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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平通寶의 주전이익과 재정확충

조선은 상평통보를 주전한 이후 매년 동전을 제작하는 것을 원칙

89) 정성일, 2000,『조선후기대일무역』신서원, 126쪽

으로 삼았다. 그러나 원료와 기타 여건 때문에 매년 주전하려는 원 칙은 제대로 고수되지 못했다. 그러나 재해 때문에 급박하게 진휼을 계획하거나 긴급히 재정적인 부족을 채울만한 수단을 마련하지 못 할 경우 매년 주전을 실시하지 못하는 해에도 주전에 대한 계획을 추가로 하고 있었다. 주전을 통해 생기는 주전이익을 확보해서 재정 에 활용하려는 계획이었다.90) 주전이익은 들어가는 원료와 공임료 같은 제반 비용 보다 산출되는 동전의 액면가치가 더 많을 경우에 생기는 것이었다. 따라서 동전을 주조하는 것은 국가 차원에서 백성 에게 교환수단을 제공한다는 시혜를 베푸는 목적도 있었지만, 국가 에서 주조를 통해 얻고자하는 또 다른 목적은 주전이익의 확보도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으로서는 주전을 통해 재정적 곤란을 극복하려고 했던 만큼 동전을 만드는 비용보다 많은 동전을 생산해야만 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주전이득을 내기 위한 상황이 마련되지 못했고 주전이득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몇 가 지 조건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어떠한 조건에서 주전을 활용했으며 당시 재정적인 곤란함을 주전을 통해 어떻게 극 복해갔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동전의 원료를 거의 전량에 가깝게 수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입하 는 구리에 상응하는 지불수단도 왜동을 수입하였던 다른 경쟁국들 보다 부족하였다. 따라서 자체적으로 일정량의 구리가 생산해서 수 입량을 조절할 수 있었던 주변의 淸과는 주전의 과정에서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적인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조 선은 정부가 주전 이익을 내는데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지 비교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동전을 만들고 그 동전을 유통시키면서 재정을 확충

90) 『비변사등록』영조 32년 7월 19일 “俄於賓廳摠使以此爲言, 而所請財力, 猝難區劃, 問 於摠使則以爲本廳若趁今鑄錢, 則庶可以其餘剩, 補用於諸處役事云, 鑄錢誠多弊端, 而頃年 三軍門鑄錢時, 摠廳獨不得爲之, 今亦許鑄則何可取剩而補用矣”

하기 위해서는 제작단가는 낮고 동전의 액면가는 높아야 했다. 우선 조선후기 본격적으로 상평통보를 대량으로 제작하면서 상평통보의 제작단가는 어떻게 형성되고 있었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동전을 제작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확인해야 하는 데 그 비용은 동전 제작 과정을 살펴보면서 대략적으로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동전을 제작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구리를 포함한 재료비, 재료를 녹여 주물하기 위한 연료비, 동전제작을 담당하는 장인들에 대한 勞賃 등으로 크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후기 연대기 자료에는 동전을 제작하는 비용이 단편적으로만 기록되어 있어 전체 비용이 각 공정별로 어떻게 소비되고 있었는지 명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다. 현재 연대기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30여 년간 주전을 금지하다가 다시 주전을 시작한 직후인 영조 11 년과 26년의 내역으로 주전에 소요된 비용의 일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영조 11년의 기록에서 확인 가능한 내역을 살펴보면 주전에 서 工役이 차지하는 비중은 많게는 1/3 정도였다는 언급이 있다.91) 영조 26년 기록에서는 生銅 100근을 50냥으로 구매하고 있는데 이 를 재료로 총 80냥을 주조한다고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92) 이를 통 해 동전을 제조하는 원료비용이 62.5%를 차지하는 것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80냥에서 노임비와 연료비 등을 제한 것인지 언급은 없으나 영조 26년에 주전하는데 있어 재료비가 62.5%나 차지하고 있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다. 부족한 주전기록을 보충하기 위해 중 국의 기록을 통해 주전할 때에 소모된 비용을 검토해 보고 조선의 상황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91) 『승정원일기』영조 11년 12월 10일 “古大錢則一重五錢, 而以一葉爲一錢, 小錢則一重 二錢矣。今以十葉, 鑄成三葉, 代三錢而用之, 則比小錢之以十葉爲一錢者, 實爲三倍之利, 一 倍則雖以功役之費除之”

92)『승정원일기』 영조 26년 11월 23일

중국의 경우 주조에 들어가는 비용이 어떠했는지 살펴보기 위해 1630년대 북경과 남경에서 행해졌던 주전사업에 대해 주목할 필요 가 있다. 당시 중국의 明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여 상당한 비용을 지출한 상태여서 재정상태가 좋지 못한 상태였다. 더 구나 明의 崇禎帝(1611~1644)는 당시 만주에서 後金의 군사적 위협 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숭정제는 후금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시켜야 했다. 명은 후금의 압박에 재정의 대부분을 군사비로 지 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정확보에 대한 문제는 당대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명이 택한 재정확충책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주전 사업이었다. 주전을 통해 군사비를 확보하고 건전해지지 못했던 당 대의 국가 재정을 보충하려고 했다.93) 1630년의 주전 사업은 후금의 군사적인 위협에도 계획된 것으로 국가에서도 주전하는 것이 당대 국방예산을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94) 특 히 남경의 舊廠에서 주조 할 당시에는 표면적으로 당시의 주전의 목표를 ‘兵餉’을 보충하기 위한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95) 따라서 주 전에 소비되는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가능하면 중국 내에서 생산되 는 구리를 사용하려 계획을 했다. 또한 원석을 이동하면서 추가되는 운반비를 절약하기 위해 구리가 채굴된 지역에 爐를 설치하고 주전 작업을 하여 원석을 이동하는 경비를 줄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96) 하지만 이 당시 명나라에서도 국내에서 산출되는 구리가 많지 않아 자국 내 구리만으로는 주전을 온전히 시행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조선과 동일하게 일본으로부터 수입되는 구리에 의존하여 주전사업 을 실시하고 있었다. 조선과 비슷한 주전 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

93) Richard von Glahn, Ibid, pp. 186~187

94) 畢自嚴, 『度支奏議』 「新嚮司」 卷8 ‘覆錢法堂任內鼓鑄本息疎’ “國莫利於鼓鑄然” (續 修四庫全書 史部 詔令奏議類 vol. 486)

95) 畢自嚴, 『度支奏議』 「新嚮司」 卷26 ‘覆南部考核舊廠郞中魂良槐疎’ “夫鼓鑄原爲兵餉 補不足”(續修四庫全書 史部 詔令奏議類 vol. 486)

96) 『春明夢餘錄』 卷37, 戶部四 “議省鑄局錢以銅鉛參雜而成, 而銅鉛各有産處搬運重難, 是 以歷代多卽坑冶附近之所置監鑄錢 ,唐有八監 宋有三十六監”

었던 만큼 시기와 지역이 다르지만 전체 비용 가운데 원료비와 공 임 그리고 기타 잡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확인하는데 시사점을 줄 것이라는 판단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630년 주전 당시 明은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구리로 北京과 南京 두 곳에서 동시에 주조를 실행했다. 먼저 北京에서는 1630년 9월 24 일부터 1631년 9월 24일까지 1년간 戶曹의 산하 寶泉局에서 동전을 제조했다. 1630년 당시 1년간 주조한 총 동전의 양은 145,144,444文 이었다. 그 중 노역한 사람들의 임금을 포함한 제반 비용으로 소비 된 액수는 30,178,476文으로 전체 주전 액수의 20%를 차지하고 있 다. 그리고 동전의 주요한 원료였던 구리와 鉛과 같은 원재료 비용 은 100,725,553文이 소비되었고 전체 주전 액수의 69%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비용을 공제하고 남은 순수이익(淨獲利)은 14,240,415文 에 달했다. 주전에서 제반 비용을 뺀 순이익을 은으로 환산할 경우 21,908냥이었다. 전체 생산한 동전에서 제반 비용을 뺀 순수하게 남 은 이익은 14,240,415文으로 전체 비용에서 차지하는 이윤은 백분율 로 환산할 경우 9.81%였다.97) 비슷한 시기 1630년 7월부터 1631년 7월 南京의 舊廠에서도 주전작업을 시행하고 있었다. 남경에서 생산 한 동전은 189,725,777文으로 연료비로 소비된 액수는 동전으로 17,3 49,115文으로 전체 주전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9.1%였다. 주전에 소비된 원재료비는117,378,617文으로 전체 비용 가운데 61%를 차지 하고 있다. 제반 비용을 제하고 남은 총이윤은 동전으로 44,998,045 文으로 은으로 환산 할 경우 42,450냥이었다. 하지만 북경과 달리 남경의 주전사업에서는 내역이 명확하지 않은 주전 사업과정에서 되갚아야 할 명목이 은으로 20,967냥이 존재했고98) 전체 순이익(淨

97) 畢自嚴, 『度支奏議』 「新嚮司」 卷25 ‘考覆錢法主事王珍錫疎’ (『續修四庫全書』 史部 詔令奏議類 vol. 486)

98) 畢自嚴, 『度支奏議』 「新嚮司」 卷26 ‘覆南部考核舊廠郞中魂良槐疎’ (續修四庫全書 史 部 詔令奏議類 vol. 486)‘還原’으로 표시되어 있다.

獲利)을 은으로 환산할 경우 22,306냥으로 남경에서 주전한 동전의 순이익은 12.3%를 기록했다.

북경의 寶泉局에서 임금으로 지불하는 비용을 포함하여99) 동전을 주조하기 위한 제반 조건은 남경이 북경보다 훨씬 호의적이었다. 임 금의 비중도 북경의 경우 전체 비용대비 20.8%인 것에 비해 남경은 9.1%였고 원료의 비용도 북경이 69.4%를 차지하였던 것에 비해 남 경은 61.8%를 기록하고 있다. 제작비용의 총계를 살펴보면 북경의 주전소는 전체 비용 가운데 제작비용이 90.8%, 남경의 경우는 87.

7%를 차지하고 있다.100) 따라서 남경의 경우 동전을 제조하며 빌린 자금을 ‘還原’하지만 않았다면 남경과 북경의 주전이익차이는 훨씬 더 많이 벌어졌을 것이다. 즉, 남경에서는 동일한 시기 주전을 통해 약 20%정도 순이익이 더 남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임금과 같 은 제반 비용의 지역 차이 때문에 벌어진 순이익의 차이는 銀錢比 價의 조절을 통해서도 줄여지고 있는데 당시 북경과 남경에서도 은 전비가를 조절하며 이익차이를 줄이고 있다. 은전비가의 조절은 국 가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은과 환산하는 동전의 액수를 조절하 는 것으로 주전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적극적인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관에서 동전의 가치를 정하는 적극적인 개입은 조선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점에 대해서는 은전비가의 조정을 통해 주전이 익을 확대시키는 17세기 후반 조선의 화폐정책을 살펴보면서 좀 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즉, 개략적이지만 북경과 남경의 주전 상황을 확인하면서 1630년대 明末 주전을 통해 소비하는 제반 비용은 대략

99) 북경의 경우 ‘爐場工料 員役 紙張工食錢’으로 남경의 경우 ‘炭罐工食’으로 표현되어 있 다. 표현은 다르지만 노동비용으로 처리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100) 북경의 원료비와 노동비용이 더 들었던 것은 아마도 북경이 수도였기 때문에 생긴 문 제로 보인다. 특히 원료비는 당시 일본으로부터 구리를 수입하고 있었던 창구가 남쪽(漢 口,와 蘇州)에 있었고 중국 국내 구리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운남성에서 북경까지 원료 를 이동시키는 비용이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운남성으로부터 북경까지 운반과정과 비용 에 대해서는 Nanny Kim, Copper transports out of Yunnan, ca. 1750-1850(Hirzel, Thomas, Metals, Monies, and markets in early modern societies, Lit 2008)의 논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