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代 茶法의 處罰規定과 그 變化 *
徐 銀 美 (釜山大)
1)
Ⅰ. 서론
Ⅱ. 唐後期 茶의 專賣와 處罰規定
Ⅲ. 北宋代 茶法 處罰規定의 成立 과 特徵
Ⅳ. 北宋末 南宋代 茶法의 處罰 規定
Ⅴ. 결론
Ⅰ. 서론
본 연구는 宋代 茶의 전매정책에 있어서 위반사항과 불법으로 규정 되었던 것들에 대한 처벌 내용과 그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다. 전매제 도는 기원전부터 시행되어 왔지만, 茶 전매의 경우 唐 후기에 시작되 어 五代十國을 거쳐 宋代 완성적인 모습을 보였다. 宋代 茶法에는 고 대적인 연속성보다는 唐宋變革期의 새로운 흐름에 대한 대응의 성격이 많다. 법적 처벌규정, 특히 정책 시행에서 위반사항에 대한 처벌과 불 법사항에 대한 법적 조치는 정책 시행의 의지를 보여주는 척도인 동시 에 시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제반 현상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따라 서 茶法과 관련된 법적 처벌 규정을 통해서 茶法 시행 과정에서의 환 경 변화를 읽어내고 이에 대한 대응을 살펴보는 것은 송대 사회를 이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 된 연구임(NRF-2014S1A5B5A07040018).
해하는데 매우 유용하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전매제도와 관련된 연구에서 처벌규정에 대한 것은 법제 사적인 문제로 여겨져 주목하고 있지 않았다. 법제사 연구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관심이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1) 이와 같이 관심이 적었던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그 처벌규정의 내용이 일목요연하지 않 고 산발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차례 간행되었던 다수의 編勅類들 이 거의 유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산재되어 있는 내용들을 확인해야 하 는 작업이 요구되고, 그 내용들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문제는 분 명히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법제적인 연구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경 제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의 적용과 대응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가능하다. 또한 이들 처벌규정에 대한 연구는 당송변혁기를 거친 사회 의 특징과 한계를 살펴보는데 아주 적절한 주제로 연구의 필요성이 요 구된다.
茶法의 처벌규정에 대한 연구는 상업과 도시 발전을 주축으로 고대 적 모습을 벗어가고 서민사회를 구가하는 시점에서 경제정책의 시행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아가 군주의 통치방식의 변화와 한계까지도 엿볼 수 있다. 茶法 내지 전매제도와 관련된 처벌규정이
宋刑統과 같은 전통적이고 고정적 성격이 강한 刑法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그러한 성격을 대변한다. 이들 내용은 編勅 혹은 勅令 格式이라고 부르는 사회 경제적 변화에 대응해 詔勅에 의해 지속적으 로 개정되는 임시적 성격이 강한 법전에 실려 있다. 이들 編勅에 실린 처벌규정의 내용들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시행과 적응을 반영하고 있 으며 동시에 항시적이지 않고 군주의 명령에 의해 개정된다는 전근대 적 한계를 보여준다. 또한 한편으로는 군주의 조칙을 받기 위한 관리 들의 보고 내지 상소 내용들이 현실적인 사안에 대한 인식과 대응을1) 久保惠子, 「北宋朝の專賣制度に對する犯罪の處罰規定」 (お茶の水史學 24, 1980); 陶德臣, 「宋代對茶葉走私的法律制裁」 (中國茶葉 2010-10); 陶德臣,
「唐五代時期官府對茶葉市場的法律管理」 (中國茶葉 2011-4); 陶德臣, 「論宋 代僞劣茶問題與官府的法律應對」 (廣東茶業 2013-1).
그대로 담고 있다. 따라서 이들 처벌에 대한 내용이 규정되는 과정을 분석해보면 전매 시행 과정의 다양한 현상과 그에 대한 대응과 모색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Ⅱ. 당후기 차의 전매와 처벌규정
차에 대한 처벌규정은 차에 전매가 적용된 이후부터의 일이었다. 8 세기 唐朝는 중앙의 재정 고갈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재원의 확 보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차는 징세의 대상이 되었고 이어 전매로 이어졌다. 780년(建中元年)부터 차에 대한 징세가 시작되 었고 835년(太和9年)에는 전매가 시행되었다. 이는 민간의 이익을 중 앙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었다.2) 따라서 그에 따른 반발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江淮地域에서 차 생산을 전업으로 하는 인구는 20~30%에 이르고 있었다. 이들은 차의 전매시행에 대해서 “다만 파 견되어온 관료를 모두 죽이고 산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만이 있 을 뿐이다”라고 공언할 정도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3)
사실 唐朝의 차 전매는 기존의 차 생산과 차 시장의 질서를 무너뜨 리는 것이었다. 780년 이전까지 차는 민간에서 규제 없이 생산되고 차 시장을 통해 자유롭게 판매되고 있었다. 1/10의 商稅가 부과되었을 때부터 官府는 기존의 園戶와 商人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따라 서 차에 대한 징세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차의 징세 는 필요에 따라 일시 중지되기도 하였고4) 관부가 茶店을 설치하여 직 접 세를 거두기도 하였다.5)
2) 徐銀美, 北宋 茶 專賣 硏究 (국학자료원, 1999), pp.52-53.
3) 册府元龜 卷510, “文宗太和九年(835)九月……江淮人什二三以茶為業 皆公言 曰 果行是勑 止有盡殺使人 入山反耳.”
4) 冊府元龜 卷504, “興元元年(784)春正月癸酉……大赦改元制曰 其所加墊陌錢 稅間架竹木茶漆 榷鐵之類 悉宜停罷.”
이러한 과정에서 중앙의 재원확보 노력은 꾸준한 것이었다. 이에 차 에 대한 징세는 점차 중앙의 관리 하에 들어오게 되었고 국가재정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稅茶에 이어서 榷茶로 진행되면서 차 의 이익은 더욱 중앙으로 귀속되었다. 관부는 등급을 나누어 가격을 높이는 방식을 통해 이익은 관으로 귀속시키고 차상에게 피해가 없으 며 茶戶를 소요시키지 않는 결과(利歸有司, 無害茶商, 不擾茶戶)를 가 져올 수 있다고 하였다.6) 그러나 榷茶의 시행 결과 가격 상승에 따른 부담은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것이었다.7)
결국 현실은 정책시행의 논리대로 순조롭게 움직이지 않았다. 국가 의 통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茶商人과 茶園戶의 반발심은 불법적인 차의 생산과 판매 방식, 즉 私茶와 밀매로 나타났다. 이로써 백성들이 사사롭게 차를 판매하는, 즉 차의 밀매에 대한 처벌은 唐 武宗 (840~846)때 시작되었다.8) 밀매가 발생하는 상황에 대해서 “1인이 죄를 범하면 여러 호가 피해를 입는다(一人犯罪 數戶破殘)”는 인식으 로 엄격한 처벌 조항을 시행하였다. 武宗 840년(開成5년) 시행한 처벌 조항은 아래와 같다.
園戶가 차를 밀매하여 10~100근이면 벌금 100문에 척장20으로 처벌 한다. 300근에 이르면 척장20에 벌금은 100문이고, 재범하면 누적시켜 처벌한다. 3범부터는 본주에 위임시켜 관리하고 요역을 가중한다. ……
(商人이) 소량 사차를 판매하되 무장하지 않고 무리가 없는 경우는 10~100근이면 脊杖15이고 그 차와 함께 소유하고 있던 물건을 모두 몰 수한다. 고발하거나 체포에 기여한 경우 그 囚牒을 본주현에 보내 관리시 키고 다른 길을 찾아 살아가게 한다. 재범의 경우는 수량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법에 따라 처리한다. 300근 이상이고 방자흉악하며 패망을 두 려워하지 않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선동 유인하면 모두 단절해야 하므로
5) 冊府元龜 卷493, “貞元13年(797)置茶鹽店收稅.”
6) 冊府元龜 卷494, “唐文宗太和9年(835)……唯納榷之時 須節級加價 商人轉賣 必較 稍貴即是錢出萬國 利歸有司 既無害茶商 又不擾茶戸.”
7) 陶德臣, 「唐五代時期官府對茶葉市場的法律管理」 (中國茶葉 2011-4), pp.29 -30.
8) 續資治通鑑長編 卷5, “自唐武宗始禁民私賣茶.”
법에 따라 처리하여 몰수하고 또한 위의 사례와 같이 처리한다.9)
840년 차의 밀매에 대한 처벌을 살펴보면 처벌대상은 밀매를 하는 생산자와 상인으로 구분하였고 초범과 재범 이상을 구별하여 가중처벌 하였다. 먼저 생산자인 원호가 10~100근의 수량을 밀매하면 脊杖20 과 벌금 100文을 부과하였다. 밀매 수량이 300근이 되면 처벌을 동일 하게 척장20과 벌금 100문이었으나 이후 재차 범법했을 경우 누적시 켜 처벌하였다. 3범일 경우는 해당 州府에서 관리하였고 요역을 가중 시켰다. 즉 생산자의 밀매행위에 대한 처벌은 초범의 경우 형량이 동 일하였으나 수량이 300근에 이르는 경우는 이후 재범시 수량을 누적 시켜 처벌하였고 3범인 경우는 가중처벌하였다.
상인의 밀매행위에 대한 처벌은 어떤 행태였느냐에 따라 처벌이 달 라졌다. 무리를 이루지 않고 무장하지 않았을 경우 10~100근이면 척 장15에 차와 보유하고 있던 물품 전량 모두를 몰수하였다. 그런데 고 발하여 알리거나 체포에 기여한 경우는 범죄의 기록은 해당 주현에서 관리하게 하고 별도의 생계를 찾아가도록 하였다. 재범일 때는 수량의 다소와 상관없이 처벌하고 몰수하였다.
여기에서 생산자인 원호와 판매자인 상인의 처벌을 비교해보면 동 일 수량에 대한 처벌의 脊杖이 원호가 20, 상인이 15로 상인에게 가 볍게 처리된 듯이 보인다. 그런데 상인의 경우 차와 함께 보유하고 있 던 물품 전량에 대한 몰수가 병행되었다. 벌금이 100문으로 규정된 원호와 비교하면 무거운 것이었다. 이를 감안한다면 원호에 대한 처벌 이 무거웠다고 볼 수 없다.
이어 852년(大中6年)이르면 처벌조항이 보강되고 강화되었는데 이
9) 册府元龜 卷494, “武宗以開成五年(840)正月四日……園户私賣茶 犯十斤至一 百斤 徴錢一百文 决脊杖二十 至三百斤决脊杖二十錢亦如上 累犯累科 三犯已後 委本州上歴收管重加徭役……輕行販私茶 無得杖伴侣者 從十斤至一百斤 决脊杖 十五 其茶并隨身物並没納 給糾告及捕捉所繇 其囚牒送本州縣置歴收管 使别營生 再犯不問多少 准法處分 三百斤已上 即是恣行兇狡 不懼敗亡 誘扇愚人 悉皆屏絶 並准法處分其所没納 亦如上例.”
것은 당시 鹽鐵轉運使였던 裵休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이전 처벌조 항으로도 민간에 엄격하게 경계를 시키고 근절시킨다는 의지를 보였지 만 조항이 강화되고 세밀화된 것을 보면 차 밀매의 현상은 쉽게 통제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상인이) 밀매3범이고 수량이 300근이면 사형으로 논한다. 무리지어 장거리를 움직여 차를 거래했으면 수량이 적더라도 모두 사형이다. 고용 되어 운반한 3범이고 500근에 이른 경우, 보관과 중계 4범이고 1,000근 에 이른 경우 모두 사형이다. 원호가 밀매하여 100근 이상이면 杖背에 처한다. 3범이면 요역을 가중한다. 다원을 벌목하고 실업한 경우 자사현 령이 소금밀매에 따라 처벌한다.10)
852년의 차 밀매에 대한 처벌조항에는 사형에 대한 형량이 다수 열 거되었다. 상인이 차를 밀매해 3범이고 수량이 300근이면 사형에 처 할 수 있었다. 밀매차의 수량이 적더라고 무리지어 장거리를 활동했으 면 사형이었다. 고용되어 밀매차를 운반하였더라도 3범이고 수량이 500근에 이른 경우와 보관인과 중계인이라고 하여도 4범이고 수량이 1,000근에 이르면 모두 사형으로 처리하도록 하였다.
생산자인 원호가 밀매하였을 경우 100근이 넘으면 杖背을 가하였고 3번이면 가중처벌로 요역을 부과하였다. 조세납부의 의무를 회피하려 고 다원을 훼손하여 실업상태를 만든 경우에는 사염법에 따라 처벌받 았다.
이러한 852년의 처벌규정은 상인의 밀매에 대한 강력한 조치였다.
밀매활동을 통해서 사형을 구형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840년 처벌조항이 杖刑, 벌금, 가중처벌로서의 요역부과, 그리고 물건의 몰수 라는 항목으로 처벌한 것과 비교하면 형량이 매우 무거워졌다. 그리고 밀매발생의 핵심이 상인이라는 인식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상에 있어서도 이전의 경우는 생산자인 원호와 판매자인 상인이
10) 新唐書 卷五十四, 食貨志第四十四, “大中(847~860)初……私鬻三犯皆三百 斤乃論死 長行羣旅茶雖少皆死 雇載三犯至五百斤 居舎儈保四犯至千斤者皆死 園戸私鬻百斤以上杖背 三犯加重傜 伐園失業者 刺史縣令以縱私鹽論.”
라는 두 부류로 나누어 구별했다면 852년은 세분화되었음이 보인다.
상인과 운반인, 보관인, 중계인까지 처벌대상이 되었고 생산자의 경우 판매행위에 대한 처벌과 茶園의 伐木에 대한 처벌이 있었다. 이와 같 이 처벌대상이 세분화되었다는 것은 징세를 위한 생산의 유지라는 측 면과 밀매 활동이 다각적으로 파악되고 있었다는 것이고 또한 그만큼 밀매의 현상이 빈발하고 극심했다는 방증이기도 하였다.
Ⅲ. 북송대 茶法 처벌규정의 성립과 특징
宋朝의 첫 번째 차에 대한 처벌규정은 964년(乾德2年)에 보이는데 그 기본 틀이 唐 武宗의 밀매단속규정에서 출발하였다. 국초에 소금과 술과 관련된 처벌규정이 後周의 것을 완화한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것 과는 방식이 다르다. 아마도 後周에서는 강남으로부터 올라오는 차에 대해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반면 송조는 차를 통해 국가 재정을 확충할 계획을 국초부터 수행하였다.
송조는 962년(建隆3年) 劉湛을 파견해서 蘄春(蘄州)에서 榷茶하여 세수를 배로 증대시켰다.11) 당시 기춘은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서 강남 에서 올라오는 차의 집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어서 송조는 964 년(乾德2年) 경사와 양자강 이북 연안의 요충지에 榷貨務를 설치하여 강남에서 올라오는 차를 관에서 통제하였다.12) 차에 대한 통제가 이루 어짐에 따라 위반사항에 대한 처벌규정이 만들어졌다.
차의 위법행위에 대한 처벌조항은 기존 다른 전매품목에 대한 처벌 과 무관하지 않았다. 먼저 술과 소금에 대한 처벌내용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고대시대 술의 소비는 식량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 었기 때문에 술과 관련된 밀매의 조항은 매우 엄격하였다. 漢代에는
11) 續資治通鑑長編 巻3, 太祖 建隆三年 丁亥, “以監察御史劉湛為膳部郎中 湛 奉詔榷茶于蘄春 嵗入増倍 遷拜越級 非舊典也.”
12) 徐銀美, 北宋 茶 專賣 硏究 (國學資料院, 1999), p.104.
양조의 원료인 누룩(麴)을 밀매하면 기시형에 처해졌다. 後周에서는 누 룩 5근을 밀매하면 사형이었는데 송 태조는 후주의 처벌조항이 너무 엄격하다고 하였다. 송초 961년(建隆2년)의 酒麴 密造密賣의 처벌은 누룩 15근을 밀조하거나 密酒 3두(54ℓ)를 성시로 반입하면 사형이었 다. 그 미만은 차등적으로 처벌하였고, 사조한 누룩과 술을 구입한 사 람은 그 1/2의 처벌을 받았다.13)
송조는 962년(建隆3년) 다시 酒麴의 금지령을 내려 밀조수량에 따 라 처벌을 차등적으로 하였다. 누룩의 밀조는 성시의 경우 20근, 향촌 은 30근의 수량이면 기시에 처하였다. 밀조한 술을 경성 50리와 서경 및 제주성시 20리에 반입한 것이 5두(90ℓ)면 사형이었고 향촌의 경우 1석(180ℓ)이면 기시였다.14)
이후 966년(乾德4년)의 酒麴의 밀조와 밀매에 대한 처벌조항은 북 송의 기본적인 규정으로 자리 잡았다.15) 밀조한 누룩을 거래한 경우 성시는 50근 이상, 향촌은 100이상이면 사형이었다. 밀조주를 반입한 경우는 東京에서는 2석, 서경 및 제도주부에서는 3석이상이면 사형으 로 처리하였다. 밀조주를 판매한 경우 東京에서는 4석, 西京 및 諸道 州府城 등에서는 5석(900ℓ)이면 사형이었다.16) 이때의 처벌조항은 建 隆시기의 것(962)보다 완화되었고 처벌이 가벼워졌다. 이에 사회적으 로 범법자들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다. 누룩과 술의 경우 그 생산과 유통이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어 빠른 시기에 국가가 통제할 수 있었
13) 宋史 巻185, 食貨志第138, 食貨下7, “五代漢初 犯麴者 並棄市 周至五斤者 死 建隆二年(961) 以周法太峻 犯私麴至十五斤以私酒入城至三斗者 始處極刑 餘 論罪有差 私市酒麴者减造人罪之半.”
14) 宋史 卷185, 食貨志第138, 食貨下7, “建隆三年(962)再下酒麴之禁 户私造 差定其罪 城郭二十斤 鄉閭三十斤 棄市 民持私酒入京城五十里西京及諸州城二十 里者至五斗處死 所定里數外有官署 酤酒而私酒入其地一石棄市.”
15) 久保惠子, 「北宋朝の專賣制度に對する犯罪の處罰規定」, p.21.
16) 宋史 巻185, 食貨志第138, 食貨下7, “乾徳四年(966) 詔比建隆之禁第減之 凡至城郭五十斤以上 鄉閭百斤以上 私酒入禁地二石三石以上 至有官署處四石五 石以上者 乃死 法益輕而犯者鮮矣”; 久保惠子, 「北宋朝の專賣制度に對する犯罪 の處罰規定」, pp.20-21.
음을 알 수 있다.
송조의 소금에 대한 처벌조항도 이전 왕조인 後周보다는 완화되었 으며17) 國初의 조항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처벌 기준이 더 완화되었다.
태조(960~975) 때는 국내산 소금만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태종 (976~997) 때에 이르면 西夏로부터 수입된 淸白鹽도 대상에 포함하 였다.
먼저 密造 소금에 대한 처벌을 살펴보면 961년의 경우 3근을 밀조 하면 사형에 처하였다. 이어 개정된 조항에서는 962년 10근, 966년 50근이면 사형으로 처벌되었다. 977년에 이르면 밀조 소금에 대한 처 벌에서 사형은 배제되고 최고형으로 100근 이상이면 背杖 20, 刺面으 로 처리하였다.18)
官鹽을 반입금지지역으로 반입한 경우의 처벌은 961년 10근에 이르 면 사형이었는데 962년은 30근으로 완화시키고, 966년은 100근이면 사형이었다. 977년에 이르면 200근을 배장20과 자면으로 처벌하고 황제에게 재가를 받는 奏裁의 방식을 택하여 사형을 배제시켰다.
농촌의 소비분인 蠶鹽19)을 성시로 반입시킨 경우는 961년 30근이 상이면 奏裁하여 사형으로 처리하였다.20) 962년에는 100근이면 사형, 966년은 300근이면 배장20, 배역3년으로 처벌되었다. 977년의 처벌 규정은 매우 치밀해졌다. 잠염을 주현성으로 반입하거나 매매한 경우 1근이상이면 臀杖15, 30근이상이면 둔장20, 50근이상이면 배장13, 100근이상이면 배장15 배역1년으로 시작하여 순차적으로 가중시켰다.
500근 이상이면 배장20 刺面奏裁하였다.
17) 續資治通鑑長編 卷2, 太祖, 建隆二年(961), “……上又以前朝鹽法太峻 是日 定令.”
18) 久保惠子, 「北宋朝の專賣制度に對する犯罪の處罰規定」, pp.22-23.
19) 蠶鹽은 농촌에서 소비되는 소금을 의미한다. 잠염이라는 명칭은, 오대에서 남송까지 농촌에 食鹽을 지급해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2월 누에를 기를 때 지 급하고 6월 생사를 만들고 夏稅를 거둘 때 그 값을 받았기 때문에 생겼다.
20) 續資治通鑑長編 卷2, 太祖, 建隆二年(961), “官鹽闌入禁地貿易至十斤 煑鹻 至三斤者乃坐死 民所受蠶鹽以入城市三十斤以上者 奏裁.”
977년의 소금에 대한 처벌규정은 북송 염법에서 기본적인 규정으로 자리하였는데 처벌조항이 치밀하고 대상도 국내외산을 모두 포함한 것 이었다. 소금의 밀조와 밀매에 대한의 처벌은 1兩(16량=1근)부터 처벌 하였고 밀조는 100근 이상 밀매는 200근 이상이면 奏裁하여 처벌하 였다. 청백염의 거래도 국내산 밀매매와 동일하게 처리되었다. 이후의 처벌규정은 북방으로부터의 소금 유입에 대한 단속규정이 첨가되었고 기본적으로 977년의 규정을 준수하였다.21)
이상과 같은 송조의 처벌조항에서 주목되는 것으로 刺面刑이 있다.
국초에 엄격했던 처벌조항이 완화되는 과정에서 死刑이 배제되면서 나 타나는 형벌 가운데 자면형이 보인다. 이는 송조 형벌의 특징을 담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다음에서 살펴볼 것이지만 차의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에서도 977년부터 黥面, 즉 자면형의 처벌이 나타난다.
자면형은 송조 형법의 적용에서 折杖法이 시행되면서 나타났다. 송 조의 형벌제도는 기본적으로 당조의 것을 답습해 笞刑, 杖刑, 徒刑, 流 刑, 死刑의 5단계를 기본으로 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折杖法을 적용하 여 태형, 장형, 도형, 유형을 대체하였다. 태조 때는 태형에서 유형에 이르는 형벌이 절장법에 의해 臀杖에서 시작해 脊杖 20에 3년 役의 처벌까지로 세분되었다. 이러한 절장법은 처벌의 경중이라는 측면에서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첨가된 것이 刺配刑이었 다. 이로써 송대의 형벌은 1인에게 杖刑과 刺面, 配役의 3가지 형벌을 동시에 부과할 수 있었다. 刺配刑의 하나로 刺面刑은 죄의 경중에 따 라 문신의 크기가 달랐고 부위도 달랐다. 신종때 규정에 따르면, 도둑 은 귀 뒤에 고리형태의 문신을, 도형과 유형은 네모를, 장형은 동그라 미를 문신시켰다.22)
차와 관련된 처벌조항은 964년(乾德2년) 아래와 같이 당 무종 때의
21) 久保惠子, 「北宋朝の專賣制度に對する犯罪の處罰規定」, pp.23-24.
22) 남현정, 「송대 刺字刑의 시행과 사회적 인식의 변화」 (법사학연구 35, 2007), pp.228-229; 李曉婧, 「從宋史 刑法志看宋代的刑事法律規範」 (河南 科技大學學報 29-2, 2011), pp.101-102.
규정을 명분으로 삼아 출발하였다. 당시는 송조가 통일을 완성하기 이 전이었고 차 생산지로 淮南西路와 湖南, 四川지역을 확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唐 武宗 때부터 백성들이 차를 밀매하는 것에 대해 금지하였는데 10~300근에 따라 벌금과 杖의 수를 정한 법이었다. 이에 (송 태조는) 令 을 내리기를, 백성들의 차는 折稅 이외에는 모두 관이 수매한다. 백성이 숨기고 관에 내지 않거나 밀매할 경우 몰수하고 그 (거래)가격이 100전 이상이면 장70으로 처벌하고 8관이면 役流로 가중처벌 한다. 주관하는 관리가 官茶로 무역한 경우 그 (거래)가격이 500전이면 2000리 流刑에 처한다. 1관500인 경우와 무장을 하고 밀매를 하다가 관사에 체포된 경 우는 모두 사형으로 처리한다.23)
당 무종 때의 처벌규정은 차를 밀거래한 경우 10근부터 300근에 따 라 해당되는 벌금과 杖刑을 내리는 것이었다. 송조는 折稅로 낼 茶를 제외하고 모든 차는 관에서 사들이는데 이에 협조하지 않고 차를 숨기 고 관에 제출하지 않거나 밀매하는 경우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였다.
이때 밀매한 차의 물량을 모두 몰수하였고 그 수량의 환산액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 100전이 넘으면 장70이고 8관(8,000전)이면 役流刑으 로 가중처벌하였다.
특히 관련 관리에 대한 처벌규정이 엄격하였다. 관차를 거래하여 그 규모가 500전이면 2,000리 流刑에 처하고 1관500전이면 사형을 내렸 다. 무장하고 私茶를 판매한 경우도 사형이었다. 차는 판매이익이 높 은 상품이었기 때문에 상인이나 원호 등 민간에서 뿐만 아니라 관련 관리들의 부정이 발생하기 쉬운 환경이었다. 게다가 국초에는 차 물량 의 많은 부분이 양자강을 넘어 국외인 강남에서 올라오고 있었고, 정 책 초기의 빠른 장악력을 위해서도 전매기구 관리의 영향력이 클 수밖 에 없었다. 전매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들의 청렴함이 매우 요구되는 상
23) 續資治通鑑長編 卷5, 太祖 乾徳二年(964), “自唐武宗始禁民私賣茶 自十斤 至三百斤定納錢决杖之法 於是 令民茶折稅外 悉官買 民敢藏匿而不送官 及私販 鬻者沒入之 計其直百錢以上 杖七十 八貫加役流 主吏以官茶貿易者 計其直 五百 錢流二千里 一貫五百及持仗販易私茶為官司擒捕者 皆死.”
황이었으므로 관리의 부정에 대한 엄격한 처벌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淮南西路의 차 생산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는 국초 부터 확보하고 있었던 생산지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통일을 이룬 979 년(太平天國4년) 이후에도 차 전매는 양자강을 경계로 한 통제가 주축 이 되는 운영이었으므로 양자강 이북의 생산지인 회남서로의 통제는 어느 지역보다도 중요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회남서로에는 전매기구 도 다른 지역에 비해 치밀하게 설치되었다. 13山場 6榷貨務로 불리는 북송의 전매기구에서 13산장은 모두 회남서로에 설치되어 차 생산지 를 강하게 통제하였다.
淮南西路에서 생산자들에 대한 밀매 단속은 심지어 함정수사까지도 동원되었다. 974년(開寶7年) 감찰어사였던 劉蟠이 황제의 명령으로 淮 南西路의 여주와 서주의 차를 순찰하였을 때 유반은 노새를 타고 상인 으로 위장하여 민가에 가서 차를 팔기를 요청하였다. 민가에서는 의심 하지 않고 차를 내주었다가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다.24) 곧이어 유반이 淮南諸州轉運使로 임명된 것을 보면 그의 일처리가 관부의 정책 시행 의지와 일치된다고 평가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宋朝가 南唐을 평정해(975) 강남지역을 확보한 이후인 977년(太平 興國2年)에 이르면 차의 처벌조항도 지역적 대상과 범위를 넓혀 개정 되었다. 이 시점은 차뿐만 아니라 소금과 누룩, 술 등의 전매물품에 대한 처벌조항도 모두 개정되면서 기본 틀을 완비한 때였다.
977년 차의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조항에서 기존에 있었던 관리에 대한 사형처벌조항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다소 완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보다 치밀하고 강력한 단속조항으로 구 성되어 있었다. 먼저 차를 밀매한 경우의 처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24) 續資治通鑑長編 卷15, 太祖開寶七年(974), “監察御史渤海劉蟠受詔 於廬舒 等州廵茶 蟠乗驘偽稱商人 抵民家求市 民家不疑出茶與之 即擒置於法 壬戌命蟠 同知淮南諸州轉運事.”
차가 생산되는 주현의 백성이 몰래 차를 남기거나 판매한 경우 그 값 이 1,000관 이상이면 얼굴에 문신시키고 대궐로 이송한다. 그 부인은 철 공에게 시집보낸다.
민간의 사차는 원래 범인 처벌의 절반으로 감하여 처벌한다.
각무의 담당 관리가 官茶를 훔쳐 판매한 경우 500전 이하면 도3년이고 3관 이상이면 얼굴에 문신시키고 대궐로 이송한다.25)
밀매차에 대한 처벌은 차 생산지와 일반지역으로 구분되었다. 먼저 생산지의 경우 생산자인 園戶가 차를 몰래 남기거나 판매한 경우 그 수량을 환산한 금액이 1,000관이 넘으면 얼굴에 문신을 시키고 대궐 로 이송하였다. 얼굴에 문신시키고 대궐로 이송한다는 것은 軍籍에 두 고 고역에 복역시킨다는 것으로 중형이었다. 그 부인의 경우도 철공에 게 시집보냈으므로 결국 가정이 해체되는 것이었다.
일반지역의 경우 밀매차에 대한 처벌은 원래 범인 처벌의 절반으로 경감하였다. 여기에서 원래 범인은 생산지에서의 처벌 대상자를 의미 하는 것이다. 이는 밀매의 단속을 소비지가 아닌 생산지를 통해 해결 하려는 정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977년의 처벌조항에서 1,000貫에 해당되는 수량이 적지 않 은 양이라는 사실에 주목된다. 964년에 민간의 밀매처벌에 대한 규정 이 100전~8관까지 규정되어 있었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단속 수량의 규모가 거대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처벌에 있어서 사 형이라는 극단적인 처벌이 배제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지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밀매의 규모가 성장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었 다. 밀매의 규모가 성장하였다는 것은 처벌이 근본적인 해결일 수 없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관련 관리에 대한 처벌을 살펴보면, 官茶를 훔쳐 판매한 경우 500 전 이하는 3년 도형, 3관이상이면 얼굴에 문신을 시키고 대궐로 이송
25) 續資治通鑑長編 巻18, 太宗 太平興國二年(977), “凡出茶州縣民輙留及賣鬻 計 直千貫以上 黥面送闕下 婦人配為鐡工 民間私茶 減本犯人罪之半 㩁務主吏 盗官茶 販鬻錢五百以下 徒三年 三貫以上 黥面送闕下.”
시켰다. 974년 1관 500전이면 사형에 처해졌던 것과 비교하면 완화된 처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형이라는 형량이 사라졌다는 것으로 관리들의 처벌이 완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여전히 상대적으로 엄격한 처벌이 가해졌 다. 차의 전매시행과 관련하여 관리의 官戶의 籍을 민호로 바꾼 사례 도 있었다. 981년 당시 知天長軍이었던 潘昭緯가 관차의 가격을 높게 팔았다는 것으로 상인들에게 피소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반소 위의 관적을 박탈해 民戶로 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26)
한편 977년(太平興國2年) 차의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에는 이전 조 치에서 없었던 새로운 조항들이 신설되었다. 차나무의 훼손에 대한 것 과 고발에 대한 것이 신설된 조항이었다.
송조의 경우 차나무를 훼손한 경우에 대한 처벌이 이때 처음 이루 어졌는데 훼손된 차나무의 산출량을 계산하여 처벌하였다.27) 다원의 벌목에 대한 처벌은 이미 당조 852년에 규정되어 있었다. 차에 세금 을 걷는 국가의 입장에서 그 원천이 되는 차나무에 대한 보호는 기본 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계속적으로 차나무를 훼손하는 행 위가 있었다는 것은 전매시행에 따른 생산자 원호의 부담이 컸다는 사 실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宋朝는 보다 치밀한 전매정책을 시행해 나 아가고 있었으므로 국가의 통제와 징세를 피하기 위해 생산자들이 차 나무를 베어 버리는 일들이 발생했고 이를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처벌 조항이 신설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 다른 신설조항은 고발의 허용이었다. 977년 처벌조항에는 아래 와 같이 관부에 팔아야하는 차를 숨기고 보고하지 않는 경우에 이웃의 고발을 허용하고 포상하는 내용이 첨가되었다. 이는 강남의 南唐을 평 정해(975) 새롭게 통치범위로 들어온 강남지역의 차를 통제하기 위한
26) 續資治通鑑長編 권22 太宗, 太平興國六年(981), “太子中允潘昭緯 知天長軍 擅增價鬻官茶 為商人所訴 乙丑昭緯坐除籍為民.”
27) 續資治通鑑長編 卷18, 太宗太平興國二年(977), 茶園户輙毁敗其叢株者 計所 出茶論如法.
강력한 시책이었다.
백성들 중에 차를 私家에 숨긴 경우는 차등적으로 그 법을 정해서 甲 令에 수록한다. (차를) 숨기고 보고하지 않는 경우에 이웃이 고발하는 것 을 허용하고 그 상금은 금백으로 모두 차등있게 지급한다. 이를 요해처에 縣法으로 고시한다.28)
江南諸州의 백성들이 개인집에 감추고 있는 차에 대한 처벌 조항을 차등적으로 정하였고 은닉하고 보고하지 않는 경우를 이웃에게 고발하 게 하여 금과 비단으로 포상해주는 것이었다. 강남지역에 대해서는 이 에 앞서 관이 전량을 수매하지 않고 20%의 수량에 대해 1/10의 세금 을 내게 하고 符를 지급하여 판매를 허용하였다. 오히려 이는 상인들 의 불법행위를 더욱 기승부리게 하여 江淮를 넘어 국법을 문란케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관부에서는 차의 수매가격을 높 게 책정하여 사들이는 방식으로 이 혼란 상황을 완화시켰다.29) 그리고 민간에서 상호감시하게 하는 방식으로 불법적 행위를 자제시키고자 하 였다. 따라서 고발에 대한 포상 내용을 요해처에 縣法으로 게시하여 민간에서 정확히 인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강남의 경우 생산지가 광범위하였으므로 이웃의 고발을 통 한 효과는 그리 높지 않았던듯하다. 그 후 고발의 범위에 대해 1012 년에는 심지어 동거인의 고발을 허용하자는 의견까지도 나왔다는 사실 에서 그러한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물론 동거인의 고발은 ‘이익 을 위해 풍속을 깨뜨리고 나라의 기틀을 그릇되게 하는 것’이라는 이 유로 불허되었다.30) 이러한 의견은 관리의 과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28) 續資治通鑑長編 卷18, 太宗太平興國二年(977), “有司言 江南諸州搉茶凖勅 於縁江置㩁貨諸務 百姓有藏茶於私家者 差定其法 著於甲令 匿而不聞者 許隣里 告之 賞以金帛 咸有差品 仍於要害處 縣法以示之 詔從其請.”
29) 續資治通鑑長編 卷18, 太宗太平興國二年(977), “初江南諸州官市茶十分之八 餘二分復税其什一 然後給符聽其貨鬻 商人旁緣為姦 踰江渉淮頗紊國法 轉運使樊 若氷請禁之 仍增所市之直 以便民.”
30) 宋史 권8, 眞宗3, 大中祥符5년(1012), “以向敏中為平章事 有司請 違法販茶 者 許同居首吿 帝謂以利敗俗非國體 不許”; 續資治通鑑長編 卷77, 真宗 大中
수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넓은 생산지를 대상으로 한 밀매의 방지가 쉽 지 않았음을 반영한 것이었다.
엄격한 통제를 시행하였지만 불법적인 활동은 좀처럼 근절되지 않 았다. 밀매와 사차의 문제는 한발 나가 僞造茶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불법의 영역이 넓어졌다는 사실은 이익의 구조가 크다는 것이었다. 僞 造茶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 역시 이익의 문제에 있었다.31) 송조의 관 부는 각차법을 시행하면서 생산자인 원호에게 차를 싸게 매입해서 상 인에게 비싸게 매각하는 방법을 썼다. 일례로 호남의 山色茶의 경우 원호에게 220문에 사들여 상인에게는 960문에 판매하였다.32) 그 차 액이 큰 만큼 민간의 이익은 관부로 접수되었으므로 사회적으로 많은 불만과 함께 불법행위가 야기되었다. 그 하나가 위조차의 제작과 판매 라고 할 수 있다.
차와 다른 것으로 탱자, 구기자, 비파, 홰나무, 버드나무 등의 싹이 있 다. 이른 봄에 따서 차와 함께 섞어서 만들기 때문에 지금 남인들이 官茶 를 납부하는데 왕왕 여러 잎들을 혼합한다.33)
본래 중국의 남부에서는 전통적으로 차를 마시는 생활습관 속에서
‘代用茶’의 형태가 존재하고 있었다. 차 이외에도 여러 나무의 잎들을 활용해 다양한 음료를 만들어 마시고 있었는데 탱자나무, 구기자, 비 파, 홰나무와 버드나무 잎들이 그러한 것들이었다. 이들 잎을 이른 봄 에 따서 차와 함께 섞어서 만들었다. 차 전매가 시작되어 차를 관부에 납부하게 되자 수량을 늘리려는 의도에서 이들 여러 잎들을 섞는 행위 들이 왕왕 있었다.
祥符五年(1012), “三司請 民有販茶違法者 許家人告論 上曰此犯敎義非朝廷所當 言也 不許.”
31) 陶德臣, 「論宋代僞劣茶問題與官府的法律應對」 (廣東茶業 2013-1), p.7.
32) 徐銀美, 「南宋時代 茶法의 운용과 私茶」 (東洋史學硏究 127, 2014), pp.281~282.
33) 羅願, 爾雅翼 卷12, “茶之别者 有枳殻枸杞枇杷皂莢槐栁芽 上春摘其芽 和茶 作之 故今南人輸官茶 往往雜以衆葉.”
위조차는 차와 함께 다른 나무의 잎을 섞는 것에서부터 찻잎이기는 하지만 품질과 산지를 속이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다. 위조 차의 문제는 송조의 통일 이전의 경우에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대량의 차가 南唐 등 강남지역에서 유입되고 통치지역 내 생산은 부족 한 상황이었으므로 위조차의 존재는 차 상품 유통의 건전성을 크게 훼 손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반 밀매차와는 성격 부터가 다른 위조차에 대해 관부는 매우 엄격하게 대처하였다.
開寳(968~976)中 민간에서 가짜차(假茶)를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1근이면 장100이고 20근 이상이면 기시한다.34)
위와 같이 위조차의 판매에 대한 처벌은 매우 엄격하였다. 開寶年間 (968~976)에 만들어진 위조차의 처벌조항은 1근이면 장100이고 20 근 이상이면 기시형이었다. 일반 밀매차의 경우 거래의 환산금액을 기 준으로 하였던 것과는 달리 물품의 수량에 따라 처벌하였다는 것도 상 대적으로 엄격한 기준이었다. 위조차에 대한 엄형은 태조를 이어 태종 太平天國(976~983)年間까지도 이어졌다. 태종은 979년 조서를 통해 이 조항을 남발하지 말도록 하였을 뿐 완화시키지는 않았다.35)
雍熙2年(985) 민간에서 뽕나무로 위조차를 제작한 경우 眞茶를 범한 것에 견주어 그 값어치를 헤아려 10분 가운데 2분의 죄를 가한다.36)
淳化4年(993) 8월 23일 조서를 내려 京城 및 諸道州府의 백성이 차를 판매할 때 대개 토약을 섞어서 이익을 엿보는 것을 일절 금지한다. 위반 한 경우 私販鹽麴法에 따라 처벌한다.37)
34) 續資治通鑑長編 巻20, 太宗 太平興國四年(979), “開寳(968~976)中 禁民 賣假茶 一斤杖一百 二十斤以上棄市.”
35) 續資治通鑑長編 巻20, 太宗 太平興國四年(979), “己未詔自今凖律以行濫論 罪.”
36) 宋史 卷183, 食貨志 茶上, 雍熙二年(985), “民造温桑偽茶 比犯真茶 計直十 分 論二分之罪.”
37) 宋會要輯稿 食貨30-2, 淳化4年(993) 8月23日, “詔京城及諸道州府民賣茶 多雜以土藥 規其利 一切禁之 犯者以私販鹽麴法從事.”
일반적으로 私茶에 대한 처벌이 10등급으로 구분하여 차등적으로 처벌하였던 것에 비해 위조차는 상위 2분에 해당하는 죄로 논하였다.
이러한 엄중한 처벌은 993년 조서를 통해 기준이 조금 완화되었다.
이때 약재를 차와 섞어 수량을 늘려 차의 이익을 높이려하는 행위를 금지시키면서 위반할 경우 私販鹽麴法에 따라 처벌한다고 하였다. 이 처벌조항은 이전보다는 완화된 것이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위조차에 대한 처벌이 완화되는 것은 仁宗代에 이르러서였다.
(1035년) 조서를 내려, 산림천택에 사는 백성이 초목의 잎을 따서 위 조차를 만든 경우 그 가치를 계산하여 사기율에 따라 盜論에 준하여 처 벌한다. (신고인의 포상은) 眞茶에 비교하여 절반으로 포상한다.38)
인종조에 이르면 국초 이래 엄중하게 처벌하였던 위조차에 대한 처 벌이 가벼워졌다. 1035년 조서에 따르면 詐欺律에 따른 盜論으로 처 리되었다. 위조차를 고발한 자에게 주는 포상도 眞茶의 포상과 비교하 여 절반이었다. 처벌이 낮아진 만큼 보상금액도 적어지는 것이지만 진 차의 절반이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있다. 즉 이는 위조차의 제작 과 판매가 차 전매정책에 미치는 영향이 국초와 같이 크지 않았음이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위조차의 제작은 이후에도 근절되지 않았지 만 차의 생산량 자체가 풍부하였으므로 위조차가 크게 경계의 대상이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동남지역의 경우 통상법이 시행되면서 사차와 밀매의 문제가 많이 완화되었다.39) 통상법의 시행으로 원호와 상인이 세금을 납부하고 직 접 거래를 하는 방식이 되었으므로 상품의 가격이 관부에 의해 규정되 지 않게 된 상황이 밀매의 발생을 감소시켰다. 통상법에 대해 반대 입 장에 있었던 歐陽脩도 통상법 시행의 효과로 사차와 밀매의 감소를 꼽 았다. 그는 “새로운 법(통상법)이 시행되면서 백성들이 私販의 죄를 짓
38) 續資治通鑑長編 卷116, 仁宗 景祐二年(1035), “又詔山澤之民 擷取草木葉 為偽茶者 計其直從詐欺律凖盗論 仍比真茶給賞之半.”
39) 陶德臣, 「宋代對茶葉走私的法律制裁」 (中國茶葉 2010-10), p.30.
지 않게 되어 매년 죄인이 감소한 정도가 많다”40)라고 하였다.
이러한 정황에 따라 이 시기에 동남지역의 차와 관련된 처벌관련 사료의 빈도수는 현저히 떨어진 반면 사천과 복건지역, 그리고 水磨茶 에 관련된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사천과 복건지역의 경우 각차법이 적용되고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복건의 납차는 황실차의 공급지라는 특별한 의미와 함께 제작방식 의 특징도 있었으므로 납차에 대한 위법은 다른 차에 비교해 엄중해 처벌이 배가되었다.41) 사천차의 판매지역을 침투해 판매하는 강남차에 대해서도 私販蠟茶法에 따라 처벌하게 하였다.42) 수량이 풍부했던 사 천차의 경우 차의 생산 시기를 제한하였다. 따라서 원호가 황노추차를 판매하면 수량의 다과에 상관없이 관에서 몰수하여 소각시켰다.43) 또 한 사천의 명산차는 주변 민족들이 선호하던 차였으므로 이를 위조하 여 판매하는 것에 대해 엄중하게 처리하였다. 이때 위조차에 대해서는 신고 뿐만 아니라 체포할 수 있는 권한까지도 허용하였다.44)
Ⅳ. 북송말 남송대 茶法의 처벌규정
40) 歐陽修, 文忠集 巻112, 「論茶法奏狀」 (嘉祐五年 1053), “臣竊聞議者 謂茶 之新法既行 而民無私販之罪 嵗省刑人甚多.”
41) 續資治通鑑長編 卷188, 仁宗 嘉祐三年(1058), “初官既榷茶 民私蓄販皆有 禁 臘茶之禁尤嚴于他茶 犯者其罰倍.”
42) 續資治通鑑長編 권289, 神宗, 元豐元年(1078), “己丑詔 應南茶輒入熈河秦 鳯涇原路 如私販蠟茶法.‘
43) 續資治通鑑長編 권292, 神宗, 元豐元年(1078), “提舉成都府等路茶場司 請 出茶州軍 每嵗曉示園戸 如敢採造黄老秋茶 中賣 不以多寡 並沒官 仍乞每嵗别委 官驗視已 有納到如此色様 並令燒毁 從之.”
44) 續資治通鑑長編 권476, 哲宗, 元祐七年(1092), “管勾成都府等路茶事閻令言 熙州獲人户趙世亨 造假名山茶 二千餘斤 從不應為重斷罪不足懲艾 欲乞應於禁茶 地分 造偽濫茶 許人告捕除 依治平陸行路通啇茶法 斷罪理賞外 其犯人送禁茶地 分鄰州編管 從之.”
북송말 다시 동남차에는 長短引法이 시행되었고 合同場法으로 이어 졌다. 이때 41개조에 해당하는 세세한 조항이 만들어졌다.45) 소위
「政
和條例」로 불리는 항목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茶引法이 시행되었던 시 기부터 다시 처벌조항이 세밀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宋會要輯稿
食貨 30-40~44에 기록된 1112년(政和2年)의 차에 관한 조치항목 가 운데 위반 시 처벌 조항들을 정리하면 다음의 ①~⑫와 같다.
① (長短引에 따라) 지정된 판매지가 아닌 곳에서 판매하면 私茶法에 따라 처벌하고 신고한 사람도 동일하게 상을 준다. (若於非指定處出賣者 依私茶法罪 告賞亦如之)
② 상인이 引을 신청하지 않고 판매한 경우 사차법에 1등을 가중하고 신고자도 동일하게 한다. 만약 인의 수량을 증가해 싣거나 인을 두 번 사 용한 경우, 기한을 넘기고도 신고하지 않는 경우도 이에 준하여 동일하게 처벌한다. (客販茶不請引而輒販者 加私茶法一等 告賞亦如之 若引外增數搭 帶 或以一引兩次行用 若踰限不申繳者 罪賞準此)
③ 차인을 위조한 경우 川錢引法에 의거하고 賞錢은 300관이다. 유통 되지 않은 경우 1등감하고 그 상도 같이 한다. (印茶引輒私造者 依川錢引 法 賞錢三百貫 已成未行用 減一等 其賞如之)
④ 상인의 차 판매지정지역인데 다른 사람이 이를 어기고 차를 판매한 경우 죄상은 사차로 논한다. 지역을 어겼으나 판매하지 않은 경우 1등을 감한다. (應客販茶地分 而諸色引輒以茶侵越本地分者 罪賞以私茶論 已至而 未賣者減一等)
⑤ 상인이 引의 기한을 1일 어기면 태10에 처하고, 3일마다 1등씩 가 중하여 도1년에 이르면 멈춘다. (客人引違限一日 笞一十 三日加一等 至徒 一年止)
⑥ 다원호가 토지에 따라 생산된 것에 등급이 있는데…… 이를 어기면 장100이다. (茶園戶隨地土所出 依久來分爲等第……違者各杖一百)
⑦ 주현의 봄에 원호가 차를 출하할 때…… 가격 평가가 부실한데 헛 된 가격을 대면 장100이다. 수량을 숨긴자는 盜論으로 처벌한다. 숨긴 수량이 적으면 도1년이다. 吏人 公人 牙人은 배1000里이다. (州縣春月 園戶茶出時…… 若平價不實 虛擡大估者 杖一百 受贓者以盜論 贓輕徒一年 吏人公人芽人配千里)
⑧ 상인이 인을 청할 때 본인이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거나 혹은 이를 부탁한 자는 각각 장100에 처한다. (客人請引 須正 身…… 借人或倩之者 各杖一百)
45) 朱重聖, 北宋茶之生産與經營 (臺灣學生書局, 1985), p.326.
⑨ 상인이 인을 받아 차를 판매할 지역에서 만약 상세시역무 堰閘, 교 량, 鎭柵門 등지에서 지체하여 1일이면 장 60이다. 2일이면 2등 높인다.
3일이면 도1년이다. 또 3일이면 1등을 높이고 도2년까지 처벌한다. 리인 과 공인은 모두 勒停에 처하고 영원히 기용하지 않는다. 재물을 받은 경 우 도론으로 처벌한다. 숨긴 것이 가벼운 경우 리인 공인은 배1000리이 다. (客人賚引販茶 所至州縣 若商稅市易務堰閘橋鎭柵門 輒邀阻留難一日 杖六十 二日加二等 三日徒一年 又三日加一等 至徒二年止 吏人公人並勒停 永不敍. 卽受財者 以自盜論 贓輕吏人公人 配千里)
⑩ 籠篰를 ……함부로 개봉하거나 바꾸는 경우는 장100이다. 고발을 허락하고 상전은 30관이다. (籠篰…… 如擅折封及擦改者 杖一百 許人告 賞錢三十貫)
⑪ 상인이 판매할 차를 사롱부에 담으면 장80이다. 크기가 규정에 맞 지 않은 경우 2등을 높인다. (客販茶輒用私籠篰 杖八十 若增損大小高下者 加二等)
⑫ 롱부를 제작해 판매할 때 개당 공비를 제외하고 50문이 넘지 않도 록 한다.…… 만약 제조를 규정대로 하지 않으면 장80이다. 만약 양의 다 과나 등급의 고하를 더하거나 빼면 장100이다. (製造籠篰出賣 每隻除工 費外 不得過五十文…… 若製造不如法 杖八十 增損大小高下者 杖一百)
①~⑤까지의 내용은 상인들의 활동에서 벌어지는 위법에 대한 처벌 내용이다. ⑥과 ⑦은 생산자인 원호에 대한 처벌인데, 주로 차의 등급 과 가격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어 引의 신청규정과 처벌, 기일 의 규정과 처벌, 籠篰의 규격에 대한 규정 등 세세한 규정과 처벌 내 용으로 구성되었다. 이때의 처벌은 먼저 鹽引法, 私茶法, 川錢引法에 준하여 시행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전매상품에 대한 처벌이 일정한 기 준으로 처리되었다고 하겠다. 동남지역에서 차와 소금은 동일한 기준 으로 처리되었고 사천지역 내지 사천차 전매의 시행 범위에서는 川錢 引法이 적용되었다.
나아가 정화연간의 규제는 不告之罪까지 적용하였다. 園戶가 사사로 이 차를 판매하거나 茶引에 규정되어 있는 수량을 넘기는 등의 불법이 발생하였는데 조직된 保 내부에서 이러한 불법행위를 고발하지 않으면 煎鹽亭戶法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 短引과 食茶의 판매 범위를 벗어나 면 2천리 流刑으로 처벌하였고 이를 신고하였을 경우를 위해 100만전
을 사용하였다.46)
회수이북의 소비지를 상실한 남송시대에도 차 판매의 고가정책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북송말 이래의 長短引法이 시행되었다. 특히 국경 을 넘는 물량에 대한 고액의 징세와 단속이 이어졌다. 지역 내에서도 路 단위를 기준으로 장인과 단인을 통한 규제와 단속을 강력하게 시행 하였다. 차 판매가격의 지역적 차이가 높다는 환경은 무엇보다도 불법 행위가 지속되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이에 강력한 단속은 불법행위 의 근절에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송의 차법이 내내 가지고 있었던 문제였다.
단속의 범위와 방식은 더욱 세밀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원호를 保로 조직해 상호 감시하고 고발하게 하는 방식은 지역을 확대해 적용되었 다. 남송 초 사천지역에도 상호 감시체제를 강화시켰다. 茶戶와 茶鋪 의 성명을 기재시키고 서로 감시하게 하였다.47) 茶戶는 10~15호를 1 保로 조직하여 몰래 감춰 판매하는 것을 상호 감시하게 하였다.48) 사 천의 경우는 茶馬貿易을 통해 주변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 에 아래와 같이 보다 강력한 규제가 적용되었다.
소흥3년(1133) 조서를 내리기를, 四川諸州에서 私茶 私鹽의 범죄를 지 은 사람들은 모두 사면을 적용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천하의 茶鹽에 모두 엄중한 법을 적용하였다.49)
소흥5년(1135) 조서를 내리기를, 川茶를 밀매하면서 이미 인접한 번부 의 주현을 넘거나 順蕃 경계 내지 위반거리가 10리 이내에서 잡혔을 경 우 모두 軍法으로 처리한다. 사람들이 체포하는 것을 허락하고 판매하려 던 화물은 모두 상금으로 지급한다.50)
46) 宋史 卷184, 食貨志第137 食貨下六 茶下, “定園户私賣及有引而所賣踰數 保内有犯不告 並如煎鹽亭户法 短引及食茶關子輒出本路 坐以二千里流 賞錢百 萬.”
47) 熊克, 中興小紀 巻4, 建炎二年, “茶户茶舖皆籍其名姓 使之互察.”
48) 宋史 卷374 列傳第133 「趙開」, 茶户十或十五共為一保 并籍定茶舖姓名 互 察影帶販鬻者.
49) 李心傳, 建炎以来繫年要録 巻71, 紹興三年(1133), “詔 四川諸州犯私茶鹽人 並不用赦䕃原免 …… 自是 天下茶鹽皆用重法矣.”
사천차의 밀매는 국내의 경제정책을 위반하는 것을 넘어 대외무역 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서 더욱 엄중하게 처리되었다. 順蕃의 경 계 주변에서 벌어지는 위법행위에 대해서는 군법으로 처벌하는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다. 심지어 민간에서 체포하는 것을 허가하여 확보한 위 법물품을 포상으로 지급하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남송은 차에 대한 규제와 처벌을 엄중한 기조로 유지하였다.
남송시대 차에 대한 처벌의 대상 범위는 더욱 넓어져 차의 종자(茶 子)와 묘목(茶苗)에까지 확대되었다. 이전부터 차나무의 벌목에 대한 처벌이 있었는데 1142년(소흥12년)에는 차의 종자를 변경으로 반출시 키는 것을 금지시켰고 1167년(乾道3년)부터는 묘목도 금지되었다. 원 호가 종자를 외국인(諸色人)에게 판매해 변경 밖으로 반출되었을 경우 판매자에게는 3천리 流刑을, 판매할 물건을 숨기고 있는 자에게는 3년 의 도형과 5백리 流刑에 처하였다. 외국인의 고발을 허가하여 500관 으로 포상하였고 연루된 다원호의 다원은 관에서 몰수하였다. 감시를 소홀히 한 당직관에게는 徒2年의 처벌을 내렸다.51) 1167년에는 차의 종자보다 묘목의 반출이 더욱 심각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인식하에 묘목의 반출도 종자의 반출에 대한 처벌에 준하여 처벌하였다.
규제와 처벌이 엄격할수록 그 반작용의 문제도 심각하였다. 그 대표 적인 문제가 바로 茶賊, 또는 茶寇로 불리는 불법적인 집단의 활동이 었다. 남송시대 茶寇의 발생은 심각한 사회문제의 하나였다. 私茶의 횡행은 차 판매의 이익이 크다는 환경 속에 발생한 것이므로 이에 대 한 합리적인 환경조성 없이 강력한 규제와 처벌로는 해결할 수 없었 다. 이러한 상황에서 大商들의 주활동지역에서는 자본이 적은 다수의 차상들의 실업사태가 이어졌다.
50) 宋會要輯稿 食貨31, 紹興5年, “詔 私販川茶 已過抵接順蕃處州縣 於順蕃界 首 及相去僞界十里內 捉獲犯引 並從軍法…… 許人捕 所販物貨 並給充賞.”
51) 徐銀美, 「南宋時代 茶法의 運用과 私茶」 (東洋史學硏究 127, 2014), pp.285-286.
이러한 상황이 가장 심하였던 지역으로 湖北과 江西地域을 들 수 있다. 이 두 지역은 淮水以北지역의 상실에 따른 소비의 부진이라는 타격을 강하게 받았고 전쟁에 따른 지역의 파괴정도도 심하여 지역내 소비도 위축되어 있었다. 따라서 호북과 강서지역의 경우 원호와 차상 에 의한 소요는 상대적으로 더 빈번하였다. 게다가 이 지역이 주로 대 상인들의 활동지역이었기 때문에52) 다수의 자본이 약한 상인들의 활 동은 더욱 위축을 받았다. 차상의 실업 사태는 茶寇 발생의 가장 기본 적인 원인이었다. 이에 빈번한 다구의 출몰에 대한 진압대책의 하나로
‘스스로 개전할 기회를 허락하는(許其自新)’ 방식이 적용되기도 하였 다.
(洪遵이 말하기를) “서창과 흥국군 사이 일대에 茶商이 실업하여서 모 여 도적이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방을 붙이고 깨우치게 하여 스스로 개전 할 기회를 허락하십시오. 군인이 되길 원하는 자는 문신을 시키고 농민이 되길 원하는 자는 방면해 돌아가게 하십시오”라고 하자 상이 모두 그렇 게 하였다.53)
1159년(紹興29) 당시 中書舎人겸 權樞宻都承㫖였던 홍준은 서창과 흥국군 일대인 강남서로 일대의 소요에 대해서 원인을 차상의 실업사 태로 보았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처리로 방면하거나 군인이 되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러한 처리는 이미 仁宗때부터 시행했던 것이었 다. 당시 茶賊, 鹽賊 등 소규모 소요가 도처에서 발생하자 이들을 군 대에 편입시키는 방법으로 처리하였다.54) 심지어 남송대는 ‘茶商軍’이 라고 하여 차상들을 병적에 편입시켜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까지 하였다.55)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남송대에는 “벼슬길에 나가는 빠른
52) 서은미, 「남송대 차의 생산과 동남지역의 차법」 (동양사학연구 117, 2011), p.104; 宋會要 食貨 31-29 (紹熙元年 5月 16日), “湖南北江西路 皆 係巨商興販.”
53) 宋史 卷372, 列傳132, 洪皓 子遵(1120-1174), “紹興二十九年(1159) 言瑞 昌興國之間 茶商失業 聚為盗賊 望揭牓開諭 許其自新 願充軍者填刺 願為農者放 還 上皆可.”
54) 佐伯富, 「宋代の茶商軍に就いて」 (東洋史硏究 4-2), p.53.
길은 도적이 되는 것만큼 빠른 게 없다” “관직을 얻고자 하면 살인하 거나 방화하여 초무안정책을 받으면 된다”라는 속담이 있을 지경이었 다.56)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에 대한 규제와 처벌은 강경하게 유지되었다.
1178년(순희5년)에도 아래와 같이 차의 밀매활동에 대해 사형으로 처 벌하는 조서가 내려졌다.
조서를 내려, 경서로와 호북로의 상인들이 소와 말에 차를 싣고 국경 을 넘어갈 경우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다.57)
사형으로 처벌하는 강경한 처벌은 國初에 있었던 강경한 입장이었 는데 이때 다시 시행되었다. 이는 국내의 차법에 대한 위반뿐만 아니 라 市馬와 함께 金과의 외교문제까지 포함된 복잡한 양상을 가지고 있 었다. 南宋과 金은 互市를 설치하여 평화 시에 교역을 하고 있었지만 상호 수출 금지품과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는 것에 대한 엄격한 관리를 하고 있었다.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거나 말을 불법적으로 교역하는 것 은 사형에 해당하였다.58) 송의 입장에서도 牛馬를 가지고 국경을 넘는 것에 대해 국가의 주요 가축의 손실을 가져올 수 있고 밀매차의 수량 도 많은 것을 의미하므로 강경하게 대처하였다. 이러한 양국의 강경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불법행위들은 그치지 않았다. “호시에 금지조치가 있었지만 밀매교역자들은 이전과 같았다”59)라고 한
金史의 기록을
55) 宋史 卷414, 列傳第173, 鄭清之(1176年-1251年), “湖北茶商羣聚暴横 清 之白總領何炳曰 此輩精悍 宜籍為兵 緩急可用 炳亟下召募之令 趨者雲集 號曰茶 商軍 後多賴其用.”
56) 佐伯富, 「宋代の茶商軍に就いて」 (東洋史硏究 4-2), p.54. ; 莊綽, 雞肋編
卷中, “建炎後 俚語有見當時之事者 如仕途捷徑無過賊……又云 欲得官 殺人 放火 受招安.”
57) 宋史 巻35, 本紀第35, 孝宗3, 淳熈五年(1178), “癸未 詔京西湖北商人 以牛 馬負茶出境者 罪死.”
58) 金史 卷5, 本紀第5, 海陵, 正隆4年(1159), “庚申更定私相越境法竝論私”; 金史 卷12, 本紀第12, 章宗四, 泰和6年(1206), “詔禁賣馬入外境 但至界欲賣而 為所捕 即論死.”
통해서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60) 이와 같이 규제와 처벌이 엄격해짐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인 행위는 줄어들지 않았다.
Ⅴ. 결론
차에 대한 징세와 전매가 시작됨에 따라 차와 관련된 위법행위에 대한 처벌도 시작되었다. 차와 관련된 처벌규정은 술과 소금 등 전매 품목의 규정과 일정한 연계를 가지면서도 독립적인 규정이 있었다. 전 매상품에 대한 처벌규정은 송조가 건국되고 통일을 이루는 太宗 太平 興國年間(976~983)에 기본적인 틀을 갖추었다.
송대 차법의 처벌규정은 唐 武宗의 밀매단속규정에서 출발하였다.
국초의 경우 차 전매의 시행에 따른 물량의 확보가 중요하였으므로 엄 격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최고형으로 사형까지 포함되는 것이었다. 특 히 관련 관리에 대한 처벌은 더욱 엄중하였다. 이는 국가의 정책 시행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태평흥국연간에 이르면 전반적인 안정기조에 따라 사형의 조항이 배제되면서 처벌조항이 완화된 듯이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치밀하고 세분된 단속조항이 완비되었다. 특히 생산자인 원호에 대한 처벌을 무 겁게 하여 차의 유통을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기조를 보였다. 그런데 광범위한 생산지는 감시에 한계가 있었고 이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이 웃의 고발까지 허용하였다. 이 시기 단속의 물량 규모가 국초에 비해 크게 증대되었다는 사실은 불법적인 활동이 엄격한 통제로 단속되기 어려움을 보여준다.
단속의 대상은 불법적인 활동에 의해 유통되는 차에서 차나무, 이어 서 차의 종자와 묘목에까지 확대되었다. 茶引法의 시행에 따라 引의
59) 金史 巻50, 志第31, 食貨5, “互市雖有禁 而私易者自如.”
60) 王曉燕, 「論宋與遼夏金的榷場貿易」 (西北民族大學學報 2004-4), p.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