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자유로운 학술회의를 통한 해법 모색
IPR의 목적은 아시아 · 태평양 지역 여러 국가간 이해와 친선을 증진시키고 상호간 평화로운 관계를 한층 공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IPR회의는 각국 기독교청년회 주체로 성립되어 종교주의 · 평화주의로 모여 이상주의로 치우치지 않을까 염려도 되었던 ‘순 수하고 사적인 단체’이다. 정부나 특정 세력의 구속을 받지 않고 오로지 전문가와 학 자 개인의 의견을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IPR회의에 참가하는 모든 참석자들이 IPR에 대해 항상 긍정적인 생 각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친밀하지 않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토론을 통해 얼마나 목적에 부합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2년마다 개최되는 IPR회의의 국제사무국과 태 평양 위원회의 내적인 관계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일부는 IPR회의의 연구 중요성에 대해서도 의심하였고, 국제 프로그램 위원회에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해서 도 궁금해 하였다. 또한 국제사무국이나 연구조사 위원회 또는 개별 국가위원회와 얼 마나 잘 융합하고 있는지도 궁금해 하였다. IPR에 대한 의심과 믿음 등이 뒤섞인 가 운데서도 IPR은 당대의 가장 뜨거운 주제를 선정하며 회의를 이어나갔고 해법을 모색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둘째, 민감한 현안을 토론하는 대담성과 혜안
IPR회의의 주제는 아시아 · 태평양 국가들의 입장에서 고려하여 중요한 문제를 선 정하였는데 그 범위에는 특별한 제한이 없었다. IPR의 첫 번째 회의였던 1925년 호 놀룰루 회의는 “외교적으로 너무 민감한 문제를 토론”한다는 평가도 나왔다. 1924년 미국 이민법이 통과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이 이에 대해 상당히 반감이 있는 상태 였고, 1925년 샹하이에서 5월 30일 사건이 있는 상태에서 중국 전역으로 반외국인 감정이 드높아 있던 상황인데 IPR에서 이민 문제를 논의하였던 것이다. 태평양에서의 식량과 인구 문제도 더불어 논의하여 ‘친선의 모험’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적인 이슈에 대한 솔직한 표현과 의견은 회의 분위기를 소란스럽게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상호 존중과 이해의 폭이 넓어져 갔다고 할 수 있다.
1927년 제2회 IPR회의에서는 특히 영국 그룹이 깊이 관심을 가졌던 중국과 열강과 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당시 중국에서 반외국정서가 상당히 현안으로 대두 되었던 것이다. 1929년 제3회 IPR회의에서는 중국과 일본에게 가장 이슈가 되었던 만주문제가 핵심이었고, 1931년 제4회 IPR회의에서는 태평양국가의 국제 경제 관계 와 중국의 외국 관계가 핵심이었다. 비록 민감한 이슈들의 대한 토의가 이어져갔지만 비공식적 토론에 대해 상당히 만족해 하였고, 상호 이해도가 상승되었다는 것이 일반 적인 평가이다.
그러나 항상 즉각적인 갈등과 분쟁에 대한 것만을 연구하는 것은 아니고 근본적으 로 새로운 환경을 창출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IPR의 연구 는 표면적인 현상에 대한 연구 뿐만 아니라 시간의 따른 현상의 변화나 움직임도 포 착하려고 하였다.
셋째, 학문의 정치화 배제
IPR은 비록 국제간 현안이 되는 문제나 각국의 대내외적인 정치문제를 고려하지만 토론이 정치화되는 것은 극히 배제하였다. 회의에 참가하는 사람에 대해 특별한 제한 을 두지는 않아 외교관 · 정치가 · 학자 · 기업가 · 교육가 · 종교가 모두 가능하지만 어떠한 위원도 각국 정부나 국민을 대표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IPR회의야말로 토론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진정한 의미의 원탁회의로 각국의 지식인이 국제적인 간담회 및 다과회를 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구주제가 과학이나 다른 학문 영역도 아니고 정치 현실의 경우 각 위원은 자국 정부를 대변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IPR회의가 표면적으로는 정부와 어떠한 교섭도 없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 문제 등에 있어서 각 그룹의 중견자 들은 정부와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하고 각국정부를 대변하는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으 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공무원도 아닌 자연인으로 개인적으로 참여하여 논의하였지만 각국의 정책을 변호하면서 논쟁하기도 하여서 IPR의 존재가치 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PR은 외교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교육적인 측면이 강조 되었다. 일차적으로는 회의에 참여하는 개인이 교육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 개
인의 역량에 따라 주변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정도까지 부산물로서 교육이 되는 것이었다. IPR은 조사된 내용을 바탕으로 토론을 하는 것이지 정책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IPR회의에서 논의하는 내용의 중요성과 대표성이 각국에서 관심을 받게 되고 국가 간 외교관계도 중시되면서 학식과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이 대거 참가하였다. 각국에서 상당히 학식이 있는 자들이 모여 태평양의 평화 확립과 태평양 여러 국가간의 관계를 융합하고 친선을 도모하려는 목표가 있었기에 회의 자체가 유익하고 효과가 있었다.
IPR회의에서 특정 문제를 논의하면서 국가간 이해와 친선을 증진시키는데 노력하지만 어떠한 사안에 대해 특별하게 결의하지 않는 것이 이 회의의 특징이었다.
‘정치적으로 들에 핀 백합화’라고 불리는 IPR회의는 사실에 기반한 학술적 연구와 실제문제 등을 연결시키는 것이 본래의 사명이므로 회의에서 주어진 의제를 학술적으 로 연구하고 토론하지만 일국의 외교 방침을 추진하거나 국위를 선양하는 것이 아니 기 때문에 의결하지 않았던 것이다. 회의 참석자는 자신 스스로를 대표하는 것이므로 국가적 위상을 두고 싸울 필요도 없으며 적극적인 이익이나 결과를 위해 노력할 필요 도 없었다.
IPR 강령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본래의 사명은 국민외교라는 명목 하에 국가외교정 책에 간여하여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므로 사실에 기초하여 조사하고 공개강연 및 원탁회의를 통해 진솔하게 논의하여 문제점을 확인하고 비판하였다. 특히 제3회 교토대회에서 중 · 일간 만주 문제를 둘러싸고 진솔하게 접촉했던 것은 양국 언론계 · 교육계 · 정치 및 경제 실업가의 심리와 융합하여 특정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파악하 였다. 대화의 진솔함을 확보하기 위해 비밀을 유지하기도 하는데, 이는 현대적 자유사 상과 본질적으로도 부합되는 것으로 보았다. 논쟁의 효과 여부는 각국의 판단에 따라 서로 다르게 평가되지만 상호 이해도를 제고한다는 차원에서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 하였다.
IPR회의의 중점은 원탁회의로 형태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보면 객관적이고 학술적으 로 기탄없이 토론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탁에 참석하는 자는 엄정하게 유자격자에 국 한하였다. 국제문제가 무비판적으로 단순히 국민감정에 호소되면 불행한 충돌을 야기 할 수 있기 때문에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문제의 본질을 검토함 으로써 국민 감정도 반성하고 숙고하여 문제의 해결이 합리화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에 공헌하려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IPR회의의 본래 목적을 잘 지켜서 IPR회의 그 자 체가 정치화 되는 것을 막고 경제 및 기타 가면 하에서 정치화 또는 선전용으로 활용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철저하게 경계하였던 것이다.
넷째, 철저한 조사와 연구에 바탕한 논의
IPR회의는 주제를 정하여 일정 기간 동안 조사하고 연구한 것에 대해 논의하는 학 술회의로 전문가가 특정 사안에 대해 고증한 것일 뿐이므로 일국의 외교 방침을 추진 하거나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 정책화하고 실행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 회의에 참 석하는 학자나 전문가들은 회의석상에서의 탁상공론에만 그치지 않고 국제관계를 촉
진하고 의례를 교환하면서 각국에 상설된 조사기관으로 하여금 사실에 기반한 조사연 구를 하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생산된 자료(Data Paper)는 IPR토론의 준거로 삼았고 이를 기반으로 회의의 의제(Agenda)를 만들었다.
그러나 IPR회의의 영향력은 단순하지 않았다. IPR회의에 참가하는 위원은 어떠한 단체나 국가도 대표하지 않지만 제2회 IPR회의에서 논의된 부전조약과 같이 몇 개의 경위를 거쳐 실제화 되기도 하였다. IPR회의 당시에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던 영국 의 수석으로 호놀룰루 회의에 출석한 프레드릭(Sir Frederick Whyte)은 런던에 돌아 가 영국의 대중국정책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다섯째, 국제적으로 위상제고를 위해 노력
IPR회의는 국제적이면서 국가적 차별이 없고 국가적이면서도 국제적이라고 평가된 다. 국제적이라는 것은 배타적이지 않고 국제적으로 차별대우가 없다는 것은 그 기초 가 국가적으로 평등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국가적 차별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개별 국가로 인정을 받지 못해 제3회 대회부터 자국 명의로 IPR회의에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없도록 제한하기 도 하였다.
조선이 참여할 수 없게 된 계기는 일본이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IPR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여 헌장을 개정하였기 때문이다. 한 때 조선자치론을 주장하기도 했던 소에지마 (副島道正)는 조선인이 IPR회의에 독립된 그룹으로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 이 유로, ① 조선에 자치제가 선포되었다면 모르지만 조선은 아직 일본 내지의 연장 속에 서 통치되고 있는데 IPR에 조선을 독립적으로 참가시키는 것은 일본 통치상의 문제로 고려해 보지 않을 수 없다. ② 제1차와 제2차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IPR회의에 참가했 던 조선대표의 태도에 유감이었는데, IPR본부가 식민지 조선과 일본을 하나의 단위로 하여 초대 자격을 변경하였기 때문에 조선은 참가할 수 없다. 이상의 이유를 제시한 그는 “조선인이 건실한 사상으로 일본인의 통치를 환영하고 온건한 상식으로 자제심 을 갖고 하루라도 빨리 자치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민족을 위하는 것”이라 고 훈수를 두었다.
이러한 일본의 저지에 맞서 조선은 IPR 헌장 개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윤치호와 송 진우 그리고 기타 3명의 조선인은 1931년 9월 30일 경성에서 교토로 IPR헌장개정안 문제를 제출하였고 호놀룰루 본부에서는 전보로 각국에 통첩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대 해 일본은 “조선은 일본과 더불어 하나의 단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헌장에서도 명시한 바이므로 조선은 헌장개정안을 제출할 권리가 없다. 만약 헌장 개정을 희망한 다면 일본 IPR이 그 안건을 찬성하였을 때 제출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조선 이 IPR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였는데, “조선인이 일본IPR의 이사나 평 의원으로 참가하여 일본과 조선이 화해하고 또 중국과도 융화하여 상보 상조 한다면 제4회 회의는 물론 장래 회의에서 동양 민족을 위해 크게 분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일본의 적극적인 반대로 제3회 IPR회의에 조선인이 참석하였음에도 불 구하고 대표 자격을 얻지 못해 공식적으로는 대표자 명단에 들어갈 수 없는 수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