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조선시대 서적 출판기관 교서관
1. , ( 校書館 )
조선은 고려말 성리학을 받아들인 사대부들이 역성혁명을 통해 건국하였기에 조선전기는 중국, 으로부터 성리학(性理學) 서적을 수입하여 이해하고 성리학적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 했다 이에 국가에서는 중앙에 주자소. (鑄字所)를 두어 금속활자를 주조하였다 중국으로부터 수입. 한 다종(多種)의 성리학 서적을 효율적으로 간행하기 위해서는 금속활자의 주조가 유용하였다.
년 태종 에 계미자 만자를 시작으로 년 세종 에는 갑인자 만 1403 ( 3) (癸未字) 10 1434 ( 16) (甲寅字) 20 자를 주조하였다 갑인자는 글자체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이전보다 획기적으로 인출능력을 향상시. 켜 계미자에 비해 배로 인출량이 늘어 하루에 교서관 장인 인이, 4 1 40장을 인출할 수 있었다.
교서관(校書館)은 조선시대 중앙정부의 서적 출판기관으로 여기에서는 전문 장인을 두어 성리학, 서적을 활발하게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교서관에서 간행한 서적은 국가기관에 내려주는 국용. (國用) 과 나라에 공이 있는 사대부 이상 관료에게 반사(頒賜)를 하는 형태로 일부 고위 관료에게 한정적으 로 유통되었다 물론 교서관에서 종이를 받고 인출해 주거나 책가. (冊價)에 해당하는 미( )米나 포( )布 를 받고 판매하기도 하였다.
한편 교서관에서 금속활자로 다종소량, (多種少量)의 서적을 인출하여 지방관아에 활자본을 내려 주고 지방관아에서 이를 목판으로 판각하여 다량 인출하여 보급하게 하는 형태로 서적 보급을 늘, 려갔다.
이러한 방법으로 조선 초기에 중국으로부터 수많은 성리학 서적을 수입 간행하여 보급함으로써· 성리학을 조선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서사 와 방각본 의 출현 2. ( 書肆 ) ( 坊刻本 )
교서관을 중심으로 정부가 주도하여 간행한 서적의 대부분은 중앙의 고위 관료들이 독점하였고, 신진관료층이나 유생층 특히 지방 유생들의 경우는 서적 구입이 쉽지 않았다, .
세기에 이르면 조선 초기부터 교서관에서 간행한 활자본을 바탕으로 지방관아에서 목판으로 16
간행한 지방판본이 급증하면서 지방관아에서 간행한 목판본이 당시 유통되는 서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들 지방 간행본의 유통은 대부분이 사족들 간의 사적인 유대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세기에 이르러 사대부층이 늘어나면서 서적 수요가 증가하게 되자 특히 지방으로부터 서적
16 ,
부족을 호소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이에 중종대에 이르면 조정에서 서사. (書肆)를 설치하여 서적 이 부족한 상황을 해결하려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중종 14년부터 서사 설치가 논의되다가 중종17년에 어득강(魚得江)이 교서관에서 독립된 기구 로서 서적의 매매를 쉽게 할 수 있도록 저자에 서사 설치를 요구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고위 관료들은 교서관 제도 하에서 반사(頒賜)와 제한적인 판매를 통해 서적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위 관료는 서적을 매매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조선의 사대부의 의식. 과 서적을 간행하는데 필요한 재정의 마련이 쉽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서사 설치를 반대하였다 따라.
조선시대 서적상 책쾌 ( ; 冊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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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서사 설치에 대한 논의는 사림 신진관료와 훈구 대신이라는 대립구도로 전개되는 중종대 정국의· · 변화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전개되었지만 중종대에는 끝내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영서사, (官營書肆) 가 설치되지 못하였다.
한편, 16세기 서적 유통의 형태는 이외에도 관청에 소속된 장인이 서적을 인출하여 판매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관청에 소속된 장인에게 종이를 주어 인쇄를 부탁하거나 필사. (筆寫)한 것을 일정 정도의 수고비를 주고 책으로 만드는 형태가 많이 등장한다 또한 서적 수요자 상호간의 교환 및. , 빌려보고 돌려주는 형태도 상당수 등장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서적을 필사해 주고 대가를 받아서. 생활하는 가난한 유생들이 등장하기도 한 것을 보면, 16세기에 조선에서 성리학 서적에 대한 수요 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서적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마침내 개인이 영리를 목적으로 서적을 간행한 방각본(坊刻本)이 년 선조 에 출현하였다 고사촬요 끝 장의 간기에 수표교 아래 북변 이제리의
1576 ( 9) . (攷事撮要) “
수문 입구에 있는 하한수 집에서 목판을 새겼으니 살 사람은 찾아오라 라고 한 것을 통해 이때 방” 각본이 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사촬요 는. 1554 (년 명종 에 어숙권9) (魚叔權)이 편찬한 분류별 백과편람(百科便覽)이라 할 수 있는 책으로 사대부나 관료들에게 유용한 내용을 요점식으로 정리, 하여 당시 사대부들에게 수요가 많은 서적이었다 이 책에는 각 지방에 소장한 책판. (冊板)을 수록해 두었고 하권, (下卷)「서책시준(書冊市准)」에는 유생들이 선호하는 서적에 대한 책가(冊價)와 인출에 필요한 종이 수량을 명시하고 있어 당시 서적의 수요가 증가하고 유통이 활발한 단면을 보여준다, . 이때 방각본을 출판한 곳이 곧 민영서사(民營書肆)라고 하겠는데, 16세기 중반에 등장하는 서사는 책의 판매만을 하는 서점이 아니라 출판사를 겸한 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기록이긴 하지만 김수항(金壽恒)의 문집인 문곡집(文谷集) 에는 김수항이 1684 년 숙종( 10)에 요절한 아들의 시문(詩文)을 엮어서 간행할 때 쓴 발문(題跋)이 수록되어 있는데, 서사의 활자를 빌어서 간행했음을 적고 있다 이때 김수항이 서사의 활자를 빌어서 아들의 시문을. 간행한 것은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 목적에서 간행한 것이므로 방각본은 아니다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17세기 후반에는 서사에서 활자를 갖추고 의뢰를 받아 서적을 간행해 주거나 서적, 을 간행하려는 개인에게 활자를 빌려주는 사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서사에서 활자를. , 갖추고 직접 서적을 간행하거나 목판을 판각 인쇄하여 판매하였다면 이것은 곧 방각본이라고 하겠· , 다.
이후 전라도 태인(泰仁)에서 본격적인 방각본이 출판되는데, 1796년부터 지속적으로 아전 전이 채(田以采)·박치유(朴致維)가 간행한 방각본이 그것이다 이들이 출판한 방각본은 상설고문진보대. 전(詳說古文眞寶大全 ) 등 문인층의 실용서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방각본은 서울. 의 경판(京板)이230여 종 전주의 완판, (完板)이 120 여종으로 가장 많이 확인된다.
조선시대 후기 방각본 출판은 우선 서적 보급을 확대시켰다는 점에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세기 들어 활발해진 방각소설의 출판으로 대중적인 장르의 한글소설이 유행하여 중하층 나름의 19
문자문화를 대단위적으로 향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존 지식과 다른 새로운 지식의 보급이라는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대표. 적인 방각본으로 사요취선(史要聚選) 은 중국사의 내용 가운데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관계 항목을 뽑아 편집한 것인데 글짓기나 과거 준비에 긴요한 서적이었다 그리고 간독정요, . (簡牘精要) ,
제 기 박물관대학15 >
직업으로 본 조선시대 생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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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간독(諺簡牘) 은 쉽게 편지를 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책이다 즉 방각본이 새롭게 출판한 서. 적은 새로운 지식의 지평 을 마련하지는 못하고 기존 지식의 요약적 재생산 의 맥락에서 이해할‘ ’ ‘ ’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중하층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던 상층의 문자문화를 자기화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책쾌 의 출현 3. ( 冊儈 )
그렇다면 책쾌는 언제 출현하였을까?
중종대에 이르러 사림이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며서 성리학 이해가 심화되는 가운데 정부에, 서는 공식적인 사행을 통하여 중국으로부터 많은 서적을 수입하여 성리학 이해를 도왔다 명종대. 이후에는 사신 일행은 물론이고 역관에 의해서 사사로이 서적 수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에. 서도 16세기 중반부터 복건(福建)지역에서 간행되는 서사의 방각본이 급증하였고 이것이 조선에, 활발하게 수입되었다.
중국 사행단은 년에1 1~4회 파견되었고 그 규모는 회, 1 200~350명이 파견되었는데 청대 초기, 조선 사행단은 중국 내 개인활동이 엄금되었으나18세기 중엽부터 상당히 완화되어 서점을 매개로 중국 지식인과 교류 및 서책 구입이 활발해졌다 허균. (許均)은 1614년과 1615년에 중국에 가서 여권의 서적을 사왔고 이의현은 년과 년 연행 때 구입한 서책 목록을 문집에 기록하
4000 , 1720 1732
고 있는데, 1720년에 53종 1416권을 구입하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지방에서 간행되는 지방 목판본이 급증하고 민간에서도 서적을 간행할 수 있는 역량이 성숙한 가운데 중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서적 또한 증가함으로써 국내의 활발한 서적 유통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에 선조 초반에는 책쾌가 등장하여 이들 수입 서적과 국내에서 간행된 서적을 수요자에게 연결 시켜주는 역할을 하였다 책쾌뿐 아니라 중앙과 지방관아의 장인. (匠人)도 서적을 판매하는 역할을 하게 되면서 사적인 서적유통 구조가 확대되어 서적의 유통경로가 다양해지는 서적유통 환경의 변 화를 가져왔다.
세기 후반기의 서적 간행과 유통에서 사적인 환경이 넓게 조성된 것은 서적 수요자가 서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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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하는데 편리하게 작용하였고 이는 더 나아가 당시 서적 수요자층인 사대부의 성리학 이해를, 심화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선조 년에 쓴 유희춘의 일기에 따르면 유희춘이 교정한 주자대전 과 주자어류 는 이전의 것9 , 에 비해 질적으로 우수한 책으로 인정받았기에 지방 수령들이 자제를 위해 사려는 자가 많아 승5 면포 동 필 의 값을 부르는데도 구하지를 못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성리학의 이해 ( )升 (綿布) 1 ( =50 )同 .
가 깊어지고 사대부층이 두터워지면서 서적의 수요가 질적 양적으로 증가한 가운데, 16세기 후반에 는 서적의 매매를 중개하는 책쾌(冊儈)가 등장한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따르면, 1567 (년 선조 즉위년) 10 18월 일 기록에 들으니 경성, “ (京城)의 의금 부(義禁府)의 북쪽에 책쾌(冊儈)가 있는데 이름은 박의석(朴義碩)이라고 하며 모든 곳의 서책을 모두 반가(半價)로 사서 전가(全價)로 판다고 한다 고 하였다 또한.” . , 1568 (년 선조1) 1 24월 일에는,“박의 석의 아들 온정(溫精)이 궐리지(闕里誌) 를 팔려고 한다기에 그 사람을 초청했다 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