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동아시아학의 창출
아시아학을 탄생시킨 조부는 누구일까?
하버드대학 존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교수는 “향후 신진연구자들에게 조부 가 누구인지 알려줄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IPR이다. 그러나 IPR의 동아시아 학 창출이 모두의 축복과 기쁨 속에서 탄생한 것은 아니다. 아시아의 저지와 반대가 있었다.
서양의 관점으로 보면 IPR이 아시아학을 탄생시킨 공로자이겠지만, 중국에서는 IPR 을 ‘제국주의자의 어용기구’라 하였고, 이에 참여하는 위원을 ‘제국주의자에 영합하는 주구’라고 부르며 거부감을 내비치기도 하면서 IPR회의 개최를 강력하게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4회 IPR회의가 중국에서 개최되기도 하였다. 중국은 국 제적인 충돌이 심할수록 평화를 위한 노력이 더욱 가중되어야 하므로 국제문제에 대 한 상호 이해를 기초로 장래의 성공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제국주의자의 어용기구인지, 국제적으로 평화를 위해 노력한 기구인지, IPR이 추구 하는 ‘본의’가 어떻든 간에 IPR은 식민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공격에서 자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물론 한계는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식민지 국가였던 조 선과 필리핀 등이 참가하여 국제 회의를 개최한 것은 정치적 세력의 크기를 넘어서서 세계적으로 아시아 · 태평양 문제를 더불어 논의하였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찾아 볼 수 있겠다.
IPR 활동의 결과, 아시아 · 태평양지역은 하나의 지역권으로 인식될 수 있는 학문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오늘날의 ‘환태평양’이라는 개념도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 었고, 이는 서양에서 동아시아학을 형성하는데 기초를 이루었다.
둘째, 동아시아학의 체계화에 기여
192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당시 서구에는 아시아 및 태평양에 관련하여 어떠한 체 계적인 학문이나 대학원 프로그램 · 연구소 · 전문학회 · 정규적인 회의 · 관련 도서 자료실 또한 없었다. 조지 허바드 블라커스리(George Hubbard Blakeslee, 1871–
1954), 스탠리 컬 혼벡(Stanley Kuhl Hornbeck, 1883-1966), 케네스 스캇 라토렛 (Kenneth Scott Latourette, 1884–1968)등 일부 학자들은 관련 분야 연구를 위해 노 력하였지만 학과에서 가장 기초적인 코스를 제공할 정도의 체계도 갖추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20년대부터 1950년대 말 까지 IPR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에는 거의 IPR 홀로 이러한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아시아 태평양과 관련된 이슈에 대한 시리즈를 출판하고 회의를 개최하였으며 관련 주제에 대해 연구 프로그 램을 활성화시켜 서구에서 근현대 아시아 태평양 연구의 기초를 다져 놓았다. 다른 어 떠한 기관도 IPR같이 학문적 영역에서 크게 공헌한 조직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로싱 벅스(J. Lossing Buck)의 『중국의 토지 활용(Land Utilization in China)』, 조지 카힌(George McT. Kahin)의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와 혁명 (Nationalism and Revolution in Indonesia)』, 펠릭스 키싱(Felix M. Keesing)의
『현대 사모아(Modern Samoa)』, 오웬 라티모아(Owen Lattimore)의 『중국의 아시 아 내륙 변경(Inner Asian Frontiers of China)』, 허버트 노만(E. Herbert Norman) 의 『근대 국가 일본의 출현(Japan’s Emergence as a Modern State)』, 리차드 타 우니(Richard H. Tawney)의 『중국의 토지와 노동력(Land and Labour in China)』, 존 페어뱅크(Teng Sse-yu and John King Fairbank)의 『서양에 대한 중국의 응전 (China’s Response to the West)』 등은 중요한 저작으로 꼽히는 것이다.
“분파와 갈등 그리고 선전이 없는” 회의로 선언이 된 IPR은 기본적으로 문화 교차 적인 접촉과 개인적인 의견교환에 집중하였다. 미국 매카시즘(McCarthyism)의 희생 양이 되기까지 많은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성과를 내었는데, 30여 년간 존재하며 활 동했던 IPR의 역사적 의의는 아시아 관련 학문을 진작시키고 관련된 저서를 많이 출 판한 것이다. 특히 1930년대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던 시대에 동 아시아학 관련 대학출판사가 유아기를 걸었을 그 당시에 IPR 출판물을 통해 상업적 출판을 확대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동아시아 관련 학문을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하 였다.
셋째, 동아시아 관련 자료 수집(집대성)
IPR은 자체적으로 하와이 대학에 도서관도 운영하였다. IPR 도서관의 가치에 대해 서는 1930년 6월 26일 제네바에서 콘드리페(Condliffe)가 카터(Carter)에게 보낸 서 신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중앙사무국 키싱(Keesing)의 편지 내용을 인용하여 "IPR 도서관은 매우 독특하며 소장하고 있는 자료가 모든 미국 도서관을 훨씬 능가하는 것 으로 규모가 작은 것은 일시적인 문제이다. 비숍 박물관에서도 IPR보다 더 나은 자료 를 얻기 힘들다. 이곳에서 제공되는 모든 것은 다른 곳에서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 다.
또한 이 도서관을 활용해 본 그래햄(Graham H. Stuart)은 1930년 12월 16일에 IPR도서관의 캐스린(Kathleen Muir)에게 편지를 보내 “IPR도서관은 국제관계를 배우 는 학생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가치 있는 자료로 가득하다. 사실상 태평양 지역 관계에 대해서 이곳의 수집 자료는 이례적인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파푸아 · 뉴기니아 · 피지를 연구한 맨더(L. A. Mander)는 1931년 6월 13일의 편 지에서 “특히 태평양과 관련된 국제관계 자료가 상당히 가치 있어” 연구에 도움이 되 었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수업 중에 학생들이 읽어야 할 도서가 오직 IPR도서관에 있어서 협력이 불가피하다”고 피력하였다.
이상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IPR도서관의 자료는 당시 세계 각 국에서 출판되는 아시아 태평양 관련 자료를 집중적으로 모아 작지만 특색 있는 도서 관으로 해당 전문가들의 연구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였다.
넷째, 동아시아학의 변화
아시아 · 태평양 연구의 서막을 열면서 국제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던 IPR은 미국에 불어 닥친 매카시즘의 열풍과 결정적으로는 록펠러 재단이 더 이상 재정지원 을 하지 않게 됨으로 경제적으로 조직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활동하기 어렵게 되 었다. 미국에서 매카시(McCarthy)가 활동했던 시기 IPR은 미국 극동전문가들이 직접 적으로 관심을 받는 하나의 정치적인 현상이었다. 특히 아시아관련 저작물이 출판되면 더욱더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소위 반공산주의 열풍이라는 1950년대 미국의 국내 정 치적 현상은 직접적으로 아시아 · 태평양을 연구하는 학문 그 자체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IPR은 1960년 말에 해체되고, 미국위원회는 1962년 2월에 해체되었다. 그러 나 다른 국가의 경우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World Affairs Council’이 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아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는데, 호주 ․ 캐나다 ․ 영국 ․ 인도 ․ 네덜 란드 · 뉴질랜드 · 파키스탄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지역적인 조직이 살아남은 경우도 있는데 미국 서부지역은 ‘World Affairs Councils’로 호놀룰루 지역은 ‘the Pacific and Asian Affairs Council’로 개명되었다. 또한 IPR의 기관지인 Pacific Affairs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이, Far Eastern Survey는 버클리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이 출판을 담당하였다.
30여년간 집중적으로 아시아학을 생산해 오던 IPR이 해체됨으로써 특정 주제를 조 사 연구하고 논의하던 분위기는 변화하였지만, 각국에 남아 있던 IPR 조직들의 변신 과 계승을 통해 아시아학은 나름대로 변화 발전해 나갔다고 할 수 있겠다.
다섯째, 동아시아 연구자(관심) 확대
세계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국제적인 회의를 통해 해결책을 찾아 보려는 이러한 분 위기는 당시 대학생들에게도 전이되어 학생을 중심으로 한 SIPR조직(Student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이하 SIPR)이 활동하기도 하였다. 기본적인 방법과 목 적은 IPR에서 출발되었는데 학생조직은 1926년에 조직되었다. 대학생들이 모여 태평 양지역에서 당면하고 있는 경제 ․ 인종 ․ 문화 ․ 정치적인 문제를 연구하고 토론 하는 모임이다. 이 조직은 100여명의 멤버로 제한하였고 샌프란시스코 베이(San Francisco Bay) 근처 지역의 다양한 대학에서 모이는데 호주와 뉴질랜드를 제외한 태평양 주요 국가들의 학생과 유럽지역의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SIPR은 이를 운영하는 영구적인 조직이 없지만 매년 회의를 개최하는 4일동안 스 폰서 해 주는 Council(Sponsoring Council)단체의 책임 하에 개최되었다. 대표적인 그룹으로는 세계 클럽(Cosmopolitan clubs), 국제관계클럽(International Relations Clubs), 각국 학생회(Student National Clubs), 기독학생회(Student Christian Associations), 그리고 각 대학의 학생회에서 참여하였다.
1931년 제6회 SIPR은 북부 캘리포니아 나파(Napa) 근처 로코야 로지(Lokoya Lodge)에서 개최하였는데, SIPR에서도 1931년 10월 샹하이에서 개최되었던 제4회 IPR회의의 중요한 의제였던 만주문제를 논의하였다. 일본 · 중국 · 유럽 · 미국 학생 들이 토론에 참석하였는데, 이들은 만주의 실질적인 경제 및 정치상황에 대해 정확하 게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SIPR에서는 만주의 어려운 문제에 대해 해결 가능한 방법을 고려하는 것 보다 현상 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중심으로 중국 · 일본, 그리고 세계 각국의 관점이 논의되 었다. SIPR은 태평양지역의 문제가 민족적 · 감정적인 관점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 에 핵심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과 세계가 상호 이해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즉, IPR의 태평양지역에 대한 관심은 학생들에게도 태평양지역에서 발생하는 현상 에 대해 주의하고 논의함으로써 학술계에서 자연스럽게 동아시아학이 확산되어 나가 는데 기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여섯째, 전후 질서 재편에 기여
1942년에 몽 트랑블랑(Mont Tremblant, Quebec)에서 개최된 제8회 IPR회의는 세 계적으로 전쟁이 한참이던 1942년 당시 전후 평화를 구상하였으며 이를 통해 동아시 아 및 세계질서 재편을 시도하였다.
세계가 전쟁에 휩싸인 상태에서 전쟁 후의 평화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 어떠한 방 법으로 평화를 되찾아 나갈 것인가 등의 과제를 논의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점령과 피 점령인 전쟁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1942년 제8차 IPR 회의는 기존의 회의와는 달리 조직과 멤버 구성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당시 국제적인 환경과도 관계가 깊다. 제8차 IPR 회의 개최를 위해 1939년 버지니아 비치(Virginia Beach)에서 스터디 미팅을 가진 것은 유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