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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바뀌어 궁내부에 소속되었다 명부사는 기왕의 내명부와 외명부가 통합된 것이었다 하지만 명. . 부사는 대한제국 때에 다시 내명부와 외명부로 나뉘었다 대한제국 멸망 후 일제는 대한제국의 황. 실사무를 관장하기 위해1910 12 30년 월 일에 이왕직 관제를 공포하였는데 이왕직에는 서무계 회, , 계계 장시계, (掌侍係), 장사계(掌祀係), 장원계(掌苑係) 등 개의 계가 설치되었다 그 때 내명부의5 . 일부 궁녀들만이 장시계에 소속되고 그 외 내명부의 후궁과 함께 외명부 역시 완전히 폐지되었다.
궁녀의 종류와 역할 .
Ⅲ
경국대전 에는 궁녀들이 내명부 조항과 세자궁 조항에만 들어있어 마치 왕과 세자에게만 배속
『 』
된 듯하지만 실제는 궁중의 왕족 각 처소별로 배속되어 있었다 즉 대비 왕 왕비 후궁 세자, . , , , , , 세자빈 세손 세손빈 등이 모두 독자적으로 궁녀들을 거느렸던 것이다 궁녀는 각 처소별로 격에, , . 따라 100-30명 정도씩 배치되었다 즉 왕과 왕비 그리고 대비에게는 각. 100명씩 배치되었지만 세 자에게는 60 ,명 세손에게는 50 ,명 세자빈에게는 40 ,명 세손빈에게는 30명이 배치되었다 따라서. 궁궐 전체로 보면 대략 500명 정도의 궁녀가 존재했다.
궁녀들은 각 처소의 안살림을 효과적으로 꾸리기 위해 지밀(至密), 침방(針房), 수방(繡房), 세수 간 생과방 소주방 세답방 등에 나뉘어 배속되었다 지밀은 침실로서 이곳에서 근무하는 궁녀들이, , , . 지밀여관이었다 만약 지밀의 주인이 왕비나 후궁 또는 세자빈으로 아이를 낳으면 아이의 양육도. 지밀여관이 담당하였다 침방은 바느질 담당 수방은 자수 담당 세수간은 세숫물 담당 생과방은. , , , 과일이나 간식 담당 소주방은 음식담당 세답방은 빨래와 불 때기 담당으로서 이곳들은 모두 궁중, , 각 처소의 일상생활에 관련되었다.
궁녀들은 각 방 구별 없이 기본적으로 여관 또는 내인으로 불렸으며 지밀의 경우 입궁 후25 ,년 그 밖의 방은35년이 지난 후에 상궁이 될 수 있었다 즉 궁녀는 간단하게 상궁과 내인으로 구별되. 었던 것이다 호칭의 경우 상궁은 마마님 이란 존칭으로 불렸으며 내인들은 항아님 으로 불렸다. ‘ ’ ‘ ’ . 관례 전의 내인들은 생각시 또는 각시라고도 했다 생각시는 각시 중에서 생이라고 하는 머리를. 맬 수 있었던 지밀 침방 수방의 각시를 지칭했다 그러므로 각 방은 상궁 내인 생각시 각시로, , . , , , 구별되었다 각 방의 상궁들은 특정 업무를 맡을 경우 그 업무의 이름에 따라 불리기도 했다 예컨. . 대 대령상궁 시녀상궁 보모상궁 등이었다 혹 왕의 승은을 입고도 후궁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특별, , . 상궁 또는 승은상궁이라 하기도 했다 그 외는 일반상궁이었다. .
각 처소에는 처소별로 궁녀 전체를 통솔하는 제조상궁이 있었다 또한 각 처소의 재물을 보관하. 는 창고를 관장하는 부제조상궁과 각 처소의 궁녀들을 감찰하는 감찰상궁이 있었다 아울러 색장. 복이 수모 무수리 파지 등이 있었다 색장은 지밀과 밖의 문안편지 등 (色掌), (僕伊), (水母), , (巴只) .
연락을 담당했고 복이는 지밀에 불을 땠으며 수모는 세숫물을 올리고 무수리는 물을 길었으며 파, , 지는 지밀에서 심부름이나 청소를 담당했다 궁녀들은 자신이 배속된 각 방에서 근무한 이후에는. 자신의 개인 거처에서 생활하였다 상궁과 내인 등 정식 궁녀들의 개인 거처에서는 방자 취반비. , 등의 하녀가 궁녀들의 일상생활을 도와주었다.
조선시대 궁녀들은 대체로 10살 전후에 입궁하였으며 출신은 기본적으로 내수사의 여자종이었
제 기 박물관대학15 >
직업으로 본 조선시대 생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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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만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해 양인 여성이 궁녀가 되기도 하였으며 또는 자신의 세력을 궁중. , 에 부식시키려는 양반들에 의해 양반신분의 여성이 궁녀가 되는 수도 있었다 이외에 왕비나 세자. 빈이 입궁할 때 친정에서 유모나 몸종을 데리고 들어가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친정에서 데려왔다고, 하여 본방내인이라고 하였다 정식 궁녀인 내인이 되기 위해서는 약. 15년 정도의 수습기간이 필요 했는데 이 시기에는 각시로 불렸다 내인이 된 후 궁녀로서 최고직위인 상궁이 되려면 또. 3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궁녀는 한번 입궁하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근무하는 종신직이었다. .
조선시대의 궁녀는 궁궐 안 각 처소의 안살림을 담당했던 전문직 여성들로서 이들이 담당했던 음식 바느질 자수 아이양육 등이 바로 궁중음식 궁중복식 궁중자수 궁중육아 등 궁중생활문화, , , , , , 였다 조선시대 최고급문화인 궁중생활문화를 전승 창조한 주역들이 바로 이들 궁녀들이었다. , .
그런데 조선시대의 궁녀는 각 처소별로100-30명 정도 배속되었으므로 나름대로의 조직을 갖추 고 있었다 각 처소별로 궁녀 전체를 통솔하는 제조상궁 재물을 관장하는 부제조상궁이 있었다. , . 이외에 각 처소의 궁녀들을 감찰하는 감찰 상궁(監察尙宮)이 있었다 각 방에서 배속된 상궁과 나. 인 각시 이외에 또 색장, (色掌),복이(僕伊), 수모(水母),무수리(水賜),파지(巴只)등이 있었다 색장. 은 지밀과 밖의 문안편지 등 연락을 담당했고 복이는 지밀에 불을 땠으며 수모는 세숫물을 올리, , 고 무수리는 물을 길었으며 파지는 지밀에서 심부름이나 청소를 했다, , .
궁녀들은 자신이 배속된 각 방에서 근무한 이후에는 자신의 개인 거처에서 생활하였다 상궁과. 나인 등 정식 궁녀들의 개인 거처에는 방자 취반비 등의 하녀가 궁녀들의 일상생활을 도와주었다, . 조선시대의 궁녀들이 담당했던 음식 바느질 자수 아이 양육 등이 바로 궁중음식 궁중복식 궁, , , , , 중자수 궁중육아였다 조선시대의 최고급문화인 궁중생활문화를 전승 창조한 주역들은 바로 이들, . , 궁녀였다.
한편 공식적으로 보면 조선시대 궁녀 조직에는 감찰부라고 하는 것이 없었다 물론 감찰 상궁이. 라는 직책도 없었다 경국대전 의 궁녀 조항에 감찰부는 물론 감찰 상궁이라는 것이 규정되어 있. 『 』 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보면 조선시대 궁녀 중에는 분명 감찰 상궁이 있었다 감찰 상궁은 달리. 감찰 시녀(侍女)라고도 불렸다 조선왕조실록 에 감찰 상궁 또는 감찰 시녀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 』 므로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순종 대의 윤명헌 상궁과 고봉운 상궁은 궁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상궁 이하 주변궁 수규 이하 장의 까지 직제는 대전회통 직관 제도에 설치되
“ (奏變宮), (守閨) (掌儀) 『 』
어 상설되어 있으나 상의(尙儀)이하의 직은 유사시에만 적용하여 각각 그 사무의 분담이 유( )有하야 담당 업무에 종사하고 그 의례가 끝난 경우에는 역시 이전처럼 상의 이하의 칭호가 해소되고 직제만 은 전과 같이 상설된다.”(『여관제도연혁 장서각 도서분류』, 2-2032)
즉 조선시대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경국대전 에 규정된 궁녀들의 명칭 및 직분이 적용되고『 』 그 이외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평상시 궁녀들은 궁중 안의 사람이란 뜻에서 흔히 내인. (內人)이 라 불렸다 조선시대 궁녀는 왕 왕비 대비 세자 세자빈 등 처소별로 배속되었다 고종대의 기록. , , , , . 에 의하면 왕에게100 ,명 대비에게100 ,명 왕비에게100 ,명 세자에게60 ,명 세자빈에게40명의 궁
궁궐에서의 삶 궁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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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가 배속되었다 각 처소별로 궁녀들은 지밀. (至密), 침방(針房), 수방(繡房), 세수간(洗手間), 생과 방(生果房), 소주방(燒廚房), 세답방(洗踏房) 등에 배속되어 근무하였다.
이렇게 각 처소별로 수많은 궁녀들이 배속되었기에 각 처소별로 궁녀조직이 형성되었다 각 처소. 별로 궁녀조직 전체를 통솔하는 제조상궁이 있었고 그 아래로 부제조상궁 감찰 상궁 각방상궁, , , , 각방 내인(內人), 색장(色掌),방자(房子)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감찰 상궁은 각 처소 궁녀들의 비. 리와 풍기를 감찰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에 의하면 세자궁에는 명의 감찰 상궁.『 』 1 이 있었으며 왕 또는 대비에게는 명의 감찰 상궁이 있었다 감찰 상궁은 감찰 시녀, 2 . (侍女)라고도 하였는데 지밀에서 근무하는 상궁이 감찰 상궁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감찰 상궁을 보좌하는 궁녀, . 는 색장(色掌)의 방자(房子)였다 색장. (色掌)은 각 처소의 문안 연락 등을 담당하는 궁녀였다 즉, . 각 처소의 정보통신을 관장하는 궁녀가 색장이었다 방자. (房子)는 궁녀를 위해 방청소나 심부름을 하는 여성 즉 궁녀의 하녀였다 색장의 하녀인 색장방자는 각 처소의 정보통신을 두루 꿰고 있었다. . 그렇기에 감찰 상궁은 궁녀들의 비리와 풍기를 감찰하는데 필요한 정보들을 얻기 위해 색장 방자를 썼던 것이다 궁녀들의 비리와 풍기문란이 발견되면 감찰 상궁은 우선 색장 방자와 함께 사실여부. 를 조사했다 이후 사실로 판명되면 제조상궁에게 보고했고 제조상궁은 처소의 주인에게 보고했. , 다 처소의 주인은 해당 궁녀를 직접 조사하거나 사안이 크면 내수사에 넘겨 조사하게 하였다 저주. . 사건처럼 심각한 사안은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양반관료들로 하여금 조사해 처벌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