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
대 계승은 있었지만 세기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선조대부터 세기로 이어지면서 역관
2~3 17 . 17
을 포함한 기술관 세전이 된 경우도 일부 있기는 하지만, 16세기 전체로 봤을 때는 역관 가계가 형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 시기는 역관의 세전이라는 신분의 고착적 요소보다 무과 생. 원 문과 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동성의 여지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종계변무의 기여와 명 원병 요청 .
Ⅲ
홍순언의 정확한 생졸년은 알 수 없지만 그는 명종 연간에 역과에 입격하여 임진왜란 시기인, 년 선조 까지 역관으로 근무하였다 여타 기록을 통해 짐작해 보면 년대 후반에 역과
1593 ( 26) . , 1540
에 입격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홍순언의 딸은 종실 송계수(松溪守) 이중숙(李仲叔)의 첩 남과 혼인하였다 송2 . 계수 이중숙은 적 서 녀 남 가운데 첩자 명을 역관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다 차례로 첩 남· 2 5 3 . , 1 신성부령 이거는 사역원 직장 홍정의 딸과 혼인했고 첩 남 보절부령 이영은2 1540 (년 중종35) 역과 에 입격한 권사의의 딸과 혼인한 것으로 짐작되고 첩 남 낙성부령 이낭은 한학역관 홍순언의 딸과3 혼인했다 오늘날까지 남은 역과단회방목 가운데. 1540 (년 고려대 소장)·1543 (년 계명대 소장) 1546․ 년 중앙대 소장 것에는 홍순언의 이름이 없고( ) 1549년 것에도 없다. 1549년 역과단회방목은 하버드 대학에 소장된 것으로 여기에는 동생으로 짐작되는 홍수언, (洪秀彦)의 이름이 있다.
홍순언이 역관으로 입격한 시기는1540년대로 짐작되지만 입격 연도를 알려줄 역과방목은 남지 않았다 명종 시기 홍순언이 역관으로서 근무한 모습은. 1561 (년 명종16)에 압해관(押解官)으로 다 녀왔고 그밖에 행적은 자세하지 못하다. 1561년에 홍순언의 아버지 사역원 부정(副正) 홍겸(洪謙) 은 아들을 명나라 사행의 역관으로 참여시키기 위해 공조참판 윤옥(尹玉)에게 뇌물을 썼다는 혐의 를 받았다.
홍순언의 역관 경력은 선조대에 종계변무를 위한 적극적인 대응 속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순회세자가13살의 나이로 일찍 죽고 명종의 뒤를 이을 왕은 덕흥군의 아들 하성군으로 지명되었, 다 명나라 사자 한림검토. (翰林檢討)허국(許國)병과급사중(兵科給事中)위시량(魏時亮)은1567년 명종 에 융경제 등극 조서를 가지고 조선에 왔다가 평안도 가산 에 이르러 조선
( 22) (隆慶帝) (嘉山)
국왕의 부음을 들었다 조선으로서는 황제 등극 조서를 맞이하는 절차는 대단히 중요한 의식이기는. 하였으나 조사를 안내하던 중에 명종이 승하하여 조정 관리들이나 명사를 접대를 접대하는 서로의 지방관들이 사체를 잃어서 우려할 만한 지경이었다 원접사 일행이 차사원 등을 이끌고 오사모에. 소복 차림으로 명사 측에 나아가서 통사 홍순언으로 하여금 조선에 국상이 있음을 알리게 하였다.
명사가 눈물을 머금고 이러한 일은 천고에 없었다고 하면서 자신들은 황제의 명으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에 비로소 직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홍순언에게 왕세자는 있는가를. 물었다 왕세자가 없다고 답하자 이번에는 형제는 있는가 하고 물었다 형제도 없다고 답하자 명. . , 상사는 왕을 대신하여 조서를 받을 사람은 누구인지를 물었다 홍순언은 그것은 낮은 자리에 있는. 자기가 알 바가 아니라고 답했다 조사는 수상이 누구인지를 묻자 홍순언은 이준경. , (李浚慶)이라고 하였다 홍순언은 이어지는 조사의 물음에 수상이 문장이 있고 덕량이 갖추어졌으며 온나라 사람들이.
제 기 박물관대학15 >
직업으로 본 조선시대 생활사
- 30 -
그에게 의지하는 바가 있다고 답하므로 명사는 그렇다면 근심할 것이 없다고 했다, .
원접사는 명사에게 갑작스럽게 국왕의 부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고 설명하자 명사는 갑자, 기 흉변을 듣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응대했다 결국 명사는 한성으로 들어가는 날짜를 늦추. 고 국상 거행의 혼선을 덜어주고 한양에 들어와서는 먼저 등극조서를 반포하고 선조의 상에 조제했 다 사신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는 일도 정지되었다. . 1567년 조사가 나왔을 때 갑작스럽게 조선쪽에 서 예변(禮變)의 사정을 잘 몰랐던 처지였으므로 그로부터 년 뒤에 명사 한세능5 (韓世能)이 나왔을 때는 피차 변례에 밝지 못해서 구습을 시행하여 미안한 지경이 되었다고 하였다 윤근수는 뒷날. 국가 전례를 맡은 예관들이 몰라서는 안될 일이라고 하면서 자신도 홍순언이 살아 있을 때에 그로 부터 들었다고 기록하였다.
년 선조 월에 홍순언은 명사가 나오기 앞서 종계변정을 요청하는 국왕의 뜻을 중국어로 1572 ( 5) 9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이 때 예조판서 이하 영의정까지 승문원으로 나와서 칙사가 나왔을 때에. 본국이 행해야 할 의례를 논정하고 국왕이 칙사를 만나 구두로 종계변정을 요청하고 이어서 중국어 로 된 단자를 전달하도록 하였다.
년 선조 에 홍순언은 주청사 이후백 부사 윤근수 서장관 이해수
1573 ( 6) (李後白) (尹根壽) (李海壽)
등을 수행하여 남경(南京)까지 가서 실록을 편수하는 일과 회전을 고치는 일을 알아보기 위해 찬선 허국의 가인 유심에게 글을 보내 알아보았다 유심은 일찍이 허국을 수행하여 조서를 갖고 나왔을. 때 홍순언을 대면한 사이였다.
년 선조 에 역관 홍순언은 성절사의 상통사 명 가운데 인으로 연경을 다녀왔다 이 사행
1574 ( 7) 3 1 .
은 겉으로는 성절사행이었지만 국초 이래로 현안이었던 종계변무가 중요 소임이었다 서장관 허봉, . 은 평안도 선천에서 상통사 홍순언을 불러들여 명 관리들의 동향이나 사행이 통과할 곳의 관 (許篈)
리 성향도 청취하였다 홍순언은 이전에 조천사의 역관으로 참여했거나 원접사의 역관으로서 경험. 했던 점들을 요긴하게 서장관에게 들려주었다 조천사는 종계변무의 사안을 진척시키기 위해 이전. 에 명과 조선을 오갔던 관리들과 조선 관리들이 서신 교류를 이어가는 가운데 명 내부에서 세종실 록 및 회전이 찬수되는 사정을 알 수 있었고 조선의 여망을 반영하고자 애를 썼다 종계변무 자체만. 놓고 보았을 때 조 명 간 관리들의 시문 교류를 교두보로 하면서 명 관리들도 조선의 요청 사항을, · 이해하면서 어느 정도 자발적으로 협조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면에는 홍순언이나 안정란같은. 역관들이 이전 경험이나 요령을 적절하게 사신에게 들려주고 전면에서 동분서주하면서 주선한 공 로도 있었다.
년 선조 에 홍순언은 황자 탄생을 알리는 명나라 사자를 맞이하기 위한 원접사 이이
1582 ( 15) (李
의 차비역관에 배속되었다 명나라 사자는 한림원 편수 황홍헌 공과급사중
) . ( ) ( ),
珥 翰林院編修 黃洪憲
왕경민 이었다 원접사 이이를 소문으로만 듣고 처음 보는 명사 황홍헌은 홍순 (工科給事中) (王敬民) .
언에게 자신들을 산림의 기상이 있는 사람으로 응접하게 하느냐며 의심하였다 한학역관이라면 마. 땅히 조천사로든 원접사의 일원으로든 명나라 관리나 수행한 인원들과 여러 차례 접촉이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양국 관리들의 시문이나 학문 조정 내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홍순언은, . 담담하면서도 간결하게 원접사의 면모를 설명하였다.
원접사로 나온 이이는 바로 년 전에 개정된 대명회전1 (大明會典)에 개정된 종계가 실렸는데 명나라
종계변무의 공로자 역관 홍순언
- 31 -
에서 조선에 보내주지 않는 것을 두고 강개한 어조로 적당한 인물을 보내서 국가의 치욕을 씻을 것을 주장하여 자신이 적임자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결국 김계휘, (金繼輝)가 다녀왔다 이이는 사신. 을 인도하여 입경하여 문묘에 배향할 때 극기복례설을 명나라 사자에게 강해하였는데 그 글은 정, 주학보다는 양명학에 기운 풍조를 비판하는 논조의 글이었다 조사 양인은. 5-6번 읽은 뒤에 아주 좋은 설이라고 칭찬하고 명나라로 돌아가 널리 전파하겠다고 하였다 다만 황홍헌이 시를 읊으면서. 맨 끝구에 압운자를 내놓자 그에 짝하여 허봉이 지은 시를 원접사 이이가 채택하지 않았고 이에, 종사관으로 동행한 고경명(高敬命)이 크게 한탄하고 애석해 하였다 이번에도 홍순언이 허봉의 시. 를 황조사에게 몰래 보이자 그가 전편을 베껴 가져오게 하고 한동안 끄덕였다는 일화가 있다, .
년 선조 주청사는 종계가 변무된 문구만 베껴서 가져왔고 년 선조 에 주청사
1584 ( 17) , 1588 ( 21)
유홍(柳泓)서장관 윤섬(尹暹)일행은 명 회전에 조선국 사실을 고쳐서 실은 책 한 권을 받아왔다. 명 예부에서 황제의 어람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줄 수 없다고 하자 유홍이 꿇어앉아 땅에 머리, 를 받아서 피가 흐르도록 청하여 곁에 있던 상서가 감동하여 조선 사자가 돌아가는 편에 붙여 주었 다고 하였다 다시 년 뒤인. 1 1589 (년 선조22)에 성절사로 다녀온 윤근수(尹根壽)서장관 윤형(尹泂) 일행이 고쳐진 대명회전 을 받아옴으로써 완료되었다 홍순언은 성절사의 역관으로 참여하여 측『 』 . 근에서 상사 윤근수를 보필하였다 북경을 번이나 다녀온 윤근수는 명의 제독 주사 화숙양. 4 (華叔 이 조선 사신을 까다롭게 대한다는 것을 사전을 알고 제독 주사와 가까운 인물 진씨를 알아내어 )
陽
그로 하여금 조선의 요청 사항을 협조해 주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윤근수와 같이 명나라를 여러. 차례 다녀온 관리라면 종계변무에 관계되는 명 관리들의 성향을 어지간히 파악하려고 했을 것이며 홍순언이나 안정란같은 역관들이 명 조사나 조사의 가인(家人)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윤근수에게 조언하였을 것이다.
종계변무가 완료되고 광국공신 등 인 등 인 등 인이 책록되었다 홍순언은 등에 녹훈되1 3 2 7 3 9 . 2 어 당릉군이란 칭호를 받았다 이렇듯 조선측의 노력으로 종계변무가 마침내 성사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전체적인 사정을 그려내기에는 부족하다 종계변무를 위한 노력이 선조, . 대에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그렇게 된 차적 동력은 명에서 목종 융경제 실록 세종 가정제 실, 1 『 ( ) 』 『· ( ) 록 이 편찬되고』 1576 (년 만력 선조 부터 대명회전 중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에 있었다 조4· 9) 『 』 . 선이 중종 연간부터 끊이지 않고 종계변무를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가 미미했던 이유는 명이 조종, 성헌을 중시하였고 법전 편찬을 위한 복잡한 과정이 있었으며 또 종계변무의 사안을 명이 외교적으 로 이용한 측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광국공신으로 녹훈된 뒤에도 홍순언은 몇 차례 중요한 역관 행적을 남겼다. 1591 (년 선조24) 3월 에 통신사가 일본의 사정을 탐색하고 돌아왔고 성절사 김응남, (金應南) 등이 일본 사정을 탐색한 결과를 명에 보고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홍순언은 이 성절사의 역관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의 자문. . 이 명 예부로 들어간 뒤로 조선 사신이 거치는 곳마다 보는 사람들이 귀엣말을 하고 신의를 대하는 뜻이 없고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렀을 때에 관하인들이 너희 나라가 일본과 함께 모반하였는데 어“ 떤 까닭으로 왔는가 하고 의심하였다 통주?” . (通州)를 지날 때1567년 황제 등극 조서를 갖고 조선 에 나왔던 허국 각로의 가인이었던 유심(兪深)이 길거리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에서 홍순언과 이문학관(吏文學官) 허징(許徵)을 손으로 불렀다 유심은 복건. (福建) 등처에서 전해지는 조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