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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과 * 己 家 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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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 과 * 李正己 一家 藩鎭 渤海國

( )

鄭 炳 俊 東國大

. 머리말

이정기 일가는 安史의 亂

(755 763)

~ 직후인

765

년부터 平盧淄靑節 에 올라 오늘날의 지역을 약

54

년 동안 독자적으로 지배하다

度使 山東

가 이정기의 손자인 李師道 시대에 이르러 唐朝 중흥의 영주로 불리는 에게 멸망하였다

.

憲宗

이러한 이정기 일가의 번진에 대해서는 그들이 고구려인의 후예라 는 점에서 일찍부터 남북한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으며1) 최근에 이르 러서는 그들이 수행한 역사적 역할을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하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

2) 동시에 외국 학자들도 이 번진이 지닌 역사

이 논문은 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연구되었음

* 2004

(KRF-2004-077-A00015).

1) 박시형, 발해사 이론과실천( , 1979), pp.85-90; 金文經, 「唐代 藩鎭의 한 를 중심으로 숭전대학

- ( ,

硏究 高句麗遺民 李正己 一家唐代 社會 宗敎

교출판부, 1984; 원래는 省谷論叢 6, 1975에 발표); 金文經, 淸海鎭 (향토문화진흥원, 1998), pp.28-40; ,

保皐 東亞細亞 金鎭闕唐代 淄靑藩

에 대해( , 태학사, 1984) 등 이(

鎭 李師道素軒南都泳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出典은 처음에만 적겠다).

. 머리말

. 李正己 登場 渤海國

건국과 그 성격

. 李納

. 押兩蕃渤海黑水四府經略使에서

押新羅渤海兩蕃使

. 李正己一家 渤海 交易

Ⅴ . 맺음말

성에 주목하여 자신의 관점에서 여러 가지 논의를 펼치고 있다

.

3) 본고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이정기 일가의 번진과 발해 즉 발해국

( )

의 관계이다 이에 대해서는 종래에도 몇 가지 견해가 제출되어 있다

. .

예를 들면 혹자는 이정기 일가가 고구려인의 후예이기 때문에 고구려 를 계승한 발해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 반면 신라에 대해서는 고

,

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하고 그 근거로 서 발해와 신라가 당에 파견한 사신 횟수의 차이 또 해적들이 신라인

,

들을 잡아다가 이정기 일가의 번진에서 노비로 팔았다는 것 등을 들고 있다

.

4)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좀더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왜냐

.

하면 오늘날의 민족 개념 또는 국민국가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이 해하는 것은 자칫 당시의 상황을 호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경

.

우 이정기 일가의 현실적 이해관계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매

,

2) 지배선, 「이정기 일가의 산동 지역 활동」( 이화사학연구 30, 2003); 지배 , 「꺼지지 않은 고구려의 혼」(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이라고, 중앙일보시사 미디어, 2004); 鄭炳俊, 「平盧節度使 李正己에 대해 -代宗時期를 중심으로-」

진단학보 온건파와 강경

( 94, 2002); 鄭炳俊, 「李正己 一家 藩鎭 高沐 -

파의 내부분열과 대립- (」 역사학보 180, 2003); 鄭炳俊, 「李正己一家

( 동국사학 40, 2004); ,

易活動 張保皐鄭炳俊李師道 藩鎭 滅亡

중국학보

( 52, 2005) .

3)昈日野開三郞, 「安史の による の 唐 東北政策 後退 渤海 小高句麗國占領 」(

8, , 1984), pp.305-322; ,

日野開三郞東洋史學論集 三一書房 辻正博唐朝

- - ( 46-2, 1987),

對藩鎭政策 河南順地 化 東洋史硏究 について 「 」 のプロセス

pp.100, 106, 116-118; 孫慧慶, 「唐代平盧節度使南遷之后 議฀ 」( 北方文物 1992-4); 王賽時, 「唐代的淄靑鎭」( 東岳論叢 1994-2); 郝黎, 「唐代淄靑鎭

( ( ) 19-4, 2003); ,

的特點靑島科技大學學報 社會科學版 楊曉燕唐代平盧軍

( , , ,

與環渤海地域 王小甫主編 盛唐時代與東北亞政局 上海辭書出版社 방학봉 당나라의 황제를 꿈꾼 야심가 이정기 중국을 뒤흔든 우리

2003); , 「 」(

선조 이야기, 일송북, 2004); 趙紅梅, 「在唐新羅人的聚居區及其相關問題探微 (陳尙勝 主編, 登州港與中韓交流國際學術討論會論文集 , 山東大學出版社,

2005), pp.89-90 .

4) 蒲生京子, 「新羅末期張保皐 擡頭 反亂」(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6,

1979), pp.44, 47-48; 金文經, 淸海鎭 張保皐 東亞細亞, pp.37-38;

, - - (

千田稔中世國際交易活動 張寶高海上王國について千田稔 宇野隆夫

, - - , , 2003), p.172

アジアと半島空間 山東半島遼東半島 思文閣 .

(2)

우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

또 혹자는 이정기 일가의 번진은 산동지역을 지배한 강력한 독립국 가였고 나아가 당과 발해 신라의 외교관계에 대해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말한다

.

5) 그러나 이 역시도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 다 이정기 일가는 비록 자신의 번진을 독자적으로 지배했다고 해도

. ,

당조의 官爵을 계속 원했을 뿐 아니라 당조에게서 완전히 이탈하려 하 지 않은 증거들이 적지 않게 보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무엇보다도 이정기 일가의 입장에서 그들과 발해가 어떠한 관계를 맺었는가를 기술해 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특히 이정기

.

일가 번진을 둘러싼 주변 정세와 이에 대한 이정기 일가의 태도에 주 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의 과

. 李正己 登 場 渤海國

이정기는 안사의 난 중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내어 발해와 나름의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

월에 를 겸임한 안

14 (755) 11

玄宗 天寶 載 范陽 平盧 河東節度使․ ․

록산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呂知誨에게 遼西의 평로 번진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다음 해 정월

.

洛陽에서 燕 에 올랐다 하지만 서쪽의 장안으로 가는 길목인

.

에서 전

國 皇帝 潼關

선이 고착되고 河北지역에서는 平原太守 顔眞卿 등이 이끄는 봉기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

6)

이에 더해 반란군의 양대 본거지의 하나인 평로 번진 관할의 安東 5) 지배선, 「고구려인 이정기의 아들 이납의 발자취」( 東方學志 119, 2003),

지배선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손자 이사고의 발자취

pp.245-259; , 「 , 」( 東方

122, 2003), pp.162-183 . 學志

6) 谷川道雄, 「「安史性格について」( 名古屋大學文學部硏究論集 Ⅷ,

3, 1954), pp.10-15; , , p.103; ,

王賽時唐代的淄靑鎭鄭炳俊李師道 , pp.245-246 .

藩鎭 滅亡 昈」

마령찰이 이반의 움직임이 보였는데 안록산이 심

,

副大都護 保定軍使․

복 韓朝陽을 보내 여지회를 시켜 마령찰을 유인하여 죽인 뒤 여지회를 평로절도사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평로군 군장인

.

劉客奴 등이 安東都 의 과 호응하며 여지회를 공격하여 죽이고 바다로 護府 王玄志 侯希逸․

하북의 안진경에게 소식을 전하고 범양을 공취하여 죄를 씻기를 조정 에 청하였다

.

7) 이때 이정기도 후희일과 함께 거사에 참여하여 세운 공으로 唐朝로부터 관직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

8)

이후 당조의 평로절도사 劉正臣

(

즉 유객노

)

등은 唐軍의 일원으로 반란군의 본거지인 범양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같은

.

(756) 6

8

일 동관이 반란군에게 함락되면서 갑자기 전세가 역전 되어 현종은 장안을 버리고 蜀으로 달아나고

,

郭子儀와 李光弼도 하북 지역에서 철군하였다 유정신도 같은

. 6

월 안록산의 맹장 史思明에게 대패하여 평로의 사졸

7

천여 명이 전사하였다 겨우 살아남은 유정신

.

은 北平

(

즉 平州

)

으로 달아났다가 같은

6

월 평로의 안동도호 왕현지 에게 독살당하였다 그러자 안록산이 지덕

. 2 (757)

재 정월 초에 徐歸 를 평로절도사에 임명하여 다시 평로를 장악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

.

번에도 안동도호부의 책임자가 된 왕현지가 후희일 등과 함께 서귀도 를 습격하여 죽였다 곧이어 왕현지는 군인들의 추대를 받아 평로 번

.

진의 수장이 되었다

.

9)

그런 과정에 평로군은 발해를 끌어들여 원군으로 삼으려 하였다 즉

.

21, 2 (

년 원년

, 758) 12

續日本記 淳仁天皇 天平寶字 肅宗 乾元

월 戊申 조에 일본의 遣渤海使 小野田守 등이 안록산의 난에 대해 자 국에 보고한 것이 적혀있는데 그 안에 앞선 숙종

,

至德 元載

(756)

의 일로서

7) 樊文禮, 「唐代平盧淄靑節度使略論」( 煙臺師範學院學報 1993-2), p.27;

에서 중국

, - - (

炳俊平盧節度使 侯希逸 安東都護府 軍將 平盧淄靑節度使사연구 39, 2005), pp.52-54.

8)鄭炳俊, 「安史 李正己」( 동국사학 37, 2002), pp.529-530.

9) 鄭炳俊, 「安史 李正己」, pp.530-532; 鄭炳俊, 「平盧節度使 侯希逸」, pp.54-55.

(3)

가 을 平盧留後事 徐歸道 果毅都尉 行柳城縣․ ․兼四府經畧判官 張元澗

에 파견하여 병마를 요구[ ]하며 말하기를 올해“ 10월 마땅히 안록

渤海 徵

산을 공격할 것이니 왕께서는 기병 4만을 보내 賊을 토평하는 것을 도와 주시길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발해는 다른 마음이 있을까 의심하여 사신” . 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12월 丙午에 서귀도가 과연 北平의 유 정신을 鴆毒으로 죽이고 몰래 안록산과 통모하였다, . 幽州節度使 사사명 이 천자를 공격할 모의를 하였다 안동도호 왕현지가 그것을 알고. 精兵

여 인을 이끌고 을 공격하여 서귀도를 참살한 후 스스로

6,000 柳城 權知

를 칭하고 나아가 에 진주하였다( , ,

平盧節度 北平 前篇 吉川弘文館

p.258).

라는 말한 것이 보인다 말하자면

.

① 유정신이 범양을 공격하기 하기 위해 출전하였을 때

,

徐歸道가 임시로 평로를 다스리면서 四府經略判 장원간을 발해에 보내 기병

4

만의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뜻을 이루 官

지 못하였고

,

12

월 서귀도가 북평에 있던 유정신을 독살하고 안록 산과 통모하자

,

③ 안동 부 도호 왕현지가 정병

( ) 6,000

여 인을 이끌고 영주를 공격하여 서귀도를 참살하고 權知平盧節度를 칭한 후 북평에 주둔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

①과 ③은 중국 사서에 전혀 보이는 않 는 내용으로 당조 또는 반란군과 발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지식을 제공한다

.

이에 비해 ③은 앞에서 기술한 것과 크게 차이가 있다 즉 앞에서는

.

중국 사서에 의거하여 유정신을 독살한 것은 왕현지였고 서귀도가 당

,

조를 배반한 것은 다음 해 정월이라고 기술하였다 과연 어느 쪽이 타

.

당한 것일까

.

日野開三郞은 續日本記 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 유 정신을 독살한 것은 서귀도였고 그 시점은 같은 해

12

월이었다고 보 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서귀도가 발해에 원군을 요청하였던 같은 해

.

월에 이미 반란군과 통모하였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10 .

10) 이러한

10) 日野開三郞, 「安史の による の 唐 東北政策 後退 渤海 小高句麗國占領 」, 서귀도는 안록산을 공격한다고 칭하여 발해에게 기병 만의 원군을 청했는

“ 4

데 발해가 그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응하지 않았다, ”, “(서귀도 가 유정신을 대신하여 절도사에 오르기 위해 몰래 안록산 측의 사사명과 내) 통하며 유정신을 북평에서 독살하였고”(p.311).

견해는 楊曉燕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11)

필자도 유정신의 독살에 관해서는 續日本記 의 기록이 정확한 것 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서귀도가 발해에 원군을 요청할 당시에 이미

. ,

반란군과 통모하였는가 여부는 續日本記 에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

뒤에 서귀도가 반란군과 통모하여 안록산으로부터 평로절도사에 임명 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판단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 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서귀도가 발해에게 올해

.

10

월 마땅 히 안록산을 공격할 것 이라고 말하였다는 점이다 즉 같은 해”

. 10

월 실제로 당군이 京師를 수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하였기 때 문이다

.

12)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서귀도는 발해에게 매우 정확한

,

정보를 제공한 것이 된다 당조가 서귀도를 통해 경사 수복 계획을 알

.

린 것이 분명하다

.

그렇다면 서귀도가 발해에 원군을 요청한 것도 같은 해

7

월에 새로 즉위한 숙종의 명에 따랐을 수 있다 물론

.

日野 등의 입장에서는 숙종 이 서귀도에게 경사 수복 계획을 알리며 발해에 원군을 요청하게 하였 지만 서귀도가 안록산과 내통하며 발해를 이용하려 한 것으로 이해할

,

수도 있다 그런데 숙종이 경사 수복을 위한 군단 책임자를 임명한 시

.

점 역시

10

월이었다

.

13) 말하자면 같은 해

10

월에 경사 수복 계획이 확정되고 같은 달에 바로 경사 공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숙

.

종이 서귀도에게 경사 수복 계획을 알린 시점도

10

월이었음을 나타낸 다 당시는 숙종이 세력을 다시 규합하여 대대적으로 반격을 준비하던

.

시기로 누구도 이후의 대세를 쉽게 예측하기 어려웠다

.

14) 이런 상황 에서 서귀도가 섣부르게 안록산과 통모하였을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더욱이 서귀도가 안록산을 공격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발해 군

.

11)楊曉燕,「唐代平盧軍與環渤海地域」, p.190.

12)鄭炳俊,「安史 王思禮」( 新羅文化 26, 2005), pp.369-370.

13) 舊唐書 中華書局( ) 10, 肅宗本紀至德元載 10월 조, p.244 .

14) 발해가 서귀도의 사신인 장원간을 억류하며 원군 요청에 응하지 않았던 것 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

(4)

대를 불러놓고 마음대로 반란군과 싸우게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

15) 결론적으로 서귀도가 발해에 원군을 요청한 것은 숙종의 명에 따른 것이며 당시에는 아직 그가 안록산과 내통하지 않았다고

,

생각된다

.

그러나 방관이 이끄는 당군은 같은 달에 반란군에게 대패하고 말았 다

.

16) 반란군의 우세가 확인되었던 것이다 이에 서귀도는 같은 해

.

월에 자구책으로 북평에 주둔하던 유정신을 독살하고 안록산과 통

12

모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다음 해 정월 안록산이 서귀도를

.

평로절도사에 임명하자 안동부도호 왕현지가 후희일 등과 함께 정병

,

여 인을 이끌고 서귀도를 습격하여 죽이고 평로군을 장악하였던

6,000

것이다

.

한편 이정기는 왕현지와 후희일이 서귀도를 참살할 때도 참여하였 을 것이다 이것은 이정기가 안록산을 이반할 때부터 시종 후희일과

.

행동을 같이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왕현지가 번진의 수장

.

으로 추대된 후 이정기는 후희일과 함께 평로군의 유력 군장이 되었을 것이 거의 분명한데 이것은 두 번이나 성공한 거사에 참여하였을 뿐

,

아니라 왕현지가 죽은 직후 이정기가 군대를 동원하여 평로의 군권을 장악하는 것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

17) 그렇다면 이후 왕현지가 중대 사안을 결정할 때 이정기도 함께 논의에 관여하였을 가능성이 상 정된다 즉 왕현지가 내린 중대 결정은 이정기와도 무관하지 않을 수

.

있다는 것이다

.

한편 숙종은 다시 반격을 개시하여 지덕

, 2 (757) 9

재 월에 장안

, 10

15) 발해가 원군 요청에 쉽게 응하지 않은 것도 발해가 쉽게 놀아나지 않을 것 을 시사한다.

16) 鄭炳俊, 「安史王思禮」, p.370.

17) 이정기가 이전에 함께 반란 세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유력 장수들이 당 내지로 빠져나간 것이 이정기의 대두에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즉 왕현. 지가 평로를 장악한 지덕 2 (757) 정월에 바로 董秦 田神功․ ․李希烈 등을 남으로 보내 작전을 수행하게 하였다(鄭炳俊, 「安史 李正己」, p.533 ).

월에는 낙양을 수복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 2

월 숙종이 왕현지를 평로 절도사에 임명해 주었고

,

18) 같은 해

4

월에는 왕현지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즉

.

續日本記 권

21

을 계속 보면

,

앞의 기사에 이어

월에 왕현지가 를 발해에 파견하여 나라의 일

3 4

至德 載 將軍 王進義

을 말하기를 천자께서“ 西京으로 돌아오고 太上皇을 蜀에서 맞아들여 別 에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를 거의 멸한 고로 을 보내 명을 알

宮 賊盜 下臣

리게 하는 것입니다 고 하였다” . 渤海王이 그것을 믿기 어렵다고 여기고 왕진의를 억류한 후 사신을 보내 자세히 알아보게 하였다 당으로 간 사. 신이 돌아오지 않아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일본으로[ 귀국하였다]19)(上同).

라고 적혀 있다 당시 당의 상황이 매우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

.

아니라 이 기사에 이어 그

,

“ 唐王이 발해국왕에게 勅書

1

권을 狀에 부 수하여 보냈다 라고 하는 것을 통해 왕현지가 숙종의 명을 받들어 발” 해왕에게 왕진의를 파견하였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

평로군의 이번 사신 파견에 있어서도 이정기가 직접 관여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번 사신 파견의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하였

.

듯이 이정기가 평로군의 유력 군장으로서 그 과정을 자세히 파악할 수 18) 資治通鑑(中華書局) 220, 乾元원년 월 조2 , p.7052.

19) 일본이小野田守를 발해로 파견한 것은 758년 전반이었다.小野田守는 발해 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안사의 난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같은 해, 9월에 발해 楊承慶등과 함께 본국으로 귀국하여 같은 해 12월 그 소식을 조정에 보고 하였다 다만. , 小野田守가 귀국한 시점은 발해가 당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하였던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은 때였다 따라서. 小野田守 등은 그 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해당 기록을 계속 보면 같은 해. , 12 월 일본 조정이太宰府에 칙서를 내려 반란군이 唐軍에 패하면 일본을 침공할 지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하며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당부하고 있다 즉.

, ,

日野開三郞安史の による の 唐 東北政策 後退 渤海 小高句麗國占領

추진 의도 청람사학

pp.315-316; 具蘭憙, 「日本 新羅侵攻計劃 」( 2,

세기 중엽 발해 일본 신라의 관계 일본의

1998), pp.117-118; 具蘭憙, 8「 ․ ․ -

신라침공계획을 중심으로- (」 한일관계사연구 10, 1999), pp.10-11; 趙二

고구려연구

, ( 13, 2002), pp.171-172

安史 渤海 對日本外交등 참조.

(5)

있는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이번에는 이정기가 당조와 발해의 중간에

.

서 양자가 어떠한 관계로서 서로를 대하는가를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 다 비록 간접적이기는 해도 이정기가 냉정하게 전개되는 양국 관계의

.

기본 성격을 인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뒤에 이정기는 오늘날의

.

山 지역을 지배하면서 발해와 직접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때 파악한

,

양국 관계의 성격에 관한 지식이 그 과정에 나름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왕진의가 발해로 파견된 해인 乾元 원년

(758) 12

월에 왕현지가 병 으로 죽었다 그러자 숙종이 환관을 보내 후임 절도사를 임명하려고

.

하였는데 이정기가 군사를 동원하여 후희일을

,

藩帥로 추대하였다 그

.

러자 숙종은 할 수 없이 그대로 후희일을 평로절도사에 임명해 주었 다

.

20) 그리고 숙종 上元

2 (761) 12

년 월에 후희일은 당의 구원이 없 어 고립무원에 빠진 데다 奚가 북쪽에서 침략해 오자 이정기과 함께 휘하 군사

2

만여 명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바다를 통해 산동지역으로 들어갔으며 다음 해인

,

寶應 원년

5

월 代宗이 후희일을 平盧淄靑節度

에 임명해 주었다

.

使 21)

그러나 후희일은 안사의 난이 종결된 후인 永泰 원년

(765) 5

월 이 정기에게 쫓아나고 같은 해

7

월 이정기가 정식으로 평로치청절도사

이하 평로절도사로 약칭 에 임명되었다

( , ) .

22) 이후 이정기는 당조에 충성한 유정신 왕현지 후희일과는 달리 당조의 통치를 거부하는 길․ ․ 을 택하고 번진을 자손들에게 물려주었다

.

20) 資治通鑑 220, 肅宗 乾元 원년 12월 조, p.7064; 舊唐書 124,

, p.3534; ( ) 144, , p.4703.

希逸傳 新唐書 中華書局 侯希逸傳

21) 資治通鑑 222, 肅宗 上元 2 建丑月(12 )월 과 寶應 원년 5월 조, pp.7118, 7126.

22) 資治通鑑 223, 永泰 원년 5월 조, p.7175. 한편, 舊唐書 11, 代宗

원년 월 조에는 로 적혀 있다

, 7 “ ”(p.279) .

本紀 永泰 令懷玉權知留後事

의 건국과 그 성격

. 李納 齊

이정기 일가와 당조의 관계는 이정기 일가와 발해의 관계를 이해하 는 중요한 전제가 된다 즉 이정기 일가는 여러 가지 형태로 발해와

.

접촉하였지만 그들과 당조의 관계 여하에 따라서는 그 형태나 성격

,

역시 크게 바뀔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이정기 일가와 당조의 관계를 가장 잘 알게 하는 것은 이정기의 아 들 李納의 齊 건국과 이를 둘러싼 상황이다 북한 학계와 한국의 일부

.

학자는 이납의 제 건국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일가가 당나라 땅에 완전한 독립국을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

이를 확대 해석하여 이정기 일가의 번진 자체를 제나라라고 부르기까 지 한다

.

23) 이 경우 이정기 일가와 발해는 완전한 독립적 관계를 맺 은 것이 되지만 과연 타당한 것일까

, .

안사의 난 이후 당에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藩鎭들이 세력을 떨 치게 되었다 번진은 당 전역에 걸쳐 약

. 40 50

~ 개가 설치되었으며

,

평균

4 5

~ 개 州의 군사 민정 재정 등 거의 모든 분야를 관할하였던․ ․ 것이다 그 중에서 당 왕조의 통치를 거부하며 스스로 절도사 자리를

.

세습하였던 强藩들이 나타났는데

,

즉 河北지역의 盧龍 成德․ ․魏博

,

산동지역의 平盧 淮水

,

지역의 淮西 번진이 그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

그 창건자가 모두 안록산의 부하였다는 점이다

.

24)

이들

5

개의 할거 번진은 모두 스스로 관리를 임명하고 군대를 양성 하며 마음대로 조세를 거두고 자율적으로 형벌을 제정하였다 하지만

.

숙종을 이은 황제 代宗은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랄 뿐 이들의 발호를 전

23) 박시형, 발해사, pp.83 90;~ 지배선, 「이정기 일가의 산동 지역 활동」, 지배선 꺼지지 않은 고구려의 혼

pp.728-734; , 「 」, pp.244, 247-251 .

24) 차이점이 있다면 하북의 세 번진을 건설한, 李懷仙 李寶臣 田承嗣․ ․ 가 반란 말기에 당조에 투항하였던 것에 비해 평로의 이정기와 회서의, 李希烈은 반란 중에 당조로 투항하였다가 반란이 종결된 후에 다시 당조의 지배를 벗어났다 는 점이다(鄭炳俊, 「李正己 一家 이후의 山東 藩鎭 -順地化 過程- ,」 대외문 물교류연구 3, 2004, p.122).

(6)

혀 제어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

大曆

14 (779) 5

년 월에 德宗이 즉위 하면서 상황이 크게 바뀌기 시작하였다

.

建中 원년

(780) 2

월 덕종은 위박절도사 田悅에게 병력

7

만 중

4

만을 감축하게 하고

,

25) 다음해 정 월에는 성덕절도사 李寶臣이 죽고 아들 李惟岳이 세습을 청하자 이를

,

거절하였다

.

앞서 대종시기에 전열이 田承嗣를 계승할 때 이보신이 도와주었는 데 이번에는 전열이 이유악의 세습을 허가해 주도록 조정에 압력을

,

넣었다 하지만 덕종이 확고한 의지를 보이자 전열과 이정기는 각각

. ,

이유악에게 사람을 보내 거병을 모의하였다

.

26) 마침내 건중

2

년 월에 전열이 주변의 와 등을 차지하기 위해 공격을

(781) 5

邢州 磁州

개시하였고

,

27)

6

월에는 山南東道의 梁崇義가 번진을 떠나라는 朝命을 거부하였다 이때 덕종은

.

淮西의 李希烈에게 양숭의를 토벌하게 하였 다

.

28) 같은 에 이정기는 대운하의 요충지인 徐州의 甬橋와 渦口29)를 차단하고 양숭의가 漢水를 지나는 통로를 막자 양자강 일대에서 올라

,

오는 조공물의 상공이 완전히 두절되었다

.

30)

그러면서 덕종과 해당 强藩들이 전면전으로 돌입하였는데 바로 그

,

러한 때인 같은 해

7

월에 이정기가 사망하고 말았다 아들

.

李納이 덕 종에게 세습을 청하였지만 덕종이 들어줄 리가 없었다

, .

31) 한편 회서

,

25) 資治通鑑 226, 建中원년 월 조2 , p.7277.

26) 舊唐書 124, 李納傳, “建中初, ( )李 正己田悅 梁崇義 張惟岳皆․ ․ ․

년 정월 조

”(3536 ); 226, 2 , pp.7291-7293.

資治通鑑 建中

27) 資治通鑑 226, 建中2 5년 월 조, pp.7299-7300.

28) 新唐書 7, 德宗本紀 建中, 2 6월 조, p.186; 資治通鑑 227,

월 조 한편

2 6 , pp.7301-7302. , 12, , 2

舊唐書 德宗本紀上 建中

월 조에 라는

5 “淮寧軍節度使李希烈充漢南北諸道都知兵馬招撫處置等使”(p.329) 기사가 보인다.

29) 胡三省은 이에 를 달아甬橋, 在徐州南界汴水上 後治宿州於此 渦口, . ,

라고 하였다 년 월 조

” ( 227, 2 6 , p.7302)

水入淮之口 資治通鑑 建中

30) 資治通鑑 227, 建中 2 6월 조, p.7302. 이때 막힌 江淮漕運이 다시 열린 것은 같은 해 년2 (781) 11월이다(同書227, p.7310).

31) 資治通鑑 227, 建中 2 7월과 8월 조, pp.7306-7307. 한편, 舊唐書 12, 德宗本紀上 新唐書 12, 德宗本紀에는 建中 2 8월에 이정기

의 이희열은 양숭의를 토벌하라는 朝命을 세력 확장의 호기로 생각하 고

8

월에 양숭의를 공격하여 자살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덕종은

.

李承 을 산남동도절도사에 임명하여 이희열의 의도를 좌절시켰다

.

32)

양숭의의 패망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 (781) 10

월에 평 로의 徐州가 당에 투항하고 다음 해

, 3

월에는 德州와 棣州가 투항해 갔다

.

33) 또한 두 달 전에는 성덕의 숙장 王武俊이 이유악을 죽인 후 항복하고

,

34) 위박의 군대도 그 전부터 계속 관군에 패하고 있었다

.

35)

하지만 덕종은 번진 제압을 너무 서둘렀고 논공행상에 인색하여 장 수들의 반감을 샀다 조금씩 형세를 관망하는 장수들도 생겨났다 노

. .

룡을 다스리던 朱滔가 먼저 위박과 내통하였고 왕무준도 이에 호응하

,

게 되었다

.

36) 당시 덕종이 동원한 군대는 황제 직속의 禁軍 외에

15

개 번진의 병사들이었다 군비가 매월

. 130

만 緡이나 되었는데 교전

,

이 벌어진지 벌써 년이 지났다 중앙의 재정이 바닥났고 이를 보충하

3 .

기 위해 건중

3 (782) 4

년 월 상인들로부터 借商錢이란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원성을 샀다 그리고 이 마저도 제대로 걷히질 않아 관군의

.

형세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

37)

같은 해

(782) 11

월 마침내 주도 등이 서로 공모하여 왕을 칭하며

가 사망한 것으로 적고 있다 각각( pp.330, 186).

32) 資治通鑑 227, 建中2 7년 월과 월과 월 조8 9 , pp.7307, 7308.

33) 資治通鑑 227, 建中 2 10월과 建中 3 3월 조, pp.7310, 7321.

그런 중인 건중 년 월 이납이3 2 濮州를 지키다가 위기에 처하자 성 위에 올라 눈물을 흘리며 自新하기를 구한 적도 있다( 資治通鑑 227, 建中 3 2 , p.7321). , 舊唐書 124, 李納傳, p.3536에는 그 시점이 약간 달리 적혀 있다 한편. , 舊唐書 12, 德宗本紀上 新唐書 7, 德宗本紀에는 건중 3 4월에 德州 棣州가 당조에 투항한 것으로 적혀 있다 각각( pp.332, 187).

34) 舊唐書 12, 德宗本紀上, 建中 3 閏正月 , p.331; 資治通鑑 년 정월 조

227,建中3 , pp.7318-7319.

35) 資治通鑑 227, 建中 2년 정월과 建中 3년 정월 조, pp.7305-7306, 7313-7314.

36) 資治通鑑 227, 建中3 2년 월 조, p.7320.

37) 舊唐書 12, 德宗本紀上, 建中 3 6월 조, 336 ; 資治通鑑 227, 년 월과 월 조

3 4 6 , pp.7325-7326, 7331.

建中

(7)

백관을 설치하였다 즉

.

자치통감 권

227,

덕종 건중

3

11

월 조를 보면

주도가 스스로 冀王을 칭하고 전열이, 魏王을 칭하고 왕무준이 趙王을 칭하고 이납에게 청하여, 齊王을 칭하게 하였다 이날 주도 등이. 軍中에 제단을 쌓고 하늘에 고한 후 왕호를 받았다 주도가. 盟主가 되어 자신을 라고 칭하고 왕무준 전열 이납은 이라 칭했다. 거처하는 건물을

孤 ․ ․ 寡人

이라 부르고 자신들이 처분하는 것을, 이라 부르고 아래에서 올리는,

殿 令

글을 牋이라 부르고 처를, 妃라고 부르고 장자를, 世子라고 불렸다 각각. 치소가 있는 주를 府라고 바꾸고 留守 겸 元帥를 설치하여 軍政을 맡겼 다. 또 東․西曹를 두어 中書 門下省․ 과 같이 하고, 左 右內史․ 를 두어 과 같이 하고 나머지, 은 모두 를 모방하고 그 이름

侍中 中書令․ 官 天朝

만을 바꾸었다(p.7336).

라고 적혀 있듯이 이납이

,

齊王

,

노룡의 주도가 冀王

,

위박의 전열이 성덕의 왕무준이 을 칭하였던 것이다

, .

魏王 趙王 38) 이른바 ‘4왕의 난’ 이다 상황을 관망하던 회서의 이희열도 다음 달에 스스로

.

天下都元 을 칭하였고 다음 해 정월에는

,

를 점령하여 낙양

帥․建興王 汝州 東都

을 위협하였다

.

39) 그러자 이납 등 네 왕이 각각 이희열에게 사신을 보내 칭신하였다

.

40)

다급해진 덕종은 서방의 군대와 금군을 동쪽으로 이동시켰는데

,

41) 이로 인해 吐蕃에 대한 방비가 약화되었을 뿐 아니라 장안의 경비마저 매우 허약해지게 되었다 이런 중인 건중

. 4 (783) 10

년 월에 동쪽으로 이동하던 涇原 번진의 병사

5,000

명이 장안을 지나면서 갑자기 변란 을 일으켜 노룡절도사였던 朱泚를 옹립하여 장안을 점령하였다 덕종

.

은 놀라 장안 서쪽의 奉天으로 달아났고 주체는

,

大秦皇帝를 칭하며

38) 舊唐書 12, 德宗本紀上, 建中 3 11월 조, “朱滔田悅 王武俊於魏縣․ ․

, . , , . .

軍壘各相推僭稱王號 滔稱大冀王 武俊趙稱王 悅稱魏王 又勸李納稱齊王

”(p.335).

僭暑官名如國初親王行臺之制

39) 資治通鑑 227, 建中 3 12월과 권228, 建中 4 정월 , pp.7337-7339.

40) 資治通鑑 227, 建中4년 정월 조, p.7340.

41) 資治通鑑 228, 建中4 8년 월 조,陸贄上奏文, p.7349.

으로 개원하였다

.

應天 42) 稱帝는 것은 당조의 완전 부정을 의미한다

.

이후 주체가 여러 차례 봉천을 공격하였지만 다행히 덕종은 위기를

,

벗어났다

.

궁지에 몰린 덕종은 할 수 없이 다음 해 정월에 興元이라 개원하면 서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사죄하고 이희열과 네 왕을 사면하였 다

.

덕종의 완패 선언이다

.

이납 전열 왕무준은 더 이상 전쟁을 확․ ․ 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바로 표를 올려 王號를 철회하고 사죄하 였다

.

43) 이에 대해 新唐書 권

7,

德宗本紀에는 “이희열․田悅․왕무 준 이납의․ 官爵을 회복해 주었다”44)고 적혀 있다

.

그러나 회서의 이희열은 같은 달에 황제를 칭하며 국호를 大楚라고 하고 武成이라 개원한 후 지배 지역을

4

개의 번진으로 나누었고 주도

,

는 북방의 回紇을 끌어들여 하북지역을 약탈하였다

.

45) 여기에 주체를 토벌하던 河中節度使 李懷光이 주체와 내통하면서 반란을 일으켰고

,

덕종은 梁州로 피신하였다

.

46)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도가 관군에 밀리기 시작하고

,

47) 주체 는 관군에 패하여 달아났다가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

48) 그리고 다음 해인 貞元 원년

(785) 6

월 주도가 병사하고 劉怦이 노룡을 장악하자 다음 달에 덕종이 유평을 노룡절도사에 임명해 주었다

.

49)

8

월에는 이

42) 舊唐書 200 , 朱泚傳, p.5388; 新唐書 225 , 朱泚傳, p.6444;

228, 4 10월 조, pp.7351-7360. 이에 대해서는

資治通鑑 建中 王永

등에 자세

, “ ” ( , , 2000), pp.390-398

涇師之變 發微文史探微 中華書局 하다.

43) 資治通鑑 229, 興元 원년 정월 조, pp.7390-7393; 舊唐書 12, 원년 정월 조

, , pp.339-340.

宗本紀上 興元

44) 新唐書 7,德宗本紀,興元원년 정월 조, p.190.

45) 資治通鑑 229, 興元 원년 정월 조, pp.7393-7396; 舊唐書 145, , p.3934; 143, , p.3897.

李希烈傳 舊唐書 朱滔傳

46) 新唐書 224 , 李懷光傳, pp.6377-6378; 舊唐書 121, 李懷光傳,

원년 월과 월 조

p.3493; 舊唐書 12, 德宗本紀上 興元, 2 3 , p.341;

229, 원년 월과 월 조2 3 , pp.7402, 7419.

治通鑑 興元

47) 資治通鑑 231, 興元원년 월 조5 , pp.7431-7432.

48) 資治通鑑 231, 興元원년 월과 월 조5 6 , pp.7435-7437.

(8)

회광도 궁지에 몰려 자살하였다

.

50) 이희열 역시 고립무원에 빠진 상 황에서 다음 해

3

월에 병을 얻었고 다음 달에 부하인

,

陳仙奇에게 독 살되었다

.

51) 이로써 거의

5

년에 걸친 대반란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

이후 당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한동안 번진에 대한 강경책을 펼칠 수 없게 되었다 번진의 전성기가 도래하였던 것이다

. .

그렇다면 제나라를 세웠던 이납은 과연 독립국을 지향하였던 것일 까 먼저 지적할 것은 이납 등의 반란이 번수의 계승권 때문에 일어났

.

다는 점이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자신들의 생존권 또는 기득

.

권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결코 당조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둘째는 덕종이 패배를 선언하자 이납 전열 왕무준이 바로․ ․ 왕호를 철회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조가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하

.

는 한 당조를 부정할 생각이 없었음을 나타낸다 셋째는 그들 번진이

.

전성기를 구가하면서도 다시 왕호를 칭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52) 이 역시 앞의 두 가지와 마찬가지로 당조와 결별하여 스스로 독립국을 세 울 의도가 없었음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이정기 일가는 당조가 그들의

.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한 당조와의 공존을 원하였던 것이다 비록 독

.

자적으로 번진을 운영하였다고 해도 그들 역시 당조의 존재를 필요로 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

최근 중국 학계의 일각에서 고구려인이 唐에 대해 ‘認同意識’(즉 동 49) 資治通鑑 231, 貞元원년 월과 월 조6 7 , pp.7453, 7459.

50) 新唐書 224 , 李懷光傳, p.6378; 資治通鑑 232, 貞元 원년 8 , p.7461.

51) 舊唐書 145, 李希烈傳, p.3945; 資治通鑑 232, 貞元 2 3월과 4 월 조, p.7468; 舊唐書 12, 貞元2 4년 월 조, p.353.

52) 太平廣記 393, 1, 李師道 조에憲宗命將討之 王師不利 而師道益驕, , ,

, , , , , ,

乃建新宮 擬天子正殿 卜日而居 是夕雲物遽晦 風雷如撼 遂爲震擊傾圮 俄 라고 하여 에 이어 평로의

, ”( , p.3144) ,

復繼以天火 了無遺者 中華書局 李師古

가 된 가 황제의 을 모방하여 을 지었다고 적혀 있다 비.

藩帥 李師道 正殿 新宮

록 소설류의 글이기는 하지만 사실을 전한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경우, . 에도 이사도가 憲宗과 극단의 대결을 벌이면서 내부적으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행위일 가능성이 크가. 史書에는 이사도가 왕호를 취했거나 황제를 모방 하였다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질의식 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망한 뒤에도 나라가 망하

)

“ 고 가문이 망했다 는 감정을 거의 가지지 않았고 당으로 끌려간 고구”

,

려 유민은 점점 漢族에 융합되어 중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데 탁월 한 공적을 남긴 사람들도 나타났다고 하면서 그 예로서 高仙芝 王毛․

와 함께 를 들고 있다

.

仲 王思禮․ 李正己 53) 그러나 이정기는 일시 당 조의 명을 따르기도 하였지만 얼마 후 당조의 통치를 거부하였다 자

, .

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향방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그가 일시

.

당조의 명을 따랐던 것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른 결과로 이해된다

.

이러한 태도는 당조와 발해 사이에서 양자의 교섭을 중개할 경우는 물 론 그들과 발해의 관계에도 투영된다

, .

. 押兩蕃渤海黑水四府經 略使 에서

로 押新羅渤海兩蕃使

이정기 일가가 산동을 지배하던 시기에 발해와 당은 비교적 빈번한 교류를 행하였다 그때 중간에서 양자의 교량 역할을 한 것이 압신라

.

발해양번사였는데 이정기 일가가 이를 겸직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

, .

정기 일가는 공식적으로 발해와 접촉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압신라발해양번사의 전신이라고 할

.

押兩蕃渤海黑水四府

부터 살펴보자

.

經略使

(

또는

)

를 건국한 후 처음으로 당과 접촉한 것은 大祚榮 振國 震國

원년

(705)

정월에 즉위한 이 을 진국에 파

神龍 唐 中宗 侍御史 張行岌

견하면서부터였다 그러자 대조영은 아들을 당조로 보내

.

入侍하게 하 였다 그리고 중종이 대조영을

.

冊立하려 하였지만 거란과 돌궐이 변경

53) 馬大正 , 古代中國高句麗歷史續論 中國社會科學出版社( , 2003, pp.72 마다정 외 동북공정 고구려사 서길수 역 사계절

-73; , , , , 2006), pp.197

-199.

(9)

을 침입하였기 때문에 使命을 전달할 수 없었다

.

54) 이어 睿宗 景雲

2

(711)

에 대조영이 당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고

,

55) 先天

2

월에는 이 또는

(713) 2

玄宗 崔訢

(

崔忻

)

56)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左驍

으로 책봉하였다

.

이후 진국은 발 衛員外大將軍․渤海郡王 忽汗州都督․

해로 불리게 되었고 대조영은 해마다 당으로 사신을 보냈다

.

57) 중국의 王承禮는 최흔의 사행로를 설명하여 “長安에서 登州에 이른 뒤 출렁이는 파도를 건너 현재의

,

旅順 입구에서 육지에 올랐다가 압

,

록상을 거슬러 올라 舊國에 도달하였다”, 또 이듬해인 개원“

2

년 최흔 이 귀국할 때 요동반도의 남단을 지나면서 여순 黃金山 아래에 기념물 로서 우물을

2

개 파고 題記를 새겨놓았다”58)라고 기술하였다 여기서

.

란 현전하는 ‘ ’

題記 旅順唐鴻臚井刻石59)을 말한다 최흔 일행이 여순을

.

지난 것은 산동의 登州를 경유한 것을 나타낸다

.

신당서 지리지에 의하면 발해도독부 즉 홀한주도독부 는 처음에

( )

의 관할을 받았던 것으로 적혀 있다

.

營州都督府 60) 그런데 영주도독부

는 발해 건국의 계기가 되었던 契丹 李盡忠의 난으로 武則天 萬歲通天 원년

(696)

에 폐지되었다가 中宗 神龍 원년

(705)

년에 幽州都督府 경 내에 임시로 설치되었고 개원

, 5 (717)

년 에 다시 영주에 설치되면서

54) 舊唐書 199 , 渤海靺鞨傳, p.5360; 新唐書 219, 渤海傳,

원년 월 조

p.6180; 資治通鑑 210,玄宗開元 2 , p.6680.

55) 冊府元龜(中華書局) 971, 朝貢3,景雲2 11 월 조, p.11404.

56) 당시 사신의 이름이 崔訢이었는가 아니면 崔忻이었는가에 대한 자세한 논의 王仁富, 旅順唐鴻臚井刻石回歸探討 哈爾濱出版社( , 2005), pp.39-58 .

57) 新唐書 199 , 渤海傳, p.6180; 舊唐書 199 , 渤海靺鞨傳,

년 조

p.5360; 冊府元龜 964, 冊封2, 玄宗 先天 2 , p.11342; 資治通鑑 210, 開元원년 월 조2 , p.6680.

58) 王承禮, 발해의 역사 송기호 역( , 한림대학아시아문화연구소, 1988), pp.63-64.

59) 王禹浪田曉潮 主編․ , 旅順鴻臚井硏究文集 哈爾濱出版社( , 2005)참조. 60) 新唐書 43 , 地理志7 , 河北道, p.1128. 王承禮는 이를 바탕으로 발

해도독부가 처음에는 영주도독부의 관할이었다고 말한다 발해의 역사( , p.

한편 가 되었지만 어디에도 관할되지 않았다

65). ,新羅 雞林州都督府 , .

를 겸하게 되었다

.

平盧軍使 61) 말하자면 당시 영주도독부는 온전한 역 할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

62)

개원

7

년에 평로군사는 평로군절도사로 승격되면서 經略 河北支度․

를 겸직하고 와 를 아

管內諸蕃 營田等使․ 安東都護府 營州 遼州 燕州․ ․ 울러 관할하게 되었다

.

63) 변방 절도사가 관내 이민족을 관할하는 시 대가 도래하였던 것이다

.

64) 그리고 개원

28 (740) 2

년 월에 현종이 王

를 평로군절도사에 임명하면서

斛斯 押兩蕃65)․渤海 黑水等四府經略․ 를 겸하게 하고 이를

(

즉 정규 관직 으로 정하였다

) .

處置使 定額 66)

때부터 평로절도사가 발해와의 관계를 ‘統押’67)

(

또는 押領

)

하는 주체 가 된 것이다

.

68) 그리고 개원

29 (741) 7

년 월 현종이 幽州節度副使 안록산을 平盧軍節度副使 營州刺史 押兩蕃渤海黑水四府經略使․ ․ 에 임 명하였고

,

69) 그 다음 해인 天寶 원년

(742)

정월 평로 번진을 완전 독 61) 舊唐書 39, 地理2, 營州 , pp.1520-1521; 資治通鑑 211, 開元

월 및 월 조

5 2 3 , p.6727; 舊唐書 185 , 宋慶禮傳, p.4814; 新唐書

66,藩鎭表 3, p.1832.

62) 713년에 최흔 일행이 등주를 경유하였을 것으로 본다면 당시 발해와 당조, 의 소통 경로는 상황에 따라 결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63) 新唐書 66, 方鎭表 3, p.1833. 자세한 것은 鄭炳俊, 「安史 발해의 역사

, pp.520-521; , , pp.65-66;

正己王承禮 魏國忠 朱國忱 郝․ ․

, ( , 2006), pp.268-269 참조.

慶雲 渤海國史 中國社會科學出版社

64) 이 시기에 발해 武王이 당조와 충돌이 생기자 개원 20 (732) 9 월에 張文 를 보내 바다로 들 공격하고 다음 해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

登州

근처의 馬都山에 이르러 주변 城邑을 공략하였는데 이때, 平盧先鋒將 烏承이 무왕의 진격을 막았다( 新唐書 136, 烏承 傳玼 , pp.4596-4597; 資治

213, 21년 정월 조의 , p.6800).

通鑑 玄宗 開元 考異

65)이때의 兩蕃契丹를 가리킨다

66) 唐會要 上海古籍出版社( ) 78, 諸使中 平盧節度使, , p.1692.

67) 唐會要 24, 諸侯入朝, 元和 15 2월 조, “, 淄靑統押海蕃, ……

”(p.538).

68) 한편, 王承禮는 개원 7년에平盧節度使가 설치되면서부터 발해에 대한 업무 를 관리하였다고 보고 있다 발해의 역사( , p.156).

69) 舊唐書 9, 玄宗本紀下, 開元 29 7월 조, pp.213-214. 이에 대해 214, 개원 29 8월 조에 “ ( ) , ”,

資治通鑑 以 安 祿山爲營州都督 充平盧軍使

安祿山事迹 卷上 開元 29 3월 조에遂授 安祿山 營州都督( ) , 充平盧

, ,

軍節度使 知左廂兵馬使 營田 水利 陸運使副 押兩蕃渤海黑水四府經略 順․ ․ ․ ․

(10)

립시키면서 안록산을 평로절도사 압양번발해흑수사부경략사 이하․

( ,

압 양번발해흑수경략사로 칭함 에 임명하였다

) .

70)

안록산은 天寶

3 (744) 3

載 월에 范陽節度使를 겸하면서 범양 즉

(

幽 으로 를 옮겼고 또 천보 재 월에는 까지 겸하

) , 10 2

州 治所 河東節度使

게 되었다

.

71) 그 사이인 천보

9

5

72)에 현종이 안록산을 東平郡 에 봉하는 를 보면

王 制書

開府儀同三司․兼右羽林軍大將軍員外置同正員 御史大夫 范陽大都督․ ․ 府 長 史 柳 城․ 郡太 守 持 節 充 范 陽 節․ ․ 度 經略․度支 營 田 陸 運 押 兩 蕃․ ․ ․ 渤 海 黑 水等四 府 節․ 度處 置․及平 盧軍河 北 海 運 幷․ 管 內採 訪等事 上 柱․ 안록산은 성격이 병법에 합치하고 기품이 하여

國․柳城郡開國公 雄武

동평군왕에 봉하고 實封 200호를 내리며 이전의 500호는 그대로

……

둔다.73)

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는 마치 범양절도사로서 압양번발해흑수경략

.

사를 겸한 듯이 적혀 있지만 평로절도사의 자격으로 해당 관직을 겸

,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그러다가 천보

14 (755) 11

년 월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고 다음

,

4

월 안록산을 이반한 유정신이 당조로부터 평로절도사 압양번발․ 해흑수경략사․攝어사대부를 제수받았다

.

74) 그리고 유정신을 독살한 서귀도가 발해에 병마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한 장원간의 직함이 이었던 것을 통해서 당시 서귀도 역시 임시로 압양번발해 四府經略判官

라는 기록이 전한다

”( , pp.2-3) .

化州刺史 上海古籍出版社

70) 新唐書 225 , 安祿山傳, p.6412; 安祿山事迹 卷上 天寶, 원년 정월 , p.3; 資治通鑑 215, 天寶원년 정월 조, p.6847.

71) 安祿山事迹 卷上, pp.3, 11.

72) 舊唐書 9, 玄宗本紀下 天寶, 9 5월 조, p.224; 資治通鑑 216,

월 조 후자에는 라는 구절도 덧붙여

9 5 , p.6899. “ ”

天寶 唐將帥封王自此始

있다.

73) 冊府元龜 129, 帝王部 封建, , 천보 九載 10월 조, p.1552; 全唐文 (中華書局) 25,封安祿山東平郡王制」, p.289.

74) 舊唐書 145, 劉全諒傳, “十五載四月, 授 劉( )客奴柳城郡太守 攝御史大․ ,

夫 平盧節度支度營田陸運 押兩蕃渤海黑水四府經略及平盧軍使․ ․ ․ ․ 仍賜名正

”(3939 ); 825, , , , p.9794.

冊府元龜 總錄部 名字 劉正臣

흑수경략사도 겸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압양번발해흑수경략사가 발

.

해와 직접 교섭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또 숙종

.

乾元

원년

(758) 2

월에 평로절도사에 임명된 왕현지도 압양번발해흑수경략

사를 겸하였을 것이지만 이 경우 왕현지가 발해에 파견한 왕진희 역

,

시 사부경략판관 과 같은 관직을 가졌을 수 있다‘ ’

.

같은 해

12

월에 평로절도사가 된 후희일도 압양번발해흑수경략사를 겸하였을 것이다 후희일은 평로절도사와 함께 어사대부를 제수받았는

.

,

75) 안록산이 동평군왕에 봉해질 시기에도 평로절도사로서 어사대 부를 겸하고 있었고 유정신이 평로절도사에 임명될 때도 어사대부를

,

겸하였다 후희일이 어사대부를 제수받은 것도 그가 압양번발해흑수경

.

략사를 겸하였을 가능성을 더해 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후희일이 산동

.

지역으로 남하한 배경에는 奚의 침략이 큰 몫을 하였는데 이는 압양

,

번발해흑수경략사가 안사의 난 중에 거의 기능을 못하고 있었음을 보 여준다

.

후희일은 산동으로 이동하여 평로치청절도사에 임명되었지만 이 시

,

기에도 압양번발해흑수경략사를 겸하였을까

?

발해를 별개로 하면 평

,

로절도사가 거란 해 흑수말갈과의 관계를 통압 하는 것은 사실상 지․ ․ ‘ ’ 리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어떤 형태로건 조정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지

.

만 확인되지 않는다 해와 거란은 어느 시점부터

, .

幽州의 盧龍節度使 가 통압하였다고 보인다

.

76)

대종 永泰 원년

(765) 5

월 이정기가 후희일을 몰아냈다 그러자 두

.

달 후 대종이 이정기를 평로절도사에 임명해 주었는데 그때 그가 받

,

은 관함은 “平盧淄靑節度 觀察 支度 營田 海運 押新羅渤海兩蕃․ ․ ․ ․ ․

, , ,

使 檢校工部尙書 兼御史大夫 靑州刺史77)였다 여기서도 어사대부

.

75) 新唐書 144,侯希逸傳,“有詔就拜節度使, 兼御史大夫”(p.4703).

76) 舊唐書 12, 德宗本紀上, 貞元 원년 7월 조, “以前 州刺史兼御史中฀ ․ 丞劉怦爲幽州長史 御史大夫 幽州盧龍節度副大使․ ․ ․兼知節度管理度支營田觀

”(p.349); 78, ,

察 押奚契丹經略盧龍等軍使唐會要 諸使中 宰相遙領節度

, “ ,

使 會昌二年正月 以撫王紘開府儀同三司 行幽州大都督․ ․充幽州盧龍軍節度觀

”(p.1699) . 察處置 押奚契丹兩蕃經略 盧龍軍等大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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