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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에 직업 외교관의 충원

Dalam dokumen PDF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Halaman 79-83)

V. 맺음말

3. 외교부에 직업 외교관의 충원

특히 (표 1-1)에서는 이 시기 외교부의 주요한 직책이었던 외교부장, 차장, 국제사 장, 아주사장, 구미사장에 임명된 인물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만주사변, 상해사변, 장성항전 시기 외교부장은 왕정정에서 시조기, 고유균, 라문간으 로 이어지는 직업 외교관 출신의 인물들이 차례로 임명되었다. 陳友人은 한 달 정도밖 에 성립되지 않았던 손과 정부 시기 외교부장으로서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겠다.

(표 1-1) 외교부의 조직과 인물(1929-1937)

13) 中國社會科學院 近代史硏究所 譯, 『顧維鈞回憶錄』第2分冊(北京: 中華書局, 1985), p.57.

徐東藩朱敏章 刁敏謙

1930 왕정정 이금륜 장아화 王家楨

반련여장흠해 서동번조민겸 陳一麟樊 光

宋子良번광 조민겸 계경 주룡광 호세택 서모

1931

왕정정시조기 고유균진우인

이금륜 왕가정 김문사

張歆海徐東藩 번광趙泉 祝惶元陳一麟

宋子良應尙德 施肇夔

刁敏謙張祥麟 계경

錢泰 호세택 서모

1932 진우인 라문간

이금륜부병상 곽태기서모

김문사감개후 유숭걸서모

장흠해서동번 축황원조천 許士謙朱鶴翔 林椿賢余 銘

시조기林佑根 응상덕

장상린張似旭 吳南如

주학상전태 호세택 심근정

장흠해서모 劉師舜

1933 라문간

왕정위 서모 유숭걸

장흠해서동번 축황원임춘현 王曾思吳頌皋 여 명

응상덕李聖五 오남여

李迪俊 주학상 심근정 유사순

1934 왕정위 서모 유숭걸 당유임

서동번임춘현 오송고王啓江 여 명

李聖五 이적준 주학상 심근정 유사순

1935 왕정위

장군 서모 당유임 陳介

임춘현오송고 왕계강譚紹華 여 명

이성오 이적준 주학상

오송고 심근정

高宗武 유사순

1936 장군 서모 진개

임춘현왕계강 담소화여명 丁紹伋

이성오진개 이적준 오송고 고종무 유사순

1937 장군

王寵惠 서모 진개

임춘현왕계강 담소화여 명 정소급

이성오진개

徐公肅 이적준 오송고 고종무 유사순

출처: 劉壽林 萬仁元 王玉文 孔慶泰, 『民國職官年表』, 北京: 中華書局, 1995, pp.518-520.

아울러 아주사 사장도 1929년과 1930년에는 직업 외교관이 아닌 周龍光이 담당했지 만, 만주사변 시기부터 직업 외교관인 胡世澤, 沈覲鼎이 계속 직무를 수행하였다. 상무 차장도 1929년과 1930년에는 직업 외교관이 아닌 張我華가 담당했지만, 만주사변 시기 부터 직업 외교관인 왕가정, 김문사, 甘介侯, 서모, 유숭걸이 계속 업무를 맡았다. 국제 사장과 구미사장도 錢泰, 朱鶴翔, 서모, 張歆海, 劉師舜 등 직업 외교관이 지속적으로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를 종합해 보면 만주사변 이후 외교부의 주요한 직책에는 대부 분 직업 외교관이 임용되어 국제연맹 및 각 국가와의 외교를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당고정전협정(1933년 5월 31일) 이후 남경정부는 국제연맹에 대한 외교 정책에서 기술 합작 정책으로, 일본에 대한 저 항과 교섭을 병행하는 정책에서 대일본 타협 정책으로 변경하면서 직업 외교관보다 왕정위 외교부장, 당유임 상무차장 등 정부의 대일본 타협 정책을 충실히 수행해 줄 수 있는 인물들로 교체하였다.

이외에도 외교부는 해외 공관과 주국제연합회 전권대표 사무처를 주요한 부속 기구 로 두었는데, 여기에 대해 간략하게 고찰하겠다. 남경정부는 1930년 1월 ‘주외공관조직 조례(駐外使領館組織條例)’를 발표하여 주외 공관을 대사관, 공사관, 代辦使館으로 구 분하였고, 영사관을 총영사관, 영사관, 부영사관으로 세분하여 설치하였다. 주외 공관 은 주로 중국과 주재국의 외교 사무를 처리하면서 소속 직원과 영사를 감독하고 화교 에 관한 업무도 담당하였다.

그리고 남경정부는 1930년 1월 ‘주외공관조직조례(駐外使領館組織條例)’를 제정한 뒤 에 거의 개편하지 않았고, 대사관의 인원도 10여 명을 초과해 두지 않았다. 이는 주로 해외 공관을 운영하는 경비의 부족 때문이었다.14) 만주사변 이후 시조기와 고유균도 국제연맹 및 주재국에서 공관을 운영할 때 경비의 부족으로 인해 늘어나는 업무에 비 해서 직원 수도 증가시키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이때 남경정부는 중국의 국제적인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각 국가에 대사를 두기 로 결정했으며, 1933년 초 안혜경을 초대 대사로 소련으로 파견하였다. 이탈리아 공사 관이 1934년 10월 17일 대사관으로 승격된 것을 시작으로, 일본(1935년 5월 17일), 미 국과 독일(5월 18일), 영국(5월 23일), 프랑스(1936년 2월 8일) 공사관도 차례로 대사관 으로 승격되었다. 청말 시기 해외 공사관은 모두 10개 국가, 즉 영국, 프랑스, 독일, 러 시아, 미국, 일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에 설립되었다. 미국과 프랑 스의 전권대신이 페루, 쿠바, 멕시코, 스페인, 포르투갈의 분관도 함께 관리하였다. 북 양정부는 소련에 대사관을 두는 이외에 다른 국가에는 공사관, 겸사관, 代辦使館을 설 립했는데, 1924년 7월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 격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서구 열강의 반대로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남경정부 초기 시기 점차 대사관이 증가되면서, 공사관과 代辦使館은 그 수가 감소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이전 남경정부는 모두 8개 국가, 즉 소련,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에 대사관을 설립하였다.

또한 남경정부는 1930년 1월 ‘국제연합회중국전권대표판사처조직조례(國際聯合會中 國全權代表辦事處組織條例)’를 발표하였고, 2월 3일 국제연맹과 관련된 업무의 증가로 인해 제네바에 사무처를 설립하였다.15) 국제연맹 전권대표 사무처는 전권대표 3명, 처 14) 王立誠, 앞의 책, pp.250-251.

15) 中國第二歷史檔案館, 앞의 책 (第五輯 第一編 外交(一)), pp.3-5.

국가 구분 공사 재임 날짜 퇴임 날짜 영국 시조기 1929. 1. 22 1932. 5. 30

곽태기 1932. 5. 14 1941. 5. 9 미국 안혜경 1931. 9. 25 1933. 1. 7 시조기 1933. 1. 7 1937. 5. 24

장 1명, 비서 3명, 수행원 2명, 주사 2명으로 구성되었다. 청조는 1905년 육징상을 네 덜란드 出使大臣 겸 헤이그 국제평화회의의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처음으로 국제조 직에 상설 대표를 파견하였다. 1920년 국제연맹에 가입한 후 북양정부는 국제연맹 대 회마다 3명의 전권대표를 파견하였고, 1922년 9월 국제연맹 전권대표 사무처의 설립을 결정하였다.

특히 주국제연합회 전권대표 3명은 외교부가 실무적인 경력과 명망이 있는 인물들 중에서 남경정부에 요청하여 임명되었다. 보통 국제연맹 전권대표가 처장 1명을 두고 사무를 처리하였고, 국제연맹 대회가 개최되면 모든 업무를 주관하였다. 그리고 사무 처장은 스위스 공사가 겸임하였으며, 胡世澤이 이 시기 사무처의 처장이었다. 사무처 는 처장 1명, 1등 비서 1명, 2등 비서 1명, 3등 비서 1-2명, 수행원 2명, 주사 2명으로 구성되었다.16) 이 사무처는 중국 대표단의 국제연맹 회의 참가 등 각종 활동을 지원 하면서 국제연맹의 사무국과 항상 연락을 유지하였다. 사무처는 외교부의 명령을 받았 고, 국제연맹 전체 대회와 이사회가 개최될 때는 수석 대표의 지시를 받았다. 사무처 의 직원은 주로 추천과 임명의 과정을 거쳐 채용되었는데, 중국 대표단의 구성원도 될 수 있었다.

당시 만주사변 이후 남경정부는 국제연맹에 대한 외교·선전 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외교부의 주요한 직원을 직업 외교관으로 충원하는 이외에도 국제연맹 중국 대표를 모두 직업 외교관으로 파견하였다. 아래의 (표 1-2)와 (표 1-3)을 보면 만주사변 시기 주요한 서구 열강의 중국 공사들이 대부분 직업 외교관이었고, 만주사변, 상해사변, 장 성항전 시기 각각의 국제연맹 중국 대표가 모두 직업 외교관으로 파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1-2)는 프랑스 공사가 高魯에서 직업 외교관인 고유균으로 변경되었 음을 보여준다. 만주사변 시기 시조기는 영국 공사이면서 국제연맹 중국 대표였고, 장 성항전 시기 고유균과 곽태기도 각각 프랑스와 영국 공사이면서 국제연맹 중국 대표 였다. 당고정전협정을 체결한 이후에도 남경정부는 국제연맹 및 서구 열강에 대한 외 교․선전 정책을 계속 실행했고, 직업 외교관들을 중국 대표로 임명해 관련 직무를 수 행하도록 유지시켰다.

(표 1-2) 주요 국가의 공사

16) 中國第二歷史檔案館, 앞의 책 (第五輯 第一編 外交(一)), p.6.; 王立誠, 앞의 책, pp.253-254. 여기 에는 ‘국제연합회중국전권대표판사처’의 확대와 폐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남경정부는 1936년 사무처 내에 법률, 경제, 군사, 교통, 위생, 노동 등을 담당하는 전문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교부에 서 전문위원을 파견하여 국제연맹과 관련된 문제를 연구하면서 기술 합작을 강화하였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국제연맹이 활동을 중지하자 사무처도 다음해 7월 폐쇄되었다.

독일 유문도 1931. 10. 17 1933. 9. 13 유숭걸 1933. 9. 13 1935. 6. 28 프랑스 高魯 1928. 10. 12 1931. 7. 16 고유균 1932. 8. 5 1941. 5. 9 소련 안혜경 1933. 1. 6 1936. 3. 23

구분 중국 대표단

1930년(제11차 대회) 장작빈, 고노, 오조추 1931년(제12차 대회) 시조기, 왕가정, 吳凱聲 1932년(특별대회) 안혜경, 羅忠詒, 王麟閣 1932년(제13차 대회) 고유균, 안혜경, 곽태기 1933년(특별대회) 고유균, 안혜경, 곽태기 1933년(제14차 대회) 고유균, 안혜경, 곽태기 1934년(제15차 대회) 곽태기, 라충이, 김문사

(표 1-3) 국제연맹 중국 대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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