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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배제의 기제 .

그러면 백정을 버림받은 집단 으로 고정시키는데 작용한 사회적 기제가 무엇일까 그것은 통합, ‘ ’ ? 정책이 성공할 수 없는 요인이었으며 백정을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대우하는 것을 가로막는 요, 소였다 또 그것은 백정을 사회적으로 배제하고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하며 더 나아가 지. , 배층의 기득권을 유지시키는 버팀목이었다 그러한 사회적 기제의 바탕에 백정을 별난 집단이라. ‘ ’ 고 보는 주류 집단의 인식이 있었다 곧 백정을 주류 집단과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고 보는 인종화. , ‘ ’ 가 작용하였던 것이다 인종은 생물학적 기준에 따라 설정된 것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구분하고. , 차등을 두는데 쓰이는 사회적 산물이다 그러한 인종화는 백정을 억압하고 차별하고 배제하는데. 유용하게 쓰인 사회적 기제였다 곧 백정을 별난 인종 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기제가 백정의 풍습. , ‘ ’ , 직업 행태 기원 등에 대한 사회 인식을 통하여 강화되었다, , .

다른 생활 풍습 1. ‘ ’

백정이 일반 백성들과 다른 별난 집단이라는 사회 인식의 주요 근거는 그들의 생활 풍습이 다르 다는 것이었다 정착해서 사는 농민 집단과 달리 그들은 떠돌아다니며 산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 . 인식은 다음 고려사 에서 보듯이 그들의 선조인 양수척 때부터 지속되어온 것이었다『 』 , .

본래 양수척은 태조가 백제를 공격할 때에도 제어하기 어렵던 사람들의 후손인데 본시 관적(貫籍)도 부역도 모르며 즐겨 수초(水草)를 따라서 유랑 생활을 하면서사냥이나 하고 버들 그릇을 엮어서 팔아먹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대체로 기생. (妓生)종자는 근본이 유기쟁이(柳器匠)집에서 나왔다.14) 강을 따라 떠돌아다니며 사는 백정의 생활양식과 풍습은 농업에 종사하며 정착해서 사는 주류 집단에게 낯선 것이었다 또 고유의 춤과 가무를 즐기는 풍습이나 일부는 창우가 되고 때로 매춘. , , 을 하였다는 것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낯선 모습이었다 더 나아가 백정은 관적을 모르고 성이 없다. , 거나 내외조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자가 허다하다고 하면서 무례하고 무식한 집단이라는 인식도, 생겨났다 그러면서 백정은 생활양식이나 풍습이 다르고 천한 일을 하는 무례하고 무식한 별난. , ‘ 집단 이라는 집합 표상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집합 표상은 다음 자료에서 보듯이’ . , 15세기 초부터

세기 전반기에 걸쳐 더욱 확산되었다

16 .

소 를 도살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이미 육전 에 실려 있는데 화척 이

(A) [ ]牛 《 (六典)》 , (禾尺) 궁벽한 땅

에 둔취(屯聚)하여 살아서농업을 일삼지 않고 도살하는 것으로 업을 삼아 추악한 풍속이 여러 대가 되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따로 살아서 부락을 이루어 저희끼리 서로 혼인하기 때문입니다.15)

본시 우리 족속이 아니므로

(B) 유속(遺俗)을 변치 않고 자기들끼리 서로 둔취(屯聚)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혼가(婚嫁)하는데, 혹은 살우(殺牛)하고 혹은 동냥질을 하며 혹은 도둑질을 합니다, .16)

14) 고려사 제『 』 129권- 열전 제42 >반역> 최충헌 앞으로 고려사 의 인용 자료는 북한사회과학원 번역. 『 』 누리미디어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함.

15) 태종실록『 』 22권 태종 11 (1411) 10년 월 17 .일

제 기 박물관대학15 >

직업으로 본 조선시대 생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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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인 백정 등은 본디 떳떳한 생업이 없는 사람으로서 우희 를 전업

(C) (呈才人)· (白丁) (優戱) (專業)

하여 여염을 횡행하며 양식을 구걸한다 하나 실은 겁탈을 마음대로 하여 온 식구가 의지하여 살며, 민가에 붙어살다가 조금만 마음에 맞지 않으면 불을 지를 뿐 아니라 기회를 엿보아 도둑질을 하므로 해를 끼치는 것이 적지 않다.17)

이 세 자료는 백정 화척 재인 의 풍습을 한결같이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 . 15세기 초의 자료 는 화척이 저희끼리 모여 살며 혼인하기 때문에 법으로 금하고 있는 도살을 하면서 추악한 풍속 (A)

을 대대로 지속해 간다고 하였고, 15세기 중반의 자료(B)는 자기들끼리 모여 살고 혼인하여 풍습을 바꾸지 않으며 소를 죽이거나 동냥질이나 도적질을 하는 집단이라고 하였고, , 16세기 초의 자료(C) 는 백정들이 제멋대로 일반 사람들의 동네를 돌아다니며 구걸하거나 겁탈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 하며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을 지르거나 도둑질을 하며 해를 끼친다고 하였다 요컨대, . , 백정 화척 재인 들은 일반 백성들과 떨어져서 성 밖이나 산 속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살며 결혼하( , ) 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는 별난 생활 풍습을 가진 집단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범죄를 저, . 지르고 행실이 일탈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백정의 생활 풍습이 다르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인식, . 하고 따라서 함께 살거나 교류할 수 없는 천한 집단이라는 편견이 만들어졌다 그러한 인식이나, . 편견은 그들을 차별하고 격리하고 배제하는 사회적 기제의 형성과 정당화에 기여하였다.

별난 직업 2. ‘ ’

백정들의 생활 풍습과 밀접하게 이어져있는 일거리도 일반 백성들의 편견이나 부정적인 인식의 형성에 작용하였다 농지가 없는 빈민 집단으로서 백정들은 사냥이나 나물 채취 고리버들 그릇의. , , 제조 판매로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그 자체가 일반 농민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그러한 편견과 부, . 정적 인식은 다음 자료에서 보듯이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있었다.

화척 과 재인 들은

(D) (禾尺) (才人) 농사짓지 않고 백성이 지어 놓은 낟알을 놀고 먹고 있으면서 항산 이 없으므로 항심 이 없이

(恒産) (恒心) 산골짜기에 모여서 왜적으로 가장하고 있습니다.18) 재인 과 화척 은 이곳저곳으로

(E) (才人) (禾尺) 떠돌아다니면서 농업을 일삼지 않으므로 배고픔과 추 위를 면하지 못하여 상시 모여서 도적질하고 소와 말을 도살하게 되니,19)

화척 이 궁벽한 땅에 둔취 하여 살아서

(F) (禾尺) (屯聚) 농업을 일삼지 않고 도살하는 것으로 업을 삼 아 추악한 풍속이 여러 대가 되어도 변하지 않습니다.20)

화척 들은

(G) (禾尺) 본시 소를 잡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어 비록 평민과 함께 섞여 살게 하여 몰래, 소를 잡을 수는 없으나 저들은 구석진 곳에 도망해 숨어서 항상 소 잡는 것을 일삼고 있사오니,

……21)

16) 세조실록『 』 3권 세조 년2 (1456 ) 3년 월 28 .일 17) 중종실록『 』 95권 중종 36 (1541 ) 5년 년 월 14 .일 18) 고려사 조준 조 제『 』 ( 118 ,권 열전 제31).

19) 태조실록 2권 태조 년1 (1392 ) 9년 월24 .일 20) 태종실록 22권 태종 11 (1411) 10년 월17 .일 21) 세종실록 38권 세종 년9 (1427) 10월 16 .일

조선의 도살업자 백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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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자료( D), 조선 초기의 태조 자료( E), 태종 자료( F), 세종 자료( G) 시기의 이 네 자료는 모두 화척과 재인의 일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농사를 짓지 않는 것을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농업 사회의 편견 아래 백정들은 도살이나 도둑질 같이 일탈적인 수단으로 살아간다고 보았 다 곧 백정의 일을 일탈적이거나 불법적으로 보았으며 더 나아가 천하다고 인식하였다 그 결과. , , . 백정은 천한 일에 종사하는 집단이라는 집합 표상이 형성되었고 그들이 하는 일은 천하게 여기게, 되었다 요컨대 생활 풍습과 직업에 기반하여 백정은 추악한 풍습을 대대로 유지하며 특정한 천한. , , 일을 하는 별난 종류 의 집단이라는 집합 표상이 정형화되고 고착되었던 것이다‘ ’ .

백정의 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집합 표상의 형성에는 도살에 대한 편견도 일정 부분 작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와 조선의 농경 사회에서 소의 도살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사. . 나 장례 명절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이루어졌는데 그 일을 백정이 맡았다 그들은 소뿐만 아니라, , . 돼지 개를 잡는 일까지 하였다 곧 백정과 도살의 밀접한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허가 없이, . , . 소와 말을 도축하는 것이 불법인 고려와 조선시대에 소고기 식용 관습이 확산되고 가죽 제품에 대 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밀도살이 널리 자행되었다 그에 따라 도살을 전담하는 백정이 반사회적 범. 죄인 불법 도살을 자행한다는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면서 백정들에 대한 편견의 형성 더 나아가, 천대와 차별의 심화에 기여하였다.

도살에 대한 편견의 형성에는 사회 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라 문화적 토양도 일정 수준에서 작용하 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많은 문화권에서 목숨을 빼앗는 것을 부정. (不淨)한 일로 인식하고 있는데, 그러한 인식은 살생을 금기시하는 불교의 영향이나 신체적 노역을 업신여기는 유교적 가치가 사회, 전반에 확산된 고려와 조선의 문화적 토양에서 더욱 강화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이렇게 살생을. 부정하게 여기고 도살을 천하게 여기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그 일을 하는 백정에 대한 천대와 차별, 도 심해졌을 것이다.

살생과 부정(不淨)의 친화적 관계는 왕궁의 제사 집행 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조선의 유교 문. 화에서 왕궁의 제사 절차는 대단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특히 제사 전의 정죄. , (淨罪)와 제사 집행 과정에서의 부정 배제가 중시되었다 왕궁의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관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정갈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적어도 일전부터 부정을 경계하였다 제사 지내기 전뿐만 아니라3 . 지내는 모든 과정에서 부정 이 스며들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였다 그런데 제사의 모든 일을 주관하‘ ’ . 는 제사관이 유독 제물로 쓰일 동물의 도축은 본인이 하지 않고 재인(宰人)에게 맡긴다 이러한 역. 할 분담의 바탕에는 살생을 부정한 일이라고 보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렇게 제물의 생명을 빼앗는. 재인은 백정임에 틀림없다 제물을 살생하는 재인. (宰人)을 부정한 존재로 규정하거나 일상생활에, 서 백정을 부정한 존재로 간주하는 금기나 관습은 찾을 수 없지만 이러한 왕궁의 제사 과정은 살생, 을 부정하게 여기는 문화적 토양을 보여준다 그렇게 부정한 살상을 백정에게 맡긴 것에서 백정을. 천하게 여기는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곧 이렇게 천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백정에게 부과되었으며. , , 그 결과 백정은 천한 일을 하는 집단이라는 집합 표상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장례를. 치루는 상여꾼의 일이나 죄수 처형이 백정들에게 부여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백정들은 왕이나 왕비. 장례식에 관을 나르는 임시 여사군(轝士軍)으로 뽑히기도 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회자수, (劊子手)를 맡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