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맺음말
4. 특별외교위원회의 성립과 직업 외교관의 참여
독일 유문도 1931. 10. 17 1933. 9. 13 유숭걸 1933. 9. 13 1935. 6. 28 프랑스 高魯 1928. 10. 12 1931. 7. 16 고유균 1932. 8. 5 1941. 5. 9 소련 안혜경 1933. 1. 6 1936. 3. 23
구분 중국 대표단
1930년(제11차 대회) 장작빈, 고노, 오조추 1931년(제12차 대회) 시조기, 왕가정, 吳凱聲 1932년(특별대회) 안혜경, 羅忠詒, 王麟閣 1932년(제13차 대회) 고유균, 안혜경, 곽태기 1933년(특별대회) 고유균, 안혜경, 곽태기 1933년(제14차 대회) 고유균, 안혜경, 곽태기 1934년(제15차 대회) 곽태기, 라충이, 김문사
(표 1-3) 국제연맹 중국 대표단
은 胡漢民, 왕총혜, 王正廷, 孔祥熙, 宋子文, 吳敬恆, 李煜瀛, 王樹翰, 張群, 朱培德, 劉尙 淸, 賀燿祖의 12명이었다.
남경정부는 특별외교위원회에 이 12명의 인원 이외에 于右任 감찰원 원장, 丁惟汾 국민당 중앙당부 비서장 대리, 戴傳賢 고시원 원장, 邵力子 남경정부 위원, 邵元冲 입 법원 원장 대리, 陳布雷 교육부 정무차장의 6명을 더 충원하였다. 그리고 李錦綸 외교 부 정무차장, 徐謨 구미司長 겸 아주司長 대리, 樊光 상무 차장 대리도 이 위원회에 참관시켰다. 이외에도 특별외교위원회에 안혜경 주미국 공사, 陳紹寬 해군부 정무차장, 楊樹莊 해군부장, 程天放 중앙선전부 부부장, 熊式輝 南昌 주둔 참모장, 朱兆莘 전외교 부 정무차장, 何應欽 군정부장, 吳鐵城 경찰총감, 陳立夫 중앙정치회의 비서장, 劉文島 주독일 공사가 위원으로 참석하였다. 또한 장학량이 외교 자문위원으로 파견한 고유균 과 劉哲 동북정무위원회 위원, 라문간 동북 변방군 사령장관 공서 고문도 위원으로 출 석하였다.
특별외교위원회 위원들은 대전현을 위원장으로, 송자문을 부위원장으로, 서모를 비 서장으로 선출하였고, 장개석도 특별외교위원회의 회의에 자주 참석하였다. 이와 같이 특별외교위원회는 당과 정부의 고급 관료와 직업 외교관들 중에서 위원을 광범위하게 충원하여 대일본 정책을 토론, 의결했고, 국제연맹에 대한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중심 기구로서 역할하였다.
당시 특별외교위원회는 장개석의 제안으로 설립되었다. 만주사변 시기 그는 江西省 에서 공산당 토벌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의 만주사변에 관 한 전보를 받고 남경으로 돌아와 군정 요인들을 소집해 대일본 방침을 결정하면서 다 음과 같이 특별외교위원회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1) 특별외교위원회를 설립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해 외교적인 대응책을 연구, 토의하여 결정한다. 2) 부대를 선발하고 북상시켜 군사적 방위를 지원하고, 광동(粤)과 공산당에 대 한 토벌 작전 계획을 정지, 완화한다. 3) 蔡元培, 張繼, 陳銘樞 3인을 광동으로 파견하여 정 치적 단결을 호소하며 외적을 막도록 한다. 4) 국민정부와 중앙 당부가 국민들에게 각각
‘전국동포서’를 발표하고, 전국 국민의 진정, 인내와 단결, 노력으로 自衛를 준비하면서 국 제연맹의 公理를 신뢰하여 판결을 기다리도록 요청한다.18)
위의 글은 관동군의 침략으로 인해 국내의 소요보다 외적을 방위하는 것이 더욱 중 요하게 되어 외교적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하고서 국제연맹의 정의와 공리를 기대하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장개석은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제291차 정치회의(1931년 9월 30일)에서도 특별외교위원회의 설립을 제안하였다.19) 이때 특별외교위원회가 9월 30일 오후 바로 개최되었고, 이후 매일 한 번씩 거의 오전 7시에 소집되어 對日本 정책을 토론, 의결하였다.
18) 秦孝儀, 『中華民國重要史料初編-對日抗戰時期』緖編(一)(臺北: 中國國民黨中央委員會黨史委員 會, 1981), p.281.
19) 中國國民黨中央黨史委員會, 『國民政府處理九一八事變之重要文獻』(臺北: 中國國民黨中央委員會 黨史委員會, 1992), pp.186-188.
(그림 1-2) 대외정책에 대한 특별 기구의 설립
출처 : 劉達人 謝孟圜, 『中華民國外交行政史略』, 臺北 : 國史館, 2000, p.44.
* 괄호 안의 연도는 각 기구의 설립 연도임
또한 장개석은 고유균이 외교부 장에 취임할 때 도 국제연맹 및 서구 열강에 대 한 외교 정책으 로 일본군의 침 략을 중지, 철수 시키는 해결 방 안을 모색하자고 요청했으며, 특별 외교위원회 및 외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강 조하였다.
전쟁에는 유 형의 군사 전쟁 뿐만 아니라 경제, 상업 전쟁도 있고, 무형의 외교 전쟁도 있다. 외교 전쟁은 어떠한 전쟁 보다 상부에 존재하며 그 효력이 크다. 금일 국제사회에는 무력을 사용하는 해결 방법뿐만 아니라 외교적인 해결 방식도 있다. 중국은 내우외환의 위기에 직면하여 군사적인 대응만 이 아니라 외교적인 해결 수단도 기대하고 있다. 지금 특별외교위원회가 외교 정책 결정의 중심 기구로 타당한 방침을 의결하고 있다. 외교가 국가의 위기를 구제하는 역할을 실행해 주기를 바란다.20)
위와 같이 그는 군사적인 대응보다 외교적인 해결 수단을 강구했고, 국제연맹 및 서 구 열강의 조정과 중재를 모색하였다. 그의 이러한 정책은 특별외교위원회의 설립과 직업 외교관의 초빙 및 임용으로 잘 드러났고, 또한 직업 외교관 출신인 시조기, 고유 균, 라문간을 외교부장으로 차례로 임명한 점에서도 국제연맹 및 서구 열강에 대한 외 교․선전 정책을 강화, 지원하겠다는 의미임을 엿볼 수 있다.
이때 직업 외교관은 이 특별외교위원회에서 대일본 정책을 제안, 의결했으며, 국제 연맹 및 각 국가에서도 일본군의 침략을 압박, 중지시키기 위한 외교적인 활동을 수행 하였다. 특히 중국 대표단은 국제연맹에서 일본 대표의 관동군 침략 옹호와 중국 비방 을 반박하면서 만주국의 해체 및 국제연맹 특별대회의 개최를 요청하였다. 이때부터 외교부도 단지 결정된 정책을 집행하는 기구에서 증가하는 외교 업무를 신속하게 처 리하기 위해 활동과 역량이 강화되었고, 직업 외교관도 특별외교위원회와 외교위원회 의 외교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여 전문가로서 대응 견해를 제시하며 활동하였다.
20) 「蔣主席對顧維鈞就任外交部長訓辭」(1931年 11月 30日), 中國國民黨中央委員會黨史史料編纂委 員會, 『革命文獻』 第38輯(臺北: 中國國民黨中央委員會黨史史料編纂委員會, 1991), pp.7936-7937.
물론 북양정부 시기 외교총장까지 역임했던 고유균, 안혜경, 라문간과 이전 남경정 부 외교부 차장이었던 주조신도 특별외교위원회의 위원으로 초빙되었고, 시조기는 영 국 공사로 직무를 수행하면서 국제연맹 중국 대표로 파견되었다. 특히 고유균은 제2차 북벌 시기 남경정부가 수배하고 있던 인물이었지만, 국제연맹 회의 등 국제회의의 참 가 경력이 풍부해서 특별외교위원회에 초청되고 외교부장까지 역임하였다. 왕총혜도 대일본 문제의 전문가로서 헤이그 국제법정 법관으로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특별외교위원회에는 당과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많이 참여했지만, 대부분 중일관계 및 외교의 전문가나 학자가 아니어서 국제연맹의 각 국가 간 분쟁 해결 사 례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실제로 고유균, 안혜경, 라문간, 왕총혜, 朱兆莘 등 직업 외교관들이 제시하는 방안이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李雲漢도 직업 외교관이 국제연맹의 상황과 일본의 정세를 현실적으로 인식하여 제시하는 견해가 주목을 받았 다고 언급하였다.21)
당시 고유균은 장학량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자신이 처음 특별외교위원회에 참석했 을 때의 상황과 초기 회의장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는 10월 12일 특별외교위원회에 위원으로 처음 참석하였고, 초기에 일본이 제안한 양 국 간 직접 교섭에 대한 대응 방안을 주로 논의하였다. 특별외교위원회 10월 13일 회의에 서 위원 대부분은 일본이 제안한 양국 간 직접 교섭을 반대하였고, 10월 14일 회의에서는 국제연맹에서 만주사변을 해결하지 못하면 구국공약을 적용해 일본을 압박하는 방안을 미 국에 요청하자는 견해가 제시되었다.22)
위와 같이 고유균은 특별외교위원회에서 만주사변에 대한 정책을 토론․ 의결한 내 용과 회의 상황을 장학량에게 거의 매일 전보로 보냈다. 고유균과 유철은 동북정무위 원회의 위원으로, 라문간은 동북 변방군 사령장관 공서 고문으로 장학량과 관련된 인 물들이었고, 그들은 장학량의 추천으로 특별외교위원회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남경에 서 장학량과 전보를 통해 특별외교위원회의 상황을 알려주었고, 서로 간의 의사를 주 고받았다. 이 전보가 당시의 정황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로 남아있다.
그리고 안혜경은 특별외교위원회의 위원들이 국제연맹의 국제분쟁 해결 사례에 대 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점을 지적했으며, 당시 국제연맹에 의한 외교적 해결 방안이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고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왕정정이 학생들의 구타 사건으로 사직하고 특별외교위원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이금 륜 외교부 차장은 중국어가 서툴렀다. 고유균은 국제연맹의 창립 단계부터 참가해 그 지식 과 경험이 풍부하여 특별외교위원회에서 관련 견해를 제시하며 공헌하였다. 그도 만주사변 을 국제연맹에 의한 조정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남경정부가 만주 사변을 국제연맹에 제소해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지만, 국제연맹 회원국과 구국공약 서명국 중 어느 국가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지 않아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23)
21) 李雲漢, 「顧維鈞與九一八事變之中日交涉」, 中國國民黨中央黨史委員會, 앞의 책, p.651.
22) 「顧維鈞致張學良電稿」, 中國國民黨中央黨史委員會, 앞의 책, pp.251-252.
23) 「顔惠慶關於特種外交委員會的回憶」, 中國國民黨中央黨史委員會, 앞의 책, pp.451-454.; 顔惠慶 著 吳建雍 李宝臣 葉鳳美 譯, 『顔惠慶自傳』(北京: 商務印書館, 2003), p.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