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滿文月摺包를 이용한 硏究事例
1) 잊혀진 恒祿 14) 의 國境巡視 旅行
乾隆26년(1761) 8월에 三水府 加乙坡鎭의 조선인 金順定 등 7명이 인삼을 채취하러 중국에 넘어가 淸人의 물건을 약탈했다가 오히려 다시 淸人에게 물건을 빼앗기고 조 선인 한 명은 淸人에게 붙잡혔는데 곧이어 행방불명되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안 건은 양 국민 간의 충돌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은 비교적 경미한 사안으로 청조는 이 사안과 관련하여 월경한 조선인과 책임을 맡은 변경의 지방관들을 관대히 치죄하 도록 조선정부에 명했다. 이 사건 자체의 경과는 『同文彙考』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 다(『同文彙考』권58, 1a-22b). 그런데 사실 이 사건은 의외의 부산물을 낳았는데, 恒 祿의 國境巡視 旅行이 그것이다. 이 이야기는 『同文彙考』 등 한국측 기록이나 중국 측 한문기록인 『淸實錄』, 『乾隆朝上諭檔』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15)
이 사건은 청조의 입장에서 볼 때 사건 그 자체보다도 조선에서 咨文이 와서 조선 인이 범월한 사실을 알려주기 전까지 변방의 盛京將軍이나 吉林將軍이 전혀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대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乾隆帝는 27년(1762) 2월 26일 盛京將軍 과 吉林將軍에게 왜 곧바로 상주하지 않았는지, 조선국의 백성이 어떻게 변경을 넘었 는지 분명히 조사해 상주하도록 명했다. 吉林將軍 恒祿은 吉林과 朝鮮의 접경지역을 관할하는 琿春協領에게 두 차례 국경을 조사하도록 명했는데 琿春協領은 조선인이 월 경한 사실이 없다고 아뢰었다. 南海를 시찰하러 나갔던 恒祿은 다시 諭旨를 받았는데 월경한 사람들이 咸境道 三水府 사람들이고 咸境道는 吉林에서 가까우니 월경한 사람
57번)의 漢文譯本은 공술 가운데 표류사건의 사실관계 부분만 번역하고 祁文敬의 변명이나 금지 된 해역에서 어로를 금한 법령을 인용한 부분은 생략해버렸다.
14) 恒祿은 宗室로 輔國公의 世職을 降襲했다. 乾隆25년(1760)부터 乾隆34(1769)년까지 吉林將軍을 역임했는데 청렴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盛京將軍 재임 중이던 乾隆37년(1771)에 중풍으로 사망했 다. 『國朝耆獻類徵初編』 권287, 14a; 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95/1348-1350.
15) 『同文彙考』에는 恒祿이 三水府가 어느 지역인지 조사하러 나갔다가 鴨綠江 연안의 瑪哈拉山 에서 조선인 8명을 잡았다고만 언급되어 있다. (『同文彙考』권58, 23a) 『淸實錄』에도 역시 恒 祿이 변경을 순찰하다가 압록강에서 조선인을 잡았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乾隆實錄, 권674, 19b-20a, 乾隆27/11/12(庚午).
이 길림국경을 넘은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이제 恒祿은 자신이 변경 감시를 게을리 했다는 문책을 벗어나려면 三水府가 자신의 관할지와 접경하지 않음을 증명해야만했 다. 恒祿은 자신이 아직 南海 시찰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때 우선 군관을 파견하여 三 水府 加乙坡鎭을 찾게했다. 이들은 會寧의 조선관원을 만나 加乙坡鎭이 백두산 서쪽, 압록강 남쪽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를 근거로 恒祿은 조선인들이 盛京將軍衙門이 관할하는 국경을 넘었음이 틀림없다고 보고했다.(표1, 37번)
하지만 乾隆帝는 吉林과 盛京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꾸짖고 恒祿과 盛京 副都統 布彦達賚가 직접 가서 조선국의 변경에 이른 후에 三水府의 加乙坡鎭이 어느 곳의 반대편에 있는지 아울러 실종된 조선인이 중국측 변경에 남아있는지 조사하라고 했다. 恒祿은 8월 3일 南海 순찰을 마치고 돌아와 순찰 중 체포한 도둑들과 압수한 인 삼을 刑部와 內務府에 인계하고 변경에 군대를 배치하던 중 布彦達賚가 출발했다는 글을 받고 布彦達賚와 합류하기위해 8월 9일 길을 떠났다.(표1, 38번)
恒祿은 8월 15일 布彦達賚를 만나 두만강가의 조청국경을 조사했으나 三水府나 金 順定 월경사건의 단서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會寧府使를 강가에 불러 탐문한 결과 咸鏡道 南道(julergi golo)의 관할지인 長白山의 서남쪽 압록강의 동쪽에 三水府 가 있는데 加乙坡鎭은 三水府의 북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恒祿과 布彦達賚는 일단 9월 1일 길림울라에 돌아갔다가 盛京將軍의 관할지로 넘어가서 旺淸邊門을 통해 압록 강 방면으로 가기로 했다. 恒祿가 이 긴 여행계획을 乾隆帝에게 아뢰었을 때 乾隆帝는 별다른 감동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냉소적으로 奏摺 말미에 “이 역시 너희들이 서로 미룬 탓에 생겨난 일이다”(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64/1518) 라고 적어 돌려보냈다.
(표1, 40번)
그런데 압록강 방면으로 가려던 계획은 곧 난관에 부딪쳤다. 盛京에서 8백리 떨어 진 帽子山이란 곳에서 동쪽으로는 범법자를 쫓는 군대를 파견하거나 카룬에 군대를 배치하지 않기 때문에 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恒祿과 布彦達賚는 마침내 얼민강과 할민강 지역의 人蔘을 캐는 증명서를 받아서 해마다 旺淸에서 나가는 山東省 백성 王 成을 길잡이로 하여 나갔다(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65/395). 이들은 압록강에 연결 된 골짜기인 三道溝에 이르러 월경해 담비를 잡는 조선인 8명을 체포하는 성과를 거 두기도 했지만 五道溝에 이르렀을 때 눈보라와 마주쳐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10월 27일 일정을 접고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67/1376). 乾隆帝는 恒祿 일행이 눈보라와 힘겹게 싸우다 철수한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아직도 노기를 가라앉히지 못하고“이 또한 서로 미루다 생겨난 일이거늘 누구를 원망하리오”(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65/403) 라고 조소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이 전 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되돌아오는 길에 王成에게서 작년에 자신이 압록 강 변에서 조선인으로부터 물건을 강탈했던 채삼인들과 이들이 사로잡은 조선인을 만 난 적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恒祿는 이들이 작년에 있었던 金順定의 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간파하고 이들을 체포하게 했다(표1, 41번). 그러나 三道溝에서 붙잡았던 조선 인들 가운데 4명이 달아나버리는 바람에 恒祿은 부에 넘겨져 의죄에 처해지게 되었다
(『同文彙考』 권58, 23a-b). 恒祿은 12월 초2일 吉林으로 돌아가 장군의 임무에 복귀 했다.(표1, 44번)
恒祿은 이듬해 3월 9일 다시 압록강을 향해 출발했다. 눈이 녹고 나서 旺淸의 변문 에 간 다음 布彦達賚를 대신해 새로 盛京副都統에 임명된 倭盛額과 만나 압록강가의 三水府 加乙坡鎭을 향해 나아갔다(표1, 47번). 이번에 恒祿과 倭盛額은 佟家江의 수원 으로부터 黑林嶺의 산등성이를 따라서 가다가 十二道溝에서 내려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인 관원과 通事를 조우하고 이들에게서 三水府 加乙坡鎭이 서쪽으로 이틀거 리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4월 21일 恒祿 일행은 드디어 강 건너편에 마중 나온 조선 인 관원들의 도움으로 加乙坡鎭에 있는 金順定 등이 도강한 곳을 찾아냈다. 加乙坡鎭 은 恒祿으로서는 다행히 吉林이 아니라 盛京이 관할하는 十一道溝의 맞은편에 있었다 (표1, 50번). 恒祿은 임무를 마치고 임소로 귀환함을 상주하면서 자신이 여행한 지방을 그린 지도를 그려서 같이 올렸다. 恒祿은 4월 24일 자신의 관할지로 돌아가는 倭盛額 과 작별하고 돌아오는 길에 5월 23일 상유를 받았는데, 상유는 지도에 加乙坡鎭이 盛 京의 맞은편인지, 吉林의 맞은편인지 분명히 명시하고 아울러 작년에 갔다가 막혀서 되돌아온 지점과 이번에 갔던 길을 꼬리표를 붙여 명백히 표시해 상주하라고 했다. 恒 祿은 지도를 수정해 다시 상주했다.(표1, 51번)
恒祿은 길림울라로 되돌아갈 때 온 길을 되돌아가지 않고 반대로 압록강을 더 거슬 러 올라 長白山을 통과했는데 松花江을 타고 길림울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 듯하다.
恒祿는 관원들을 데리고 長白山에서 묵은 후 天池를 참배했다(omo be hargašame hengkilefi).16) 그리고 그전에 長白山에서 산출된 특별한 香을 공물로 바친 적이 있음 을 떠올리고 長白山의 특산향 90묶음을 두 상자에 넣어서 6월 7일 관원을 파견해 乾 隆帝에게 보냈다.(표1, 52번) 향을 받았을 때 乾隆帝는 恒祿의 노고를 치하하지는 않았 지만 恒祿에게 더 이상 불만도 표시하지 않았다. 奏摺에 단지 짤막하게 “알았다”고 批 示했다(滿文月摺包, 마이크로필름 67/1813). 恒祿로서는 이 여행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 한 셈이었다. 加乙坡鎭이 盛京將軍 관할지의 對岸임이 밝혀짐에 따라 金順定의 월경사 건이 발생했을 당시 盛京將軍이었던 淸保는 部에 교부되어 조사하고 합당한 죄를 의 논하도록 했지만, 그는 별다른 처분을 받지 않고 넘어갔기 때문이다(滿文月摺包, 마이 크로필름 67/2049-2051).
이미 잘 알려진 대로 康熙연간에 적어도 두 차례 청조 관원들이 長白山 일대 조청 국경을 답사한 사례가 있었다. 康熙16년(1671) 武黙訥의 長白山 여행은 청조의 發祥地 를 참배하기 위한 것이었고, 康熙51년(1712) 穆克登의 답사가 朝淸 사이의 경계를 정 하기 위한 것이었던 반면, 恒祿의 국경여행은 월경사건이 일어난 후 盛京과 吉林 간의 책임의 귀속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것으로 다소 뜻하지 않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 만 여행 자체의 노정과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恒祿의 여행은 앞서 두 여행을 능가한 16) 이 호수(omo)를 天池로 비정하는 것이 정확한지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恒祿이 참배할 정도로 중요한 지형지물은 그가 조정에 올린 아래서 언급할 지도(그림2)에 표시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지도에 표시된 omo는 天池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