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 물품 자체의 가치가 매우 높은 상품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화폐로 사용되었다. 더구나 생산량마저 제한적이어서 고대부터 금, 동과 함께 ‘三金’으로 불리며 귀금속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즉, 고대 부터 금이나 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말로 동일시되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접근하더라도 금과 은 같은 귀금속 의 축장은 국가 재정의 확실성과 동일시 할 수 있다. 따라서 은은 국제적으로도 거래를 매개할 만큼 물품가치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 게 자리 잡아 당시 국제무역의 교환수단으로 널리 유통되고 있었다.
당시 은의 최대 수요처는 중국으로, 중국에서는 사치품을 수출하고 그에 대한 결제대금을 은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유입된 은 은 중국의 재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은의 유출은 곧 재정건전 성이 악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에서 은화가 대 량으로 유출되어 명의 경제가 타격을 입었고 이것이 명의 멸망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은 이러한 상황을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다.65) 조 선에서도 국제무역을 통해 유입되는 은이 있었지만 그 양은 중국과 비교해 볼 때 미미한 수준이었다. 조선에 가장 많은 양의 은이 유입 된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왜란의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명군이 참전 하게 되었고 명군이 지참하고 왔던 은이 시장에 거래되면서 조선에 서도 은이 유통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명군의 참전이후 조선의 시장에서는 모든 거래를 은으로 매개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 로 은의 유통은 임란이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조선에서 은은 생산량이 거의 없었던 만큼 가치도 높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은은 조선에 임진왜란을 계기로 유입되기 전부터도 유통되고는 있었지만 쌀이나 면포와 같은 현물에 비해 유통량이 적 어 민간에서는 은이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은이 지 닌 기본적인 가치가 높았고 명과 교역을 통해서도 은이 유입되면서 조선에서는 국부의 보전이라는 차원에서 은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특히 명, 일본과 무역을 지속하면서 결제 통화로서 은이 유입되기도 했지만 반대로 무역 불균형으로 은이 유출되기도 하여 정부로서는 국부 유지차원에서 은의 유출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66)
조선에 유입된 은은 국가 뿐만 아니라 상인들도 활용하기 시작했 다. 가치가 높았던 만큼 대량으로 물품을 거래하던 상인들에게 활용 되기 시작했다. ‘富商大賈’로 불리우는 이들은 은을 활용하여 대규모 로 지역 간 거래를 매개할 수 있었고 이전보다 훨씬 가볍고 편리한 은을 사용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국제교역 시 사치품 수입에 대한 결제수단으로 은을 사용하자 조선에서는 은 유 출을 염려하여 사용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통제정책으로 명 으로 나가는 은의 양이 국가차원에서 제한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서는 생산되는 은의 양이 매우 적었으므로 화폐로 사용될 만
65) 한명기, 1992「17세기초 銀의 유통과 그 영향」『규장각』15, 1쪽.
66) 한상권, 1983「16세기 대중국 私무역의 전개」『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큼 은이 확보되지 못했다. 당대 신대륙과 일본에서 유입되는 은의 양이 공식적으로는 거의 없던 상태였으므로 조선에서 확보할 수 있 는 양이 미약할 수밖에 없어 화폐로 유통되지는 못했다.
공식적인 무역의 제재로 은과 상품의 유통이 대외적으로 제한되 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직후 명의 참전으로 다량의 은이 유입 되면서 조선에서도 은이 교환수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조선 에 참전한 明軍은 군량과 軍需를 모두 중국 본토에서 가지고 올 수 는 없었다. 전세의 불리함으로 속히 참전해야하는 시간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물리적인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명군은 군량 을 조선 현지에서 조달할 것을 원칙으로 세우고 있었다. 명의 황제 는 명군이 출병할 때 沈惟敬을 보내서 다량의 은을 하사하여 조선 에서 필요한 군수를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명군은 이를 기반으로 조선에 파병된 군사들의 軍糧을 해결했고, 조선에서는 이에 따라 은 을 받고 군량을 지급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명군을 지원하 기 위한 유통로에서만 은의 유통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전국적으 로 유통되지는 못했다. 은의 유통이 오늘날의 화폐유통과 같이 이전 과 단절된 화폐흐름의 양상을 보인 것은 아니다. 1592년(선조 25) 9 월 선조와 명의 사신 薛藩과의 대화에서 설번은 명의 원병이 양식 을 구비하여 오는 것은 무리가 있으니 은으로 군량 가격을 가지고 와서 조선에서 쌀로 바꾸는 방법에 대해 선조에게 물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조는 쉽게 승낙하지 못하면서 조선은 땅이 좁고 백성들도 은의 가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銀兩이 있더라도 군량으로 바 꿀 수 있을지 확언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다.67) 실제로 조선정부는 명군이 조선에 참전한 이후 명군이 구비한 은을 매개로 군량과 의 복을 제대로 공급해주지 못해 혹시 명의 군사들이 철병할 것을 염
67) 『宣祖實錄』선조 25년 9월 2일 “天兵十許萬方到. 且千里饋運, 勢所未易。 欲以銀來此 換米何如 上曰 邦土地偏小, 人民貧瘠, 且國俗不識貨銀之利, 雖有銀兩, 不得換米爲軍糧 矣”
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조는 명군이 군량과 의복을 제때 확보하고 있는지 수시로 보고하게 하고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당대 명 나라에서 가지고 온 은으로 어떻게 민간에서 군량을 확보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조뿐만이 아니라 조정에서도 식량과 군수가 구해지지 않으면 명군이 철병할 수도 있 다는 염려를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음에도 조선에서 명이 군량과 군 수를 확보하는 작업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전쟁 중이라는 상황에 서 물자의 생산이 원활하지 않기도 했지만 당시 민간에서 은을 현 물과 교환하는 인식이 부족했고 은으로 식량을 구할 수 없을 것이 란 불안감이 그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68) 물론 당시 명나 라 군사가 참전당시 필요한 모든 전쟁 물자를 조선에서 구매한 것 은 아니었다. 요동에서도 은을 매개로 戰馬와 군복에 쓰일 면포 등 을 구매하기도 하였다.69) 이러한 상황은 조선에서 은을 매개로 물자 를 구비할 수 없을 것이란 예상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 상이라고 볼 수 있다.
왜란이 고착상태에 빠지면서 명군의 주둔비용과 군수물자를 구입 하는 비용을 명나라에서 전적으로 감당하지 않았다. 명나라는 초기 전황이 진정되고 전쟁이 정체에 접어들자 왜군의 공격에 대비할 목 적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에 명군을 주둔시키고 그 경비의 대부분을 조선에 요구하기도 했다. 명군의 숫자는 2만에 가까웠는데, 이들이 소비하는 군량, 피복 그리고 포상비를 합친 1년 간의 주둔 비용을 1 00만 냥 정도로 계산하여 그 중 64만 냥을 조선에 요구했다.70) 이때
68) 『宣祖實錄』선조 26년 1월 21일 “今日之事, 只在天兵糧餉, 予欲以匹馬, 率某某臣, 策 應於天兵之後, 督運糧餉, 而此處有接待天朝將官之事, 令世子前進安州, 一邊策應天兵, 一 邊督運糧餉事”
69) 『宣祖實錄』 선조 26년 8월 25일 “前日所送提督軍前銀兩, 送于總兵, 俵給軍士似當。
但以三千兩, 分給六千餘軍, 一名所得僅半兩”
70) 『宣祖實錄』선조26년 8월 10일(당시 2만에 달하는 명나라 군사에게 드는 비용은 주로 月糧과 식량에 소비되는 비용이었다. 月糧으로 1냥 5전 그리고 行糧과 鹽菜代로 1냥 5 전 그 밖의 비용으로 도합 3냥 6전을 지급해야 했으니 1년 동안의 합계가 1백만 냥에 이르게 되었다.
부과된 액수는 모두 은전으로 계산된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입장 에서 보면 명군의 참전으로 은이 유입되기도 했지만 일부 군사비를 부담하면서 국외로 유출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명군은 전쟁 중 은이 다량 소비되면서 조선에 원병을 파견한다는 초기의 의도와 달리 은 을 확보하는 문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명군 중에는 광부가 있 어 조선에서 은이 날만한 지역을 군사작전으로 조사하였지만 은맥 을 별도로 찾을 수 없어 군자 마련에 실패하였을 정도였다.71) 조선 으로서 명나라 군사들을 물러나게 할 수도 없고 현상태로 유지하지 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국부의 유출을 줄이기 위해 조선에 머무르는 군사의 숫자를 5천으로 줄이는 방법에 대해 제안했을 뿐이었다.72) 전란 중에 나타나는 은의 강제적인 유통과 명나라 장수들의 모리 수단으로 은광맥을 찾으려는 노력은 조선에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변화를 가지고 올 수밖에 없었고 명나라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 다.
그렇지만 명군의 참전으로 조선에 유통된 은이 조선의 경제 변동 에 영향을 미쳤고 그 효과가 지속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왜란이라는 군사적 압박에 닥처 조선도 현실 적인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명의 참전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에 조선에서는 명군을 유지하기 위해 이미 채굴이 금해졌던 端川의 은광을 다시 허가하여 은 생산량을 확보하려고 했다.73)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은을 제련하는 기술은 발전하였지만 채굴하는 기술은 획기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은을 채굴하기 위한 갱도가 수직으로 내려 갈 경우 갱도에는 지하수가 차기 마련인데 이를 효과적으로
71) 上同
72) 『宣祖實錄』선조 26년 8월 10일 “若如經略之言, 則我國雖闕粢盛, 除上供, 不頒祿, 竭 一國而專供天兵, 勢所難支。 故兩南俱是敵之要衝, 而當初請留兵, 不過五千者, 非不知多 多挽駐, 在在結屯, 使賊不敢窺, 而以爲萬全之地也。 專爲糧餉之難, 只請五千, 作爲聲勢, 兼使敎鍊我士, 以爲之用, 至於陳奏, 已蒙準可。 五千之數, 似難加減”
73) 『宣祖實錄』선조 26년 8월 3일 “方今國用蕩盡, 用銀一事, 最爲急切, 端川所産, 素稱品 好, 今當弛禁, 許令採取”