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眞 善 (東國大)
Ⅰ. 머리말
Ⅱ. 西突厥의 叛亂과 碎葉鎭 設置
Ⅲ. 碎葉鎭과 焉耆都督府
Ⅳ. 碎葉鎭壓十姓使와 唐朝의 西 域支配
Ⅴ. 맺음말
Ⅰ. 머리말
670년대에 들어 당조의 서역지배는 크게 동요하였다. 즉 吐蕃이 본 격적으로 서역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고, 西突厥이 당의 천산 이남을 침략하였으며, 大食이 7세기 중엽부터 꾸준히 東進하여 중앙아시아 소 국가들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특히 토번은 함형 원년(670) 4월에 安西 四鎭을 모두 함락시켰고, 의봉 2년(677)에는 서돌궐과 연합하여 다시 안서사진을 함락시키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당조는 여전히 서역을 중 시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려고 하였고, 679년에는 裴行 儉이 서역으로 파견되어 서돌궐을 평정하였다.
그 결과 안서사진의 구성이 바뀌어 679년 배행검의 서역원정 이후 기존의 龜茲ㆍ疏勒ㆍ于闐ㆍ焉耆에서 언기가 빠지고 碎葉이 포함되었 다. 이 상황은 현종 개원 7년(719) 突騎施의 蘇祿이 강성해짐에 따라 쇄엽을 방기하고 다시 언기가 사진의 하나가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1)
1) 여기에서는 ① 648년 사진이 처음 설치된 때에 언기가, ② 679년 사진이 회
碎葉鎭의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기록이 전한다. 첫째, 당대 의 碎葉城이 천산 이북 碎葉水 부근에 위치한다는 新唐書 권43下, 地理志7下, 安西 조 등의 기록이다. 둘째, 천산 이남 언기에 쇄엽성이 위치한다는 資治通鑑 권200, 고종 조로 원년(679) 7월 조의 胡三省 주 등의 기록이다. 松田壽男, 張廣達, 周偉洲 등은 전자를 바탕으로 천 산 이북 쇄엽진설을 취하였는데,2) 1982년 貝希姆古城에서 당의 장수 杜懷寶가 천산 이북 쇄엽에 주둔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비문이 출토되 면서 이 설이 보다 큰 힘을 얻고 있다.3) 하지만 王永興, 李志敏 등은 여전히 후자의 입장을 취하여 천산 이남의 언기에 쇄엽진이 있었다고 보는데,4) 그 이유는 전자에 비해 후자의 언기도독부 조 기록이 당조가 설치한 쇄엽진의 위치를 매우 명시적으로 전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 에 쇄엽진의 위치에 대해 다소 혼란이 생겨날 수도 있으며, 필자 역시 그러하였다.
이 글은 당조가 쇄엽진을 설치하기까지 배행검의 서역원정 과정 및
복되었을 때에 쇄엽이, ③ 719년 사진이 재편되었을 때에 다시 언기가 포함되 어 있었다는 松田壽男의 설을 따른다(松田壽男 저, 정병준 역, 「碎葉과 焉耆」,
한국고대사탐구 16, 2014).
2) 殷孟倫, 「試論唐代碎葉城的地理位置」 (文史哲 1974-4); 吳震, 「從吐魯番出 土“氾德達告身”談唐碎葉鎭城」 (文物 1975-8); 周偉洲, 「略論碎葉城的地理位 置及其作爲唐安西四鎭之一的歷史事實」 (新疆曆史論文集, 新疆人民出版社, 1977); 張廣達, 「碎葉城今地考」 (北京大學學報 1979-5); 王小甫, 「試安西四 鎭焉耆與碎葉的交替」 (北京大學學報 1991-6); 松田壽男 저, 정병준 역, 「碎 葉과 焉耆」 등.
3) 나이토 미도리는 「アクベシム発見の杜懷寳碑について」에서 두회보비를 중점 으로 쇄엽진 위치를 고증하였다(內藤みどり, シルクロード學硏究 4, シルク ロード學硏究センター, 1997, pp.151-158). 努爾蘭․肯加哈買提, 「碎葉出土唐代 碑銘及其相關問題」 (史學集刊 2007-6).
4) 陳寅恪과 郭沫若은 쇄엽진 위치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왕방익의 쇄엽성 이 언기에 있다고 한 점에서 언기 쇄엽진설에 포함된다(陳寅恪, 「李太白氏族之 疑問」, 淸華學報 권10, 1935-1, pp.153-155; 郭沫若, 李白與杜甫, 大民文 學出版社, 1971, pp.3-16; 王永興, 「唐代前期安西都護府與四鎭硏究」, 唐代經 營西北硏究, 2010; 李志敏, 「唐安西都護“兩四鎭不同”問題述要 -碎葉鎭城地望 考實」, 中國歷史地理論叢 24-3, 2009).
쇄엽진의 위치 관련 기록들을 다시 검토하여 쇄엽진의 위치를 나름대 로 확정하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당조의 서역지배 정책과 그 의미 를 기술해 보려는 것이다.
Ⅱ. 西突厥의 叛亂과 碎葉鎭 設置
서돌궐은 태종 정관 연간(627-649) 초 沙鉢羅咥利失可汗 시기에 부 락이 10개로 나뉘었는데, 5咄陸部가 碎葉水 동쪽에, 5弩失畢部가 쇄엽 수 서쪽에 살았다. 정관 22년(648) 4월 阿史那賀魯가 당에 內屬하면 서 일시적으로 5돌륙부가 당의 지배를 받았으나, 태종 사후 아사나하 로가 당에 반기를 들면서 서돌궐은 다시 당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당 조는 고종 현경 2년(657) 12월에야 아사나하로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 들이 살던 땅에 두 羈縻 都護府를 설치하여 쇄엽수 동쪽에 崑陵都護府 를 두고 阿史那彌射를 興昔亡可汗ㆍ崑陵都護에, 쇄엽수 서쪽에 濛池都 護府를 두고 阿史那步眞을 繼往絶可汗ㆍ濛池都護에 임명하여 각기 부 락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때 비로소 당은 천산 이북의 서돌궐을 다 스릴 초석을 두었다.
하지만 두 괴뢰 가한을 앞세운 당조의 천산 이북 서돌궐 통제는 그 다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다. 고종 용삭 2년(662) 윤12월 䫻海道 總管 蘇海政과 아사나보진이 아사나미사를 살해하였고, 건봉 2년(667) 아사나보진도 사망하였다. 두 가한이 모두 없어지자 서돌궐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같은 해 서돌궐의 阿史那都支와 別帥 李遮匐이 남은 무리 들을 거두어 토번에 붙었다.5) 서돌궐 영역이 이른바 ‘十姓無主’6) 상태
5) 이 일은 자치통감 권201, 고종 용삭 2년(662) 12월 조, p.6332에 있다. 하 지만 책부원구 권967, 外臣部, 繼襲, 건봉 2년(667) 조에 “乾封二年, 二可汗 旣死, 餘衆附于吐蕃”(p.11372)라는 기록을 근거로 계왕절가한의 사망 및 서돌 궐이 토번의 편에 선 시점을 667년으로 본다(佐藤長, 古代チベット史硏究
上卷, 同朋舍, 1977; 원래 1958, p.321; 森安孝夫, 「吐蕃の中央アジア進出」,
가 된 것이다. 이에 당은 고종 함형 원년(670) 4월 토번의 안서사진 함락으로 인한 서역에서의 후퇴를 만회하고 다시 천산 이북의 지배를 공고하게 하기 위하여 671년 4월 토번에 붙었던 아사나도지를 左驍衛 大將軍ㆍ兼匐延都督으로 삼고 5돌륙부를 安集하게 하였다.7) 그러나 이 역시 오래가지 못하였는데, 고종 의봉 2년(677)8) 아사나도지가 서 돌궐 十姓可汗을 자칭하고 이차복과 함께 토번과 연합하여 安西를 침 입한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한동안 서돌궐이 당에 반기를 들고 저항 하였다.9)
金澤大學文學部論集(史學科篇) 4, 1984, p.4; 薛宗正, 「後西突厥兩廂可汗始末
」, 新疆師範大學學報 2001-4, p.37).
6) 자치통감 권201, 고종 용삭 2년 12월 조, “由是諸部落皆以興昔亡爲冠, 各有 離心. 繼往絕尋卒, 十姓無主, 有阿史那都支及李遮匐收其餘衆附於吐蕃”(p.6332);
자치통감 권203, 무측천 수공 원년(685) 11월 조, “初, 西突厥興昔亡ㆍ繼往 絕可汗旣死, 十姓無主, 部落多散亡, 大后乃擢興昔亡之子左豹韜衛翊府中郎將元 慶爲左玉鈐衛將軍, 兼崑陵都護, 襲興昔亡可汗押五咄陸部落”(p.6435).
7) 신당서 권215하, 서돌궐전하, “咸亨二年, 以西突厥部酋阿史那都支爲左驍衞 大將軍兼匐延都督, 以安輯其衆”(p.6064)이라고 하고, 자치통감 권202, 고종 함형 2년 4월 조, p.6366에도 같은 사건을 전한다. 또한 책부원구 권964, 외신부, 책봉2, 함형 원년 조에서는 아사나도지에게 “5돌륙과 咽麵의 무리를 安輯하게 하였다”고 한다(p.11341). 이렇게 볼 때 아사나도지의 근거지는 복 연도독부 일대로 생각된다. 또한 그에게 서돌궐의 5돌륙부와 인면 등을 통할 하도록 하였으므로 그의 지배권은 이들 부락에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그 가 십성가한을 자칭하며 토번과 연합하여 안서를 침입한 무렵에는 십성가한이 라는 칭호에서 서돌궐의 5노실필부도 그의 지배권에 편입되었다고 보인다.
한편, 위 책부원구 기록에서는 아사나도지의 복연도독 임명 시점을 670년 4월이라고 한다. 이를 근거로 나이토 미도리는 토번이 670년 4월 안서사진을 함락하자 당조가 토번의 서돌궐부로의 진출을 우려하여 십성에 주인이 없던 서돌궐부를 안집시킬 목적으로 아사나도지를 복연도독에 임명하였다고 한다 (内藤みどり, 西突厥史の研究, 早稲田大学出版部, 1988, pp.275-276).
8) 신당서 권108, 배행검전, pp.4086-4087; 全唐文 (中華書局) 권228, 張說 8, 贈太尉裴公神道碑 조, p.2305; 신당서 권3, 고종본기, 의봉 2년 조, p.73.
王小甫는 677-678년이라고 한다(王小甫, 「論安西四鎭焉耆與碎葉的交替」, 北 京大學學報 1991-6, p.98). 677년 무렵부터 서돌궐과 토번이 안서(안서도호 부의 관할 범위를 지칭)를 침핍한 듯하다. 또한 서돌궐과 토번의 안서 침입에 대해서는 森安孝夫, 「吐蕃の中央アジア進出」, pp.14-16 참조.
9) 廉景伊는 토번의 공세와 서돌궐의 반당으로 고종대의 대외 정책이 동요하였
서돌궐과 토번 연합군이 안서사진 일대를 장악하자,10) 당 조정에서 는 서쪽 변경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어 이들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앞 서 토번은 의봉 원년(676) 윤3월에 鄯州ㆍ廓州ㆍ河州를, 같은 해 8월 에 疊州를 침략하였고, 다음해(677년) 5월에는 扶州의 臨河鎭을 노략 질하였다. 당조는 의봉 3년(678) 정월 李敬玄을 洮河道大總管ㆍ兼安撫 大使에 임명하여 토번을 치게 하였다. 같은 해 9월 이경현이 이끄는 18만 군대가 青海에서 토번 장수 論欽陵에게 패배하자 黑齒常之가 이 를 겨우 구원하였다. 흑치상지는 이 공으로 河源軍副使에 충임되었 다.11)
그런데 이후 당조가 679년 하반기에 사진을 復置하기까지 사진이나 청해 일대에 대한 토번의 뚜렷한 우위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佐藤長은 678년 겨울 토번 내부에서 정치적 숙청이 일어났기12) 때문 일 것이라고 한다.13) 한편, 토번의 내부 상황도 있었지만, 자치통감
권202, 고종 개요 원년(681) 5월 조에서는 흑치상지가 河源에서 군 대에 임한 7년 동안 토번이 감히 변경을 침략하지 못하였다(p.6401) 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고종 말년 당조의 사진 회복 및 서역 진출은 토번의 연합 세력이었던 서돌궐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 유
으며, 이는 당군의 군사력이 광범위한 기미부주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며 기 미부주체제를 통한 지배라는 대외 정책에 한계가 드러났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廉景伊, 「唐 高宗代 對外 政策의 性格과 意味 -唐使 派遣을 중심으로」, 中國 史硏究 75, 2011).
10) 신당서 권221상, 구자전, “의봉 연간 토번이 언기 이서를 공격하여 사진 이 모두 함락되었다”(p.6232).
11) 자치통감 권202, 고종 의봉 3년 9월 조, p.6385; 구당서 권196상, 토번 전, p.5224; 구당서 권109, 黑齒常之傳, p.3295.
12) 王堯ㆍ陳踐 譯註, 敦煌本吐蕃歷史文書(增訂本) (民族出版社), p.147.
13) 佐藤長, 古代チベット史硏究 上卷, pp.333-341. 한편 토번은 내분의 종식 후 680년 사천과 청해 방면으로 당을 공격하였고, 이때 雲南의 諸蠻이 토번에 게 귀부하였다. 그렇지만 청해 전선에서 당조가 설치한 河源軍이 방파제 역할 을 하면서 당은 토번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이렇듯 680년 이후도 국지적 으로 당-토번의 공방전이 이어졌지만,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고 한다(菅沼愛語,
7世紀後半から8世紀の東部ユーラシアの國際情勢とその推移 -唐ㆍ吐蕃ㆍ突厥 の外交關係を中心に, 溪水社, 2013, pp.43-44).
의할 필요가 있다.
서돌궐 토벌은 고종 조로 원년(679) 6월 배행검이 서역원정을 떠나 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배행검은 安撫大食使에 제수되어 대식에게 나라가 망한 후 당에 귀부한 波斯王子 泥涅師師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려는 호송으로 위장하였다. 배행검의 첫 행보는 莫賀延磧(伊 州 동남쪽, 옥문관 바깥)을 지나 자신의 옛 부임지였던 西州에 이르러 함께 토벌에 나설 안서사진 諸蕃의 자제14)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이 모집에 사진 제번의 자제가 만여 명이나 참여한 것이 주목할 만한 데,15) 이는 당조의 안서사진 수복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16) 만일 당이 사진을 일정부분 회복하거나 회유하지 못하였더라면 사진 제번의 자제는 모집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고, 배행검은 사진 토벌부터 서역 원정을 시작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677년 사진이 함락된 이후 부터 배행검이 서주에 도착하기 이전, 그 사이에 이미 당조는 어느 정 도 천산 이남의 사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서주에서 군대를 모집한 배행검은 먼저 사냥을 하고 토벌하지 않는 척하며 아사나도지가 경계를 느슨히 하도록 만들었다. 나아가 그들이
14) 程喜霖은 이때의 蕃酋 자제가 城傍 子弟이며 波斯軍의 주력으로 편성되어 아사나도지를 잡고 안서를 침범하는 돌궐과 토번 연합군을 격파하며 당 영토 를 쇄엽까지 확대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程喜霖, 「論唐代西州鎭戍 -以吐 魯番唐代鎭戍文書爲中心」, 西域硏究 2013-2, p.11).
15) 구당서 권84, 배행검전, “至西州, 人吏郊迎, 行儉召其豪傑子弟千餘人隨己而 西. 乃揚言紿其下曰, ‘今正炎蒸, 熱坂難冒, 涼秋之後, 方可漸行.’ 都支覘知之, 遂 不設備. 行儉仍召四鎭諸蕃酋長豪傑謂曰, ‘憶昔此遊, 未嘗厭倦, 雖還京輦, 無時暫 忘. 今因是行, 欲尋舊賞, 誰能從吾獵也.’ 是時蕃酋子弟投募者僅萬 人”(pp.2802-2803). 다만 이때 모집에 응한 사진 제번의 자제는 천산 이남에 분포한 지역 출신이었다고 생각된다. 배행검의 서역 원정이 끝나기 전 쇄엽은 서돌궐이 차지하고 있었지 사진의 하나가 아니었고, 679년 9월 원정이 끝난 이후에 처음으로 쇄엽진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이전에 언급된 사진은 옛 사진으로 언기를 포함한 천산 이남의 사진이라고 생각된다.
16) 王小甫는 678년 최지변이 토번에게 패하였다는 기록이 없고, 배행검이 서역 원정 당시 사진의 도움을 받고 있는 점 등을 근거로 679년 상반기에 이미 당 조가 사진을 회복하였다고 한다(王小甫, 唐ㆍ吐蕃ㆍ大食情致關係史, 中國人 民大學出版社, 2009, pp.74-77).
토벌군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는 때를 엿보면서 아사나도지의 쇄엽 아 정 10여리 앞에 이르렀다.17) 이때 아사나도지는 앞서 이차복과 함께 모의하여 가을에 당의 사신을 거부하기로 하였는데, 갑자기 당군이 이 르렀다는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식솔과 수령 등 5백여 기를 거느리고 군영에 이르러 항복하였다.18) 이에 배행검은 큰 무력 충돌이 없이 그 를 사로잡았다.
아사나도지를 사로잡은 배행검은 신표용 화살[契箭]을 돌려 아사나 도지 휘하 諸部를 잡아 쇄엽성으로 돌려보내고,19) 남은 반란군 세력인 이차복을 공격하러 나섰다. 구당서 권84, 배행검전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A] 정예 기병을 선발하여 가볍게 무장하고 새벽녘에 앞으로 나아가 이차복을 사로잡으려고 하였다. 도중에 과연 아사나도지의 귀환 사자를 잡으니 이차복의 사자가 함께 있었다. 배행검이 이차복의 사자를 풀어주 며 먼저 가서 그 주군을 깨우치게 하고 아울러 아사나도지가 이미 사로 잡혔음을 말하게 하니, 이차복이 곧 내항하였다. 將吏 이하가 쇄엽성에 비석을 세워 그 공적을 기록하였다. 배행검이 아사나도지와 이차복을 잡 아 돌아왔다(p.2803).
위 사료 [A]에서 보이듯이 배행검은 아사나도지를 잡고 다시 경무장 정예 기병을 선발하여 이차복을 사로잡았다. 나아가 도중에 이차복의 사자와 함께 있는 아사나도지의 귀환 사자를 잡았다20)고 하므로 서돌
17) 나이토 미도리는 배행검이 아사나도지를 잡은 날에 도지 휘하의 추장에게 계전을 보내 이들을 사로잡고 이후 쇄엽성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으로 보건대 이 무렵 아사나도지의 아정이 천산 이북 쇄엽수에서 40리 거의 羯丹山일 가능 성이 높다고 한다(內藤みどり, 「西突厥“碎葉の牙庭”考」 東洋學報 69-3ㆍ4, 1988, pp.200-201).
18) 全唐文 권228, 張說8, 贈太尉裴公神道碑 조, p.2305; 구당서 권84, 배행 검전, p.2803.
19) 자치통감 권202, 고종 조로 원년 7월 조, “因傳其契箭, 悉召諸部酋長, 執 送碎葉城”(p.6391). 이때 쇄엽성으로 보낸 諸部는 서돌궐 십성 諸部일 가능성 이 크다.
20) 이때 아사나도지와 이차복의 두 사자가 왕래한 목적은 사료에 명확히 보이 지 않는다. 다만, 배행검이 서주에서 서늘한 가을이 된 뒤에야 천천히 가겠다
궐의 두 반란자가 다른 공간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아사나도 지와 이차복을 사로잡은 시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 있었다 면 서로 사자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고, 배행검에게 이차복의 사자가 잡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배행검이 장안으로 귀환한21) 반면 원정군의 副使였던 王方翼은 安 西都護를 겸하며 서역에 남아있었다. 신당서 권111, 왕방익전에는 서돌궐 평정 이후 그의 행적이 보다 자세하게 전한다. 그 중에서도 그 의 쇄엽성 축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22)
[B] 왕방익이 쇄엽성을 쌓고 각 面에 문 3개를 두고 구불구불하게 만 들어 출입하는 것이 잘 보이지 않게 하였으며, [공사를] 50일 만에 마쳤 다. 서역의 호인[胡]들이 자유롭게 보면서 그 방략을 헤아릴 수 없자 모 두 珍貨를 바쳤다(p.4135).
위 사료 [B]에 보이는 왕방익의 쇄엽성 축조는 당조의 쇄엽진 설치 및 사진의 復置와 유관한데, 그 설치 시기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다. 679년 상반기에 이미 사진이 회복되었다는 설,23) 679년 9월 쇄 엽성 축조 이후에 회복되었다는 설,24) 682년 7월 서돌궐 阿史那車薄 의 반란 진압 후에 회복되었다는 설25)이 그것이다.
라고 하여 아사나도지가 이를 엿보고서 대비하지 않았으며, 아사나도지는 앞 서 이차복과 가을에 오는 당의 사신을 거부하기로 하였는데, 배행검의 군대가 갑자기 이르자 계책이 없어 항복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서돌궐의 두 사신 은 당시 서주에서 자신들에게로 오는 배행검의 동향을 전하고 이에 대한 대책 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21) 구당서 권5, 고종본기하, 조로 원년 9월 조, “吏部侍郞裴行儉討西突厥, 擒其 十姓可汗阿史那都支及別帥李遮匐以歸”(p.105); 신당서 권215하, 서돌궐전, p.6064; 자치통감 권202, 고종 조로 원년 6월 및 7월 조, pp.6390-6392 참조.
22) 구당서 왕방익전에서 “碎葉鎭城을 쌓았다”(p.4802)고 하므로 왕방익이 축 조한 쇄엽성을 쇄엽진으로 볼 수 있다.
23) 王小甫, 唐ㆍ吐蕃ㆍ大食情致關係史,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09, pp.74-77.
24) 松田壽男 저, 정병준 역, 「쇄엽과 언기」, pp.205-207.
25) 679 10월 동돌궐 阿史德溫傅와 阿史德奉職 두 部, 682년 2월 서돌궐 阿史 那車薄과 咽麪 등 아사나도지 이후에도 천산 이북 지역에서 서돌궐의 반란이
먼저 679년 쇄엽을 포함한 사진의 復置는 松田壽男이 언급하였듯이
册府元龜 권967, 外臣部, 繼襲篇, 西突厥 조에 “조로 원년(679) 쇄 엽․구자․우전․소륵을 사진으로 삼았다”(p.11372)26)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679년 서역원정 당시 모집에 응했던 사진은 구자ㆍ소륵ㆍ우전 ㆍ언기였지 쇄엽이 아니었으므로 679년 상반기에 이미 사진이 회복되 었다고 할 수가 없다. 또한 682년 아사나차박의 난 진압 후 “서역이 마침내 평정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장악하지도 못한 지역에 당의 장 수 왕방익이 성을 축조할 수는 없었다고 생각된다.27)
그런데 위 사료 [A], [B]에 보이는 쇄엽성은 ① 아사나도지를 사로 잡은 후 서돌궐 제부의 추장을 돌려보낸 쇄엽성, ② 아사나도지와 이 차복을 사로잡은 뒤 將吏 이하가 배행검의 서역원정 성공을 기리기 위 하여 비석을 세운 쇄엽성, ③ 원정 이후 왕방익이 축조한 쇄엽성이 있 다. 총 세 번의 쇄엽성이 나오는데 이들 쇄엽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쇄엽은 천산 이북 熱海 부근에 위치하므로 당조의 쇄엽진 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이 쇄엽성의 위치에 대하여 간과할 수 없는 사료가 있으며, 이에 대하여 기존의 쇄엽과 다르게 그 위치를 비정한 견해도 있다.
Ⅲ. 碎葉鎭과 焉耆都督府
안서사진은 당조가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 기구임과 동
682년까지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사나차박의 난은 왕방익이 같은 해 7월에 평 정하였다. 森安孝夫는 확정하기 어렵다고하고(森安孝夫, 「吐蕃の中央アジア進 出」, pp.15-16), 李必忠은 681년 혹은 그 이후에 회복되었다고 한다(李必忠 저, 「安西四鎭 考辨」, pp.152-153).
26) 松田壽男은 이 기사를 주목하여 679년에 쇄엽진이 설치되었다고 한다(松田 壽男 저, 정병준 역, 「碎葉과 焉耆」, p.205).
27) 이진선, 「唐代 安西四鎭의 設置와 變化樣相」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5), pp.29-31.
시에 주변 민족에게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지녔던 만큼 설치와 폐지가 복잡하게 나타난다.28) 그 중 하나인 碎葉鎭은 679년 왕방익이 쇄엽성 을 축조하였을 때 처음 설치되었다. 사진의 이름은 각각 설치된 곳의 지명에서 유래하였는데, 안서(구자)는 안서진(구자진), 소륵은 소륵진, 우전은 우전진, 언기는 언기진이라고 하였다. 쇄엽진 역시 그 땅 주위 에 쇄엽수가 흐르고, 그곳의 지명이 쇄엽이라는 점에서 그 명칭이 지 명과 유관한 것은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쇄엽진의 위치는 응당 천산 이북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왕방익이 축조한 쇄엽성의 위치에 대해 신당서 권43하, 지리지7하, 羈縻州, 隴右道, 四鎭都督府, 焉耆都督府 조를 보면
[C] 쇄엽성이 있는데, 조로 원년(679) 안서도호 왕방익이 축조하였다.
네 면에 12개의 문이 있고 굴곡이 있으며 은밀히 출몰하는 형상이다 (p.1134).
라고 하여, 쇄엽성이 바로 언기도독부에 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렇 다면 쇄엽진이 천산 이북이 아닌 언기도독부 경내에 있었던 것인가.
위 사료 [C]를 근거로 일찍부터 쇄엽진의 위치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어 왔다. 쇄엽진 위치에 대한 의문은 (嘉慶)大清一統志 권523, 古 蹟, 焉耆都督府 조에서 “碎葉鎭은 곧 焉耆鎭인 듯하고, 毗沙鎭은 곧 于闐鎭과 같다. 그렇다면 당에 두 개의 쇄엽이 있어 사진의 쇄엽은 곧 언기국 경내에 있었는가?”라고 하여 淸代에도 제기되었다.29) 쇄엽의 위치는 唐代 시인 李白의 출생지가 쇄엽이라는 것에서도 주목을 받아 왔다. 陳寅恪은 사료 [C]를 소개하면서 이백의 출생지인 條支가 언기 에 있다고 하여 쇄엽진이 곧 언기에 있다고 보았고,30) 郭沫若은 이백
28) 안서사진이 설치된 지역은 당의 변경을 지키는 요충지이며, 실크로드 간선 상에 위치하여 당과 외국의 교류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9) 또 沈垚(침요, 1798-1840), 落帆樓文集 권12, 外集6, 西北地名雜考, 焉耆 鎭 조, “又似碎葉鎭即焉耆鎭, 猶毗沙鎭之即于闐鎭也. 然則唐有兩碎葉, 四鎭之碎 葉即在焉耆國界歟? 然新書又何以言十姓可汗請居碎葉, 乃以焉耆備四鎭也. 新 書雜採傳紀, 不若舊書之可信. 然不敢遽定, 姑闕疑焉”에도 같은 내용이 전한다.
의 출생지가 천산 이북 쇄엽이라고 보는 점에서 陳寅恪과 다르지만, 왕방익이 축조한 쇄엽성이 언기에 있다는 것은 陳寅恪과 동일하게 보 았다.31) 그렇다면 쇄엽진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당조의 쇄엽진 위치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32) 하나는 언기 쇄엽진설, 다른 하나는 천산 이북 쇄엽진설이다. 먼저 언기 쇄엽 진설에는 대표적으로 王永興이 있다. 언기 쇄엽진설에 따르면 안서사 진은 천산 이남으로 한정되고, 당조의 서역 경영에 있어 쇄엽진이 가 지는 의미도 대폭 축소된다. 그는 쇄엽진이 언기에 있다고 보는 근거 로 신당서 지리지의 기록 외에도 배행검이 서주에서 10일 동안 이 동할 수 있는 거리는 700리 이지,33) 2천 수백리 거리의 천산 이북 쇄
30) 陳寅恪, 「李太白氏族之疑問」, 淸華學報 권10, 1935-1. 그러나 條支都督府 에는 州가 8개 있지만, 언기도독부 내에는 蕃州가 없으므로, 조지가 언기도독 부에 있다고 할 수 없다. 한편, 黃适遠은 이백의 출생지인 碎葉이 哈密이라고 한 것에서 陳寅恪과 차이가 있지만, 언기 쇄엽이 고종대에 만들어졌다고 하여 쇄엽진이 언기에 있다는 점에서는 陳寅恪과 같다(黃适遠, 「哈密 -詩仙棲居的 故地」, 絲綢之路 2007-2).
31) 郭沫若은 陳寅恪이 신당서 지리지를 근거로 천산 이북의 쇄엽과 언기 쇄 엽이 동일하다고 본 것을 오류라고 비판한다. 또한 이백이 죽은 지 55년 뒤 憲宗 元和 12년(817)에 세운 비의 내용을 보면 文苑英華 권945, 贈左拾遺 翰林供擧李白墓志 조, “수나라 말엽에 난리가 많아지자 일가족이 쇄엽성으로 숨어 들어가, 뿔뿔이 흩어져 이름을 감추었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이백이 쇄 엽성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郭沫若, 李白與杜甫, 大民文學出版社, 1971, pp.3-16; 郭沫若 저, 임효섭⋅황선재 역, 李白과 杜甫, 까치, 1992, pp.7 -29).
32) 언기와 천산 이북 쇄엽진설 이외에 鐘興麒의 합밀 쇄엽진설이 있다. 그는 淸 代 鐘方이 지은 哈密志 「咏合羅川」 시의 세주에 “哈密에 쇄엽성이 있는데, 바로 옛 돌궐의 땅이다. …… 合羅川은 하미 서쪽에 있는데 바로 回鶻公主가 거주하던 곳이며 이 성이 아직도 거기에 남아있다”라는 사료를 근거로 하였 다. 즉 ① 배행검이 장안에서 아사나도지와 이차복을 사로잡고 다시 장안으로 돌아오는 시간과 거리, ② 680년 토번이 서쪽으로 구자ㆍ소륵 등 사진을 함락 시키고 북쪽으로 돌궐과 맞닿아 있었던 것(자치통감 권202, 고종 영륭 원년 (680) 7월 조)을 생각해 볼 때, 왕방익의 쇄엽성이 하미에 있다고 한다(鐘興 麒, 「唐代安西碎葉鎭位置與史事辨析」, 中國邊疆史地硏究 10-1, 2000). 그러 나 자치통감 영륭 원년 7월 조의 일은 의봉 연간의 일이므로 합밀 쇄엽진설 은 타당하지 않다.
33) 서주에서 서역으로 가는 경로는 ① 西州圖經에 있는 銀山道를 따라 서주
엽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든다.34)
고대 행군의 평균 속도가 하루 30리였음을 감안할 때35) 10일 동 안 두 배의 속도로 이동한 거리는 600-700리 정도가 합리적으로 보 이지만,36) 이 경우는 보병 위주의 행군속도이다. 원정군은 당시 四鎭 諸蕃의 자제와 호걸 만 여명을 동원한 것으로 보아 기마병이었을 가능 성도 상당히 크다. 기병의 속도로는 원정 경로 상에 있는 제번의 협조 를 받았을 경우 충분히 언기도독부 경내를 초과할 수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하였듯이 아사나도지와 이차복은 다른 공간에 있었으므로 아사나 도지만을 사로잡은 후 그곳에 쇄엽진이 설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아사나도지의 아정이 쇄엽성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면 이들을 사로잡고 세운 쇄엽진은 천산 이북에 있는 것이 합당하다.
쇄엽성의 위치가 언기에 있다고 보는 자치통감 권195, 태종 정관 12년(638) 12월 조의 호삼성 주에 [D] “쇄엽성은 焉耆 碎葉川에 있 다. 安西에서 서북쪽으로 1천리를 가면 쇄엽에 이른다(p.6142)”라고 한다. 또 자치통감 권200, 고종 영휘 6년(655) 11월 조의 호삼성 주에 [E] “弓月城에서 思渾川을 지나 伊麗河를 건너면 쇄엽 경계에 이른다. 또한 서쪽으로 1천리를 가면 쇄엽성에 이르며 언기도독부 경
에서 언기에 이르는 약 600리 길, ② 唐代交通圖考에 있는 白水潤道를 따라 서주에서 庭州 輪臺縣을 거처 쇄엽에 이르는 약 2천 수백리 길이다.
34) 王永興, 「唐代前期安西都護府及四鎭硏究」 (唐代經營西北硏究, 蘭州大學出 版社, 2010), pp.93-196. 이때 王永興이 10일이라고 지적한 것은 구당서와
신당서의 배행검전에서 수일이라고 하지만, 贈太尉裴行儉神道碑에 “裹糧十 日, 執都支於帳前”이라는 구절을 근거로 한 것이다. 다만, 10일이 왕복을 염두 한 것인지 편도만을 염두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아 의문만 제시해 둔다.
35) 孫子 권中, 軍爭7, “舉軍而爭利, 則不及, 委軍而爭利, 則輜重捐. 是故卷甲而 趨, 日夜不處, 倍道兼行, 百里而爭利, 則擒三將軍, 勁者先, 疲者後, 其法十一而 至. 五十里而爭利, 則蹶上將軍, 其法半至. 三十里而爭利, 則三分之二至. 是故軍 無輜重則亡, 無糧食則亡, 無委積則亡.”
36) 토론자께서도 지적하였듯이 천산 이북 쇄엽에까지 배행검의 군대가 서돌궐 을 토벌하고 장안으로 돌아가는 일은 시간상 불가능 해 보인다. 다만 鐘興麒 의 연구에 의하면 장안에서 언기까지의 거리도 시간상 무리가 있다고 보인다 (鐘興麒, 「唐代安西碎葉鎭位置與史事辨析」, 2000).
내[界]에 속한다(pp.6295-6296)”라고 한다. 호삼성은 대체로 쇄엽성 이 언기에 있다고 파악하였다. 그러나 [D]와 [E]는 서돌궐 본거지로 써의 쇄엽성을 설명하는 부분이므로 이때 쇄엽성의 위치는 천산 이북 이다. 또 [D]의 경우 안서에서 서북쪽으로 1천리를 가면 쇄엽에 이른 다고 하였는데, 통상적으로 안서도호부가 서주보다 구자에 있었던 기 간이 길고,37) 구자진을 안서진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이때 안서는 구자 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쇄엽과 언기의 방향을 보면 쇄엽은 구자에서 서북쪽에 있지만, 언기는 구자에서 동쪽에 있다. 안서를 서주라고 해 도 당시 언기는 서주의 서북이 아닌 서남쪽에 가깝다.
[E]에서 쇄엽이 언기도독부 경내에 속한다는 것은 언기가 쇄엽을 관할하였다는 의미인데, 두 지역은 지리적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언기보다 가까우면서 상위 관할권을 가진 지역(안서 혹은 北庭)이 있었으므로 쇄엽은 언기도독부 경내에 속할 수 없다. 또한 거 리적 수치는 제외하더라도, 궁월성에서 사혼천을 지나 이려하를 건넌 다고 하였으므로 그 위치는 천산 이북이다. 자치통감 권203, 고종 영순 원년(682) 4월 조에서 서돌궐의 阿史那車薄과 왕방익이 熱海(이 식쿨湖, 현재 楚河)에서 싸웠다고 하는 호삼성 주에 쇄엽 주변 지명에 대한 설명이 있다. 즉, “궁월성에서 사혼천, 蟄失蜜城을 지나 이려하를 건너면 쇄엽 경계[界]에 이른다. ……… 쇄엽성 동쪽에 열해가 있는데 땅이 춥지만 얼지 않는다”(pp.6408-6409)라고 한다. 이려하와 열해는 모두 천산 이북에 위치한다. 따라서 쇄엽성 위치에 대한 호삼성의 견 해는 거리나 방향에 착오가 있으므로 신뢰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38)
李志敏 역시 사료 [C]를 근거로 왕방익의 쇄엽성은 언기에 있다고 하였다. 또 그는 軍ㆍ鎭ㆍ守捉ㆍ城이 천산 이남에 치우쳐 있으며, 천 산 이북 특히 쇄엽 근처에는 보이지 않고, 唐六典 권7, 尙書工部, 屯 田郞中·員外郞 조의 屯田 기록에 쇄엽의 둔전이 보이지 않는다39)는 것
37) 王永興, 「唐代前期安西都護府與四鎭硏究」, pp.177-179.
38) 吳震, 「從吐魯番出土“氾德達告身”談唐碎葉鎭城」 (文物 1975-8), p.15.
39) 唐六典 권7, 尙書工部, 屯田郞中․員外郞 조, “河西道. 赤水三十六屯, 甘州一
을 근거로 천산 이북 쇄엽에 당의 군진이 없었다고 한다.40) 그러나 고 종대의 것은 아니지만 신당서 권40, 지리지4, 안서대도호부 조에
“保大軍이 있는데, 碎葉城에 주둔한다”(p.1048)라고 하여 쇄엽진에 명 확히 주둔군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당육전에 사진의 하나 가 명확한 우전의 둔전 기록 역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육전에 누락이 있을 수 있으며,41) 고고학의 발굴 결과 쇄엽에도 둔전이 시행 되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42)
당시의 사료에서도 쇄엽과 언기가 별도의 지역으로 각각 보인다.43) 하나는 1968년 4월 투르판 아스타나 100호 묘에서 발견된 두 개의 「 氾德達告身」 가운데 무측천 연재 원년(694)의 고신에 “[무측천] 垂拱 2년(686) 12월 3일의 勅에 준한다. 金牙軍이 于闐ㆍ安西ㆍ疏勒ㆍ碎葉 등 사진을 빼앗았으니 1鎭 마다 勳 一轉을 내린다. 都歷嶺 등의 陣을 격파한 것은 아울러 勳 3轉을 주니 모두 7轉이다. 西州 氾德達(高昌 縣). 輕車都尉에 임명한다”라는 기록이다.44) 다른 하나는 往五天竺國 傳에서 신라의 入竺僧 혜초가 현종 개원 15년(727) 언기에 이르러 이곳이 바로 안서사진의 하나라고 한 기록이다.45)
이렇게 볼 때 쇄엽은 언기와 다르기 때문에 쇄엽진이 언기에 있었 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된다. 쇄엽성은 張廣達의 고증에 의하면 지금 키르기스탄 북부 楚河 유역 상류 托克瑪克鎭 서남쪽 8km 阿克ㆍ
十九屯, 大斗一十六屯, 建康一十五屯, 肅州七屯, 玉門五屯, 安西二十屯, 疎勒七 屯, 焉耆七屯, 北庭二十屯, 伊吾一屯, 天山一屯”(中華書局, p.223).
40) 李志敏, 「唐安西都護“兩四鎭不同”問題述要-碎葉鎭城地望考實」, p.95.
41) 松田壽男 저, 정병준 역, 「碎葉과焉耆」, pp.193∼194.
42) 張安福 외, 唐代的西域屯墾開發與社會生活硏究 (中國農業出版, 2011), pp.60-61.
43) 또한 譚其釀, 中國歷史地圖集 -隋ㆍ唐ㆍ五代十國時期 (中國地圖出版社, 1996), 隴右道西部, pp.63-64를 보면 당 고종 총장 2년(669)의 지도로 언기 진을 천산 이남 博斯騰湖 부근에, 쇄엽진을 천산 이북 열해 부근에 표시하였 다. 나아가 670-692년 사이에 안서도호부가 쇄엽진에 있었다고 한다. 譚其釀 의 지도집에서도 쇄엽진을 천산 이북으로 파악하고 있다.
44) 吳震, 「從吐魯番出土“氾德達告身”談唐碎葉鎭城」, p.13.
45) 往五天竺國傳箋釋, 中華書局, p.178.
貝希姆村 부근으로 비정된다.46) 나아가 이 쇄엽진과 관련하여 1982년 에 중요한 금석문이 발굴되었는데,47) 이를 토대로 이후의 학자는 대부 분 쇄엽이 천산 이북 지금의 초하 유역이라고 확정하였다. 1982년 碎 葉外城의 불교 사원 유적지에서 우연히 발견된 금석문은 모두 11행으 로 이루어졌는데, 杜懷寶가 돌아가신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든 비문의 대좌이다. 그 비문 가운데 두회보의 官名에 주목할 필요가 있 다.
安西副都護碎葉鎭壓十姓使上柱國杜懷寶.
위 관명을 살펴보면, 두회보가 안서부도호이면서 쇄엽에서 활동한 것 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두회보는 언제 안서부도호로 활동하였을 까. 두회보에 관한 기록이 매우 적지만, 그의 활동과 관직이 文苑英 華 권913, 碑70, 夏州都督太原王公神道碑(이하 왕방익신도비) 조에 보인다.
46) 張廣達, 「碎葉城今地考」 (北京大學學報 1979-5). 한편, 周偉洲는 쇄엽이 巴爾喀什湖 이남 托克瑪克 부근이라고 한다(周偉洲, 「略論碎葉城的地理位置及 其作爲唐安西四鎭之一的歷史事實」, 新疆曆史論文集, 新疆人民出版社, 1977).
鄒逸麟과 趙永複은 쇄엽진 설치 연대를 연구하고, 쇄엽 위치가 천산 이북의 쇄엽수 유역이며 언기에 쇄엽이 있다는 것은 착오라고 한다(鄒逸麟ㆍ趙永複, 「 唐代的碎葉城」, 復旦學報(社会科学版) 1980-1).
47) 한편 1997년에도 쇄엽성의 제2 불교 사원 부근 阿克ㆍ貝希姆古城 남쪽 옆 에서 금석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비에 대하여 크게 세 가지 주장이 있다. ① 周偉洲의 배행검기공비설, ② 徐苹芳의 某氏 묘지비 잔편설, ③ 加藤九祚의 조 각품설이 그것이다. 努爾蘭․肯加哈買提는 비석의 형태를 통해 위 세 가설을 분 석한다. 첫째, 이 비의 잔편 규모와 투르판 출토 묘지가 거의 같으므로 이 비 는 묘지의 잔편일 것이다. 둘째, 이 비의 모양은 거북받침 머리 조각이다. 中 外에서 출토된 碑銘의 모양을 살펴보면 대략적으로 8세기-9세기 초의 것이 거북받침 머리 조각이다. 684년의 碑는 廡殿式 덮개와 네모 형태의 하부로 되 어있다. 비록 배행검 비의 구체적 규모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쇄엽출토비가
‘거북받침 머리 조각’으로 되어 있으므로 출토된 碑는 배행검기공비보다는 묘 지비의 잔편일 가능성이 더 근접하다고 하였다(努爾蘭․肯加哈買提, 「碎葉出土 唐代碑銘及其相關問題」, 史學集刊 2007-6, p.76).
[F] 왕방익을 波斯軍副使ㆍ兼安西都護ㆍ上柱國으로 삼고, 安西都護 杜 懷寶를 庭州刺史로 삼았다. [왕방익이] 크게 쇄엽을 축조하였다. …… 오 래지 않아 왕방익이 庭州刺史가 되어 波斯使가 金山都護가 되고, 이전 관 리[前使] 두회보는 다시 안서를 통할하여 쇄엽을 鎭守하였다(中華書局, p.4804).
48)
왕방익이 쇄엽성을 축조하고 얼마 후 두회보가 쇄엽을 鎭守하였던 것이다. 쇄엽진이 설치되기 이전 쇄엽에 당군이 鎭守할 수 없으므로 두회보의 안서부도호 재직은 왕방익의 쇄엽성 축조 이후일 것이다.49) 나아가 ‘오래지 않아’라는 점에서 볼 때, 두회보가 쇄엽을 진수한 시기 는 왕방익이 쇄엽성 축조를 완성한 직후라고 생각된다. 이는 당조의 쇄엽진이 천산 이북 열해 옆에 있었음을 분명히 말한다.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기간 동안 한 사람은 언기에 쇄엽성을 쌓고, 한 사람은 천 산 이북 쇄엽에 주둔하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배행검이 아사나도지와 이차복을 쇄엽성 인근에서 사로잡고, 왕방익 이 열해 부근의 쇄엽에 쇄엽성을 축조하였으며, 그 직후 두회보가 쇄 엽에 鎭守하였고, 당군이 쇄엽에 진수하였다는 것을 알리는 두회보 비 문이 쇄엽외성에서 출토된 점으로 볼 때 당대 안서사진의 하나인 쇄엽 진은 천산 이북 열해 부근에 있었다.
Ⅳ. 碎葉鎭壓十姓使와 唐朝의 西域支配
1982년에 발견된 두회보 비문에서 그의 관함은 安西副都護ㆍ碎葉鎭 壓十姓使ㆍ上柱國이었다. 이때 ‘碎葉鎭壓十姓使’는 어떤 관직인가. 쇄 엽은 지명을 나타내고 십성은 서돌궐 십성으로 아사나하로의 난 진압
48) 全唐文 권228, 唐故夏州都督太原王公神道碑 조, p.2303.
49) 두회보와 왕방익이 안서도호였던 기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나와 있다. 즉 李大龍, 都護制度硏究 (黑龍江敎育出版社, 2012), p.194; 초판 (2003), p.150의 정리를 참조.
후에 남은 무리이다. 碎葉鎭壓十姓使라는 관명은 두회보비에서만 보이 므로 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서사진과 같이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는 鎭의 장수를 鎭守使라고 하는데,50) 碎葉鎭守使는 쇄엽진이 설치되어 당군이 그곳에 주둔하면서 두어졌다. 앞서 왕방익신도비에서 언급하였듯이 두회보는 쇄엽을 진수 하였다. 이렇게 볼 때 그의 ‘碎葉鎭壓十姓使’라는 관명에서 ‘碎葉鎭…
使’라는 부분은 쇄엽진수사라고 할 수 있다.51) 이는 곧 두회보가 쇄엽 진수사였음을 나타내며, 나아가 694년의 쇄엽진수사 韓思忠 이전에 보이는 쇄엽진수사의 최초 임명 사례라고 할 수 있다.
壓十姓使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나이토 미도리는 관명의 나열이라고 하는 점에서 안서부도호의 뒤는 ‘碎葉鎭守使ㆍ鎭壓 十姓使’라고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여기에 鎭이 중복되었으며
‘守使ㆍ鎭’이 생략되었다고 보았다.52) 반면, 薛宗正은 ‘鎭壓’이라는 글 자를 사용한 것은 근대의 일이고, 쇄엽진압십성사의 명칭도 당조의 다 른 誥制에서 볼 수 없는데, 이때 壓이 押자와 같다고 한다. 즉, 두회보 의 관명이 쇄엽진수사를 약칭한 ‘碎葉鎭’과 押十姓招慰使를 나타내는
‘押十姓使’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53) 당대에는 薛宗正의 견해와 같 이 진압이라는 단어가 관명에 쓰인 적이 없다.54) 그러므로 碎葉鎭壓十 姓使는 碎葉鎭守使와 壓十姓使가 결합된 관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 다.
이때 壓十姓使는 어떠한 배경에서 나온 것인가. 압십성사라는 관명
50) 菊池英夫 저, 조재우 역, 「唐代 邊防機關으로서의 守捉ㆍ城ㆍ鎭 등의 성립과 정」 (역사와 교육 17, 2013).
51) 이에 대해서는 나이토 미도리와 薛宗正 모두 같은 의견이다(內藤みどり, 「ア クベシム發見の杜懷寳碑について」, pp.151-158; 薛宗正, 「杜懷寶碑銘管窺」, 吐魯番學研究 2001-2, p.51).
52) 內藤みどり, 「アクベシム發見の杜懷寳碑について」, pp.151-158.
53) 薛宗正, 「杜懷寶碑銘管窺」, p.51.
54) 비록 관명에 鎭壓이 쓰이지 않았지만, 鎭壓이라는 단어는 당대에도 사용되었 던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 권109, 阿史那社爾傳, “其酋長咸諫曰, ‘今新得西 方, 須留鎭壓. 若即棄去, 遠擊延陁, 只恐葉護子孫必來復國’”(p.3289).
역시 다른 데에서 보이지 않으므로 그가 서역에서 활동한 시기의 행적 과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내는 왕방익신도비를 통해 살펴보자. 여기에는 그가 쇄엽에 鎭守하였다는 사료 [F]에 이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정에서는 애초에 [두회보가] 다스리는 것이 蕃戎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두회보를 대신하여 공(왕방익)을 [안서도호에] 제수하였 다. 또한 구하여 鎭을 잃지 않아 다시 두회보에게 명하여 왕방익을 대신 하게 하였다. 자연히 諸蕃의 마음이 동요하였음이 보인다.
두회보가 쇄엽에 진수하였다고 한 기록 뒤에 ‘朝廷始’라고 하고, 두 회보 대신에 왕방익을 제수하였다고 하면서 애초에 왕방익이 안서도호 가 된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두회보가 안서를 다스린 뒤로 번융과의 평화가 깨졌기 때문이다. 신도비의 성격상 자연히 왕방 익을 높일 수밖에 없더라도 두회보가 재직 시에 번융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679년을 전후하여 서쪽의 번융과 마찰이 있었던 사건은 677년 아 사나도지와 이차복의 반란, 682년 2월 阿史那車薄의 반란이 있다. 번 융과의 평화가 깨진 일은 677년과 682년 2월 두 반란이 모두 해당될 수 있지만, 두회보가 이 두 서돌궐의 난 진압에 참전하였다는 직접적 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전후 관명을 통해 추측할 뿐인데, 庭州刺史 兼金山都護가 다스리던 구역은 천산 이북이었다. 또한 안서 도호부는 천산 남북을 모두 관할하였으므로 쇄엽을 근거지로 둔 서돌 궐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보면 두회보가 두 반란 정벌에 참전하였 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즉, 압십성사는 두회보가 679년 아사나도지의 반란 진압에 참전한 뒤 쇄엽성이 축조된 이후 쇄엽을 진 수하면서 받은 관명이거나, 쇄엽을 鎭守하면서 682년 아사나차박의 반란 토벌에 참전하고 받은 관명일 것이다.55)
55) 나이토 미도리는 682년 2월에서 7월에 행해진 아사나차박의 난을 토벌한 시기에 진압신성사라는 관명이 사용되었다고 한다(內藤みどり, 「アクベシム發 見の杜懷寳碑について」, p.157).
한편, 두회보의 관명에 붙은 使는 앞에 쓰인 쇄엽진수사와 같은 使 職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 薛宗正의 견해에 따라 ‘壓’을 ‘押’으로 본 다면 碎葉鎭 뒤의 壓十姓使라는 관명은 押十姓使라고 할 수 있다. 압 십성사는 사직인 押蕃落使(이후 押蕃使)의 하나로 보이는데, 이러한 압 번사의 출현에 대하여 村井恭子는 党項人의 묘지명을 제시하면서 다음 과 같이 설명하였다. 즉, 의봉 연간(677-679)에 당항 부락의 拓跋立伽 가 당조에 귀부하여 押十八州部落使에 제수되었고, 이후 그의 아들 拓 跋羅胃가 押十八州部落使에 임명되어 대대로 비슷한 관직에 세습되었 으므로 압번사는 이미 고종 의봉 연간부터 보인다. 또한 압번사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이민족 수장에게 수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 중앙에서 파견된 것이라고 한다.56) 다만 村井恭子는 漢人 압번사가 현종 개원 연간(713-741)에 등장하였다고 하였으나, 두회보 는 중앙에서 파견되었으므로 한인 압번사도 이미 이민족 압번사가 생 기면서 비슷한 시기에 두어진 듯하다. 그렇다면 두회보의 압십성사는 이민족을 안무하기 위한 한인 압번사의 최초 수여 사례라고 할 수 있 다.
이민족 수장에게 수여한 압번사는 내부한 수령에게 그 관할하의 부 족을 통제하는 역할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이후 당조가 서돌궐 가한에 게 부여한 십성가한이라는 칭호와 비슷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 된다. 한편, 두회보의 다른 관명이 안서부도호, 쇄엽진수사였음을 고려 하면 그의 한인 압번사는 이민족을 군사적으로 진압하고 그 지역을 통 제, 감시하는 역할이었다고 생각된다.
왕방익이 쇄엽진을 설치하고, 두회보가 쇄엽을 진수하였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이는 서돌궐 부락이 당조에 내속한 것과 엄 연한 차이가 있다. 서돌궐의 내속은 이미 태종 정관 22년(648)의 아사 나하로가 있었다.57) 이러한 내속 형태는 당이 그 지역에 영향력을 미
56) 村井恭子, 「唐代押蕃使出現和歐亞東部國際形勢的變化」 (중국고중세사연구
22, 2009).
57) 자치통감 권199, 태종 정관 22년 4월 조, “賀魯帥其餘衆數千帳內屬, 詔處
치는 정도에 그치지만, 당군의 주둔은 그 지역을 당이 보다 실질적으 로 통제하려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조의 쇄엽진 설치는 679년 처음으로 쇄엽이 안서사진의 하나가 되면서 비로소 당군이 쇄엽에 주 둔하게 된 의미가 있다.58) 그 중에서도 배행검의 기공비를 쇄엽성에 세우고, 왕방익이 쇄엽성을 쌓으며, 두회보가 쇄엽을 鎭守한 일 등은 이때 당조의 서역 진출이 679년 후반 천산 이북 쇄엽에까지 확장되었 음을 의미한다.59)
나아가 당조는 쇄엽에 주둔군을 두면서부터 이를 통해 주변 이민족 의 동향 파악과 키르기스탄 주변의 국제정세 변화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쇄엽은 예로부터 서돌궐이 살던 영역이었으므로 이들 의 움직임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조의 첫 괴뢰 서돌궐 가한이 모두 사망한 후 그 부락이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고는 하지만, 이들은 이따금 반란을 일으키며 서돌궐의 부활을 꾀하였다. 또한 서돌 궐은 의봉 연간의 일에서와 같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토 번과 연계하여 당의 변경을 괴롭혔다. 당군이 주둔한 쇄엽진은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서돌궐과 토번의 연합에 대응하는 요충지였다고 할 수 있다.60)
之於庭州莫賀城, 拜左驍衛將軍”(p.6256).
58) 松田壽男은 왕방익이 쇄엽성을 축조한 때 쇄엽진이 사진의 하나로 등장하였 다고 한다(松田壽男 저, 정병준 역, 「碎葉과 焉耆」, pp.206-207.
59) 당의 천산 이북 진출은 태종 정관 20년(646) 庭州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 고, 아사나하로의 난을 진압하고 658년 쇄엽 이동과 이서에 곤릉ㆍ몽지 두 기 미 도호부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한편, 伊瀨仙太郞도 679년 당의 위세가 서쪽으로 확장되어 쇄엽에 이르렀다고 한다(伊瀨仙太郞, 中國西 域經營史の硏究, 巖南堂, 1968, p.256).
60) 王小甫는 조로 원년 사진의 설치가 십성가한 옛 땅의 통제를 강화하였고, 서 역에서 두 蕃을 단절시키는 것이 당조의 주된 서역 경영의 임무라고 한다(王 小甫, 唐ㆍ吐蕃ㆍ大食情致關係史, p.77). 자치통감 권205, 무측천 延載 원 년(694) 2월 조에 “武威道總管 王孝傑이 吐蕃의 勃論贊刃ㆍ突厥可汗 俀子 등 을 冷泉과 大嶺에서 격파하였는데 각 3만여 명이었다. 碎葉鎭守使 韓思忠은 泥熟俟斤 등 만여 명을 격파하였다”(p.6493)라고 한다. 니숙사근은 서돌궐 십 성의 하나이다. 쇄엽이 사진의 하나로 있었던 연재 원년에도 토번과 서돌궐이 당의 변경을 침입하였는데, 이때 쇄엽진수사가 서돌궐의 니숙사근을 격파한
한편, 이때 서돌궐을 토벌하러 가는 배행검의 직함이 “安撫大食使”
였던 것을 다시 상기해보자. 대식은 651년 파사를 멸하고 그 후 7세 기 후반에 때때로 東進하여 중앙아시아 각국을 위협하였다. 고종 영휘 연간(650-655) 米國이 대식에게 격파되었고61) 康國이 자주 사자를 보내어 대식이 자주 공격을 하고 세금을 징수해 간다고 하였다.62) 용 삭 연간(661-663) 초에는 파사가 다시 대식의 침입을 받았다고 호소 하였으며,63) 대식이 또 拂菻을 격파하였다.64)
당조는 정관 연간이나 고종 즉위 초까지만 하여도 위의 昭武九姓 국가들이 대식에게 침략된 것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다. 파 사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신당서 권221하, 서역전하, 파사 국 조에
伊嗣俟가 군주[로서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자 大酋에게 쫒겨 토화라로 도망쳤는데, 도중에 대식이 그를 공격하여 살해하였다. 아들 卑路斯는 吐 火羅로 들어가 목숨을 건졌다. [비로사가] 사자를 보내 어려움을 알렸는 데, 고종은 멀어서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고 [사자를] 돌 려보냈다(p.6259).
라고 한다.65) 자치통감 권199, 고종 영휘 5년(654) 4월 조에 “비로 사가 토화라로 도망하였다”(p.6285)라는 기록이 보이므로, 비로사가 당조에 원병을 요청한 일은 654년 4월 무렵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신당서 서역전에 보이듯이 파사국왕이 대식에게 살해당하고 그 나라
것에서도 쇄엽진이 토번과 서돌궐의 연합을 막고, 당이 이에 대응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61) 신당서 권221하, 서역전하, 米 조, “永徽時爲大食所破”(p.6247).
62) 당회요 권99, 강국 조, “永徽中, 其國頻遣使, 告爲大食所攻, 兼徵賦 稅”(p.2105).
63) 신당서 권221하, 서역전하, 파사국 조, “龍朔初, 又訴爲大食所侵, 是時天子 方遣使者到西域分置州縣, 以疾陵城爲波斯都督府, 即拜卑路斯爲都督”(p.6259).
64) 구당서 권198, 서융전, 대식국 조, “龍朔初, 擊破波斯, 又破 拂菻, 始有米 麪之屬”(p.5316).
65) 구당서 권198, 파사국 조, “伊嗣候懦弱, 爲大首領所逐, 遂奔吐火羅, 未至, 亦爲大食兵所殺. 其子名卑路斯, 又投吐火羅葉護, 獲免”(pp.5312-5313).
가 망하였는데도 고종은 길이 멀다는 핑계를 대며 구원병을 보내지 않 았다. 이는 아마도 소무구성이나 파사 지역이 아직 당의 기미부주가 아니었고, 당조가 소무구성과 파사국으로 가는 길목을 장악하지 못하 였으며, 당에게 직접적으로 대식의 동진이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66)
그러나 파사에 대한 당의 태도는 고종 용삭 원년(661)부터 점차 바 뀌었다. 신당서 서역전, 파사국 조에,
용삭 초에 또 대식의 침입을 받았다고 호소하였다. 이때는 천자가 마 침 사자를 서역으로 보내어 州縣을 나누어 두려고 할 때였다. [그래서]
疾陵城을 波斯都督府로 삼고 곧 비로사를 파사도독으로 삼았다(p.6259).
라고 하여, 당조가 파사국에 기미부주를 설치했음을 전한다. 자치통 감에 의하면 파사도독부가 설치된 때는 661년 6월이고, 다음해(662 년) 정월에는 비로사가 파사왕이 되었다.67)
함형 연간(670-673) 파사왕이 장안으로 피신하기에 이르자 이전에 비해 당조는 적극적으로 이에 대응하였다. 신당서 서역전, 파사국 조에
[비로사는] 갑자기 대식에게 멸망하게 되어 비록 나라를 갖지는 못하 였지만 함형 연간에 여전히 입조하여 右武衞將軍에 제수되었다가 죽었다.
애초에 그 아들 泥涅師가 質子가 되었는데, 조로 원년 배행검이 군대를 이끌고 호송하여 돌려보내 장차 다시 그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다 (p.6259).
66) 이때 고종이 서역으로 군대 파견을 미룬 것은 한반도를 염두한 조치일 가능 성도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정병준은 당조가 한반도 전쟁에 치중하여 토번의 침략으로 인한 토욕혼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였다고 한다(정병준, 「吐蕃 의 吐谷渾 倂合과 大非川戰鬪 -唐朝의 韓半島 定策과 관련하여」, 역사학보
218, 2013).
67) 자치통감 권200, 고종 용삭 원년 6월 조, “罽賓·波斯等十六國置都督府八, 州七十六, 縣一百一十, 軍府一百二十六, 並隸安西都護府”(pp.6324-6325); 같은 책, 고종 용삭 2년(661) 정월 조, “辛亥, 立波斯都督卑路斯爲波斯王”(p.6326).
라고 한다. 당조가 대식의 동진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고 679년 6월 배행검을 보내 군사적 행동에 나선 것이다. 비록 대식과 직접적으로 군사 충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파사왕자의 호송도 서역 원정의 대 외적 명분이었으며, 그를 안서의 쇄엽까지만 호송하였지만, 파사왕자 를 세워 그 땅을 다스리게 하려는 당의 태도가 대식의 動向 및 파미르 이서 지역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변한 것은 분명하다.
파미르 고원 서쪽과 시르다리아강, 아무다리아강 사이의 서역 諸國 은 당과 대식의 완충지대였는데, 7세기 후반기부터 대식이 점점 이 지 역을 침략하였다. 이러한 서역 제국은 소륵이나 쇄엽과 인접해 있었 다. 함형 연간까지 당조에게는 직접 국경을 맞닿고 있는 서돌궐, 토번 등이 서쪽 변경의 최대 관심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서돌궐을 멸하고 토번의 침입을 재차 막아내면서 당이 천산 남북을 아우르게 되자, 이 때부터 대식의 동향이 당의 서역 지배에 위협 요소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68) 그리하여 배행검은 실질적으로 서돌궐 아사나도지를 토벌 하러 갔지만, 한편으로 그의 관직명 그대로 대식과 서역 제국의 정세 도 살피고자 하였을 것이다.69) 당조의 서역 지배에 있어 서돌궐, 토번 에 이어 대식이 새로운 적으로 부상하였고 배행검의 서역원정은 이러 한 국제적 상황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68) 후대의 기록이지만, 당과 대식은 현종 개원 연간 초에 본격적으로 군사 충돌 을 하였다. 자치통감 권211, 현종 개원 3년(715) 11월 조에 의하면 토번이 대식과 함께 拔汗那를 공격하여 발한나의 군대가 격파되자 그 왕은 안서로 도 망가 구원을 요청하였다고 한다(p.6713). 또한 같은 책 개원 5년(717) 7월 조 에 의하면 안서부대도호 湯嘉惠가 주문을 올려 突騎施가 대식과 토번을 이끌 고 사진을 빼앗을 것을 모의하고 鉢換과 大石城을 포위하자 이미 三姓 葛邏祿 의 군사를 징발하여 阿史那獻과 더불어 그들을 공격하였다고 한다(p.6728).
이로써 보건대 당조가 쇄엽을 장악한 데에는 인근 제 세력의 연합과 이에 따 른 당 변경 침략의 방어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69) 盧葦는 7세기 후반 대식이 흥기하여 파사국의 본토를 점거하였을 뿐 아니라 석국, 강국 등을 침략하였고, 당시 당은 이미 토번・서돌궐의 내환, 대식의 서 쪽 변경 소요를 방어해야 하였으므로 배행검이 안무대식사가 되었고 한다(盧 葦, 中外關係史硏究, 蘭州大學出版社, 2000, pp.214-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