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滿文月摺包를 이용한 硏究事例
2) 乾隆11年 莽牛哨 事件의 眞實
乾隆11년(1746) 청정에서 압록강에 위치한 섬인 莽牛哨21)에 초소를 설치하려는 움
직임이 있었으나 조선이 이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상주문을 올린 후 이 사건이 무위 로 돌아간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학자들의 선행연구가 존재 하는데, 초소 설치가 무위로 돌아간 원인에 대해서는 견해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 부 연구들은 乾隆帝가 조선의 표면상의 공손한 태도에 미혹된 결과라고 하고(張杰 1994, 48; 張杰, 張丹卉 2005, 252), 다른 연구는 조선에 대한 회유정책의 발로이고 조 선의 강역보호 노력의 결과라고 주장한다(李花子 2008, 208). 가장 최근에는 천하의 보 편군주의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 관료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까지도 乾隆帝가 조선측 의 요구를 수용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김선민 2011, 90, 95).
이제까지 건륭연간의 莽牛哨 초소의 설치를 둘러싼 논쟁을 다룬 글들은 거의 모두
『同文彙考』와 『淸實錄』에 인용된 盛京將軍 達爾党阿등이 올린 莽牛哨 사건과 관 련된 奏摺이나 乾隆帝의 상유를 근거로 서로 다른 시각에서 자신들의 논지를 전개해 왔다. 하지만 滿文月摺包에는 『同文彙考』나 『淸實錄』에 인용된 奏摺의 原件과 이 제까지 학자들이 확인하지 못했던 이 사건과 관련된 滿文史料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들 자료를 이용해 이 사건을 재검토하기로 한다.
雍正9년(1731) 盛京將軍 那蘇圖가 월경하는 무리를 잡기 위해 莽牛哨에 초소를 설 치할 것을 건의했다가 조선측의 반대로 그만 둔 적이 있었다. 그런데 盛京將軍 達爾党 阿가 乾隆10년 9월 15일 奏摺(표1, 12번)을 올려 那蘇圖가 전에 건의할 때 이곳이 蔘 場으로 들어가는 要路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면서 다시 이곳에 병력을 충원하고 초소를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이 奏摺을 받아본 乾隆帝는 해당하는 부에서 이 문제를 의논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乾隆帝는 兵部가 의논해 상주한 바대로 11월 8일 達爾党阿 에게 “다시 생각을 다해서 조사하고 정하기 바란다. 관원과 군대를 더하여 주둔시킨 후 진실로 해당국과의 경계에서 헛되이 일이 발생하고 서로 괴롭힘에 이르지 않는다 면” 達爾党阿가 상주한 대로 다스리겠다고 했다. (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12/1605) 이어서 乾隆11년(1746) 5월 1일 達爾党阿는 奏摺을 올려 아뢰길 副都統 西爾們을 파견 해서 莽牛哨 지역을 답사해보니 조청간의 경계가 분명한데 초소를 설치할 곳은 중국 에 속해 있다고 했다(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12/1608). 이렇게 乾隆帝를 안심시키고 배 4척, 병사 1백 명과 관원을 파견하고 이들을 수용할 草房을 지을 것을 요청했다(滿 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10/1610-1614; 『同文彙考』권48, 23a-24a).
乾隆帝는 이를 병부에 교부해 의논한 후 상주하도록 했는데, 병부에서는 앞서 진실 로 조선의 교계와 가까워 혼잡하고 소란스러운데 이르지 않는다면 마땅히 達爾党阿가 상주한 대로 다스려야한다고 했음을 언급하고 지금 達爾党阿가 이미 상세히 조사한 결과 소란스러운 일이 발생할 염려가 없다고 하니 達爾党阿가 요청한대로 병사와 관 원을 파견하고 배와 草房을 첨설하는 것을 허락할 것을 건의하여 乾隆帝는 이를 7월 5일 제가했다(『同文彙考』권48, 24a-26a).
21) 莽牛哨는 현재 遼寧省 寬甸滿族自治縣 古樓鄕에 속한 압록강 상에 떠있는 莽牛哨俠心子島라고 불리는 섬이다. 길이 600여 미터, 폭 150여 미터, 넓이 7500평방미터의 길쭉한 섬이다. 중국측에 가까우며 건기에는 중국본토와 땅으로 연결된다(張杰, 張丹卉 2005, 246).
그런데 이 일이 이미 결정되고 나서 열흘 후인 7월 15일 조선왕의 상주문이 도착했 는데, 그 내용은 만일 莽牛哨에 토지를 개간하고 둔영을 설치하면 변경에서 奸民이 서 로 상통하여 법금을 어기고 폐단이 백출할 것이라고 하고 부디 이를 중지하여 “소국 이 죄를 얻는 근심을 풀어주시길”간청했다(『同文彙考』권48, 26b-28a). 조선왕의 상주 에 대해 兵部에서는 達爾党阿의 상주를 근거로 병사를 배치하는 곳은 國界와 멀리 떨 어져있고 개간하는 곳은 중국 內地이며 혼란을 일으킬 염려가 없고 초소를 설치하는 것은 변경을 肅靜할 뿐만 아니라 外蕃에도 이익이 된다고 하며 조선왕의 주장을 논의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乾隆實錄 』권271, 7b-9a, 乾隆11/7/21(己卯)). 반면 乾隆帝 는 조선왕의 奏摺을 받자마자 변경에서 간민이 상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전에 허락 한 鳳凰城 밖에 경지를 개간하도록 한 조치는 중단시켰다. 하지만 초소 설치를 중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선 達爾党阿가 주장한대로 초소의 설치가 조선과 아무런 관계 가 없는지 다시 상세히 조사하기로 했다(『乾隆實錄』권271, 9a-9b, 乾隆11/7/21(己 卯)).
乾隆帝가 莽牛哨의 실제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른 인물은 班第였다. 그는 건륭초 년부터 줄곳 군기대신을 맡았으므로 乾隆帝의 측근 중 측근이라고 할 수 있었다.22) 그는 또한 조선왕의 간청을 묵살할 것을 건의한 兵部의 수장이기도 했다. 건륭제는 班 第를 보내면서 “만일 초소를 설치할 곳이 중국 경내이고 그 나라와 서로 조금도 간여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병사를 두고 초소를 설치하여 간사한 무리들을 막기로 한다. 이 는 변방을 숙정하기 위해서 마땅히 행해야할 바이니 조선국왕이 간청해도 또한 들어 줄 수 없다”(『乾隆實錄』권271, 9b-10a, 乾隆11/7/21(乙酉))라고 못박았다. 즉 朝鮮과 교계에서 사안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초소를 설치하기로 한 본래의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게 했으므로 조선왕의 공손한 태도나 하소연이 건륭제의 판단에 별 영향 을 끼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班第는 7월 25일 출발해서 8월 12일 鳳凰城 변경에 이르러 莽牛哨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고 8월 30일 奏摺(표1, 18번)을 올렸는데 여기서 班第는 이곳은 청측 경계 내부 이면서 배가 마땅히 통과해야만 하는 요충지이니 순시선을 이 곳에 배치하면 교활한 악인들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양측이 하나의 강을 두고 오래 지나면 월경 등 의 사안이 발생할 수 있지만 양측이 수하를 엄격히 감독하고 법을 엄하게 집행한다면 혼란을 야기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고 영구히 변경을 평안하게 하며 조선에도 이익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초소는 마땅히 설치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滿文月摺包, 마이크로 필름 10/1665-1667).
그런데 班第는 이 滿文奏摺과 동시에 또 하나의 滿文奏摺(표1, 19번)을 올리는데 이 奏摺은 『淸實錄』이나 『同文彙考』에 인용은커녕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 奏 摺에서 班第는 “奴才 等이 조사하고 관찰한 정황을 보고한 바를 반드시 조선에 行文 22) 班第는 雍正11년 軍機大臣으로 임명된 이래 乾隆3년까지 軍機大臣으로 있었다. 3년 湖廣總督으
로 나갔다가 5년 回京하자 6년에 다시 軍機大臣에 임명되었다.
하므로 本 奏摺의 내용을 앞서의 奏摺(즉, 표1, 18번- 필자)에 싣지 않고 앞서의 奏摺 에서는 단지 카룬을 설치해야 마땅한 바를 가지고 의논했다”라고 했다(滿文月摺包, 마 이크로필름 10/1678). 즉 이 주접은 班第의 腹心을 담고 있었다. 이 조선에 알려지지 말아야할, 이제까지 베일에 가려있던 滿文奏摺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 쓰여 있었을 까? 그 내용은 같은 날 올린 초소설치를 주장하는 앞서의 奏摺의 주장과는 실로 판이 했다.
奴才가 바라보니 莽牛哨는 진실로 하나의 隘口와 같은 곳이지만 몰래 통과하는 배의 사 람들은 모두 내지의 모든 강, 바다의 입구로부터 갑니다. 그들이 휴식을 취하는 곳과 가는 길을 감시하는 곳에 있는 관원과 군대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는 길에서 곧바로 가로 막고 체포해야 마땅하지만 근원에서부터 엄격히 조사한 후 정지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합 니다. 자세히 조사하고 살펴보면 이들은 혹은 새우를 잡는 배와 뒤섞여있거나 혹은 바다의 입구 외진 곳에서 쉬고 있다가 배나 조각배를 만들고 쌀과 곡식을 모으고 본지의 사람들 과 함께 왕래하고 가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이러한 곳은 전연 관원, 군대가 조사하고 다 다를 수 없는 곳이 아닙니다. 이들이 가는 것은 또한 정해진 때가 있습니다. 진실로 모든 관할하는 곳으로부터 관심을 기울이고 각각 조사하고 금지한다면 몰래 오는 것이 그들 스 스로 드물게 됩니다. 설령 있다고 하여도 中江의 옛날 카룬에 이미 준비된 작은 배가 있습 니다. 유사시에는 鳳凰城의 관원과 군대를 돕도록 보내고 위세를 부리고 잡게 한다면 또한 쉽습니다. 만일 근원으로부터 진지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고 단지 莽牛哨의 하나의 초소에 만 의지한다면 겨우 일백의 군사가 다시 힘을 나누고 번갈아가며 순찰하러 가게 하는 것 입니다. 시일이 오래된 후에 태만히 하여 지나가게 하거나 또는 도적 떼가 무리를 지어서 제멋대로 반항하여 행동하고 거리낌 없이 지나가 버리는 일이 있었을 때 도리어 조선인들 이 바라보고 듣게 됩니다. 만일 이 카룬을 더하는 것이 다만 조선인들이 몰래 지나가는 것 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면 그들은 전혀 이 하나의 길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길의 위 쪽 모든 곳으로부터 모두 건너갈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언덕에 오르고 산에 들어 가는 길을 조사하고 순찰하고 자취를 추적하여 잡게 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본디 상주한 바에서 莽牛哨의 카룬에 金州의 삼백 명의 漢軍 가운데서 토지가 없는 자를 일백 명을 옮 겨서 데려가 주둔시키고, 새로 개간한 소택지 농토를 나누어 주고 개간하고자 한다고 했습 니다. 하지만 지금 변경에서 널리 소택지를 개간하는 것을 중지했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야 할 토지를 확보하지 못했는데 본디 産業이 없는 가난한 병사들을 8백리 떨어진 곳에서 호 구와 함께 멀리 옮겨오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비록 모두 公項으로 다스린다고 해도 어 떻게 전부 풍성하게 만족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외국과 경계가 만나는 중요한 국경 지역 을 곧바로 이들에게 맡겨서 감시하게 하고 또한 인삼의 이익을 도모하는 교활하고 사악한 사람들을 가로막고자 한다면 절대로 이들의 계략에 빠져 들어가지 않고 전연 병폐를 만들 어서 행하지 않을 것임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과 함께 하나의 강 안에 있고 길이가 수백 리나 되는데 앞뒤로 순찰하러 갈 때 한번도 경계를 넘 지 않고 멀고 오래될 때까지 국경 쪽에서 조그만 일도 야기하는 사항이 없으리라고 보장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10/1674-1678).
班第는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莽牛哨에 카룬을 설치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이 秘密 奏摺에서 구구절절하게 밝혔다. 蔘場에 들어가는 자들은 모든 강과 바다를 지나 들어가는데 이곳 한 곳만을 막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유사시 무력시위 를 해야 할 경우에는 충분한 병력과 배가 근방에 이미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미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어야할 농토를 개간하는 것을 중지한 상황에서 멀리서 백 명이 나 되는 병사들을 파견해 양육해야하는 경제적 부담도 뒤따랐다. 이와 같이 카룬 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