개인적인 이 득을 준 것은 아니더라도, 군의 존립취지에 부합하지 않으며 군사대비 태세에 방해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장교들은 주로 인력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사병들을 장시간 예외적인 일에 동원함으로써 군사력 의 오·남용을 불러왔다.

사례 2 : 병사들이 건설 현장이나 추수 현장, 그리고 노동을 강 요당하기 위해 당 본부에 있는 대기실로 모일 때, 그들은 군인으 로서의 기본적인 군장을 휴대하지 않았다.

사례 3 : 지역 당과 행정조직은 종종 군대를 값싼 노동자원으로 보았다. 그 결과, 많은 군 복무자들이 당·행정관련 조직에서 운 전수로 일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그들에게 죽은 영혼 이라는 말이 붙어 다녔다.

강제노동 문제는 건설부대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났다. 건설부대는 주로 러시아어가 서툴거나 전과가 있는 군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강제노동에 자주 동원되었다. 건설부대들은 정부가 추 진하는 주요 건설프로젝트와 전국적 차원의 건설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무리한 강제동원은 건설부대 내 규율문란의 원인으로 작용하 였다.

사례 4 : 1989년 기준으로 300,000명 이상의 군 건설노동자들이 각종 건설사업에 투입되었다. 건설부대는 설거지와 모스크바 고 급당학교의 강의실 청소를 포함한 여러 가지 잡일도 맡았다. 설부대는 군사규정의 보호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으 로서의 권리도 갖지 못했다. 이러한 열악한 근로조건으로 인해 발생한 규율문란은 건설부대에서 발생한 모든 규율문란의 40%

를 차지했다.

규율문란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군 지도부는 군 건설노동자를 부도덕하고 군의 위신을 해치는 존재로 치부하였다. 그리하여 건설부 대를 정치범 수용소인 ‘굴락’(Gullag) 시스템으로 대체하려는 방안이 검토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서 건설부대원들은 노예와 마찬가지였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군 고위층은 건설부대가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였다고 주장하며 존속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주 장은 부대원들의 노예적 노동환경보다는 강제노동의 동원 필요성에 방점을 두었다.

사례 5 : 육군 원수 아크로미프(S. F. Akhromeev)는 육군이 단 순히 국가안보의 수호자일 뿐만 아니라, 건설과 농업, 그리고 기 타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인민의 진정한 조력자’라고 주장하였 다. 군 지도자들은 이러한 관행의 부정적 효과에 대해 우려할 하 등의 이유가 없다고도 말했다. 그는 이러한 강제노동의 이용이 적절하다고 절대적으로 믿었다.

(다) 사적 명령, 특권, 그리고 가혹행위

‘사적 명령’(one-man command)은 일부 지휘관들의 권위주의적 태 도에서 비롯되었다. 지휘관들은 자주 개인사를 위해 군대를 이용하였 다. 지휘관들은 명령복종이라는 도덕적 규범을 이용하여 면책을 누리 면서 뭐든지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사적 명령은 지휘관들로 하여 금 기존의 확립된 질서를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그들에게 지나치게 많 은 권력을 부여했으며, 지휘관들은 아무런 규정상의 책임이나 물질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사례 1 : 리아호프(Riahov) 대위는 건설부대를 동원하여 군의 사기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에서 수영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수영장은 주로 지휘관들의 사적 모임에 의해 주로 사용되었다.

사례 2 : 페투코프(N. Petukov) 소장은 부대자금과 부대원을 이 용하여 자신의 아파트를 공짜로 수리했고 자신 소유의 집을 지 었다. 그는 부대 비품인 가스 스토브와 커튼도 갖다 놓았다.

사적 명령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절대명령화 되었다. 이후부터 군대 내에서는 군 관련 법과 규정, 그리고 군 복무자들의 권리는 중시 되지 않았으며 사람에 대한 존중도 사라졌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진 급을 비롯한 각종 행위에서 하급자들은 상급자에게 완전히 의존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사적 명령은 상급자들로 하여금 하급자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