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의 * 唐代 中央 沿岸 藩 镇 關係
를 중심으로
-
對外業務-
( 서울 )
金 宗 燮 市立大
. 머리말
Ⅰ
은 원래 변경 지역의 수비를 목적으로 설치되었는데 당조가
,
藩鎭 藩
를 제수할 때 을 하사하였으므로 라 불렀다
.
帥 旌節 節度使 1) 睿宗 景雲
년 부터 연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개의 절도사가 설치되
2 (711)
玄宗10
었다
.
2) 안록산의 반란(755)
으로 내지에도 설치되었는데 憲宗 元和2
년(807)
李吉甫가 편찬한 元和國計簿 에 따르면 모두48
개이다.
3) 내 지번진과 관련해서 다음 현종의 조처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肅宗 至 원년(756)
에 현종은 병사와 말 갑옷과 무기 양식과 하사품은 해“, ,
德당 路에서 스스로 공급하도록 하라
.
…중략 그… 官屬 및 郡縣官을 나 이 논문은 년 재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의 지원에 의해서 연구되었음* 2006 ( ) .
1) 舊唐書 권44, 「職官三」(이하 중국 正史는 中華書局 標點校勘本을 이용함), p.1922.
2) 安西道節度使(721), 北庭道節度使(712), 河西道節度使(711), 朔方道節度使 (721), 河東道節度使(730), 范陽道節度使(714), 平盧道節度使(719), 隴右道
(714), (719), (733) ( ,
節度使 劍南道節度使 嶺南道節度使 程志 韓濱娜․ 唐代 , , 1987). pp.82-84.
的州和道 三秦出版社
3)( )宋 司馬光, 資治通鑑 권237, 「憲宗元和二年條 中華書局」( , 1956), p.7647.
. 머리말
Ⅰ
당대 연안 번진의 동향 .
Ⅱ
연안 번진의 대외업무 .
Ⅲ
연안 번진의 의 유효성
. 過所
Ⅳ .맺음말
Ⅴ
누어 설치하고 스스로 선발하여 임명하되 임명이 끝나면 보고하도록
,
하라”4)고 하였다 이렇듯 현종이 일시적으로 번진에게 재정과 군사의.
독립,
지방관의 임명권을 부여하였는데 이후 점점 고착화되어갔다.
또 숙종 지덕 이후에 천하가 군대를 부리게 되자 중원의 자사들도 그,
예에 따라 절도사의 명칭을 갖게 되었다.
5) 이를 통해 번진은 기존의 를 기반으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번진 절도사들은,
의 장관을 겸임州 州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사료는 번진이 당조로부터 독립성과
.
예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안정기의 독립 예.
․ 속은 조화를 이루어 왕조를 원활하게 하지만 왕조의 권력이 약하거나 상대적으로 번진이 강한 경우 혹은 사회가 불안한 경우는 번진의 독립 적 성격이 점점 강화되거나 변화되면서 왕조를 위협하게 된다 그러므.
로 번진은 지방의 행정단위이면서 동시에 지방을 불안하게 하는 주요 인이었다.
번진의 발호는 당조의 명령을 듣지 않고 스스로 藩帥를 정하는 것 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부자계승에 의한 세습이었다 번진 발호는 비
. .
단 당조의 명령을 거부하는 데 끝나지 않고 반란으로까지 이어지는 경 우도 있었다 지역적인 편차는 있지만 어느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
라 당나라 전역에서 발생했다.
번진에 대한 평가를 보면 송대 이후 때부터 상당히 부정적이다 번
.
진은 곧 국가 권력을 쇠퇴시킨 주요 세력으로 반란 세력,
6) 혹은 반독 립적 성향을 지닌 小王國으로 비춰진 경향이 강하였다.
7) 송대의 이런 관점에 입각해서 번진의 권력 구조와 관련된 연구가 진행되었다.
8) 번4) 資治通鑑 권218,「肅宗至德元載條」, p.6984.
5) 舊唐書 권44,「職官三」, p.1922.
6) 大澤正昭, 「唐末 藩鎭 中央權力の と -德宗 憲宗朝 中心․ を として」( 東洋史硏究 32-2, 1973).
7) 栗原益南, 「安史亂藩鎭體制展開」(임대희 외 옮김, 수당오대사세미나 , 서경, 를 참고 이 논문은 년에 발표되었다
2005, pp.311-354 . 1971 ).
8) 松井秀一, 「盧龍藩鎭攷」( 史學雜誌 68-12, 1959); 毛漢光, 「唐末五代政治
( 50 , 2 , 1978).
社會之硏究」 歷史言語硏究所集刊 第 本 第 分
진이 갖는 지향점에 초점을 맞추어 分立志向型
,
權力志向型 統一權力,
志向型9)으로 나누어 고찰하기도 하고 번진의 성격에 따라,
河朔割據, , ,
型 中原防遏型 邊疆御邊型 東南財源型10)으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
또 다른 각도에서 번진70%
정도가 당조에 공손하였음을 밝히기도 하 였다.
11) 현재에는 각 번진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서북쪽에 위치한.
歸義軍12)에 대한 연구 북쪽에 위치한,
朔方軍13)에 대한 연구와 산동 반도 일대를 강력하게 장악했던 이정기 일가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 다.
14)연안 번진과 관련된 연구 성과를 보면 번진 절도사가 겸임한 사직 에 대한 연구가 있다 당조가 주변 민족에 대해 취한 기미정책을 전환
.
할 필요성에 따라 押蕃使를 설치했다는 지적15)과 안사의 난 이후 권 위가 추락한 당이 주변 나라로부터 종주국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를 설치했다는 지적
押新羅渤海兩蕃使 16)이 있다 이는 당조와 연안 번
.
진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본고는 이런 점에 착안하여 중앙과 연안 번진17)의 관계를 살펴보고 자 한다 먼저 당대 연안 번진의 동향을 살펴보겠다 외국인이 자주
. , .
넘나드는 지역적 특성이 있는 만큼 다른 번진과 구별되는 연안 번진만 의 뚜렷한 특징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 후 연안 번진의 대외업무. ,
9) 大澤正昭앞 논문.
10) 張國剛, 唐代藩鎭硏究(湖南敎育出版社, 1987), p.81.
11) 王壽南, 唐代藩鎭與中央之關係硏究 大化書局( , 1978).
12) 榮新江, 歸義軍史硏究(上海古籍出版社, 1996).
13) 李鴻賓, 唐朝朔方軍硏究 吉林人民出版社( , 2000).
14) 鄭炳俊, 「平盧節度使 李正己에 대해 -代宗時期를 중심으로- (」 震亶學報 과 온건파와 강경파의 내부 분열과 94, 2002); 同, 「李正己 一家 藩鎭 高沐 -
대립- (」 歷史學報 180, 2003). 同, 「李師道 藩鎭의 滅亡에서 張保皐의 登場 으로」( 대외문물교류연구 2, 2003); 池培善, 「치청절도사 이사도에 대하여
원화 년 월 이전을 중심으로 제 집
- 13 4 - (」 東方學志 136 , 2006).
15) 村井恭子, 「押蕃使 設置の について」( 東洋學報 84-4, 2003).
16) 姜淸波, 「試論唐代的押新羅渤海兩蕃使」( 曁南學報 2005 1 ).年 期
17) 연안의 사전적 의미는 河海․호수의 물가에 연한 지방이다 본고는 편의상. 바다와 접해 있는 번진을 연안 번진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특히 외국인의 왕래와 관련된 업무를 통해 연안 번진이 지방행정체제 안에서 중앙과 얼마나 결속되어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다
.
음 이 관계를 실제 사례를 통해서 증명해 보고자 한다 즉 당나라 전. ,
역 곳곳에서 발호나 반란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상황에서 연안 번진에서 발급한 과소나 공험이 과연 통용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겠 다.
당대 연안 번진의 동향 .
Ⅱ
당대 연안 번진은 대체로 안사의 난 이후 설치되었는데 연안 번진
,
과 관련된 내용을 표로 나타내었다.
18)표 당대 연안 번진의 발호와 반란의 동향
< 1>
18)< 1> < 2>표 과 표 는王壽南의 앞 책 부록1.「唐代藩鎭總表」를 참고하였다 임. 용방식에서 强藩이란 당조의 명령이 아니라 강력한 번진이 휘하의 장수 등을 절도사로 삼은 경우를 말한다.
내용 번진
존속 기간
절도사의 출신19)
발호시기 임용
방식 반란 시기 임용 방식
발호․ 반란절 도사수
발호․ 반란비 율(%) 총수 문관 무관
幽州 713~
906 43 10 32
763 781~ 擁兵 744 755~ 朝命 785 906~ 擁兵 756 758~ 擁兵 81 781 785~ 襲兄 橫海20) 784~
906 29 6 19 784 818~ 朝命
9/29 49 880 906~
平盧淄 靑 756~
906 40 13 17
765 782~ 擁兵
782 792~ 襲父
9/40 55 792 806~ 襲父
806 819~ 襲兄
884 889~ 擁兵 890 906~
淮南 756~ 40 32 6 888 906~ 擁兵 773 784~ 朝命 7/40 25
임용방식은 앞에 있는 발호시기나 반란시기에 주체가 된 절도사의 임용방식을 말한다
(* )
반란시기란 발호 끝에 반란이 일어난 경우로 발호와 구분 지었다
(* , )
위의 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 ,
幽州를 제외 한 연안 번진들은 발호나 반란이 잦지 않았다 회남은 당.
僖宗 이전까 지 한차례 반란이 있었고100
년 넘게 발호나 반란이 없었다 발호나.
반란 기간이 비교적 긴 횡해와 평로치청도819, 820
년 이후에는 오랜 기간 동안 발호나 반란이 없었다 그런데.
契丹과 奚를 비롯한 여러 민 족들과 북쪽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유주는 발호와 반란이 거듭된다.
당조는 다른 연안 번진과 달리 유주가 비록 발호를 하더라도 바로 즉 각적 대응을 하지 않는다 이렇듯 당조의 압력이 다른 연안 번진에 비.
해 덜 했는데 그 이유는 지정학적 특성상 거란 등과 잦은 전쟁을 치르 는 유주를 당은 완충지역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 문 무관의 수는 출신성분이 확인 가능한 경우이다․ .
20) 827년 以前橫海節度副使 李同捷이 횡해의 관할구역인 滄州와 德州에서 반 란을 일으켰는데 그를 절도사로 보기는 어렵다, ( 資治通鑑 권243, 「文宗太和
, p.7854. ).
元年條」 以前 海節度副使李同捷横 為兖海節度使
906 879 887~ 朝命
浙西 756~
906 48 37 6 893 906~ 朝命 799 807~ 朝命 2/48 14 浙東 757~
906 50 34 4 880 886~ 朝命
887 896~ 擁兵 4/50 17 896 906~ 擁兵
福建 760~
906 52 28 8 884 906~ 擁兵 2/52 15
嶺南東 道 715~
903 69 49 9 901 906~ 擁兵 2/69 3
嶺南西 道 793~
906 43 10 10 0/43 0
容管 756~
903 39 15 10 894 903~ 强藩 4/39 6
安南 767~
906 45 8 10 904 906~ 强藩 0/45 0
유주의 지나친 팽창은 곧 당조의 위협이 되기 때문에 당조는 이에 대 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그것이
.
橫海였다 횡해는 지리적으로 발호와.
반란이 자주 일어나는 북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무관출신 절도사가 절 대 다수를 차지하지만827
년 以前節度副使 李同捷이 일으킨 반란을 제외하고는880
년까지 발호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
.
유는34
년간 발호를 일으킨 횡해를 헌종이 원화13
년 에 평정하고 누구보다(818)
도 번진 발호에 대해서 정확 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烏重 을 횡해절도사로 삼았기 胤
때문이다
.
오중윤은,
하삭번 진들이60
여 년 간 당조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 은 절도사 휘하의 鎭將을 주 현으로 보내어 자사와 현령 의 권한을 빼앗았기 때문이 라고 지적하면서 발호 번진 의 폐해를 개선할 것을 상주 하였다.
22) 宣宗 大中8
년 까지 제수한 명의(854) 15
절도사 가운데 무관출신이
명이었던 것에서도 당조가 횡해를 통해 유주의 반란을 경계하고자
12
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렇듯 계속 무관출신을 횡해에 파견한 것은
.
이 주변지역에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바로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을21) 문무관의 수에서 총수와 문무관의 합이 다른 것은 문무관의 구별이 불가능 한 절도사가 있기 때문이다.
22) 資治通鑑 권241, 「憲宗元和十四年條」, p.7768.
내용 번진
발호 반란이․ 없었던 시기
문무관 수21)
총수 문관 무관 幽州 713 743(30 )~ 년 11 6 4
759 762(3 )~ 년 ? ? ? 橫海 819 879(60 )~ 년 21 5 13 平盧淄靑 756 764(8 )~ 년 6 1 2 820 883(63 )~ 년 25 10 8 淮南 756 772(16 )~ 년 7 6
785 878(93 )~ 년 26 25 1 浙西 756 798(42 )~ 년 14 10
808 892(84 )~ 년 32 25 4 浙東 757 879(122 )~ 년 46 33 1 福建 760 883(123 )~ 년 50 28 6 嶺南東道 715 900(185 )~ 년 67 46 8 嶺南西道 793 906(113 )~ 년 43 10 10 容管 756 893(137 )~ 년 35 15 7 安南 767 906(139 )~ 년 45 8 10 표 당대 연안 번진의 발호나 반란이
< 2>
없었던 시기 및 문무관 비율
상비시키겠다는 당조의 의도이다
.
穆宗은 長慶 원년(821)
에 유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橫海節度使 杜叔良에게 橫海의 전군을 이끌고 가 토 벌하도록 하였다.
23)둘째 유주를 제외한 연안 번진들은 대략
, 880
년 이전의 일정정도 긴 기간 동안 발호나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표 에서 알 수 있듯 당. 2
희종대 이전 약50 150
~ 여 년의 시기동안 발호나 반란이 없었다 중.
앙이 연안 번진의 발호와 반란에 얼마나 민감했는지 알 수 있으며 중 앙의 연안 번진에 대한 정책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또 발호가 비교적 집중적으로 보이는 당 희종대조차도. ,
嶺南,
東道 嶺南西道24)
,
容管,
安南에서는 발호가 일어나지 않았다 영남동.
도는 절도사 대부분이 중앙에서 파견한 문관출신이었다.
僖宗 乾符 원 년(874)
에서 昭宗 天復 원년(904)
까지10
명의 절도사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문관출신 절도사는7
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당조의 명령을 받.
은 절도사였다 또 다른 연안 지역에 없는. ,
市舶使의 설치로 해외에,
서 들어오는 사치품 등 고가의 물품을 중앙에서 직접 관리하는 시스템 을 구축하고 있었다.
昭宗이 乾寧4 (897)
년 에 神策大將軍을 역임한를 영남서도 절도사로 제수했다
.
李鐬 25) 이렇듯 당조가 神策大將軍을 역임한 사람을 이 지역의 절도사로 파견한 것으로 보아 당말에 당조에 게 있어 이 지역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
安南의 경우 는,
黃巢가 南海지역을 근거로 웅거하고자 표를 올려 安南都護․廣州로 제수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당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
節度使 26) 그
것은 당조가 안남에서 나오는 대외선박무역과 관련된 이익이 셀 수 없 을 정도로 많다는27)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에서 직
23) 舊唐書 권124, 「薛嵩傳」, p.3526. 杜叔良은 이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좌 천되었다.
24) 영남은 懿宗이 咸通 원년(860)에 嶺南節度使 蔡京의 건의에 따라 동도와 서도로 나뉘었다( 資治通鑑 권250, 「懿宗咸通元年條」, p.8098).
25) 吳廷燮, 唐方鎭年表 中華書局( , 1980), p.1066.
26) 舊唐書 권200 ,하 「黃巢傳」, p.5392.
27) 新唐書 권225 ,하 「黃巢傳」, p.6454.
접 절도사를 파견하여 관리하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중앙으로부터 먼
.
연안 번진인데도 중앙의 힘이 더 길게 유지된 것은 이곳에서 창출되는 재부가 막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조가 끝까지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집중 관리했기 때문에 발호나 반란이 적었던 것으로 생각된 다.
셋째 헌종은 번수에 유교적 교양을 지닌
,
文臣을 우선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28) 회남 절서 절동 복건 영남동도 등지에는 무관에 의해서, , , ,
가 아니라 문관출신 절도사에 의해 장기간 운영되었다 유주는 무관출.
신 절도사가 많았고 횡해는 당조가 의도적으로 무관출신들을 파견한,
경우이다 평로치청과 용관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유주나 횡해처럼.
무관 출신이 아주 많아 보이지 않으며 문관출신이 더 많았을 것 같 다.
29) 영남서도와 안남은 번진이 생긴 이래로 아예 발호나 반란이 없 었다 그러므로 문관출신 절도사를 파견하여 번진의 안정을 꾀하고자.
한 헌종의 의도가 연안 번진에서는 비교적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 다.
대부분의 문관출신 절도사들은 발호나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
.
런데 문관출신으로 발호나 반란을 일으킨 절도사가 있었다, .
幽州의회남의 절서의 가 그 예이다 는
, , .
劉濟 陳少遊 李錡 劉濟 幽州節度使
의 아들로 진사출신이었으며 유평이 죽자 군사들의 옹립으로 절
,
劉怦도사가 되었다 그는
.
烏桓과 鮮卑의 침입을 물리치는 등 군무에도 능 하고 절도사로서, 20
여 년 간 정사에 충실했지만 끝내 入朝하지 않았 다.
陳少遊는30) 진사출신으로 隴右行軍司馬를 거쳐 代宗 大曆 원년 28) 日野開三郞, 日野開三郞 東洋史學論集 -第十九卷 -唐末混亂史考(三一書, 1996), pp.131-132.
房
29) 평로치청은 李師道가 평정된(819) 이후부터 僖宗 中和 3 (884)년 에 安師儒 가王敬武에게 쫓겨날 때까지 모두 25명의 절도사가 부임했는데 출신이 명확, 한 사람은 18명이다 이 가운데 문관출신 절도사는. 10 ,명 무관출신 절도사는 명으로 문관출신이 많아 보이나 만약 출신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 중 무관이 8
명 이상일 경우엔 문관출신이 우세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용관도 마찬가지이
4 .
다.
30) 舊唐書 권126,「陳少遊傳」, pp.3562-3566.
를 시작으로 를 역임하면서
(766)
宣歙觀察使 浙東觀察使 淮南節度使,
대략
18
년간 번진에 머물렀다 그는 회서절도사 이희열의 반란군과.
결탁
(784)
하였는데 반란은 실패하고 결탁 사실이 알려지자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
李錡는31) 문음으로 출사하여 宗正少卿을 역임하고,
덕종 정원15 (799)
년 浙西觀察使兼諸道鹽鐵轉運使가 되었다 그는 병.
사를 불러 모아 ‘挽硬隨身’ 혹은 ‘蕃落健兒’라 불리는 심복부대를 만드 는 등 사실상 발호하고 헌종 원화, 2 (807)
년 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 벌되었다 이들은 문관이면서 발호나 반란을 일으켰지만 전체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넷째 당 희종 이후의 발호나 반란은 모두 무관출신 절도사들에 의
,
해 주도되었다 회남에서. 879
년 高騈이 횡해에서, 880
년 楊全玫가,
절동에서880
년 劉漢宏이,
平盧淄靑에서884
년 王敬武가 복건에서,
년 가 절서에서 년 가 영남동도에서 년 이884
鍾傅, 893
錢鏐, 901
劉隱발호하였다 모두 무관출신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각 번진의 문관출
. .
신 절도사가 대거 퇴출되었다 이 시기 이후부터 오대 말까지 번진에.
문관출신 절도사가 거의 없었다.
32) 淮南에서는 희종 乾符6 (879)
년이 마지막이었고
,
劉鄴 33) 절서에서는 희종 건부
2 (875)
년 재상 趙隱 을 끝으로 문관출신 절도사가 사라졌다 절동에서는.
昭宗 乾寧3
년 재상 이 부임하려 했으나 가 이미 웅거해 있었다 전(896)
王搏 錢鏐.
류는 昭宗 景福
2 (893)
년 당조의 명령을 받아 鎭海軍節度使가 되었는데
,
34) 乾寧3 (896)
년 兩浙의 관리와 백성들을 시켜 절동을 겸하도록 상주하게 하여 王搏의 부임을 저지하고 浙東마저 차지하였다.
福建은 희종 건부5 (878)
년 韋岫가 황소에게 패하여 달아난 이후 문관출신 절도사가 없었으며,
35) 嶺南東道는 문관출신 절도사 徐彦若이 죽자 31) 新唐書 권224 ,상 「李錡傳」, pp.6381-6384.32) 馮道, 桑維翰 趙塋, 등이 절도사를 역임한 사실이 확인되고 대다수는 무관, 출신이다.
33) 唐方鎭年表 , pp.737, 739.
34) 唐方鎭年表 , pp.767, 795.
35) 唐方鎭年表 , pp.874, 876.
년 이 를 자칭하면서 웅거하였다
(901 )
行軍司馬 劉隱 留後.
36)다섯째 희종대
, (874 888)
~ 를 기점으로,
嶺南西道와 안남을 제외한 나머지 연안 번진들이 처음으로 발호하거나 다시 발호나 반란을 일으 키면서 점차 독자적인 길을 모색해 갔다 희종대를 기점으로 보는 주.
요인은 희종이 中和 원년(881)
황소의 군대를 피해서 蜀으로 파천했 을 때 詔令이 통하지 않자 당시 사람들은 더 이상 당이 부흥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37) 이후 연안 번진은 무관출신 절도사들에 의해 점차 할거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당조에 협력하기보다는 자.
신의 세력을 확대시키는데 더 심혈을 쏟았다 중앙은.
朝臣과 宦官과 간의 정쟁이 끊이지 않았고 황소의 항장이었던 주전충이 정권을,
藩鎭장악하면서 번진 할거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당조의 통제를 벗어난 번
.
진은 더 이상 당을 지탱하는 하부구조가 아니라 당의 분열을 가속화하 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후 번진들은 더 이상 당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관할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당조의 말기적 상황.
과는 달리 일부 연안 번진은 독자적으로 번진의 안정을 찾고자 모색하 기도 했다 이후 연안 번진은 후량의 건국과 동시에.
吳(
회남),
吳越 절동과 절서 복건 영남동도와 영남서도 등으로 독립하( ),
閩( ),
南漢( )
였다
.
오대 왕조38)는 번진 발호를 姑息하여 정치적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정도는 당말과 달랐다 왜냐하면 오대 왕조 자체가 강력한 군사력을
.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번진이 함부로 반란을 획책하기 어려웠다 오대.
36) 唐方鎭年表, p.1047.
37) 資治通鑑 권254, 「僖宗中和元年條」, p.8249.
38) 당대 연안 번진들의 오대 이후 추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유주는 후량과 후. 당을 거쳐 이후 거란에 예속되었다 횡해와 평로치청은 이후 줄곧 오대 왕조. 의 영역으로 남았고 회남은 오대와 적대적 관계를 가진, 吳와 南唐으로 되었 다가 후주에 가서 오대왕조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절서와 절동은. 吳越로 되 었고 복건은, 閩으로 되었다가 민의 멸망으로 南唐에 예속되었다 영남동도와. 서도는南漢으로 되었다 용관과 안남은 오대와 십국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였 다 그리고 오대왕조는 조공을 해온. 吳越과 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조공을, 보내지 않은吳, 南唐 南漢, 등과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에 가장 규모가 컸던 范延光․楊光遠 李守貞․ 의 반란조차도 군사력이 채
2
만도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철저히 진압되었다 이 시기 원활.
한 국가 운영을 위해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사안이 번진들을 다시 지방행정체제 속으로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오대에는 번진의 독.
립성을 확보해 주었던 요소들을 하나 둘씩 제거시켜 번진의 권한을 중 앙으로 회수하였다 그 결과 번진 세력이 약화되어 번진은 점차 지역. ,
할거와는 상관이 먼 지방행정 단위로 고착되어 갔다.
39) 이런 추세는 송대로 이어져 번진은 더 이상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절도사는 허명,
으로 남게 되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연안 번진의 대외 업무 .
Ⅲ
에 언급된 중앙의 대외업무 기관은 상서성 와
唐六典 主客司 鴻臚
이다
.
寺 40) 홍려시는 외국 사신이 돌아갈 때 옷 음식물 하사한 물품
, ,
39) 金宗燮, 「五代王朝의 정책과 幕職官」( 中國古代史硏究 제11 , 2004).집 40) ( )唐李林甫 等撰, 唐六典 권 와 권4 18(中華書局, 2005)에 기재되어 있는
주객과 홍려시의 職掌은 대략 다음과 같다 상서성 주객은. 隋와 北周의 제사, 의 과 관련된 일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 의 수, 의
諸蕃 朝聘 朝貢儀禮 享燕 高下
등급 왕래의 명령을 담당하였다 홍려시는, . 典客署와 司儀署를 두었는데, 典客 는 대외업무를 담당하고, 는 를 담당하였다. 은 사방 주변
署 司儀署 凶禮 鴻臚卿
국의 君長이 朝見을 오면 그 등위를 분별하고 빈례로 그들을 대하며 주변국, , 의 자손이 을 세습하려 한다면 그 를 구별하여 가부를 상세히 살
君長 官爵 嫡庶
펴서 상서성에 보고하였다. 典客令은 隋와 北周 후손의 版籍과 사방 주변국 사람 가운데 귀화한 사람들을 관장하였다 또한. 朝貢, 宴享 送迎, 에 참여하고, 나라의 등급 순위를 분별하여 職事에 이바지하였다. 酋渠, 首領 가운데 朝見 하는 자는 관에서 묵게 하고 賓禮로 그들을 대하였다 제번의 사자가 돌아갈. 때 朝堂에서 각각 차등 있게 물품을 하사하고 전객은 그 수령을 도와주며 감, 사의 예절을 가르친다. 黎虎는(「略論唐後期外交管理體制的變化」, 文史哲
당대 외교 업무는 상서성 과 가 주도하다가 으
1999 , 4 )年 期 主客 鴻臚寺 客省
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 원인은, 主客의 閑職化와 客省使와 禮賓使 등이 鴻 의 직권을 침탈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외교제도와 관련해서는.
臚寺 黎
의 ( , 1998)를 참고.
虎 漢唐外交制度史 蘭州大學出版社
등의 수량을 적어서 주객사에 보고하고
,
過所를 발급한다고 했다.
41)주객사와 홍려시는 수평적 관계라기보다는 실무는 홍려시가 관리는
,
주객사가 하는 체계였다 대외업무와 관련된 홍려시의 규정을 보면. ,
외교사절이 변경 지역에 도착하면 해당 州는 그 인원을 파악한 ‘邊牒’ 을 발급하라고 하였다.
42)연안 번진은 대외업무와 관련된 전담 使職이 활성화된 이후부터 그 지역만이 갖는 고유 권한을 갖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
押奚契丹兩蕃使,
가 있다 이 사직들은 당대 해, , .
押新羅渤海兩蕃使 押蕃舶使 押蕃落使
외 진출로와 관련이 깊다 당이 주변 나라로 가는 주요 노선을 보면
.
대체로7
곳으로 나뉜다.
營州에서 安東으로,
登州에서 바다를 건너 고 려와 발해로,
夏州에서 大同과 雲中으로,
中受降城에서 回鶻로,
安西 에서 서역으로,
安南에서 天竺으로,
廣州에서 바다 건너 이역으로 통 한다.
43) 營州 가까운 유주에 押奚契丹兩蕃使가,
登州 가까운 청주에가
,
에 가,
와 등에는押新羅渤海兩蕃使 廣州 押蕃舶使 夏州 中受降城 押 蕃落使44)가 설치되어 지역별로 전문화되었다
.
는 현종 개원
2 (714)
년 에 설치된 가 줄곧押奚契丹兩蕃使 范陽節度使
겸임했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때 즈음에 설치된 것으로 생각된다
.
에 이전에, 를 로 삼았다. (숙종) 지덕 故事 范陽節度使 押奚契丹兩蕃使이후 藩臣이 함부로 다른 지역의 영역을 점거하는 일이 많았는데 조정( ) , 은 그것을 관대하게 대하였다. (押奚契丹兩蕃使의) 직무가 갖추어지자 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두. ( )의 노략질이 줄어들었
邊事 蕃 契丹․奚
다 매년. 朝賀를 위해서 수백 명을 보내왔다. (이들이) 幽州에 이르면 酋 명을 선발하여 궁궐로 보냈다 에서 이들을 접견한 후
35 .
長 麟德殿 金帛
을 하사하고 돌려보냈다.45)
41) 新唐書 권48,「百官三」, pp.1257-1258.
42) 新唐書 권46,「百官一」, p.1196.
43) 新唐書 권43 ,하 「地理七下」, p.1146.
44) 舊唐書 권13, 「德宗下」, p.381, 朔方留後 李欒이 제수받은 관직은 다음과 같다. 靈州大都督府長史 朔方靈鹽 夏四州受降定遠城天․ 豐 徳軍節度副大使 知節․ 여기서 는 연안 번진과 관 .
度事管 度支 營田觀察 押蕃落等使․ 内 ․ ․ ․ 押蕃落使 련된 직책이 아니므로 논외로 한다.
상기 내용으로 押奚契丹兩蕃使의 직무를 직 간접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다 첫째
. ,
押奚契丹兩蕃使의 설치는 비교적 빨랐으나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안사의 난 이후이다 둘째. ,
押奚契丹兩蕃使의 설치는 동북 변경지역의 안정에 일정정도 도움을 주었다 셋째 동북. ,
지역의 대외업무는 押奚契丹兩蕃使로 통합되었다 그리하여.
奚,
契丹 등 주변 지역과 관련된 대외업무를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넷.
째 발호 번진인,
幽州의 절도사가 押奚契丹兩蕃使를 겸임하였다 다섯.
째,
押奚契丹兩蕃使는 사절 일행 중 당 내지로 들어갈 사람을 절반 이 하로 선발하여 보냈다 여섯째 동북지역 여러 나라와 당을 연결하는. ,
유주의 대외창구로서의 역할은 발호와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은 를 설치하여 일차적으로 동북지역의 대외업무 唐 押奚契丹兩蕃使
를 일원화 체계화시켜 혼란을 방지하고 대외교류를 원활하게 하며․
,
아울러 대외 정보도 제공받고자 했다 유주입장에서 보면 대내외적으.
로 권위를 인정받는 동시에 위박과 성덕 치청과,
澤潞 등으로 둘러싸 여46) 자칫 고립되기 쉬운 상황에 돌파구를 트는 격이었다.
德宗 貞元45) ( )宋 王溥, 唐會要 권96, 「 」奚 中華書局( , 1998), p.1720. 이 구절은 舊 권199하에도 있는데 ‘ ’ ‘ ’이 으로 되어 있다. 에 근거하면 어
唐書 嘗 常 舊唐書
느 정도 상설화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 唐會要 ․ 舊唐書와
권 에 공통적으로 가 들어있다 그
( 219) ‘ ’ .
新唐書 以范陽節度使爲押奚契丹使․
러므로 연문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 구절의 초점은 뒷부분인. 押奚契丹兩蕃使 에 있다 그래서 이어지는 뒷 구절은. 押奚契丹兩蕃使와 관련된 것이라 생각된 다. 그런데 唐會要․ 舊唐書와 新唐書에는 차이점이 있다. 唐會要․
에는 ‘ , , ( ) ’으로 되어 있는데
舊唐書 藩臣多擅封壤 朝廷優容之 俱彼 務自完 新唐 에는 이 부분이 ‘ ’으로 축소되어있다. 는 때
書 藩鎭擅地務自安 舊唐書 後晋
등이, 는 송초 인물인 왕부가 편찬하였으며, 는 송
劉昫 唐會要 新唐書 仁
년 의 명령으로 편찬되었는데 등이 참여
(1023 1063 ) ,
宗 ~ 宋祁范․ 镇吕․ 夏卿
했으며 欧阳修가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 이때가 대략. 1060년으로 唐會要 와 新唐書의 편찬시기와 약 100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唐會要
의 구절이 더 구체적이고 정확하다고 본다.
․ 舊唐書
46) 馮金忠은 유주와 위박 성덕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유주는 이 번진들․ , 을 견제했다고 지적하였다(「幽州鎭與唐代後期政治探析」, 中國邊境史地硏究, 2006 3 ).年 期
년 만 여 명을 격파한 사실
11 (795)
奚6
47)이나 무종 회창2 (842)
년가 거란이 의 인장을 사용하는 대신 자신들의 幽州節度使 張仲武 回鶻
인장을 하사해 줄 것을 간청한다는 사실을48) 중앙에 보고한 것을 보 아 유주는 대외업무나 동북정세를 대부분 중앙에 보고하고 결정이 필
,
요한 일은 중앙의 허락을 받아 처리하였다.
는 당말을 거쳐 후당까지 존속했다 덕종 정원 원년
.
押奚契丹兩蕃使(785)
劉怦이 幽州盧龍節度副大長史兼使知節度 管理․ ․度支 營田․ ․ 에 제수된 것과觀察 押奚契丹 經略 盧龍等軍使․ ․ ․ 49) 의종 함통
5
년이 에 제수된 것
(864)
張建章 押奚契丹兩蕃副使,
50) 그리고 후당 末帝원년
(934)
이 에 제수된淸泰 趙德鈞 押奚契丹 經略․ ․盧龍軍等使 51)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
石敬瑭이 後晋을 세우면서 燕雲16
州를 거란에 게 할양함으로써 이 사직은 더 이상 존재 의미를 상실했다.
의 설치시기는 숙종 원년
(765)
으로 짐작된押新羅渤海兩蕃使 永泰
다 이 해
.
淄靑平盧節度使에 押新羅渤海兩蕃使를 더하도록52) 명했다.
그런데 이때에 李正己가 절도사 侯希逸을 쫓아내고 자신이 절도사가 되었는데,
당조는 이정기에게 平盧淄靑節度觀察使 押新羅渤海兩蕃使․ 를 제수했다.
53)당조가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押新羅渤海兩蕃使를 설치 한54) 이유도 있지만 주된 이유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업무 증가 때 문이 아닐까 한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로 끌려갔던 일
.
47) 舊唐書 권199 ,하 「 」奚 , p.5356.
48) 舊唐書 권199 ,하 「契丹」, p.5354.
49) 舊唐書 권12,「德宗上」, p.349.
50) 全唐文補遺 제 책3 , 「唐幽州盧龍節度押奚契丹兩蕃副使攝薊州刺史正議大夫
( ) (
檢校太子左庶子兼御史大夫上柱國賜紫金魚袋安定張公 建章 墓誌銘 三秦出版」 , 1996), pp.289-290.
社
51)( )宋 王欽若 等編, 冊府元龜 권129, 「帝王部 封建․ 」(中華書局, 1988), p.1556.
52) 新唐書 권65,「方鎭二」, p.1805.
53) 舊唐書 권124,「李正己傳」, p.3535.
54)姜淸波 앞 논문.
부 유민이 산동일대를 중심으로 거주했다 그들과 점차 당으로 들어온
.
신라인들과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자55)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그.
리하여 목종이 원화15 (820) 7
년 월 평로치청절도사 薛平의 청을 받 아들여 이 일을 보좌할 巡官을 설치했다.
56) 또 무종 회창, 5 (845)
년 중서문하가 각 道(
藩鎭)
의 막직관 수를 조정할 때도 押新羅渤海兩蕃巡을 존속시켰다
.
官 57)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보아 관련 업무가 아주 많았 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당조가 이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해외
.
무역의 이익을 고려하여 전담 관리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한다 평로.
치청절도사 이정기가 재부를 축적한 주요한 방법이 바로 발해 등과의 교역이었다.
“발해의 명마를 들여와 팔았는데 해마다 끊이지 않았,
다”58)라고 할 만큼 발해와 교역이 잦았고 그 만큼 부를 축적할 기회,
가 많았다 이렇게 보면.
押新羅渤海兩蕃使의 설치는 대외업무의 일원 화와 대외교역에 의한 재부를 고려한 결과로 보인다.
목종 장경 원년
(821)
평로치청절도사 薛平은 신라인을 사로잡아 노 예로 파는 것을 금지해 달라고 청하였으며59) 文宗 開成 원년(836)
에 평로치청절도사는 신라와 발해에서 가져온 熟銅의 교역을 허락해 달라 고 청하였다.
60) 이처럼 押新羅渤海兩蕃使 역시 押奚契丹兩蕃使와 마 찬가지로 교역이나 외국인과 관련된 일을 먼저 중앙에 보고하고 중앙 의 허락을 얻은 후 시행하였다 그런데.
押新羅渤海兩蕃使의 직권으로 외국인의 당나라 내지왕래를 허락할 수 있었다.
는 오대에 들어서도 한 동안 유지되었다
.
押新羅渤海兩蕃使 後唐 末
55) 당은 645년 고구려인 7만 명, 660년 백제 유민 12,000 , 668명 년 고구려 유민 28,200호를 당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權悳永, 재당 신라인사회 연구, 일조각, 2005, pp.45-68 참고).
56) 舊唐書 권16, 「穆宗」, p.479.
57) 唐會要 권79 , 「諸使下」, p.1450.
58) 舊唐書 권124, 「李正己傳」, p.3535. 王賽時은(「唐代的淄靑鎭」 東岳論叢 평로치청에서 산동 요동 한국과의 무역 해로를 통한 운수
1994 , 2 )年 期 , , , ,
외국사절의 왕래를 책임졌다고 지적하였다. 59) 唐會要 권86, 「奴婢」, p.1571.
60) 冊府元龜 권999, 「外臣部 互市․ 」, p.11727.
원년
(934)
이帝 淸泰 平盧軍節度使 押新羅渤海兩蕃等使 房知溫․ 東平 에 봉해졌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
王 61) 후당 때 신라와 발해에
서 사절이 오면 押新羅渤海兩蕃使가 전담했을 것으로 보이며 고려 역 시 후당으로 사절을 보냈는데 押新羅渤海兩蕃使가 그들을 접대했던 것 으로 이해된다 이후 송대에 가면
.
押新羅渤海兩蕃使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신라와 발해의 멸망 및 송대 중앙집권화에62) 의한 번진의 소 멸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당조는 대외업무가 증가하자 업무의 체계화에 대한 필요성 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에 대외업무를 전담하는
.
押奚契丹兩蕃使와 押 를 설치하여 각 번진의 절도사로 하여금 이 사직을 겸 新羅渤海兩蕃使임하게 했으며 그 밑에 속관을 두었다 그 결과 행정적으로는 지역의
.
대외업무를 일원화시킴으로써 혼란을 방지하고 효율을 높일 수 있었 다 정치적으로는 종주국으로서의 대외적 위상과 번진에 대한 중앙으.
로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서 재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또 당조는 동북에서 산동반도를 아우르. ,
는 직책을 설치하지 않고 동북 유주 에는( )
押奚契丹兩蕃使를 산동반도,
평로치청 에는 를 지역별로 나누어 사직을 제수함으( )
押新羅渤海兩蕃使로써 번진 권한의 지나친 확장을 방지하고 각기 다른 고유의 사직을
,
전담시켜 그들 간의 갈등을 방지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당대의 대외업무는 더욱 활성화되고 전문화되었다.
의 설치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773 819)
의 기록押蕃舶使 柳宗元 ~
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헌종 원화
. 9 (814)
년 에 죽은 의 묘지명에 이 를 역임했음을 기록하 嶺南經略副使 馬君 馬君 押蕃舶使였다
.
63) 그러니814
년 이전에는 이미 押蕃舶使가 있었다 그리고.
柳 61) 冊府元龜 권129, 「帝王部 封建․ 」, p.1556.62) 송나라 때 일본승 죠우진(成尋) 일행이 태주 천태산을 방문하고 난 후 천태 산에 남아 수행을 하고자 하는 뜻을 밝히자 태주에서 단독으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樞密院에서 상세히 검토한 후 지시를 내려 줄 것을 상주하였다 송대. 에도 외국인이 체류할 경우 州는 결정권이 없어 중앙에 보고해서 처분을 기다 렸다(平林文雄, 參天台五臺山記 校本並 硏究に ,風間書房, 1978, p.65).
은 의 직무와 관련해서 다음의 기록을 남겼다
.
宗元 押蕃舶使에 은 로 구성되었는데 하나의 는 십 여 를 관리하였
唐制 嶺南 五府 府 州
다 크고 작은. 兵事와 號令은 절도사의 명령을 듣는다 큰 바다에는. 蠻夷 가 많았다. (동으로는)流求와 訶陵에서부터 서로는 大夏와 康居에 이르 기까지 섬나라가 백여 개나 있었다. 押蕃舶使가 다스린다.…중략…二使
와 의 중책을 한 사람에게 합하여 를 다스린다
(節度使 押蕃舶使) ( ) 廣州 .64)
절도사는 군사와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
押蕃舶使는 海夷道를65)통해서 들어온 백 여 나라의 선박과 관련된 대외업무를 담당했다 둘
.
의 직무는 엄연히 구별되어 있었으나 한 사람이 두 사직을 겸하였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절도사가 압번박사를 겸임하지만 앞의 마군처럼 절 도부사가 겸임하기도 하였다.
66)년 이전에도 영남의 외국선박과 관련된 대외업무는 아주 많았
814
다 현종
.
天寶 연간(742)
廣州에 도착했던 鑑眞大師 등은 강 가운데“ 등의 배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婆羅門 波斯․ ․崑崙 67)라고
하였다 또 한유가 외국의 물품이 영남으로 와 중국에 넘쳐나며 그
. ,
용도는 말할 수 없이 많기 때문에 영남절도사의 인선은 다른 번진보다 훨씬 중요하며 문무를 겸비하지 않거나 위신이 서지 않는 사람은 종,
종 불행한 일을 당한다고 하였다.
68)대종 대력 년
4 (769)
영남절도사에 제수된 李勉의 고사에 보면 그가 영남절도사로 부임하기1
년 전에는 광주로 입항하는 외국 선박이 겨 우4 5
~ 척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가 부임하여 영남을 안정되게 다.
스리고 외국선박에 과도한 세금을 물리지 않자 다음 해 광주로 입항한 외국 선박이40
여 척이나 되었다.
69) 또 헌종 원화, 12 (817)
년 에 영 63) 柳河東集권10, 「唐故嶺南經略副使御史馬君墓誌 上海人民出版社」( , 1974),p.160.
64) 柳河東集 권26, 「嶺南節度使饗軍堂記」, p.441.
65) 新唐書 권43 ,하 「地理七下」, p.1146.
66) 마군이 무슨 연유로 押蕃舶使를 겸임하게 되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67) ( )日 眞人元開著 汪向榮, 校注, 唐大和上東征傳 中華書局( , 2000) p.74.
68) 韓昌黎文集校注 권4,「送鄭尙書序 上海古籍出版社」( , 1998), p.283.
남절도사가 되었던 孔
戣
70)는 외국 상인이 광주에 왔다가 죽으면,
官 에서 그의 재물을 가지고 있다가3
개월이 지나도록 처자의 요청이 없 으면 관의 소유가 된다는71) 규정을 철폐하였다. 769 , 817
년 년의 두 사례를 통해 대외무역의 활성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결과 더 많은 외국 선박이 들어와 당의 재정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외국 선박 및 상인과 관련된 업무.
의 증가와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이를 전담 관리할 새로운 관직이 절실 히 필요해짐에 따라 압번박사가 설치되었다 아마도. 700
년대 중반 이 후에 이미 押蕃舶使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에만 市舶使가 설치되었다 이는
.
영남절도사의 명령을 받지 않고 직접 중앙의 명령을 받은 使職으로,
주로 환관이 임명되었다.
德宗(780 804)
~ 이후 시박사에 대한 직무가 정해지고 관서도 설치되어 상설화되었다 그 주요 직무는 외국선박의.
정박세 상세 진상품 관리이다, , .
72) 이 외 외국선박과 외국인의 관리는 의 몫이었다 이처럼 영남지역의 대외업무는 양분되어 있었.
押蕃舶使다 그런데 헌종 원화
. 12 (817)
년 에 孔戣
가 외국선박의 정박세를 폐지 했다 그 조처는 외국 상인들이 정박세를 이유로. (
市舶使의)
僕隸들에 게까지 뇌물을 주는 폐단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당시 이에 대한 시박.
사의 항변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조처는 시박사의 직무를 침해했 다기보다는 영남의 대외업무 활성화를 위한 조처로 이해된다.
는 왕래하는 외국 선박과 상인을 주로 관리했지 외국인의 押蕃舶使
당나라 내지왕래를 허락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홍려시의 규정을
.
69) 舊唐書 권131, 「李勉傳」, p.3635. 四庫全書本에는 4,000척으로 되어 있다.
70) 柳宗元이 773 819~ 년까지 살았던 점, 814년 이전에는 이미 押蕃舶使가 있 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817년 영남절도사로 부임한 孔戣는 압번박사를 겸임했 다고 볼 수 있다.
71) 韓昌黎文集校注 권7, 「唐正議大夫尙書左丞孔公墓誌銘」, p.531.
72) 寧志新은 시박사의 직무가 외국선박의 정박세 징수 상세 징수 진귀한 물, , 품의 進貢, 금지 물품의 검열 등이라고 지적하였다(「試論唐代市舶使的職能及
, , 1996 1 ).
其任職特點」 中國社會經濟史硏究 年 期
보면 일반적으로 조공사절이 오면 수행 인원의 절반을 경사로 보내도 록 한데 반해 영남에서 오는 조공사절은 수령과 보좌할 인원 두 명만 보내도록 하였다
.
73) 앞 유주의 사례를 보면35
명을 당 내지로 보냈는 데 영남에서는 단3
명만 보낼 수 있었다 조공사절의 경우조차도 단.
명으로 인원수를 한정하는데 압번박사의 권한으로 일반 외국인들을3
내지로 보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후 송대에 가면
.
押蕃舶使는 없어지고 市舶使가 압번박사의 업무까지 통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송대 시박사는 모두 네 곳으로 확대 설치되어 해외 무역을 담당하였 다.
회남 절서 절동 등에는 대외업무 전담
, ,
使職이 없었다 이 연안 번.
진들의 업무는 대외업무가 주가 아니었다 이곳은 곡물의 최대 산지였.
다 그래서 이 재원을 순조롭게 경사로 옮기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
한 업무였다 이에 이를 전담할 직책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곧. ,
轉運使 이다 회남 절서 절동 지역의 절도사는 때때로 전운사를 겸하였는. , ,
데 유주 평로치청 영남 등에서는 이 사직이 보이지 않는다 당조는, , , .
이 지역의 부정부패나 반란을 막기 위해 특히 많은 신경을 썼다 즉. ,
이 지역의 토착화를 방지하기 위해 잦은 移鎭策을 시행하였다 그리하.
여 이 지역 번진 절도사의 在鎭 기간이 평균3
년 미만으로 다른 번진 에 비해 짧았다.
74) 그리고 이 지역 절도사에 대부분 문관출신들을 파 견하였다 그래서 이 지역 문관출신 절도사의 비율이 다른 지역에 비.
해 압도적으로 높다.
영남의 압번박사는 현재 일본 남도에서부터 인도에 이르는 열도와 이 지역의 바다를 경유해서 들어오는 외국상인과 외국선박을 주로 관 리했으며 시박사의 설치로 대외업무가 양분되었다 나머지 연안 번진
.
의 주 업무는 국가 재원을 전담하므로 대외업무에 관해서는 유주 평,
로치청 영남에 비해 규모도 적었고 업무도 덜 전문화되었다 이렇듯, .
73) 新唐書권48, 「百官三」, pp.1257-1258; 唐六典 권18,「鴻臚寺」, p.506.74) 張國剛 앞 책 p.100. 僖宗 乾符 원년(874)까지 이 지역 절도사의 평균 임 기를 보면 淮南3.6 ,년 浙西2.9 ,년 浙東2.8 ,년 福建 2.6년이었다.
연안 번진은 외교 및 당의 재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으므로 당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조는 유
.
주를 제외한 연안 번진에 더욱 직접적이고 강력한 정책을 시행하였고 그 결과 발호나 반란이 타 번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래서.
천하의 방진 가운데 동남이 가장 평안하였다
“ ”75)라고 하였다
.
연안 번진의 의 유효성
. 過所
Ⅳ
대외업무 전담 使職이 없는 연안 번진에서는 외국인의 당나라 내지 왕래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회남절도사이자
?
揚州都督府長史인 李德裕 는 양주에 도착한 엔닌의 내지왕래를 허락할 권한이 없었다 단지 중.
앙의 허락만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개월 만에 중앙에서 돌아온 회. 8
답은 거절이었다 이에 이덕유는 엔닌을 돌아가라고 하였다 또 일본. . ,
승 엔친(
圓珍)
은 선종 대중8 (854) 9
년 월12
일 越州 開元寺에 도착 하였다 절동절도사이자.
越州刺史인 李訥이 중앙으로 보고한 뒤 약6
개월이 지나서야 중앙의 허락이 있었다 이에 대중. 9 (855) 3
년 월19
일에 越州都督府에서 과소를 발급해 주어 장안으로 갈 수 있었다.
76)외국 사절의 경우를 보면 사신 후지와라노 쓰네스쿠
, (
藤原常嗣)
는 문종 개성3 (838) 8
년 월1
일 揚州의 州衙로 가서 李德裕를 만나 일 을 논의하였으며, 9
월13
일경 중앙에서 회답이 왔다 이 사신 일행은.
월 일 장안으로 떠났다 양주에 도착한 후 장안으로 출발하는데10 5 .
걸린 시간은 약 개월이었다 대외업무 전담 사직이 없는 연안 번진에
2 .
서는 외국 사절이든 개인 자격으로 온 외국인이든 중앙에 보고하여 허 락이 떨어진 후에야 과소를 발급할 수 있었다 다만 외국사절인 경우.
에는 처리 기간이 아주 짧고 개인일 경우는 상대적으로 긴 차이만 있75) 全唐文 권417,「代杜相公讓河南等道副元帥第二表」, p.4265.
76)礪波護,「唐代 過所の と公驗」( 中國中世 人物の ,明文舍, 1993).
을 뿐이다
.
중앙에 보고한 후 중앙의 허락이 있어야 과소를 발급하는 것이 원 칙인데 중앙의 허락 없이 과소를 발급하기도 했다 등주에 도착한 일
.
본승 엔닌(
圓仁)
이 등주자사로부터 공험을 발급받기를 원했으나 등주 자사는 우리가 결정할 규정이 없으므로 청주에 있는 押新羅渤海兩蕃使 에게 올리겠다고 하였다 즉 등주자사는 중앙에 보고하지 않고 이 건.
을 청주로 보냈다 우리는 이 사례를 통해 왕조의 허락 없이 과소발급.
을 주관할 수 있는 곳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왜 등주에서 불가능.
한 것이 청주에서는 가능한지 계속 살펴보자 평로치청의 치소인.
靑州 에 도착한77) 엔닌이 이쇼를 시켜 공험의 일을 알아보게 했을 때 기안 자는 이미 결정하여 공험을 발급하기로 되어 있다 한 통은 엔닌에게“.
주고 다른 한 통은 천자에게 상주하는 것이다 모레 아침 관청이 열리.
기를 기다려 상서께서 서명하고 날인이 끝나면 보내도록 하겠다 라고” 하였다.
78) 기안자의 말을 통해 공험의 발급은 칙명에 따른 것이 아니 라 尙書 즉,
押新羅渤海兩蕃使의 결정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공험을.
두 통 만든 후에 다른 한 통은 보관했다가 천자에게 올렸다 즉 먼저. ,
공험이 발급되고 뒤에 중앙에 올리는 형식이다 그래서 관할지역내.
登는 엔닌의 일을 중앙에 보고해서 조처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州刺史 押
에게 올렸다 그러므로
.
는 공험을 발新羅渤海兩蕃使 押新羅渤海兩蕃使
급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이것이 중앙이
.
押新羅渤海兩蕃使에게 부 여한 다른 연안 번진과 차별된 고유권한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연안 번진 절도사의 관직명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
.
79):
幽州 幽州盧龍節度度支 營田觀察 押奚契丹兩蕃․ ․ ․ ․ ․經略․盧龍軍
77) 엔닌이 청주에 도착한 것은 문종 개성 5 (840)년 이었는데 이때의 평로치청 은順地이었다.
78) 엔닌 지음, 김문경 역주, 入唐求法巡禮行記 권 중심2( , 2001), pp.256 을 참조함
-257, 269-270 .
79) 연안 번진의 관직명은 唐方鎭年表의 것을 참고함.
等使․兼幽州大都督府長史 :
橫海 義昌節度滄德觀察處置等使兼滄州刺史․ ․ :
平盧 平盧軍節度․淄淸齊棣登萊觀察 押新羅渤海兩蕃等使 靑州刺史․ ․ :
淮南 淮南節度 觀察處置等使兼揚州大都督府長史․ ․ :
浙西 鎭海軍節度․浙西觀察處置等使․兼潤州刺史 :
浙東 浙東都團練․觀察處置等使․兼越州刺史 :
福建 福建都團練․觀察處置等使․兼福州刺史 :
嶺南東道 嶺南東道節度 觀察處置 押蕃舶等使․ ․ ․兼廣州刺史 :
嶺南西道 嶺南西道節度 觀察處置等使․ ․兼邕州刺史 :
容管 容管經略使兼容州刺史․ :
安南 靜海節度安南觀察處置等使兼安南都護․ ․
엔닌에게 과소를 발급한 주체는 押新羅渤海兩蕃使이다 평로절도사
.
이자 청주자사이면서 押新羅渤海兩蕃使인 韋長은 엔닌에게 과소를 발 급할 때 押新羅渤海兩蕃使의 자격으로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의 과소.
발급은 중앙의 허락 이전에 이루어졌으므로 押新羅渤海兩蕃使 자체 권 한으로 처리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엔친에게 과소를 발급한 사람.
은 越州都督府이다 즉 대외업무 전담 사직이 설치되지 않았던 절동에.
서는 중앙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과소를 발급하였다 절동관찰사이자.
월주자사인 李訥은 엔친에게 과소를 발급할 때는 월주자사의 자격으로 수행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 ,
押 가 있는 곳에는 중앙으로부터 고유권한을 부여받아 과 新羅渤海兩蕃使소발급을 자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지만 그 외 지역에서는 州 자체 권 한으로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지 발급업무만 대행할 뿐이었다
.
둘째 비록 번진이지만 과소 발급은 절도사의 직무와 구별되는,
押新羅및 주장관의 직권으로 임무를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
渤海兩蕃使이처럼 당조는 연안 번진의 지역적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사직을 설치하였다 유주와 평로치청 영남은 대외업무를 전담하는 사직을 설
. ,
치하여 외교업무를 집중 관리했다 유주 평로치청은. ,
押奚契丹兩蕃使 와 押新羅渤海兩蕃使를 설치하고 그 밑에 押奚契丹兩蕃副使와 押新羅 과 같은 속관을 두었다 이는 허직이 아니라 실제 직무를.
渤海兩蕃巡官수행했던 職事官이었다 사료에는 보이지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