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주전량의 감소와 高額換

상평통보의 발행 이후 국가에서 수요만큼 동전을 공급하지 못하 자 동전의 수량이 부족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부족 한 동전 때문에 나타난 폐단을 동전 자체의 폐단으로 인식하며 동 전을 없애자는 廢錢을 주장하기도 했다. 廢錢論者들은 백성들이 동 전을 사용하면서 오히려 불편함이 생기고 폐단이 야기되니 동전을 없애 백성들이 겪는 고충을 제거하자는 의미에서 주장한 것이었다.

이러한 폐전론은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민간에서 뿐만 아니라 英 祖를 중심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에서 제작하여 발행했 던 동전은 교환수단으로서 사용되기도 했지만 재정적인 차원에서도 효용이 높았다. 우선 동전은 잘 알려져 있듯이 교환수단으로 기능하 며 민간에서 널리 확산되었다. 특히 17세기 후반 상평통보의 발행량 이 급증하면서 조선에서는 상평통보가 이전보다 광범위하게 교환수 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56) 상평통보가 널리 확산되는 정도에 있어 지역차이는 나타나고 있었지만 일상에서 동전의 영향력은 전국적으 로 높아지고 있었던 경향은 부인하기 힘들 정도였다. 백성들이 동전 이 아니면 교환을 할 수가 없을 정도라는 언급에서 이러한 경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57)

동전이 단순히 민간에서 교환수단만으로 기능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에서는 財政 補用수단으로 화폐가 활용되고 있었고 국가가 동 전의 제작과 가격의 책정에 크게 관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의

56) 현재 화폐사 연구의 대부분은 매매문기와 같은 고문서를 통해 동전이 언제부터 사용되 었는가를 추적하여 화폐교환경제의 성립 시기와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이정수, 정수환 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57) 『비변사등록』 영조 4년 9월 19일 “臣意則以爲有國則必有錢, 若無錢則國無行貨之道, 民無懋遷之利矣”

간섭은 주전이익과 관계된 것으로 재정효과를 극대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주전하는 과정에서 얻는 이득으로 곡물을 구매하여 재 분배하는 방식으로 재정분배가 진행되었다.58) 특히 흉년이 들어 진 휼할 자원이 부족했을 때에는 더욱더 새로운 재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환경에서 동전의 영향력은 더욱 높아지고 있 었다. 동전은 흉년이 심하게 들어 곡식을 1石도 구하지 못하는 상황 에서 관서에서 유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인식하기도 했다.59) 주전을 통해 가뭄과 같은 재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常平廳 과 같은 중앙관서 뿐만 아니라60) 지방감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주전은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지방 에서 백성들이 흉년으로 고통을 받을 때에는 현지에서 鑄錢을 하여 재정을 확보하는 방법을 취하기도 했다. 英祖 18년 함경도에서 흉년 으로 식량 조달이 어렵게 되자 주조를 통해 식량을 확보하는 의도 하에 함경도에서 주전을 하려고 계획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물론 이 당시에 함경도에서 직접 鑄錢이 設行되지는 않았다. 제반 조건이 마련되지 않았고 특히 원료 공급의 어려움이 원인으로 작용 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함경도가 아닌 平安監營에서 15만 냥을 주전 하여 함경도의 흉년에 간접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각 지방 감영에서는 함경도뿐만 아니라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 고 개성에서 주전을 행하여 약 50만 냥 정도를 흉년을 원활하게 극 복하는 차원에서 발행하였다.61) 三南지방은 곡창지대로 국가 재정에 끼치는 영향력이 컸던 만큼 삼남 지방에 흉년이 발생하였을 때에도 조정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

58) 『승정원일기』 숙종 12년 1월 23일 “鑄錢於安州地, 息利貿穀”

59) 『승정원일기』 영조 원년 8월 5일 “國家無一石穀賑救之資, 若使多數鑄錢, 播及諸道, 則 庶爲一分可救之道矣”

60) 『숙종실록』 숙종 21년 9월 30일 상평청에서 1년에 40~50만 냥을 주전할 것을 요청 하고 있다.

61) 『비변사등록』 영조 18년 8월 23일

서도 鑄錢이 주된 해결책으로 등장하고 있다. 三南에 참혹한 흉작이 들어 稅入이 줄어들자 戶曹의 경비를 충당하지 못할까 염려하였고 宣惠廳에서도 貢價를 충당하지 못하게 되면서 국고의 탕진이 매우 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辛亥年(영조 7)과 壬子年(영조 8)에도 흉년에 주전을 한 일이 있다하여 주전을 통해 변통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특히 주전이 흉년을 구제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라 고 하며 주전의 효과에 대해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 현하고 있다.62) 즉, 주전은 현실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임 시적인 소규모 재정확충책으로도 널리 활용되었지만 비교적 규모가 큰 재해를 재정적으로 해결할 때에도 활용되고 있었다.

재해가 들었을 때뿐만 아니라 官署의 재정문제를 해결해 줄 수단 으로 鑄錢이 널리 활용되고 있었다. 軍門은 원래 屯田의 보급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고 있었지만 屯田의 수확도 매해 수확이 일정하 지 않은 경우가 발생하였다. 이런 경우 軍門에서 급료를 제대로 지 급하지 못하는 경우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63) 숙종 11년에는 軍器 寺의 工匠과 하인의 料布를 흉년 때문에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런 경우 임시로 선혜청에서 보내주는 大 同木을 쌀로 折價하여 나눠주며 변통하기도 하고, 내년 분을 당겨쓰 며 눈앞의 급한 재용을 해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부족하게 되었을 때, 결국 軍器寺에서도 鑄錢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는 계획 을 세우고 있었다.64) 軍門의 하나인 摠戎廳의 재정위기도 주전을 통 해 해결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영조 32년에는 摠戎廳에서 三軍門 에 물자를 나눠주는 일을 홀로 담당하여 재정상태가 빈약했는데 이 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손을 댈 수 있는 것은 주전밖에 없다고 언

62) 『비변사등록』 영조 38년 10월 17일 “蓄儲之匱竭, 莫甚於此時, 曾前辛壬歉歲, 亦有鑄 錢之前例, 若不及今講確變通, 則前頭之憂, 不可勝言, 第念生財之道, 莫如鑄錢”

63) 『승정원일기』 숙종 7년 7월 23일 “本曹責應浩多, 物力漸縮, 將無以成樣, 依他衙門例, 鑄錢補用, 何如 上曰, 唯。錫胄曰, 近來錢文漸賤, 各衙門竝鑄, 必至於難行”

64) 『비변사등록』 숙종 11년 9월 12일

급하고 있다. 이에 정부에서는 총융청에 주전을 허락하여 재정을 회 복시키도록 명령하고 있다.65)

실제 동전의 주조가 시작되면 관서에서는 왜동을 구입하여 주전 을 실시하고 주전이익을 취하고 이를 통해 다시 곡식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진휼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66) 물론 동전 자체가 갖는 가 치가 있었기 때문에 주전 자체만으로 예산을 증액시키는 효과도 동 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즉, 동전은 민간의 소용 못지않게 국가의 財 政策으로서 이미 효용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 전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지만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구리의 양이 줄어들면서 점차 鑄錢량이 감소하게 되었다.

정부주도의 주전사업이 축소되면서 민간의 백성들은 ‘錢荒’현상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도 주전할 倭銅이 부족했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수요대로 주전을 행할 수 없었다. 주전이 30년간 중 단되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재료인 倭銅이 제대로 수급되지 못했기 때문인데 동전 수급의 중단으로 민간뿐만 아니라 정부에게도 큰 타 격이 미칠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이러한 폐단을 해결하고자 동전 대신 木綿을 사용하려던 純木令을 세 차례에 걸쳐 시행했지만 순목령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철회하였다. 이후 1730년에 주전이 재개 되었지만 倭銅의 생산 감소 에 따른 원료수급의 어려움은 개선되지 않은 상태였다.67) 따라서 주 전량을 늘리려는 논의가 계속되었지만 실행에 옮겨질 수 없었고 민 간에서는 동전부족으로 고충을 겪는 ‘錢荒’이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있었다. 물론 상평통보의 주전을 멈추기 이전에도 동전이 풍족하게

65) 『승정원일기』 숙종 12년 5월 18일 “上曰, 摠戎廳物力之殘弊, 朝家旣已知之, 依所啓許 鑄, 可也);『비변사등록』영조 32년 7월 19일(摠廳物力本來凋殘, 營門以北漢城堞公廨修 葺事言之, 三軍門分授之役, 一倂獨當, 摠使之悶迫固然矣, 漢北門城役, 自朝家旣無劃給之 物, 則宜許鑄錢矣”, 『비변사등록』 영조 33년 3월 21일 ‘摠戎廳鑄錢節目’ 참조

66) 『승정원일기』 숙종 12년 1월 23일 “鑄錢於安州地, 息利貿穀”

67) 『승정원일기』 영조 8년 7월 5일 “上曰, 鑄錢今已中止, 而所鑄幾何 寅明曰, 十二三萬 餘兩, 而卽今無餘存矣”

공급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평통보가 발행된 지 1년이 지난 숙종 4년(1678)에도 田稅를 돈으로 거두자, 시골에서 갑자기 돈을 구하기 어렵다는 불만을 표시한 적이 있었다.68) 특히 군병과 서리, 노비 등 이 납입하는 布納에 대해 錢納을 원칙으로 강제하면서 백성들은 동 전이 비교적 풍족하게 발행되던 시기에도 동전을 구하기 힘든 상황 이 연출되고 있었다.69) 특히 각 관서에서 거둔 동전이 관서의 창고 에서 다시 시골로 환원될 수 있는 경로가 없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비교적 동전발행을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민간에서는 동전을 求得하 는 어려움이 상존할 수밖에 없었다.70) 선혜청과 軍門에서 동전으로 거둔 세금 중 10~20%정도만 다시 민간으로 돌아간다고 보았으니 지방에서는 동전을 구하는 것이 더욱 힘들었을 것을 짐작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즉, 동전 주조가 원활하게 시작되던 시기에도 동전 부족은 만연했었고 서울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그 어려움은 더 배가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료의 수급마저 불안정했기 때문 에 18세기 초반의 동전부족 현상은 더욱 심각하게 사회적 문제로 존재했을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배경 속에서 화폐를 지속시키기 위해 몇 가지 방 법이 도출되었는데 고액환의 발행과 저화와 같은 명목화폐를 다시 발급하자는 내용이 그것이었다. 고액환은 현실적인 화폐 원료가 부 족한 상황에서 한정된 재료로 필요한 만큼 화폐를 주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楮貨는 이미 世宗대에 실시되어 ‘失敗’한 것으로 인식하 고 있었는데 상평통보가 부족하게 되자 현실적인 대안으로 다시 등

68) 『비변사등록』 숙종 4년 1월 24일 69) 『비변사등록』 숙종 5년 4월 9일

70) 『승정원일기』 정조 12년 6월 12일 “顧今錢貴之弊, 非在乎他, 一歲之中, 錢之出於民而 入於公者, 不可勝計, 內而惠廳各軍門之所捧, 外而各營各鎭邑之所收, 已過屢十萬緍, 而京外 之公用所散, 歲不過十分之一二矣, 自民而入者爲十之八九, 自公而散者爲十之一二, 故比年 以來, 惠均二廳與各軍門之積錢, 不啻倍蓰, 而又貿銅鐵, 儲置於軍門亦已多矣, 則財之閼滯而 不流通者, 於是乎極矣…今則公下之外, 不復有散錢之路, 而一向徵出於民間, 則錢安得不貴 乎? 天下未嘗無財, 而通之則有裕, 閼之則不給, 財之勢也。今若分付均·惠二廳與各軍門, 以 其積置之錢貨, 散貸於貢市諸民, 以爲滋殖之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