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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이후 마지막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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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작위를 이어받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 양반 관료들의 생각이었다.

그러한 역할과 인식은 조선 후기에서는 오히려 축소된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와 함께 의주까지. 피난시 호종한『扈聖功臣』86명 중 환관이24명 등 대부분 궁중 잡직이었고 문 무관은, · 17인에 불 과하였다 그러나 양반관료들은 이들에 대한 공신 책봉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 . 하였으니 상을 주는 것으로도 족하다는 것이다 또한 일부 환관들은 전쟁에 참가하여 군종을 세우. 지만 그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선조 당시 공신으로 책봉되기는 하지만 환관들에 대. 한 양반 관료들의 단적인 생각을 말해준다 그 위상은 후기로 갈수록 약화된다 환관과 일반 관료는. . 서로 인연을 맺거나 교감하는 행위 자체를 제한하였다 또한 소송 사건에서도 차별을 두는 등 일반. 관료 조직 내에서 철저하게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각종 역모 모반 사건에서 환관이나 궁녀가 등장. , 하는 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임금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이 존 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개항기는 역동의 시대이다 국왕 중심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일본의 신식제도 내각제 등으로 환. . , 관제도의 필요성이 없어진다 결국. 1906년을 전후로 환관제도는 폐지되었다.

개항기 이후 마지막 흔적들 .

년 대한제국의 대부분이 축소되면서 내시부 역시 이때 폐지된다 당시 내시부의 마지막 임

1908 .

무는 남아 있는 내시 고관의 자제들 즉 역시 환관이 되기 위해 양자로 들어간 사람들에게 교관의, 직첩을 주고 허울만 남은 황실을 보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정식 직첩을 받은 사람들 중에 가장. 마지막 내시는 정완하이다 정완하는 조선이 망할 때 당시 가장 유명한 환관은 갑신정변 때 죽은. 유재현 고종의 측근 강석호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자결한 반학영 한말의 대부호 나세환을 들고, , , 있다.

· 제도의 변화 한말 정치 제도의 변화는 기존의 조선시대 정치 제도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 · 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변화는 갑오경장이라 하겠다 특히 일본식 궁내부 제도의 도입은 중국의 관제. 에 익숙해 있던 조선으로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그 의도가 고종의 권한 약화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 차 김홍집 내각에서는 궁내부가 성립되기는 하지만 국왕과 관련된 부서 중. 1 내시부 역시 내시사로 상궁직이 명부사로 변화되지만 그 수적인 면에서는 변화가 없다 그러나, . 2 차 김홍집 박영효 내각에서는 왕권을 약화시키는 방편으로 내각의 기능을 강화면서 왕명출납기구· 인 승선원이 폐지되는 등 일대 변화를 가져온다 그와 함께 내시사는 폐지되고 시종원에 봉시라는. 직책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내시사는 없어졌지만. 1908년 완전 해체될 때까지 봉시청이라 하여 독 립적인 부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내시부라 자처하였다 또한 각종 임무면에서도. . 변화가 없으며 봉시라는 명칭 이외의 기존의 명칭들은 그대로 존재한다 통감정치 과정에서 궁중, . 내의 폐습을 일소한다는 명목에서 궁중의 출입을 통제하고 궁중내의 관리들을 대거 출궁이나 퇴거 시키는 과정에서 내시와 함께 궁녀들도 출궁된다 이후 고종이나 순종을 보필하는 아주 일부의 내. 시와 궁녀만 궁에 남아 있고 퇴출되면서 내시제도는 폐지된다, .

제 기 박물관대학15 >

직업으로 본 조선시대 생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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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과 유재현의 항변 - 개화파는 정변의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여러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실행을 준비하면서 고종의 동태 파악과 설득을 위하여 궁중 내 사람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문을 지켜는 군사 외에 왕이나 왕비의 측근에 종사하는 내시 유재현과 이름 모를 내시 명 궁녀2 , 고대수와 다른 궁녀들이었다 그들과 친해지는 시기는 아마 홍문관교리가 되어 궁녀 고대수를 개. , 화파로 영입하는1874년 이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왕의 측근에서 큰 힘을 발휘하던 내시. 와 궁녀들을 포섭의 대상이 삼았던 것이다.

다만 유재현이 포섭되는 시기는1874년 원자궁에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민비의 총애를 받기 시작 한 때라고 생각된다 이 시기는 고대수가 개화파에 포섭되는 시기와 우연히 일치한다. . 1881년 고종 의 승전색과 왕과 왕비의 협시로 활동하는 시기로 개화파들에게 유재현이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로 보인다 또한 이름 모를 환관과 궁녀 역시 포섭된 것으로 보인다. .

이 과정에서 궁녀 고대수와 이름 모를 환관 궁녀들은 개화파의 정변에 동참 고종의 동태를 알려, , 주거나 정변 과정에서 궁중 내 불을 지르는 등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유재현은 왕의 최측근. 으로 개화파의 정변에 반대하고 사대파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개화파들이 노력한 윤웅렬의 북청군 대를 돌려보내는 역할을 하고 윤웅렬 역시 군대를 대부분 철수시킴으로서 정변에 동참하지 않는, 다 이것은 내시 유재현이 사대파의 입장을 지지하고 개화파를 반대하여 취한행동이었을 수도 있. , 다 그러나 내시 유재현은 왕의 측근으로 왕에게 충심을 다한 인물로 보인다. .

아관파천과 강석호 강석호는 친일파와 친러파가 경쟁하는 갑오개혁 이후 친미파로 활동하였다

· - .

그가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아관파천 때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 을 이어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시종원 봉시가 되었다 이후 내각에 힘을 가지고 있던 친일파와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인 김영준이 정치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고종과 엄비 강석. , 호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계획이나 월미도 사건을 통한 강석호의 암살계획 등이 있었지만 실패하였 다 이후 그는 고종의 측근으로 박영효 유길준 암살계획 등을 단행하였다 이것은 비록 계획 단계에. · . 만 머물거나 실패하였지만 강석호가 고종의 측근으로 고종의 입장을 대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 다 일본의 압력에 대한 고종의 무언의 항거를 말해 주는 것이다 또한 헤이그 밀사사건의 자금을. . 강석호를 통해 주려고 한 것에서 고종의 의도를 알 수 있다.

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신문에서 종종 내시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1924 8 10년 월 일자 동아일보 내동네 명물 편의 효자동 내시 를 보면 만약 서울 효자동의 인물지를 만든다면 대부‘ ’ ‘ ’ ,

『 』

분 내시들을 기록할 수밖에 없는데 이들이 좋지 못한 것도 많지만 한말에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 고종의 이름만 말해도 눈물을 흘리는 홍택주의 행동 김한정의 문학 황윤명의 절조라고 소개하였, , 다 그리고 이보다 더한 절조로 교하에서 자결한 반학영을 제일의 양반이라 칭하였다 효자동은 흔. . 히 내시들의 동네로 유명한데 아마 경복궁 근처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이며 효자도 외에도 경복궁, , 근처의 계동이나 자하문 근처에 많이 살았다.

반학영은1910년 월8 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일병합 조인 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 방안에서 통곡하다가 월 일 파주 삽다리 장터에서 할복 자결, 9 5

왕의 남자 환관 삶의 흔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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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그는 자결하면서 내관이나 외관이나 관직에 귀천은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수십 년 임금. “ . 의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이 어찌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임금이 뜰로 내려섰는데 내가 어찌. 따뜻한 방안에서 편안히 죽기를 바라겠느냐 고 하였다” .

일제강점기의 대혼란 대를 잇지 못하고 재산 소송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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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내시는 더 이상 궁중에서 필요 없게 되었다 일부의 궁녀들이 고종과 순종 및 그 가족들. 을 보살피는 이외에 특별히 내시들이 왕의 측근에서 있을 필요는 없는 듯하다 아마도 그 많은 사람. 들은 서울 근처로 가서 생업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재산은 상당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강석호와 나세환이다 그렇다 보니 이들과 관련된 재산 분쟁도 심심찮게 나오. 는데 일제시대 신문에 나타난 재산 분쟁 중 최대 사건은 한말 유명한 내시 나세환의 양손자 송성진, 사건이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 』1924 9 18년 월 일부터21일까지 연속으로 게재되었다 이것은 당시 재산가. 로 알려진 내시 나세환 당시( 68 )세 의 양손자인 송성진이 그의 생부 송지문과 재산 문제로 경성지방 법원 민사부에서 소송을 벌이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다 즉 아들이 아버지를 상대로 재판을 벌이는. , 희대의 촌극이다.

송성진은13세에 촌 송진옥의 중매로 나세환의 양손자가 되었다 나세환의 양자 김규풍의 양자6 . 로 들어갔으나 김규풍이 죽자, 17세에 양자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13세에 같이 서울에 올라온 맏 형 송성옥이 운송업하면서 동생 송성진으로부터 만 원을 융통하면서 차용증서를 교환하였지만 기1 일을 넘기게 되자 말썽이 발생하였다 당시 송성옥은 한성부 명동 시가 만 원 가량의 가옥 한 채를. 4 아우 송성진의 명의로 해두었다 그러나 송성옥이 죽고 년이 지나 넷째 아우 송윤옥이 올라와서. 7 거처하였지만 소유는 여전히 송성진으로 되어 있어 말썽이 생겼다 또한 송윤옥은 충남 연기군에. 있는 송성진 소유의 백 석 추수를 본래 자기의 생가에 무료로 준다고 하였으나 주지 않았다고 한4 다 이렇게 되자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미워하면서 다투게 되었다. .

한편 송성진 역시 만석군의 양자가 되었지만 아직 아무런 재산권 행사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생가의 요구를 모두 들어 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 송지문과 형제들은 계속 무리한 요구와. 부당한 행동으로 송성진의 재산을 탕진하였다 송성진 소유의 연기 공주 천안의 토지를 송지문 등. · · 이 관리하던 중 충남 공주군 정인면에 있는 송성진 소유의 백여 석이 추수되는 토지 중 분의, 2 3 정도를 송세옥의 명의에서 송지문의 명의로 변경하여 일본인에게 저당권을 설정한 것이다 셋째

2 .

형 송윤옥은 경기도 일산역 근처에 있는 송성진 소유의 백여 석이 생산되는 토지를 현금 천 백2 4 2 원에 팔았다 즉 송지문은 송윤옥과 송세옥 등 두 아들과 함께 송성진을 괴롭히고 재산을 나누어. , 갖기를 요구하였다.

송지문이 살고 있는 합동의 층 벽돌집 역시2 1918년 서양 사람에게 만 천 원에 구입한 것인데6 7 사건이 나던 해 월 경에 송지문과 아들 송세옥이 강제로 들어가 살고 있었다 이 집은 규모가 천4 . 3 여 평이나 되며 정원이 잘 가꾸어진 집인데 송성진에 대한 분풀이로 집을 마구 훼손하기도 하였다, . 또한 송지문은 탄원서와 진정서를 재판소와 경찰 등에 보내었는데 송성진이 소위 조선 독립을, “ 목적하는 부정배에게 돈을 다수 보냈다 는 내용과 나와 송세옥 두 사람을 암살하려 한다 등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