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앞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15세기 후반부터 국가주도의 명목화폐는 더 이상 유통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있었다. 정부주도의 화폐가 시 장에서 퇴장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정부가 관주도의 화폐를 유통시킬 의지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원 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면포는 국가주도의 화폐가 사라진 가운데 새로운 교환수단으로 민간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면포는 조선 초 기에는 아직 널리 사용되지 못했고, 면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고려 말 文益漸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되었다.24) 원나라를 통해 고려 에 유입되기 이전에도 한반도에 다른 종류의 면화가 일부 재배되고

22) 로이드 E. 이스트만, 이승휘 역, 1999 『중국사회의 지속과 변화』돌베개, 155쪽.

23) 실제 20세기 초반에 외국인들은 중국정부가 거래비용을 줄이기 위해 통일된 화폐를 만 들어 줄 것을 바랐으나(G. Vissering, On Chinese Currency, vol. Ⅰ(Amsterdam, 1912).) 당시 중국 사람들은 복잡해 보이는 통화 시스템에 대해 전혀 불만을 느끼지 않 고 있고 외국인들만 불평을 할 뿐이었다.(Kann, Currency of China, pp.416~417) 24) 『高麗史』권25 열전, 文益漸

있었던 것이 고고학 유물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한해살이의 목화가 전래되어 재배되었던 것은 문익점이 원으로부터 목화씨를 몰래 들여온 시기 이후로 보인다.25)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목화는 본래 고온 건조한 인도지역에서 재배되었던 품종으로, 인도 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것도 원나라가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가능해 진 일이었다. 최초로 중국에 전래되었던 한해살이 면화는 실크로드 를 통해 오늘날 파키스탄으로 전해진 아시아면(학명:G.herbaceum)이 었다. 이 면화는 오늘날 신강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재배되기 시 작하여 주변부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면화의 재배는 기후에 민감한 특성이 있는 만큼 확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재배되었던 면화는 조생종으로 130일 정도의 생장기간이 필요하였 다. 이후 7세기까지는 신강지역, 12세기에는 산시성까지 면화재배가 이루어졌고, 13세기에는 양자강까지 확대되었다.26)

또한 문익점이 수입한 새로운 목화가 들어오기 이전에도 다양한 종류의 면화가 중국에 전래되어 재배되고 있었다. 기록상 등장하는 면포에 대한 이칭은 柴花, 吉貝, 如蘿 등이 있는데 이것은 문익점이 도입한 한해살이 면화가 아니라 다년생 면화이거나 품종이 다른 면 화였다.27) 당시 재배되고 있는 목화들은 모두 직조를 염두에 둔 것 이라기보다는 이미 다른 재질로 직조한 천 사이에 충전물로 집어 넣어 보온 효과를 높이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직 조하는 과정이 매우 까다롭고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어야하기 때문 이기도 했지만 당시에 재배되던 면화가 직조과정에서 다습한 환경

25) 목화의 다른 별칭이 여러 기록 들에 散見되는데 ‘吉貝’와 같은 명칭도 조선 후기에는 면 포를 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종류가 다른 다년생 목면으로 보아야 한 다.

26) 면화는 건조지방에서 잘 자랐지만 직조 단계에서는 습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기 때문에 면화를 생장시키고 면포로 직조하는 과정을 한 지역에서 전부 완성하기 쉽지 않았다.

건조한 지역에서 직조를 할 경우 실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쉽게 끊어졌기 때문에 면포 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27) 柳僖, 『物名攷』(文雅社, 1974)

이 유지되지 않으면 쉽게 끊어지는 섬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8) 생산량 또한 많지 않아 섬유로 제작하는 양도 매우 적 었고 직조하는 과정에도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면포는 실질가치가 높은 상품이기도 했다.29)

이렇게 제작된 면포는 국내에서도 높은 가격에 거래되며 상품 혹 은 교환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더불어 당시 일본에서는 면포가 생산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서 생산되는 면포를 수입하려고 노력하 였다. 이에 조선에서 생산된 면포는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과 교역시 사용되는 국제 무역의 교환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어 활용도가 매우 높아지고 있었다.30) 일본은 국내에서 늘어나는 면포 소비를 감당하 기 위해 1600년까지 마카오를 통해 포르투갈 선박을 이용하여 중국 의 면직물을 일년에 2만~3만 斤 정도 수입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소비한 면포의 양은 점점 더 증가하여 중국 면포를 수입하는 것만 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1638년에는 네덜란드 선박 11척이 프랑스산 면 5만880여反31)을 수입하기도 했다. 일본에 형성된 城下町은 에도 (江戶) 근처의 사치품 소비를 더욱 부추겼고, 고급 면포소비는 이전 보다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1639년에는 중국선 93척이 면직물 을 일본에 판매하였는데 그 양이 1만150여反이었다. 1645년에 중국 선과 네덜란드 선박이 일본에 수송해서 판매한 직물의 총계는 대략 14,630反이었다.32) 하지만 일본에서 소비되는 면포는 더욱 늘어났고

28) Chao Kang, 1977 The Development of cotton textile production in China, East Asian Research Center, Harvard University

29) 면포의 경우 직접 노동력 투입 당 생산량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지만 비단의 경우 전업직조를 할 경우 1인의 여자가 한달에 10필의 비단을 생산할 수 있다고 보고 있 다.(Pan Mingti, ,Rural credit and the concept of 'peasant petty commodity production' in Ming-Qing Jiangnan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55:1.1996) 30) 이태진 편, 2000 「16세기 국제교역의 발달과 서울상업의 성쇠」『서울상업사』, 태

학사

31) 일본 직물의 크기를 재는 단위인 ‘反’은 조선에서 사용하는 ‘疋’의 1/2크기로 환산하였 다.

32)『長崎商館の日記』『長崎商館仕訳帳』를 참고하여 합산한 것임.(山脇悌二郞, 2002,

『絹と木棉の江戶時代』, 吉川弘文館, 163쪽)

중국에서 수입되는 양만으로 소비를 전부 충당할 수는 없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면포 재배지역이 늘어나면서 면화생산량이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이에 면포를 이용하여 明과 거 래를 진행하기도 했다. 연산군대에는 조선에서 중국의 唐貨를 구매 하는데 소용되는 면포가 연산군 4년에 43,000필(86,000反)33)에 달하 기도 했다.34) 하지만 연산군대의 사치억제책으로 명과의 교역이 중 단되었고 동시에 면화의 중국유출도 단절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외 교역 환경은 조선에서 생산된 면포가 대마도를 통해 일본으로 유출되는 방향으로 선회되었다. 이후 17세기 전반 일본에 면직물이 전파되면서 ‘木棉革命’ 혹은 ‘衣料革命’으로 불리는 획기적인 의생활 의 변화가 나타날 때까지 조선의 면포는 대일본 교역수단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그러나 일본에도 면화가 전래되고 생산이 확대되면서 寬永·慶安 시기(1623~1651)에는 일본의 국산 목면으로 직조한 직물 로 일본 전국의 무사와 죠닌(町人)·농민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생산이 확대되었다. 이렇게 일본국내에서 면직물의 생산량이 점차 늘어가고 중국, 네덜란드 상선이 싣고 오는 면직물까지 더해지 자 상층 귀족들만의 전유물이었던 면포는 하층민까지 사용이 확대 되어 갔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 국내산 면직물은 현대의 20番手에 해당하는 굵은 직물에 한정되어 생산되었고, 에도 시대에도 대부분 이러한 太物만이 생산될 뿐이었다.35) 이에 상층 귀족층이 소비하였 던 높은 품질의 면포는 여전히 수입에 의존하였고, 중국과 조선으로 부터 수입되는 면포에 대한 의존도는 여전히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 었다. 일본 내의 면직 기술은 대략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조선 이나 중국에서 생산하는 면포 품질에 상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된다.36) 즉, 일본 내에서 면화의 재배와 면포의 직조기술이 일

33) 『燕山君日記』연산군 4년 6월 11일 34) 『燕山君日記』연산군 4년 6월 15일 35) 山脇悌二郞, 2002, 위의 책, 122쪽.

정수준에 이르기까지 조선 면포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았고, 조 선에서는 면포를 매개로 일본과 교역을 진행할 수 있었다. 왜로 유 출되는 면포의 양이 증가하면서 조선에서는 유출되는 면포의 양을 조절하려는 차원에서 면포의 수출을 제한하려고 했다. 당시 남쪽 지 방에 남아 있는 면포가 500여 同인데 비해 일본으로 유출되는 면포 의 양은 1,200~1,300동이나 되었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무역불 균형에 대한 염려가 증가하고 있었다.37)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 일본 으로 흘러들어가는 면포의 국제적인 흐름은 인위적인 규제책으로 조절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고 있었다.38) 즉, 조선의 면포는 국제 적인 교환수단인 동시에 상당한 매력이 있는 상품으로서 17세기 이 전까지 朝日무역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왜로 면포가 유출되는 양상을 걱정했던 것은 면포가 의 복의 직접적인 재료로 기능했기 때문에 현물 자원의 유출을 걱정하 는 측면도 있었지만 교환수단으로서의 면포유출을 걱정하는 차원도 있었다. 면포가 등장하기 이전 조선에서 교환수단으로 기능하고 있 던 것은 미곡이었다. 하지만 쌀은 보관성도 떨어지고 중량도 나갔기 때문에 효용성은 높았지만 교환수단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에 쌀보다 중량이 가볍고 보관성이 좋은 면포가 교환수단으로 부각되 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지역 내 혹은 지역을 벗어난 교환을 매개할 적합한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쌀이 주요한 교환수단으로 사

36) 일본 내 직조기술은 최초의 일본그림 백과사전이라고 하는『訓蒙圖彙』(1666년 간행) 를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이에 다르면 당시 일본 내 면직기술의 확대가 일본전역 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후 직조기술의 축적이 이루어져서 1695년에 간행된 菱川師 宣이 그린 『和国百女』의 그림과 설명을 통해 17세기 통해 일본에서 40~60번수의 면 직물을 직조하는데 사용되었던 紡車를 사용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山脇悌二郞, 위의 책, 123쪽)

37) 『중종실록』 중종 20년 10월 8일 “國儲虛竭, 非但公債, 緜布亦然 今者倭人所貿去南方 緜布一千二三百同, 而遺在只五百餘同矣 戶曹深以爲憂, 謂不可盡從”

38) 1525년 당시 왜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다가는 국내의 면포가 고갈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가 나타나고 있었다.(이태진, 2000,「16세기 국제교역의 발달과 서울상업의 성쇠」

『서울상업사』 태학사, 1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