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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文史料와의 關係

Dalam dokumen PDF 對外 交涉을 통해 본 中國史 (Halaman 57-61)

1) 『同文彙考』

조선측에서 남긴 사료 중 조청관계에 관한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사료는 7) 『同文彙考』 이외에도 『通文館志』, 『朝鮮王朝實錄』, 『備邊司謄錄』 등의 淸과의 외교관계 를 수록한 사서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 자료들을 滿文月摺包의 조청관계 관련 사료와 대조해 보는 것은 실익이 별로 없다. 『通文館志』는 『同文彙考』에 수록된 외교문서를 가공한 2차사 료이고 분량면에서도 『同文彙考』에 비해 현격히 적다. 한편, 『朝鮮王朝實錄』, 『備邊司謄 錄』은 주로 외교관계를 둘러싼 조선 조정 내부의 토론을 보여주지 滿文月摺包 사료와 대조할만 한 문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청과의 외교문서를 모아놓은 『同文彙考』이다. 『同文彙考』와 현존 조선과 관련된 滿文錄副奏摺을 비교하면 내용이 중복되는 건수가 상당수 발견되는데 이는 대개 盛京 禮部, 盛京將軍, 禮部 등이 조선에 咨文을 보낼 때 奏摺을 참고하거나 인용했기 때문 이다. 간혹 咨文과 奏摺의 내용이 거의 차이가 없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문건은 기 존사료의 인용여부 항에 (전폭)이라고 표시했다.) 이러한 문건도 자세히 비교해보면

『同文彙考』에 실린 咨文은 奏摺에 표시되어 있는 奏摺을 상주한 날짜, 상주한 사람 의 명단, 황제가 주비를 가한 날짜, 주비의 내용 등이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내용도 완전히 일치한 것은 아니어서 내용의 일부 첨삭이나8) 『同文彙考』에 실린 咨文이 원문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오기도 발견된다.9) 『同文彙考』의 咨文이 滿文奏摺을 일부만 인용한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기존사료의 인용여부 항에 (부분)으로 표시했다.) 『同文彙考』의 咨文에서 생략된 부분은 조선 측에 이미 통지 한 부분을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한 것이거나 외교적인 수사상 부적절하여 뺀 부분 이다.10) 또한 청조정의 내정과 관련된 부분을 생략하거나 조선조정을 속이기 위해 삭 제하기도 했다.11) 『同文彙考』에 실린 咨文이 滿文奏摺의 요지만을 담고 있기도 한 데 (이 경우는 인용여부 항에 (요약)으로 표시) 失銀案 등을 보고하면서 피의자의 공 술을 생략하고 사건의 개요만을 보고한 경우 (표1, 25번, 26번 등)가 그 예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滿文錄副奏摺 가운데 『同文彙考』에 전폭적 내지 부분적으로 인 용되거나 또는 최소한 요약되어 나타나는 것은 전체 71건 가운데 18건으로 사분의 일 에 불과하다. 나머지 『同文彙考』에 언급되지 않는 滿文錄副奏摺은 대부분이 조선문 제와 관련되었지만 청조의 내부의 의논으로 조선에 통보할 필요가 없거나 통보하기에 불편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다. 이들 奏摺 가운데는 당시 조선조정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스런 내용도 종종 포함되어 있다. 乾隆12년(1747) 조선사신을 따라갔던

8) 예컨대, 표1, 29번 盛京將軍이 올린 奏摺과 『同文彙考』에 실린 盛京禮部에서 온 咨文을 비교 하면 奏摺은 표류당한 사람이 李君弼 등 8인이라고 언급한 반면 『同文彙考』의 咨文은 8명의 이름을 모두 기재하고 있다.

9) 가령, 표1, 8번 奏摺은 표류한 여자가 4명인데, 성인2명, 소녀1명, 여자아기 1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반면 『同文彙考』에 실린 같은 내용을 담은 咨文은 여자가 총 4명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소녀1명을 생략하고 있다.

10) 예를 든다면, 莽牛哨에 초소의 설치를 청한 達爾党阿의 奏摺(표1, 12번)을 요약 인용하고 있는

『同文彙考』에 수록된 禮部에서 보낸 咨文은 達爾党阿의 奏摺의 내용 가운데 앞서 雍正연간 莽 牛哨의 설치와 관련된 那蘇圖의 奏摺, 황제의 上諭, 조선왕의 上奏文 등 조선측이 이미 숙지하고 있는 내용은 모두 생략했다. 그리고 조선왕의 초소 설치에 반대하는 입장에 대한 達爾党阿의 비 판도 역시 제외되었다. 표1, 49번 盛京將軍의 奏摺은 살인사건의 책임을 물어 조선국왕의 치죄를 요청하고 있는데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담은 盛京禮部가 조선에 보낸 知會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이 또한 외교적인 고려에 따른 조치였을 것이다.

11) 표1, 15번 奏摺을 인용하고 있는 盛京禮部가 朝鮮에 보낸 咨文은 표류민을 조선에 교부한다는 점만 언급할 뿐, 達爾党阿가 城守尉 등에게 불법채삼자의 단속을 명한 부분, 즉 內政과 관련된 부분은 생략했다. 그리고 漂流民(?) 5명이 인삼을 몇 뿌리 밖에 캐지 않았다는 그들의 공술은 포 함하되 실제로 33뿌리나 캔 실상은 언급하고 있지 않은데 이는 인삼을 캐기 위해 불법월경한 자 들을 조선 조정이 국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므로 (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12/2697) 이들에게 사형을 면해주기 위해서였다.

노비 11명이 북경에서 말 40필을 사서 鳳凰城을 나갔다가 이 사실을 알고 쫓아온 鳳 凰城의 관원과 병사가 이들을 변경에서 체포하여 盛京으로 이송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奉天將軍이었던 達爾党阿가 올린 滿文奏摺(표1, 20번)은 다음과 같은 조선관계의 불문율을 적고 있다. “我朝가 盛京에서 開昌의 길을 연이래 큰 말(大馬)을 조선에 팔 게 하지 않은 것은 비록 정해진 법전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현재 백여 년을 전하여 왔습니다. 변경의 국경에서는 아직도 법령을 따르고 엄격하게 준수합니다”(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12/2707-2708). 이 奏摺에서 達爾党阿는 북경의 左右稅局에서 조선의 사 신일행에게 말을 팔지 않게 하고 山海關과 盛京 邊門의 관원들에게 조사를 엄격하게 하도록 명을 내릴 것을 건의했다. 戶部尙書 傅恒 등의 議復(표1, 21번)을 거쳐 達爾党 阿의 건의는 황제의 재가를 받았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에서는 말을 산 노비들을 인솔한 사신들을 혁직하고 범인들에 대해서는 청조의 처분을 기다린다는 내용의 咨文 을 보냈다(『同文彙考』 권64, 28b-29a). 이에 대한 답변으로 淸朝 禮部에서 보낸 咨 文은 刑部에서 파악한 이 사건의 진상과 관련자에게 내릴 처분만을 기재했을 뿐 불문 율을 담고 있는 達爾党阿의 奏摺이나 傅恒의 議奏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 었다 (『同文彙考』 권64, 29b-30a).

銀의 유출을 막을 방도를 건의한 盛京將軍 琳寧의 奏摺(표1, 67번)은 또 다른 예이 다. 조선사신을 원래 돌아갈 때 중국돈을 가져갈 수 없었다. 그런데 건륭58년(1793) 조 선사신이 다시 禮部에 이것이 가능한 지 물어보았다. 禮部는 이를 거절하는 한편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했고, 乾隆帝는 盛京將軍에게 혹시 조선 사신들이 몰래 가져갈지 모르니 짐을 수색하되 조선 사신들을 괴롭히지 않는 방법을 강구해 보고하도록 했다.

이 상유를 받은 盛京將軍은 사신이 돌아오면 놀라지 않게 은밀히 조사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모든 조선국의 사신들이 邊境의 문에 진입한 후 영접하는 관원 한 명, 통역 한 명을 파견하여 조선의 사신 일행을 따르면서 이들이 銀으로 매매한 돈의 수, 사용한 돈의 수를 은밀히 파악하였다가 돌아올 때 盛京將軍衙門에 보고하면 盛京 將軍이 邊門에서 사신들이 사용하고 남은 돈의 액수와 대조하고 남은 액수의 돈은 銀 으로 바꿔가게 하겠다는 건의를 올려서 건륭제의 승인을 받았다. 청조 관원이 조선인 사신들을 은밀히 감시할 것을 건의한 이 奏摺의 내용이 조선측에 전달될 리 없었다.

『同文彙考』에 언급되지 않는 滿文奏摺은 국경의 범월, 양국민의 충돌, 은의 분실 등의 사안이 발생한 후 淸朝에서 범인이나 연루된 자를 심문한 내용을 보고한 奏摺들 도 포함하는데 『同文彙考』에 실린 조선에서 사건의 관련자를 조사한 기록과 이들을 비교해보면 사건의 전개과정에 관해 상충하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乾隆14 년 중국인 7인이 조선의 柔遠鎭 對岸에서 조선인들의 습격을 받아 5명이 살해된 사건 이 발생했다. 『同文彙考』는 조선인 범인들의 공술을 담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조선 인들이 중국인들이 쌀만 챙기고 쌀값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습격했다고 주장한 다(『同文彙考』권56, 14a). 반면, 이 사건을 보고하는 寧古塔將軍의 奏摺(표1, 31번)은 습격당해 사망한 5명에 대한 검시기록, 신원과 아울러 생존자의 진술을 담고 있는데 그 생존자는 습격원인에 관해서 자신들이 쌀을 가져오면 주겠다고 인삼을 꺼내 보이

자 조선인들이 인삼을 탐해 습격했다고 전혀 다르게 진술하고 있다. 건륭23년에는 중 국인 劉自成이 월경해 조선땅에서 인삼을 캐다가 체포되어 중국에 이송되었다. 『同文 彙考』(권62, 34b-35a)와 滿文奏摺(표1, 35번)은 각각 劉自成이 조선관원과 청조관원에 게 공술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양자는 내용이 판이하다. 劉自成은 조선관원에게는 자 신이 鳳凰城 서쪽에 살고 인삼을 캐러갔다가 조선군에 체포되었다고 했지만, 중국에 송환된 후에는 자신이 山東사람이고 배가 난파되어 조선에 가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乾隆연간 朝淸 간에 발생한 犯越, 失銀 등의 사안을 명확히 규명하기 위 해서는 滿文錄副奏摺을 반드시 참고해야만 한다.

2) 淸朝의 漢文記錄

『淸實錄』은 淸朝에서 만들어진 史書 가운데 최소한 乾隆연간의 朝淸關係史와 관 련하여 가장 풍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淸實錄』에 포함된 이 시기 朝淸關係 관 련 기사는 『同文彙考』에 수록된 조선에 전달할 목적으로 작성된 청조의 咨文과 달 리 당시 청조내부의 의논을 엿볼 수 있는 기사를 포함하고 있다. 가령, 앞서 언급한 조선에 大馬를 팔지 않는 불문율을 제기한 達爾党阿의 奏摺(표1, 20번)은 『同文彙 考』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淸實錄』에는 나타난다. 하지만 朝鮮과 관련된 奏摺이

『淸實錄』에 나타나는 것은 대개 그 奏摺이 중요한 내용을 포함한 상유를 유발해서 그 상유가 『淸實錄』에 수록되고 상유의 앞부분에 해당 奏摺이 요약되었을 때에 한 정된다. 따라서 전체 71건의 滿文奏摺 중 불과 12건 만이 상유 속에 요약된 형태로

『淸實錄』에 등장한다. 결국 수많은 조청관계와 관련된 중요한 건의나 보고를 담은 奏摺이 『淸實錄』에서 누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12)

한편, 일부 滿文錄副奏摺은 漢文譯本이 존재한다. 이들 譯本은 楷書體가 아닌 行書 體로 쓰인 점으로 미루어 上奏者가 아니라 內閣이나 軍機處에서 보관이나 업무처리를 위해 작성했다고 여겨진다. 현재까지 파악한 조청관계 관련 滿文奏摺의 漢文譯本은 모 두 13건인데, 대부분이 일사관의 滿文月摺包 내에 滿文奏摺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 漢 文譯本은 가끔 번역상의 오류를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滿文錄副奏摺의 내용을 빠짐없이 그대로 옮기지도 않았다. 역본은 대부분의 경우 滿文錄副奏摺에 나타나는 황 제가 주비를 가한 날짜와 주비내용, 그리고 상주를 올린 관원의 명단, 이 奏摺이 군기 처에서 전달된 관청명 등을 생략하고 있다. 심지어 滿文錄副奏摺에서 상당부분을 생략 해 버리고 번역한 譯本도 있다.13)

12) 예를 든다면, 위에서 언급한 朝鮮使臣이 돈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몰래 감시하게 한 奏摺(표1, 67번)은 황제의 재가를 받았으므로 실제 시행되었으리라 짐작되지만 『淸實錄』에 언급되지 않 는다. 한편, 乾隆末年에 鳳凰城 밖 카룬의 배치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는데 표1, 69번 奏摺의 漢文附件은 그 구체적인 양상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淸實錄』, 『大淸會典事例』 등에는 이 와 관련된 사료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13) 금지된 해역에서 조업하다가 朝鮮에 표류한 祁文敬의 공술을 담은 盛京將軍 增海의 奏摺(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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