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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안보인식 변화와 한반도 평화라는 주제를 다루기 전에 먼 저 몇 가지 지적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평화와 안보의 개념적 상 관성이다. 한국이 놓여있는 시대적 좌표를 생각할 때, 한국이 효과적 안 보정책을 통해 안정적 국제환경을 유지하고 이에 근거하여 한반도에서 평화의 구축을 장기적이고 궁극적 목표로 간주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별다른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안보와 평화의 관계설정, 더 나아가 어떠한 방식으로 평화에 이르게 되느냐에는 단선적이고 유일한 방법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많은 경우 평화(peace)와 안보(security)는 광범위한 영 역을 가지며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평화를 소극적으로 정의할 때 전쟁 과 폭력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에 반해 적극적 의미의 평화는 개인 들간 그리고 집단들 간의 조화(harmony)이며 갈등의 창조적 변형을 의 미한다.1) 따라서 일반적으로 평화는 안보를 포괄하는 상위의 개념이 되며, 평화학(peace studies)는 안보학(security studies)을 포함하는 다차원적 접근법이다. 물론 안보라는 개념 또한 포괄적 정의가 가능한데, “외부적

1) Richard Smoke and Willis Harman, Paths to Peace: Exploring the Feasibility of Sustainable Peace (Boulder: Westview Press, 1987), pp. 1-3.

위협에 대한 개인과 집단의 물리적 안전상태”라는 정의가 그 중 하나다.2) 그리고 안보의 영역 또한 군사안보부터 인간안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 역을 포괄하고 있다. 따라서 평화가 곧 전쟁의 결여라는 소극적 정의를 따 르면 평화는 대개 안보, 특히 군사안보와 동일시되며 평화학도 안보학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러나 평화와 안보가 상당부분 중첩되는 영역은 있으나, 반드시 전 영역이 완전하게 동일시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평화와 안보에 이르는 길은 크게 네 가지 형태로 나뉘어 설명된다.3) 첫째, “무제한적 자위(Unlimited Self-Defense)”를 통한 안보다. 이것은 대개 국제정치의 현실주의적 관점을 강하게 담고 있는 데, 즉 국제정치의 본질은 무정부성에 있고, 따라서 국제정치라는 자조 체제 속에서 개체의 생존 외에는 어떠한 최고의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 는 것을 강조한다. 생존을 위하여 국가는 힘을 보유해야 하며 자국의 생존에 위협을 가하는 타국에 대해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힘을 가짐으 로써 자국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논리다. 이른바 힘을 통한 안보확보의 논리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오랜 경구(警句)도 이러 한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을 추구하는 경우 평화는 대 개 억지전략, 동맹, 세력균형 등을 통해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국제체제 내 모든 국가들이 이러한 논리로 자위를 추구할 때 국가는 군 사력 증대의 끝없는 유혹에 빠지게 되며 이에 따라 지역영역이건 범세계

2) Barry Buzan, People, States, and Fear: An Agenda for International Security Studies in the Post-Cold War Era, 2nd ed., (Boulder: Lynne Rienner, 1991).

3) John T. Rourke, International Politics on the World Stage, 6th ed., (Guilford, CT: Dushkin/McGraw-Hill, 1997), pp. 377-409.

적 영역이건 국제체제는 안보딜레마에 빠지면서 불안정의 악순환을 거듭 하게 된다. 또한 이 현실주의적 접근법은 국가간 관계가 기본적으로 불 신구조에 근거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불신의 상호관계에서 국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상대국의 속임수다. 상대국이 자국보다 군사력을 급격 히 증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현상을 변경하려는 행동을 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점이 정치적 기 제로 이용될 때 일반 국민들의 안보 의식은 상시적 긴장성으로 나타나 게 된다. 이러한 구조에 따라 비용 또한 많이 소모된다. 따라서 무제한 적 자위를 통한 접근법은 평화란 곧 군사적 안보와 동일시되나, 엄밀하 게 말하자면 매우 불안전한 평화라 할 수 있다.

평화와 안보에 이르는 두 번째 길은 “제한적 자위(Limited Self-Defense)”를 통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무제한적 자위를 통한 방법이 가져오는 현실적 비용을 고려하면서 자국의 방위를 위한 군사력을 보유하면서도 그것의 무제한적 군비경쟁의 파국을 막고 군사력 운용에 일정정도 수준의 통제 를 가하는 방식이다.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군사능력에서 공격력을 어떠 한 방법으로 제한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예컨대 군비통제를 통한 안보구 축의 방법이 그 하나가 될 수 있다.4) 군비통제의 합의나 조약들이 속임 수의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접근법에는 관련국들의 게임규칙에 관한 약속이 부분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정책결정자들이나 일반국민들 의 안보의식에는 불신과 신뢰의 인식이 공존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4) 문정인, “남북한 신뢰구축: 그 가능성과 한계,” 함택영 편, 한반도 군비경 쟁과 군축 (서울: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1992), pp. 183-215; 한용섭,

한반도 평화와 군비통제 (서울: 박영사, 2004) 참조.

세 번째 평화 및 안보 확보의 방법은 “국제안보(international

security)”를 통한 접근이다. 안보를 개체 중심으로 접근하면 국가안보

(national security) 중심의 틀이 만들어지지만, 개별국가가 속해 있는

환경, 즉 국제체제나 지역체제의 안보를 중심으로 접근하면 국제안보의 개념이 효력을 가진다. 국제적으로 안전한 환경을 만들면 그 안에 속해 있는 개별 국가의 안보가 확보된다는 주장이다. 자국의 안보를 위하여 타국의 안보를 위협해야 하는 위험부담을 덜 수 있다는 점이 핵심 주장 이다. 예컨대 공동안보나 협력안보의 개념을 담고 있는 다자간 안보협 의체의 구축을 통한 지역안보 질서의 확립이나, 집단안보를 통하여 국 제적 안전상태를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설립된 국제연합이 이러한 접근 법의 소산이다. 무제한적 자위를 통한 안보구축이나 제한적 자위를 통 한 안보에 비해 평화의 규칙에 관한 간주관적 공유영역이 보다 넓어야 하며 효과있게 작동해야 한다. 관련 국가들간 관계 뿐 아니라 개별 국 가의 인식적 영역에서도 안보의 추진방법에 관한 신뢰가 전제되어 있 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전쟁의 폐지(abolition of war)”를 통한 평화와 안보를 들 수 있다. 이 방법은 평화주의적 이상을 담고 있는데, 결국 진정한 평 화라는 것은 군비의 완전한 철폐를 통해 완결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담 고 있다. 지금까지 전쟁과 폭력이 끊임없이 계승되어 오는 이유의 하나 를 군비의 보유와 확대라는 제도적 원인,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엄격한 법칙으로 전승 받아온 인류의 인식세계에서 찾고 있다. 국가가 상대를 공격할 능력이 없으면 전쟁과 폭력의 두려움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개인적 차원에서부터 집단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평화주의의 신

념이 확산되면 그것이 안보의 가장 확실한 기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른 바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구축을 일컫는다.5)

이 네 가지 형태의 안보와 평화 구축방법은 현실주의적 패러다임으로 부터 이상주의 패러다임에 이르는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무제한적 자위를 통한 안보추구 방식이 국제정치의 현실주의 주장을 가장 뚜렷하 게 나타내고 있는 반면, 전쟁폐지를 통한 평화의 추구라는 방법은 이상주 의적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볼 때 이 스펙트럼은 안 전과 평화에 관한 규칙이 개별 행위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인식적 공유 를 이루고 있느냐를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무제한적 자위를 통한 안보추구의 방법에는 평화의 창출과 유지에 관한 규칙이 행위자들 간에 상당히 미약한 정도로 존재하고 있고, 행위자들의 간주관적 인식 또 한 공유되는 영역이 적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전쟁 폐지를 통한 평화 추구는 평화 유지의 규칙에 관한 간주관적 인식 공유가 협소하다면 존재 하기 힘들다.

앞서 지적한대로 안보와 평화는 상당부분 동일한 영역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으며 중복되어 있다. 그러나 안보가 곧 평화는 아니다. 모든 평 화가 안보의 관점에서만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일국중심의 군사안보정책이 안정적 평화의 상태와 반드시 동일시 될 수는 없다. 한 국의 안보와 한반도의 평화를 단선적 시각에서 접근할 수 없는 이유도 그것에 있다. 국가의 안보정책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는 말이 자주 언급 된다. 국내정치에서는 사안에 따라 여야간 쟁점이 생기고 서로 다투더

5) 요한 갈퉁 지음, 이재봉 외 옮김,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서울: 들녘, 2000).

라도 안보정책과 외교정책이 실천되는 국제정치의 장에 이르러서는 갈 등이 표명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로 흔히들 해석된다. 이른바 초당외교

(bipartisanship)라는 말이 이러한 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 오해될 소지를 안고 있다. 국가의 안보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는 말은 국가의 안보외교정책이 추진되는 국제정치의 장에서 국익의 효율 적 추구를 위하여 정당간, 집단간 갈등이 불필요한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 안보정책을 두고 벌어지는 정책적 논쟁조차 불필요하다 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아울러 안보와 평화에 관한 국민의식조차 획일적 으로 통일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랜 냉전기간의 유산, 개체 중심의 국가안보논리를 체제의 파수병으로 활용해 왔던 권위주의 시대 의 유산 때문에 한국의 안보와 한반도 평화를 하나의 단선적 방법, 즉 개체중심의 군사안보의 방법으로 접근하는 지식적 체계가 아직까지 우 리 인식 전반을 대체로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