龔自珍의 경세적 사상에 있어 주요 바탕이 되었던 常州 공양학은 18세기 후반 고문 학자 閻若璩의 제자인 常州 출신 莊存與(1719-1788)에서 시작되어 그 방계 門人으로 孔廣森(1752-1786)과 邵晋涵(1743-1796)에 전해지고, 또 家學은 조카 莊述祖 (1750-1816)를 통하여 그 甥姪인 劉逢祿(1776-1829), 宋翔鳳(1779-1860)에 전해짐 으로써 확립되었다. 莊存與에 의해 莊氏家學으로 시작된 常州 공양학은 莊存與 단계에 서는 아직 漢宋 미분화의 고증학 支派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劉逢祿에 이르러
『公羊春秋』何休條例(3科9旨)에 의거한 정치적 微言大義의 學이라는 금문경학의 학 문적 방법론이 확립되었고, 청대 후기 揚州學派와 더불어 고증학계의 吳派와 晥派를 재편한 진보적 금문학파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32) 이처럼 장씨 가학에서 출발한 常 州 금문학파는 한학의 형식을 갖고 분화된 학파였으므로 고문학파와 마찬가지로 ‘고증 학적 한학’ 연구의 복고적, 경학적 접근방법을 학문의 기초로서 보유하고 있었다. 그 러나 고증학의 근본적 특성이 ‘主知的 方法論‘에 있었고 또 戴震 및 揚州學派가 程朱
30) 路新生, 앞의 책, p.371.
31) 「己亥雜詩」303수, 『全集』, p.537. “마음 속 높은 학문 사용하기 두렵지만, 樸學을 잇는 것 이 封侯에 비할쏘냐. 五經에 爛熟함이 일상사처럼 되더라도, 늙은 아비처럼 九流(百家)에 심취하 진 말기를(儉腹高談我用憂, 肯肩樸學勝封侯. 五經爛熟家常飯, 莫似而翁啜九流).”
32) 조병한,「淸代 후기 常州 考證학계에서의 經世 사조 부흥」(『東義史學』 78, 1993), p.80.
學과 다른 의미의 도덕적 의리학 범주에 머물러 있었음에 반해, 常州 공양학은 정치적 의리학을 형성한 점에 그 특징이 있었다.33)
龔自珍이 公羊學을 그의 新義理學으로 받아들여 연구하게 된 것은 28세 되던 1819 년(嘉慶 24) 恩科會試에 낙제한 후 북경에서 常州 公羊學派인 劉逢祿의 문하에 들어 가『公羊春秋』를 배우면서부터였다.34) 공양학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이전「與江子屛 牋」을 통해 고증학에 대한 강력한 불만을 토로하고 또「明良論」(1814),「乙丙之際 箸議」(1815-1816)를 통해 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개혁의 뜻을 품고 있던 龔自珍에게 經世學이자 실천적 개혁론의 이론적 기반이 되는 공양학은 새로운 학문적 돌파구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시기가 常州學派와의 첫 만남도 아니고35) 공양학 개념에 대한 첫 접촉도 아니었지만36) 劉逢祿의 해석37)에서 드러난 광범위한 암시와 공양학의 개혁 이념에 흥이 돋우어진 龔自珍은『公羊春秋』를 집중적으로 공 부하며 그 주요 개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38) 그리고 龔自珍이 1823년과 1825년 에「五經大義終始論」과「古史鉤沈論」을 각각 완성시켰을 때 공양학의 개념을 경전 의 해석에 적용하게 되었음이 비로소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공자진은 劉逢祿을 통해 공양학을 수용하면서 이것이 좀 더 편리하게 자신의 사회 개혁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임을 발견하였다. 劉逢祿의 말을 빌리자면, 금문경학 의 微言大義는 “이로써 모든 경서를 꿰뚫으면(貫經書) 가는 곳마다 그 근원을 알아내 지 않음이 없고, 이로써 몸가짐을 바르게 해서 세상을 다스리면(持身治世) 선왕의 도 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공자진은 금문경학의 “持身治世”를 중시하여 자신의 정치주장을 피력할 무기로서 활용했던 것이다.39)
33) 조병한,「淸 乾嘉朝 이래의 經世사조 부흥 -考證學 융성기의 桐城 古文派와 常州 公羊學-」
(『明淸史硏究』6, 1997), p.157.
34)「定盦先生年譜」,『全集』, p.603.
35) 臧庸, 顧汝明, 孫星衍, 惲敬, 趙懷玉과 같은 상주 학자들은 段玉裁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 여 소주에 있는 段玉裁의 거처를 자주 찾았으며 阮元이 절강성 순무로 재임하는 동안 항주로 초 빙되어 학문활동을 펼쳤다. 龔自珍은 10세가 될 때까지(1792-1802) 살았던 항주에서 이들을 접 할 수 있었으며 1812년에서 1815년 사이에는 소주에 있는 段玉裁의 집에서 이들을 만날 수 있 었다(Judith Anne Whitbeck, The Historical Vision of Kung Tzu-Chen(1792-1841),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Ph.D. dissertation, 1980, pp.20, 74).
36) 1815년에서 1816년 사이에 쓰여진「乙丙之際箸議」에서는 이미 공양학의 三世說을 빌려 쓰 고 있음을 볼 수 있다(乙丙之際箸議第九」,『全集』, pp.6-7).
37) 劉逢祿에게 있어 공양춘추학은 성인 공자의 경세학으로서 성인의 도를 배워 행하고 그 발자취 를 계승하고자 하는 학문이었다. 劉逢祿에 의하면 그러한 성인의 도는 五經에 완비되어 있고 그 가운데에서도『春秋』가 바로 오경 이해의 열쇠였다. 따라서 오경의 개별화된 고증으로 경학의 분해를 촉진한 고문경학의 연구법에 비해 劉逢祿의 금문경학은 春秋學의 義理를 중심으로 오경 의 통합적 이해를 추구하였다. 이처럼 劉逢祿의 공양학은 주자학 쇠퇴 이후 새로운 정치적 의리 학의 원형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현실적 경세의식과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劉逢祿,「春秋公羊釋例序」,『劉禮部集』, 卷3, 22a-23a).
38) 龔自珍은 劉逢祿을 만나 그로부터 공양학에 심취하게 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시로 읊었다.
“昨日 劉禮部(劉逢祿)를 상봉하니 高言大句가 더할 수 없이 유쾌하다. 君을 따라 虫魚學(고증학) 을 태워 없애며, 즐겨 東京(낙양) 賣餠家(공양학자)가 되리라”(「雜詩, 己卯自春徂夏, 在京師作, 得十有四首」,『全集』, p.441).
39) 陳銘,『龔自珍評傳』, p.75.
금문경학의 微言大義 방식은 유학경전을 해석하는 것에서부터 朝政을 논의하고 현 실을 비추어 내는 데에 이르기까지 공자진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주었고 그의 사유 방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경학과 관련된 공자진의 저술 중 금문경학의 미언대의 수 법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으로는「春秋决事比自序」,「春秋决事比答問」,「大誓答 問」등을 들 수 있는데 그 중「春秋决事比答問第五」에서 공자진은 공자가『春秋』를 지은 원인을 해석하던 중 ‘天下必變의 常理’를 도출해 냄으로써『公羊春秋』의 ‘引伸 方式’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공자진은 공양학 개념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劉逢祿의 해석을 통해 何休의 三科九 旨說40)을 수용하였다. 유봉록은 공양학의 삼과․구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存三統(通三統)’의 科에 ‘故宋(商)’․‘新周’․‘據魯(當新王)’의 旨가 있고, (2) ‘張三世’
의 科에 ‘所傳聞의 世’․‘所聞의 世’․‘所見의 世’라는 세 시대의 旨가 있는데, 세 시대마 다 각기 ‘撥亂始治’․‘進升平’․‘見治太平’의 뜻이 있고 또한 ‘三世異辭’의 뜻으로 각 시대 마다 ‘殺其恩’․痛其禍‘․微其辭’라는 뜻이 있다. (3) ‘異內外’의 科에 ‘內其國’․‘外諸夏’․‘內 諸夏外夷狄’의 旨가 있다. “存三統(通三統)”의 지침은 왕통 계승론에 그치지 않고 三 代 정통왕조(夏․商․周)의 제도를 겸용하여 새 왕조의 개혁에 상호 참작한다는 뜻도 있 었다. “張三世”의 지침은 동란을 다스려 평화를 이루며, 궁극적으로는 태평의 실현을 지향한다는 뜻이며, “三世異辭”의 지침은 “春秋筆法”을 지적한 것으로 삼세의 시기에 따라 초기에는 直書, 당대에는 微詞를 쓴다는 것이다. “異內外”의 지침은 天子가 “대 내의 근본 문제를 존중한다.”는 이념으로서 천자의 內政에는 爵祿 수여, 관리의 임면, 반적 토벌, 복수, 行權, 禪讓 같은 義理가 있다.41)
龔自珍은 이러한 공양학의 삼과․구지 중에서 특히 ‘三世’에 치중하였는데 이는 청 중엽 이래 공양학의 중점이 ‘內外’와 ‘三統’에 있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선구적이라 할 수 있었고 또한 그의 經世 史論 형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이었다. 즉 龔自珍 은「五經大義終始答問八」에서
묻건대, 禮運의 文은 上古를 據亂으로 삼아 쓰여 졌고, 中古를 升平으로 삼았다. 春秋의 當興王일 것 같으면, 首尾 겨우 240년인데 무엇 때문에 三世를 갖추었는가? 답하노니 고 금을 통틀어 三世라 할 수 있다. 春秋의 首尾도 역시 三世이다. 大橈가 甲子를 만드니, 一 日도 역시 그것을 쓰며, 一歲도 역시 그것을 쓰며, 一章(76년)一蔀(19년)도 역시 그것을 쓴다.42)
라고 하여 문답식의 형태를 빌어 三世를 긍정하였다.
공자진은 공양학의 張三世를 받아들여 삼세설을 전개하게 되면서 변화와 순환을 중
40) 何休의 三科九旨는 故宋․新周․以春秋當新王의 存三統(通三統), 所見異辭․所聞異辭․所傳聞異辭의 張三世, 內其國而外諸夏․內諸夏而外夷狄․夷狄進至于爵의 異內外(風內外)를 말한다(『十三經注疏』
6冊(京都: 中文出版社, 1971), p.4778).
41) 劉逢祿,「春秋論」下,『劉禮部集』卷3, 19b-20b.
42) 問 : 禮運之文, 以上古爲據亂而作, 以中古爲升平, 若春秋之當興王, 首尾才二百四十年, 何以具三 世? 答 : 通古今可以爲三世, 春秋首尾, 亦爲三世. 大橈作甲子, 一日亦用之, 一歲亦用之, 一章一蔀 亦用之(「五經大義終始答問八」,『全集』, p.48).
시하는 역사인식을 형성하였다. 그는 역사가 據亂, 升平, 太平의 三世를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순환,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였다.43) 3단계의 역사 발전법칙은 世界와 만물이 계속하여 변화한다는 인식에도 적용되었다. 즉 그는 “天道는 10년이면 小變이고, 백년이면 大變이다.”44), “天運 10년에 小變하고, 人事도 역시 그러하다”45) 고 말하며 천도와 천운의 변화에 따라 人事 또한 이에 상응하여 변화한다고 생각하였 다. 이러한 변화의 인식은 경전에 대한 해석 속에서 만물 운행의 원리를 파악하는 데 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즉 공자진은「春秋决事比答問第五」에서『春秋』를 지은 원인 을 해석하던 중 ‘天下必變의 常理’를 도출해 냄으로써『公羊春秋』에서 전개하는 변화 의 세계관을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春秋는 어떻게 지어졌는가? 십에 팔구는 人倫의 변화에 대해 적은 것이다. 크구나, 변함 이여! 父子가 변하지 않으며 慈孝를 탐구할 수 없다; 君臣이 변하지 않으면 忠孝의 종류를 밝혀내지 못한다. ; 夫婦가 변하지 않으면 閨門의 덕을 말할 수 없다. 精義가 절묘하면 致 用이다; 사물을 비교하고 같은 종류를 연이으면 그 錯綜을 높일 수 있다.46)
『公羊春秋』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개념인 변화(變)는 공자진의 개혁사상을 이루는 핵심부분으로, 그는 세상과 人事가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만큼 정치제도와 정책의 실 시 또한 이에 상응하여 반드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1822년과 1823년 사이에 지은「壬癸之際胎觀」중에 드러났는데, 공자진은 반복하여 凝固, 膠結, 不變이 국가의 파괴와 가정의 쇠망을 가져올 것이라 주장하였다.47)
또「五經大義終始答問九」에서는
묻건대, 무엇이 순전한 太平의 書인가? 답하노니 禮는 古經을 節文해 보면 상세하다. 賓 에 대해서는 더욱 상세하다. 무릇 賓師는 八政 중 최후의 것이다. 士禮 17篇은, 순전한 太 平의 말이다.48)
고 하여「五經大義終始答問八」과 더불어 據亂→升平→太平이라는 변화과정을 기본으 로 하여 공양학의 삼세설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의 삼세설은
「乙丙之際箸議」를 쓸 때인 1816년과는 그 순서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 다. 즉「乙丙之際箸議 第九」에서는 시대의 구분과 衰世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43)「五經大義終始論」,『全集』, pp.41-46.
44) “天道十年而小變, 百年而大變”(「擬上今方言表」,『全集』, p.308) 45) "天運十年而小變, 人事亦然."(「在禮曹日與堂上官論事書」,『全集』, p.327)
46) “春秋何以作? 十八九爲人倫之變而作. 大哉變乎! 父子不變, 無以窮慈孝之隱; 君臣不變, 無以窮忠 孝之類; 夫婦不變, 無以發閨門之德. 精義入神, 以致用也; 比物連類, 貴錯綜也”(「春秋決事比答問 第五」,『全集』, p.63).
47) “大兵大札, 起于肉食, 大亡大哀, 起于莞簞. 大薄蝕, 大崩竭, 起于膠固”(「壬癸之際胎觀」,『全 集』, p.16).
48) 問 : 孰爲純太平之書? 答 : 禮古經之於節文也詳, 尤詳於賓. 夫賓師, 八政之最後者也. 士禮十七 篇, 純太平之言也(「五經大義終始答問九」,『全集』, p.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