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67.
63) 陳恒富,「龔自珍與今文經學」,『浙江學刊』第2期(1983), 40~41쪽.
64) 陳恒富,「龔自珍與今文經學」(『浙江學刊』第2期, 1983), 復印報刊資料 中國現代史, 1983. 5, pp.40-41.
65)「與陳博士箋」,『全集』, p.346.
66)「大誓答問第二十四」,『全集』, p.75.
67)「六經正名」,『全集』, p.36.
68)「古史鉤沈論二」,『全集』, p.21.
69)「古史鉤沈論二」,『全集』, p.23.
70)「五經大義終始答問一」,『全集』, p.46.
淸朝의 전기에서 중기에 이르는 康熙, 雍正, 乾隆 삼대의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시 작된 인구증가는 사회경제적, 생태학적 변화를 가져 왔으며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龔自珍(1792-1841)이 활동했던 19세기 상반기는 乾隆 (1736-1795)의 성세를 끝으로 거대한 사회적 변화의 과정 속에서 淸朝가 황혼으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비록 경지면적과 인구의 증가와 같은 표면적 지표로 볼 때는 乾嘉 盛世(1736-1820)라 표현할 정도로 국가의 번영이 지속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미 건 륭 말기부터 물가가 오르고 토지의 집중화 현상이 가중됨으로써 빈부의 대립이 극심 하게 되어 농민반란이 시작되는 등 사회 혼란이 표면화되고 있었다. 즉 건륭연간 (1736-1795)의 淸水敎 반란을 시작으로 서북의 回族 및 撤拉族의 반란, 대만 天地會 의 반란, 苗民叛亂을 거쳐 가경연간(1796-1820)의 白蓮敎의 대반란으로 이어지고 있 었던 것이다.
공자진은 청조가 治世를 지나 衰世에 접어든 것으로 진단하였다. 대내적으로는 경 제가 악화되어 농민반란이 빈번히 일어났지만 각급 관리들은 가렴주구에 여념이 없었 고 황실 또한 허식에 물들어 쇄신의 기운이 없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서북 변경지역 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이 가시화되고 있었고 동남 연해에는 영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열강들이 아편을 밀수하여 중국의 白銀이 대량으로 해외에 유출되고 있었다. 이는 청 조의 통치 집단에서부터 일반 농민에 이르는 모든 계층이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혼란 의 한 가운데에 휘말려 있었으며 이를 틈타 외국 세력들이 정치적, 경제적 침략을 진 행함으로써 결국 영토의 보전마저 위태로운 상황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공 자진은 당시 청조 사회를 해부하여 쇠세로 접어든 원인을 정치와 사회상에서의 부패 와 부조리, 부의 불공평한 분배, 잘못된 행정정책, 관료사회의 도덕적 해이, 형식화된 행정제도의 모순, 변경정책의 실패, 아편밀매와 은화유출 등에서 찾고 이에 대해 날선 비판의 칼날을 주저 없이 휘둘렀다.
龔自珍은 어려서부터 외조부인 段玉裁의 영향을 받으며 古文經學의 소양을 쌓았다.
뿐만 아니라 段玉裁와 친분관계에 있던 常州의 학자들과도 교왕하면서 今古文 절충의 家學 전통을 어느 정도 이어받고 있었다. 小學으로서의 考證學은 공자진의 사상 형성 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고 다양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皖派의 학문 전통은 가학을 통 해 공자진에게 전해져 이후의 학문 연구와 사상 발전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공자진은 今文學者이기 이전에 古文學者였으며 今古文學을 절충하는 그의 학문 경향은 乾嘉 고 증학의 세례를 받고 있던 당시에도 漢學과 宋學의 방법과 대의를 함께 추구하던 태도 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교적 초기부터 經世致用에 뜻을 두면서 사회비판사상을 키워나가던 龔自珍에게 공양학 이론은 經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이끌어 내었을 뿐 아니라 그의 세계관과 사회관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그는 경전해석에 드러난 역사관과 ‘史’에 대한 인식을 통해 衰世 사회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주장할 이론적 무기를 발 전시키게 되었다.
공자진은 공양학의 張三世를 받아들여 三世說을 전개하게 되면서 변화와 순환을 중
시하는 역사관을 형성하였다. 그는 역사가 據亂, 升平, 太平의 三世를 거듭하면서 끊 임없이 순환,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변화(變)는 공자진의 개 혁사상을 이루는 핵심부분으로, 그는 세상과 人事가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만큼 정치 제도와 정책의 실시 또한 이에 상응하여 반드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공자진 의 역사관을 관통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인식은 순환론이었다. 자신이 받아들인 3단계 의 역사발전 원칙에서의 순환․발전은 각 단계의 시대와 사물에 있어서도 그대로 체현 되고 있음을 공자진은 인지하였다. 따라서 공자진은 그의 역사관과 ‘史’論을 통해 ‘士’
가 ‘史’로서의 가치를 높여 禮와 道를 지켜나가는 것이 衰世 사회를 바로잡을 방안임 을 제시하였고 臣이 ‘賓’으로 대우받게 될 때 비로소 太平世에 이르게 된다는 역사적 시각을 드러내었다.
龔自珍에게 있어서 공양학은 순수 經學의 차원을 벗어나 經世와의 연장선상에서 일 종의 목적론으로서 흡수, 이용되었다. 이처럼 공양학은 龔自珍에게 있어 포괄적 經世 學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공양학이라는 사상적 근저가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 제시된 대담한 개혁론이 개진될 수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공 자진의 經世思想의 형성에 있어서 공양학의 이론 요소가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통 해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역사의 발전을 위해 현재 사회의 병폐를 개 혁해야겠다는 지식인의 사명 인식에도 일정한 작용을 하였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